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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침략을 위한 길 닦기

2016년 10월 19일 3056

∷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6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하자 일본은 거류민 보호명목으로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어 그해 7월 23일 경복궁에 난입해 ‘국왕생포작전’을 벌였다. 왕궁 점령 이틀 후 일본은 아산만의 청군함대를 기습 공격해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에 적극 개입하였다.(제1차‧2차 갑오개혁) 그러나 1895년 5월 삼국간섭으로 인해 요동반도를 반환하면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민씨 일족은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 등을 기용해 일본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 일본은 1895년 7월경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고 친러 정책을 펴는 명성황후를 제거하고자 ‘여우사냥’ 작전을 획책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 낭인들을 지휘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체를 불태웠다. 그리고 고종을 위협해 유길준,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수립,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로 인한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자 미우라와 가담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히로시마 감옥에 가두고 재판했으나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하였다. 우리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정부대개혁도朝鮮政府大改革之圖」(69.2㎝×34.5㎝)는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갑오개혁을 소재로 한 니시키에錦絵다. 니시키에란 근대 일본의 목판화로 무로마치시대 말기부터 에도시대 초기에 걸쳐 그려진 우키요에浮世繪라는 풍속화를 근간으로 한 것이며 이것이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는 컬러판 니시키에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미인화를 주로 그렸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풍경화나 일본과 중국의 역사상의 인물을

친일파는 한국판 전범

2016년 9월 23일 2820

∷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해방이 되자 제일의 민족적 과제가 친일파 숙정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친일파 재등용은 이러한 민심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수립되자 친일파에 대한 단죄는 다시 전면화하게 된다. 1948년 9월 22일,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하였다. 이어 친일파 기소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를 구성하여 친일파 체포에 나섰다. 국민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며 반민특위에 친일파의 행적을 증언하거나 제보했다. 언론들의 취재 경쟁도 치열했는데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자료 하나를 소개한다.특별재판부 재판정으로 들어가는 친일파의 모습이 실린 1949년 4월 4일자 <주간서울> 1면이 바로 그것이다. <주간서울>은 1948년 1월 창간되어 6·25전쟁 직전인 1950년 5월까지 간행된 해방이후 최초의 종합시사주간지이다. 1949년 3월 28일부터 반민족행위자특별재판이 개정하자 <주간서울>은 “한국판 <뉴른베르그> 피고들 궤변과 방청석의 공기”라는 제목으로 이 재판의 의의와 분위기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먼저 친일파 처단의 목소리는 해방과 동시에 일어났지만 미군정의 소극적인 태도로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낸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일파 처단은 해방민족으로서의 절대 요청’으로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상정(1948년 8월 17일)되고 정식 공포(1948년 9월 22일)되어 법적 근거가 마련된 사실에 안도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어 1949년 1월 8일 친일파 박흥식의 수감을 시작으로 반민특위의 실질적 행동이 개시되어 3월 28일부터 개정된 8명의 피의자에 대한 반민족행위자특별재판에 대해 ‘도로 찾은 민족정기가 겨우 소생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고 평가하며 특급 친일파인 피의자들의 사진을 전면에

‘광복’과 함께 ‘국치’를 기억하자 –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2016년 8월 19일 3624

‘광복’과 함께 ‘국치’를 기억하자 –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1910년 8월 22일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가운데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비밀리에 조인했다. 병합조약은 일주일이 지난 8월 29일 순종의 칙유를 통해 내외에 공포되었고,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10년 12월 4일 신반도사에서 발행한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이다. 사진첩을 발간한 신반도사는 서언에서 “조선의 병합은 동양평화의 기초를 공고히 하고 반도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으로 특히 원만하고 평화롭게 이 대사 병합의 해결을 본 것은 진실로 주목할 만한 일로… (병합의) 성사를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간행한다고 밝혀 ‘조선병합’을 ‘경축’하는 의미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취지로 발행된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은 총 100쪽에 걸쳐 다양한 사진 자료를 담고 있는데, 강제병합의 주역들인 일본과 조선의 인물 사진 170여 장, 특별한 행사의 인물단체 사진 20여 장, 경성의 모습 44장, 지방의 명소와 고적 사진 86장, 조선의 풍속 사진 42장 등 약 400장의 사진을 싣고 있다. ‘조선’ 사진첩임에도 불구하고 첫머리에 실린 사진은 메이지(明治) ‘천황’ 부부의 초상과 그 후 계자인 요시히토 ‘황태자’ 일가족이다. 황실에서 왕가로 전락한 조선왕실 일가는 다음 순서로 밀려났다. 또한, 조선총독부 최초 관보와 대한제국 최종 관보, 순종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를 함께 실어 조선의 병합은 ‘원만하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첩에는 수많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