소장자료 톺아보기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3)
[소장자료 톺아보기 65] 통계 수치를 활용해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를 선전하는 시정기념엽서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3)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발전상을 홍보할 목적으로 시정기념엽서 도안에 산업과 교육, 운송과 관련한 통계 수치와 관련 막대 그래프를 이용해 그 추이를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그 대표적인 시정기념엽서는 위에 제시된 시정5주년(1915), 시정6주년(1916), 시정25주년(1935), 시정30주년(1940) 기념엽서이다. 먼저 시정5주년기념엽서에서는 쌀과 면화의 수확량과 유출량을 1912년부터 1914년까지 3년간 비교했다. 이를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위 표에서 쌀과 면화의 경작면적과 수확량, 그리고 어획량이 해마다 증가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쌀과 면화의 경우 해마다 생산량 대비 일본으로의 유출량이 증가하고 있다. 즉 쌀의 경우 1912년에 6.4% 1913년에 8.6% 1914년에 10.8%로 늘어나고 면화도 1912년에 8.2% 1913년에 10% 1914년에 12.2%로 증가하여 생산량이 늘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쌀과 면화가 일본으로 유출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출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물자 수탈 양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파악된다. 시정6주념기념엽서에는 축우(畜牛)와 소가죽, 엽연초 경작면적과 생산량의 증가 추이를 1912년부터 1914년까지 통계표로 보여준다. 시정25주년기념엽서에는 ‘성장해가는 조선(伸び行く朝鮮)’이란 제목으로 한반도 지도 위에 농공산품 생산량, 우편·전신·전화, 철도 길이, 무역량을 1910년과 1933년의 수치로 비교하였다. 농공산업, 우편산업, 철도와 무역 부문에서 조선총독부 시정 25년간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선전하는 것이다. 1940년 10월 1일 시정30주년기념엽서가 발행되었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인해 이후 시정기념엽서의 발행이 중단되고 말았다. 시정30주년기념엽서 봉투의 앞면에는 “국위선양 견인지구(國威宣揚 堅引持久)”라는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2)
[소장자료 톺아보기 64] 근대화 이미지로 포장한 식민지 조선의 자원 수탈의 실상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2) 일반적으로 식민지 수탈 구조는 식민지의 농수산물과 각종 지하자원을 헐값으로 매수하고, 식민 본국에서 만든 제품을 들여와 비싼 값으로 팔아 이중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수탈 구조를 공고화하여 일본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우선 조선 농민으로부터 토지 소유권과 사용권을 빼앗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이외에도 공업, 임업, 어업, 광업 전반에 걸쳐 철저한 수탈정책을 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자본가 기업을 규제하기 위하여 회사령을 제정, 공포하여 조선인의 기업활동을 억압하고 민족산업의 성장을 막았다. 철도, 항만, 통신, 항공, 도로 대규모 기반시설 등은 일본의 대기업에 의해 독점되었고, 인삼, 소금, 담배 등을 조선총독부가 전매하여 조선경제의 균형적 발전이 막히게 되었다. 임업 부문에서 산림령에 따른 임야조사사업이 실시되어, 막대한 국·공유림과 소유주가 명확하지 않았던 임야가 조선총독부와 일본인에게 넘어가 전체 임야의 5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어업 부문에서 총독부는 어업령을 공포하여 일본 어민의 성장을 지원하고 조선 어민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의 어획고가 한때 세계 제2위를 기록할 정도로 조선의 주요 어장을 독점 지배하였다. 끝으로 광업에서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광산 자원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한민족의 광업활동을 제약하는 광업령을 제정, 공포한 후 일본인 재벌에게 많은 광산을 넘겼고 지하자원의 대부분은 이들을 통해 일본으로 헐값에 반출되었다. 위에서 열거한, 시정기념엽서에서 보이는 근대화 이미지는 자원 수탈을 위한 기초산업과 이를 위한 가공산업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1)
[소장자료 톺아보기 63] 시정기념일과 시정기념엽서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1) 1910년 8월 22일 일제에 의해 ‘한국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 발효되면서 대한제국은 식민지 조선이 되었다. 그해 9월 30일 공포된 「조선총독부관제」에 의해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으로 기능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10월 1일을 시정기념일(始政紀念日)이라 명명하고 국가기념일의 하나로 삼았다. 하지만 일제가 실제로 기념축하행사를 벌인 것은 병합기념일인 8월 29일이었다. 이날 경성신사 등 전국 각지에서 기념식과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고 은행 등은 임시휴업일로 지정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15년에 이르러서 시정기념일이 공식화되고, 이날을 총독부와 소속관서의 휴무일로 지정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취지는 조선총독부 고시(告示) 제151호(1915.6.26) 「시정기념일의 건」에서 잘 드러난다. 명치 43년(1910년) 10월 1일은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더불어 신정(新政)을 개시했던 날이다. 병합조약의 체결 및 그 실시에 있어서 추호(秋毫)의 분요(紛擾)를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정의 방침 및 계획에 따라 전부 원활히 제반의 정무(政務)를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성명(聖名)의 위덕(威德)과 시운(時運)의 추세에서 기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총독부 개시 이래 자(玆)에 5주년 질서의 회복, 제도의 정리는 물론 식산흥업(殖産興業)에 관한 백반(百般)의 시설 경영도 또한 점차 그 서(緖)에 들었으며, 홍택(洪澤)의 점윤(漸潤)하는 바 상하만상 각기 안도하고 치평(治平)의 경(慶)에 욕(浴)하여 조선통치의 기초는 이미 확립되어 시정의 방침은 오래도록 넘쳐나는 것이 될 것인즉, 이제 자금(自今) 매년 10월 1일로써 ‘시정기념일’로 정하여 영구히 이러한 성사(盛事)를 명심하고 일층 여정노력(勵精努力)하여 제국의
『대일본국방부인회기념사진첩』(1942)
[소장자료 톺아보기 62] 대표적인 관제 여성단체의 10년간 총후활동 기록 『대일본국방부인회기념사진첩』(1942) 이번 호에 소개하는 소장자료는 1942년 6월 대일본국방부인회총본부(大日本國防婦人會總本部)가 동회 결성 10주년을 기념해 간행한 『대일본국방부인회기념사진첩(大日本國防婦人會記念寫眞帖)』이다. 이 사진첩은 총 142쪽이며, 앞부분에 국방부인회를 지원하는 일본 황족, 육해군 장성, 국방부인회 임원 사진을 게재하고 본문에서 일본 도쿄사단관구(東京師團管區)부터 조선, 대만, 만주, 중국 관내 등 일본이 점령한 지역에 설치된 지방본부들의 총후활동 사진을 각 지방본부마다 한두 페이지씩 실었다. 맨 뒤에 대일본국방부인회 회세표(會勢表) 즉, 75개의 국방부인회 지방본부와 900만에 달하는 회원 수의 통계표를 첨부하여 1942년 2월 당시 국방부인회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참고로 조선 지역본부 수는 6개, 회원 수는 약 204,000명). 조선지역 국방부인회의 총후활동 사진은 10페이지에 걸쳐 실려 있으며 조선군 제19사단이 관할한 나남사단관구(함북·함남)와 제20사단이 관할한 경성사단관구(경성·대구·광주·평양)의 지방본부 임원 사진과 주요 총후활동을 소개한다. 평양지방본부의 사례를 살펴보면 평양지방본부장 등 임원 사진을 싣고, 평양제조소분회의 탄환 도장(塗裝) 작업, 순천분회의 헌납 면화의 제1회 풀베기작업, 은율분회의 폐품회수, 평양지부의 모포 헌납(1938.8), 순안분회의 순안신사 조영공사, 성천분회의 헌납 목화 파종(1941.5.4), 평양지방본부대회 기념촬영 등 다양한 총후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대일본국방부인회는 1932년 10월 24일, 일본 군부의 총력전 체제 및 국방국가 체제 구축에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취지로 설립된 일본 최초의 군국주의적 여성단체이다. 전신은 오사카 국방부인회였다. 이 단체는 군사 원호 사업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일본 부덕(婦德)의 고취’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중여성의 정신교화에 진력하였으며, 군부를 배경으로 가정주부와 노동여성을 주된 구성원으로 삼았다.
⌈신안정로전국쌍육⌋
[소장자료 톺아보기 61] 침략전쟁의 선전 도구로 이용된 쌍육 놀이 : 러일전쟁 ⌈신안정로전국쌍육⌋(1904.1) 1904년 2월 러일전쟁 개전 후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하여 일사천리로 구련성, 금주 등을 점령했다. 여세를 몰아 일본군은 8월부터 러일전쟁의 최대 승부처인 여순항 공략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간 맥없이 패주하던 러시아군도 여순항에 배수의 진을 치고 격렬히 저항하여 장장 5개월간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양군에서 십수 만의 사상자를 낸 끝에 1905년 1월 2일 일본군이 여순항을 함락시켰다. 당시 일본 언론 매체들은 일본군의 승전보를 실시간 중계하듯 보도하였고 특히 러일전쟁의 전황만을 다루는 잡지와 사진화보집을 경쟁적으로 발간하였다. 『일로전쟁실기(日露戰爭實記)』라는잡지를 발행하고 있던 박문관(博文館)은 『일로전쟁실기』1905년 신년호의 판매부수 증대를 위해 사진화보부(寫眞畫報部)가 기획하고 일본화의 중진 화가였던 오타케 곳칸(尾竹國觀)이 그림을 맡은, 러일전쟁 승전을 테마로 한 쌍육판 「신안정로전국쌍육」을 부록으로 제작하였다. 1905년 1월 시점에서 일본의 승전을 상정하고 제작한 이 쌍육판은 기존의 쌍육 놀이와 차별화하기 위해 실제 러일전쟁에 참전한 일본 군단과 사령관을 게임 속에 구현하였다. 즉 플레이어는 일본군 6개의 군단―구로키 대장(黑木大將)의 제1군, 오쿠 대장(奧大將)의 제2군, 노기 대장(乃木大將)의 제3군, 노즈 대장(野津大將)의 제4군, 도고 대장(東鄕大將)의 도고 함대, 우에무라 중장(上村中將)의 우에무라 함대― 중 하나의 군단을 선택해서 그 군단(말)을 움직이는데 군단의 이동 방법은 각 칸의 지시에 따른다. 출발 칸인 ‘출정’을 보면 제1군부터 우에무라 함대까지 각 군단에 숫자마다 이동할 칸이 정해져 있다. 가령 플레이어가 제1군을 택했을 경우 주사위를
‘지나정벌개선쌍어육’ (1894.12)
[소장자료 톺아보기 60] 침략전쟁의 선전 도구로 이용된 쌍육 놀이 : 청일전쟁 ⌈지나정벌개선쌍어육⌋(1894.12) ‘쌍육(雙六. 스고로쿠)’은 주사위를 이용해 말을 움직여 승부를 가리는 일종의 보드게임이다. 한무제(漢武帝) 때 서역에서 중국으로 전해졌고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유입되어 백제에서도 유행했으며 일본에서는 전통놀이 ‘스고로쿠’가 되었다. 쌍육에는 바둑처럼 반상 위에 말을 배치해 승부하는 반(般)쌍육과 그림판에서 말을 움직여 제일 먼저 결승점에 도착하면 이기는 그림[繪]쌍육이 있다. 현재 반쌍육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스고로쿠라 하면 대체로 그림쌍육을 일컫는다. 쌍육은 에도 시대를 비롯해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에 걸쳐 새해 첫날 온 가족이 즐기는 명절 놀이로 자리잡았다. 초기에는 불교, 출세, 가부키 등을 제재로 했고 메이지 유신 후에는 문명개화, 부국강병이 주된 테마가 되었다. 특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을 주제로 한 쌍육이 다수 만들어져 일본인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전쟁 열기를 부추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쌍육은 우리나라 윷놀이처럼 개인별, 팀별 플레이가 가능하다. 각 플레이어가 번갈아 가며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만큼 말을 움직여 도착지점에 제일 먼저 도달하면 승리한다. 말 이동 방법은 위 그림처럼 시계방향으로 나선형으로 돈다. 다만 쌍육판 출발의 다음 칸처럼 ‘한 회 쉬기’ 또는 ‘나온 숫자만큼 뒤로 가기’ 등 함정 칸이 있어 게임의 묘미를 배가시킨다. 그림판은 총 33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칸에는 청일전쟁에 관련한 역사적 사실과 설명을 상세히 그려놓았다. 예를 들면 공사의 담판, 대원군
제임스 H. 헤어의 『러일전쟁의 사진 기록』(1905)
[소장자료 톺아보기 59] 제임스 H. 헤어의 『러일전쟁의 사진 기록』(1905) A photographic Record of the Risso-Japanese War 제임스 H. 헤어(James H. Hare)의 『러일전쟁의 사진 기록 A Photographic Record of the Russo-Japanese War』은 1905년 뉴욕의 P.F. Collier & Son 출판사에서 초간 되었고, 2013년에 재출간되었다. 러일전쟁의 전 과정을 250여 장의 사진에 담아낸 전쟁화보로서 사진 저널리즘 분야의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등과 모서리에 가죽을 사용한 고급 양장본이며 세로가로 27×40cm의 큰 판형으로 총 256쪽이다. 이 책은 14장으로 구성되며 각 장의 앞 부분에는 각 전투의 경과와 의미를 간략히 서술하고 이어서 관련 화보를 수록한다. 각 장 제목은 다음과 같다. 1.러일전쟁의 원인 2.첫번째 전투 3.러시아의 전쟁 준비 4.조선에서 일본인과 함께 5.러시아군의 전선으로 진군 6.압록강 전투와 일본의 진격 7.여순항 포위전 개시 8.요양(遼陽) 전투 직전의 개전 준비 9.요양 전투 10.전쟁의 기록자들 11.사하(沙河) 전투 12.여순항 함락 13.러시아 해군력의 종말 14.봉천 전투 여기에 수록된 사진화보는 제임스 헤어를 비롯해 Victor K. Bulla, Robert L. Dunn, James F. Archibald, Richard Barry, Ashmead Bartlett, James Ricalton 등 총 7명의 사진작가가 러시아와 일본으로 파견되어 양국 군대에 종군하여 직접 촬영한 것이다. 따라서 러일전쟁과 관련한 일본측 전쟁화보집과는 달리 제3자로서의 객관적 시각으로 전쟁 상황을 상세히 담아냈다는 점에서도 이 전쟁화보집이 갖는 의의가 남다르다. 또한 이 화보집이 전쟁의
『일본만세 백찬백소(日本萬歲 百撰百笑 : 청일전쟁편』
[소장자료 톺아보기 58] 중국·중국인 멸시관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전쟁 만화 『일본만세 백찬백소(日本萬歲 百撰百笑 : 청일전쟁편』 [작품 설명] ② 밟아 부수기 노래(踏潰しの歌) 일본군 병사가 풍도, 아산, 평양에서 청국 함대와 청국 군대를 밟아 부수고 이제 만주와 북경으로 향하고 있다. 변발한 청국인은 털썩 주저앉아 일본군의 엄청난 기세에 눌려 속수무책으로 울고 있을 뿐이다. ③ 지옥의 대번창(地獄の大繁昌) 지옥에서 염라대왕이 풍도해전과 성환·아산전투에서 전사한 청국 병사들을 문초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이 ‘도자에몬(土左衛門)’ – 일본 설화에서 土左衛門은 무쓰국(陸奧國) 출신의 스모 선수였는데 그 몸이 매우 비대하였다. 그 모습이 물에 빠진 사람들의 배가 가스로 가득차 온몸이 부풀어 오른 자태와 비슷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당시 일본인들은 익사자를 가리켜 土左衛門이라 일컬었다고 한다.이라고 한다. – 너무 많은 전사자들이 몰려와 7일 밤낮을 조사하는데 나중에는 황해전투 사망자까지 떼지어 들어왔다. 염라대왕은 이 사망자들의 나라 이름이 死國이라 규정했다. 여기서 死國(しこく)은 곧 淸國(しんこく)으로 발음이 비슷한 것에 착안한 언어유희다. 이렇듯 청국의 전사자는 모두 지옥으로 간다는 설정과 ‘도자에몬=익사자’라는 명칭으로 청국과 청국 병사를 신랄하게 멸시하고 비하하였다. ④ 이홍장의 대두통(李鴻章の大頭痛) 청일전쟁 당시 직예총독(直隸總督)이자 북양대신(北洋大臣)이었던 이홍장은 연일 들려오는 청국의 패전 소식에 심한 두통을 앓고 있다. 수면제를 먹고 잠시 눈을 붙이려 해도 꿈속에서까지 일본군이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자 처음부터 일본에 항복했더라면 하고 후회한다. ⑤ 패퇴한 장군(御敗將) 청국 장군이 여장을 한 채 화장하면서 “여인의 모습으로 적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2)
[소장자료 톺아보기 57] 풍속화보 청일전쟁편에 깊숙이 녹아있는 ‘문명과 야만’이란 편향된 시선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2) 1894년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군 군함을 기습공격해 격침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청일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는 논설을 기고하였다. 그 논설에서 후쿠자와는 청일전쟁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전쟁은 청일 양국 사이에서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 근원을 따지자면 문명개화의 진보를 꾀하는 자와 그 진보를 방해하려고 하는 자 간의 싸움이지, 결코 양국 간의 싸움이 아니다.(「日淸の戰爭は文野の戰爭なり」, 『時事新報』 1894.7.29) 청일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고 규정한 것은 조선과 청나라에 대한 침략의 정당성을 담보하고 일본인의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어 당시 지식인과 언론인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었다. 『일본신문(日本新聞)』의 사장 겸 주필인 구가 가쓰난(陸羯南)도 청일전쟁이 조선의 현상(現狀)을 좌시할 수 없는 인도상의 후의(厚誼)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전쟁의 목적은 “동양의 진보를 꾀하기 위해 중국이라는 야만을 치는 데 있다”(「征韓の王師」 1894.8.16)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정한론(征韓論), 북진론(北進論)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이후 대동아공영권이란 미명하에 1930~40년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추동하는 대외침략의 이데올로기로 확장되었다. 청일전쟁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가 벌인 최초의 근대전이어서 전사회적으로 전쟁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대단했다. 이에 따라 『아사히신문』, 『고쿠민신문』, 『요미우리신문』등 주요 일간지나 잡지사들은 조선과 중국의 전장에 수많은 종군 기자와 화가, 사진사를 파견해 그때그때의 전쟁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하고자 했다. 조재곤의 연구(조재곤 2024, 336쪽)에 따르면, 청일전쟁 당시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1)
[소장자료 톺아보기 56] 표지화로 보는 청일전쟁의 실상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1) ➊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78호 일청전쟁도회 제1회』(1894.9.25.) 청일전쟁 관련 기사를 다룬 첫 번째 풍속화보지. 아산만 풍도해전(豊島海戰, 7.25)과 성환에서의 육지전투(7.29)를 상세히 다루었다. 표지화는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국 순양함 ‘제원’과 ‘광을’을 격침시키는 장면이다. ➋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2호 일청전쟁도회 제4회』(1894.12.20.) 7월 개전 후 일본군은 평양, 의주를 거쳐 북진을 계속해 11월 이후 구련성, 금주성, 대련, 여순을 함락시켜 압도적 우위에 섰다. 표지화에서 보듯이 일본군 장군이 청국군 지휘관을 군기로 깔아뭉갤 정도로 일본군은 승전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➌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4호 정청도회』 제5편』(1895.1.25.) 제5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더불어 조슈(長州) 3걸로 일컬어지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角五郞. 1836~1915)의 조선 체류 기록인 『한성내잔몽(漢城廼殘夢)』(1891.10)을 전재하였다. 이노우에는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말 조선에 건너와 조선의 외교고문에 임명되었고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와 교류하며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하였고 거사가 실패하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조선과 일본을 왕래했으며 1894년 직후 조선공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한성내잔몽』은 갑신정변 당시의 조선 정세와 외교관계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표지화는 갑신정변 실패 후 다케조에 이치로(竹添進一郞) 공사와 개화파가 일본으로 도주하자 이에 격분한 조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을 불태우는 모습을 담았다. ➍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6호 정청도회』 제6편』(1895.2.25.) 1894년 12월초 일본군 제1군사령부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육상교통로의 요충지인 해성(海城) 공략에 전력을 기울였다. 12월 13일 해성을 점령했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