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천안 호두과자의 원조는 기미년 만세시위대(예산 고덕)를 칼로 찌른 일본군 헌병오장 출신이었다”
[3·1절 특집 발굴추적] “천안 호두과자의 원조는 기미년 만세시위대(예산 고덕)를 칼로 찌른 일본군 헌병오장 출신이었다” 이순우 특임연구원 지금에야 비단 고속도로휴게소가 아니더라도 지하철 가판매장만 찾아가도 넘쳐나는 간식거리의 하나이지만, 그 옛날 철도여행이 성행하던 시절에는 ‘경부선 천안역’ 근처를 지나노라면 선물용 꾸러미를 한 아름 안은 채 홍익회 판매원이 ‘천안명물 호두과자[혹은 호도과자]’를 외치며 열차통로를 바삐 지나다니는 광경을 곧잘 보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큼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는 ‘호두과자’라고는 하나, 정작 그 유래를 정확히 아는 이는 드물다. 근년에 몇몇 언론매체와 소논문 형태의 글을 통해 『부산일보』 1931년 4월 12일자에 수록된 「시무라(志村)의 쿠루미요캉(くるみ羊かん)」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인용 소개되면서, 이것이 호두과자의 원조를 새롭게 밝혀줄 자료라는 식으로 제법 소개되기는 한 적이 있다. 천안역전(天安驛前) 시무라제과포(志村製菓舖) 주인 시무라 마츠타로(志村松太郞) 씨는 상당한 분투가(奮鬪家)로 연구심(硏究心)이 넘치는 사람이며 천안특산물(天安特産物)인 쿠루미(胡桃, 호도)를 이용 여러 가지의 과자를 만들고 있는데, 과반(過般) 부산(釜山)에서 개최한 전선과자이품평회(全鮮菓子飴品評會)에서 ‘쿠루미야키’는 일등상 금패(一等賞 金牌)에, ‘쿠루미요캉’ 및 ‘신(新)쿠루미’는 모두 이등상 은패(二等賞 銀牌)에 입상(入賞)했던 것으로, 거의 전선적(全鮮的)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시무라 씨의 명예만이 아니라 천안의 명예이다. 이와 관련하여 『경성일보』 1931년 3월 30일자에 수록된 「제1회 전선과자이품평회와 전국식료품전람회 포상수여식(褒賞授與式) 거행」 제하의 기사를 보면, 1등상 금패는 부산 카타야마 토쿠타로(片山德太郞) 외 63점(點)에게 한꺼번에, 그리고 2등상 은패 역시 함흥 고토 야스요시(五島安吉) 외 98점에 대해 일괄하여 주어진 사실이 확인된다. 아무튼 이것이 대략 호두과자의
김희원 경기동부지부장을 추모하며
[추모사] 김희원 경기동부지부장을 추모하며 방학진 기획실장 독립운동가 중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훈장을 전수하지 못한 경우는 현재 18,162명 중 7,278명(40%)에 이른다. 역사에 이름 석자만 남겼을 뿐 훈장을 받아서 보관할 후손조차 없는 독립운동가들이 이렇게나 많다. 34년 전 민족문제연구소가 창립되자 당시 후원회원으로 참여한 시민들은 스스로를 ‘21세기 독립군’이라 자처하며 연구소 활동에 물심양면으로 힘을 보탰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연구소를 위해 헌신한 많은 분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계시지만 제한된 민족사랑 지면 관계로 일일이 그분들의 노고를 남기지 못해 늘 안타깝고 죄송했다. 멀지 않은 시기(어쩌면 창립 35주년이 되는 내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에 ‘역사정의 실현’이라는 추상적 기치를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라는 구체적 현실로 만들어낸 연구소 후원회원들의 성원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상근자로서 최소한의 도리라고 늘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월 23일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희원 경기동북지부장에 대해 짧게나마 쓰고자 한다. 김희원 지부장은 1952년 서울 사대문 안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님은 해방 직후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서울여자의과대학(현 고려대 의대)을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했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어머니의 이대 약학과 1년 후배인 손명순(김영삼 전 대통령 부인) 여사가 집에 찾아오거나 장택상 씨 집안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집이 서울 시내 한복판이었지만 한국전쟁 중에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했던 것은 아마도 부모님 덕분이었을 것이다. 대학 입학 후에는 공부보다는 음악다방 DJ 같은 자유로운 생활에 몰두하다 부모님의
‘역사의 증인’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추모사] ‘역사의 증인’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님께서 2025년 1월 27일(월) 오전 8시 57분 향년 102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이춘식 할아버님은 1924년 전라남도 나주군 평동면 용동리에서 태어나 17세에 일본 이와테현 일본제철 가마이시제철소에 끌려가 강제노동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현지에서 다시 일본군에 징집되어 고베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습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공습의 위험을 이겨내고 고베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을 맞아 끌려간 모든 조선의 청년들이 서둘러 고향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청년 이춘식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쇳물을 다루는 위험한 제철소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배고픔, 다반사로 일어나던 사고, 전쟁 말기 미군의 극심한 공습을 피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은 자신이 강제로 노동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효고(兵庫)현 고베에서 이와테(岩手)현 가마이시까지 1,000㎞가 넘는 머나먼 길, 전쟁의 폐허로 교통수단도 제대로 없었을 당시에 청년 이춘식은 자신의 인권과 존엄을 다시 찾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춘식 할아버님은 2005년 서울중앙지법에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소한 손해배상소송에 원고로 참여하여 전범 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투쟁에 앞장섰습니다. 해방 뒤 73년이 지난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가해 기업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피해자들의 역사적인 승소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법정에서 판결을 직접 들은 이춘식 할아버님은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기쁨이 아니라 눈물이 나오고,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라며 뜻밖의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에 앞장선 을사오적(乙巳五賊)
[소장자료 톺아보기 67]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에 앞장선 을사오적(乙巳五賊) 을사늑약 체결 120주년을 맞아 을사늑약, 정미 7조약,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주도한 대표적인 친일 대신들인 을사오적(乙巳五賊), 정미칠적(丁未七賊), 경술국적(庚戌國賊) 15인의 이력과 그들에 대한 소장자료를 세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을사늑약 체결과정을 살펴보자.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로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다음날 수옥헌(현재의 중명전)에서 고종에게 일왕의 국서를 전달했다. 11월 15일에 하야시 일본공사와 함께 조약 초안을 제시하고 각료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종용했다. 17일 어전회의가 열리자 하세가와 사령관이 완전무장한 일본군을 앞세워 경운궁을 포위했고 서울 일대에도 무장한 군대가 배치되었다. 이토는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을 회유하여 조약 조인에 찬성하게 하고 반대하는 국민들을 총칼로 제압하면서 고종에게 ‘보호조약안’을 승인하도록 강요했다. 11월 17일 “일본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하는 대신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조인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명목상 보호국이나 사실상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침략의 원흉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으며, 개항장과 주요 도시에 이사청이 설치되어 식민지배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완용(1858~1926)은 을사늑약, 정미 7조약,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각각 학부대신, 총리대신, 총리대신으로서 모두 관여한 대표적인 매국노(賣國奴)이다. 경기도 광주 태생으로 생부는 이호석이고 양부는 판중추부사 이호준이다. 24세에 증광별시에 합격하여 관료의 길에 들어서서 승승장구했다. 1896년 2월에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했고 그해 7월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을 맡기도 하는
민족사랑 2025년 2월호
[바로보기]
진주 죽이기 – 김경현의 역사·문화·논개 비평
[책소개] 진주 죽이기 – 김경현의 역사·문화·논개 비평 김경현 저 | 곰단지 김경현 작가가 2024년 1월 『김경현의 진주이야기 100선』을 펴낸 지 10개월 만인 11월에 후속편인 『진주 죽이기』를 출간하였다. 단기간에 500여 쪽의 두툼한 책을 완성한 저자의 치열한 노력과 성실함에 경탄해 마지않는다. 전자가 수백여 년의 진주 역사 속에서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길어올린 것이라면, 후자는 저널리스트로서 2000년대의 진주 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 비평집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진주 죽이기’라는 도발적인 제목과 ‘김경현의 역사·문화·논개 비평’이라는 부제를 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렇게 하여 이 책의 제목이 『진주 죽이기』로 정해졌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책 제목은 진주 역사와 문화에 대해 적의감(敵意感)이 넘치는 ‘죽이기의 절망’을 넘어서 과거를 치유하고 상생하는 ‘살리기의 희망’을 생각해 보자는 취지에서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은 ‘죽이기’이지만 ‘진주역사 살리기’와 ‘진주문화 살리기’ 및 ‘논개 살리기’를 의미하고 그런 뜻에서 『진주 죽이기』의 부제로 ‘김경현의 역사·문화·논개 비평’이라고 붙이게 되었다. 어차피 죽고 사는 문제는 얼마나 서로를 잘 이해하고 생각하느냐, 앞으로 역사와 문화를 얼마나 공유하며 얼마나 공동체 정신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진주 죽이기』는 제1부 진주역사 죽이기, 제2부 진주문화 살리기, 제3부 논개를 위한 변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진주역사 죽이기는 『경남도민일보』에 연재한 칼럼 중에 역사와 문화와 관련된 글이다. 여기서 다룬 주제는 진주와는 떼려야 뗄
남도 한말의병의 기억을 걷다·남도 임진의병의 기억을 걷다
[책소개] 남도 한말의병의 기억을 걷다·남도 임진의병의 기억을 걷다 김남철 저 | 살림터 우리가 5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세계사에서 어느 민족도, 어느 나라도 이만큼 긴 세월을 동질성을 지키면서 꿋꿋이 버텨온 사례가 없다. 그 밑바닥에는 저항의 역사와 함께 기록이 있다. 끊임없이 저항하고 이를 모두 기록하면서 반성했기 때문에 드물게 5천년을 이어오는 민족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소통 할 수 있는 언어라는 수단(문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면 온동네 개들이 떼창으로 짖어댈 수는 있지만, 우리 마을에 무슨 일이 있는지 다른 마을에 알릴 수 없고, 어제 우리 마을에 낯선 사람이 왔었다고 전할 수도 없다. 기록은 우리 일을 옆 동네에 알리는 수단이고, 오늘 이야기를 내일에 전하는 수단이다. 수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있었지만 기록이 있고없고에 따라 민족의 문화와 역사에 등급이 매겨지기도 하고 수명이 달라지기도 했다. 반만년의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수많은 저항이 있 었다. 안으로는 부당한 지배자에 대한 저항이 있었고 밖으로는 외세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지배세력들에 의해 ○○란亂이라고 이름붙여진, 이름을 다 외우기도 어려울 만큼 수많은 백성(민중)들의 저항이 있었고, 항쟁으로 불리는 수많은 시민(민중)들의 저항이 있었다. 몽고의 침략에도 30년 가까이 버텼고, 임진년부터 왜놈과 7년의 전쟁도 치러냈다. 일제의 침략에도 30여 년을 버텨냈다. 지배층은 도망갔어도 민초들이 끝까지 지켜냈다. 위정자들은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백성들이 의병이 되어
경부선 경의선 복선공사와 맞물린 경성조차장(수색역)의 건립 내력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5] 겉시늉으로만 남겨놓은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 묘비석(1940년)’ 경부선 경의선 복선공사와 맞물린 경성조차장(수색역)의 건립 내력 이순우 특임연구원 경의중앙선 화전역(花田驛, 2023.11.21일에 ‘한국항공대역’으로 개칭)에 내려 지하통로를 따라 항공대 운동장 방향으로 올라가면, 이곳에서 남동쪽 수백 미터 남짓한 지점에 ‘화전동공동묘지(경기도 고양특례시 덕양구 화전동 633-9번지 일대)’가 나타난다. 공동묘지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지난 2019년 11월에 고양시에서 3·1독립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성한 ‘기림의 길’이 죽 이어진다. 이 길의 끝에서 약간 휘어진 언덕길로 올라서면 이름 모를 무덤들 사이에 제법 큼직한 비석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 전면에 이르기를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묘”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주식회사 하자마구미 수색출장소가 소화 15년(1940년) 3월에 세운 것이라는 표시가 남아 있다. 이를테면, 이 비석은 일제가 수색역(水色驛) 일대에 대규모 경성조차장(1939년 5월 13일 기공)을 새로 조성할 때에 그 공사구역 안에 포함된 묘역들 가운데 기한 내에 이장(移葬)하지 못한 무연고묘지를 일괄처리하면서 만든 합장묘비인 것이다.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묘’의 비문 풀이 하지만 비석 뒷면에 용지매수 대상지 여섯 곳의 지번은 그럭저럭 표시되어 있으나 이것과는 달리 정작 몇 기의 무연고무덤이 처리된 것인지를 나타내는 자리는 아예 공란(空欄)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묘비조차도 얼마나 형식적으로 만든 것인지가 여지없이 잘 드러난다. 그저 연고도 없는 조선인의 불쌍한 혼령을 위한 묘비를 세워주었다는 사실만 생색을 낼 따름이지 이 묘비석에는 아무런 알맹이도 담겨있지 않고,
‘끝나지 않은 석정의 노래’를 쓴 까닭
[기고] ‘끝나지 않은 석정의 노래’를 쓴 까닭 저자 최필숙 역사를 잊으면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즈음의 작태를 보면서 ‘친일부역자를 청산하지 못한 해방 직후 역사의 대가(代價)’라 여깁니다. 동시에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를 생각합니다. 가족을 볼모로 하는 협박을 누가 견딜 수 있었을까요? 가족의 목숨까지 담보해야만 할 수 있었던 것이 민족해방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것을 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당연한 은혜로 생각했습니다. 선열의 희생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고 그들의 이야기는 신화가 된 듯 말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살지 않았던 나는 당시 독립운동가를 이념으로 재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 땅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그들을 재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 고향 밀양에는 그 이념의 굴레가 아직도 건재합니다. 그 굴레는 약산 김원봉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 활동하다 희생당하신 분들, 심지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6·25전쟁 당시 겪었던 학살의 기억은 그들을 움츠러들게 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외부인과의 접촉을 경계하라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이런 밀양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암살’이라는 영화가 단비가 되어 밀양 땅을 적셨고,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툭 던져진 한마디 “가 선생께 전하시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이 말은 밀양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숨겨야 했던 약산 김원봉은 물론 그 그늘에 가려진 많은 독립운동가가 재조명되었고, 밀양인의 마음에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도
민족문제연구소 2024년 10대 뉴스
재조일본인과 전후 재외재산 처리 문제 국제학술회의 개최 우리 연구소는 2월 22일 서울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식민지시기 재조일본인과 전후 ‘재외재산’ 처리 문제〉를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이 국제학술회의는 연구소가 수행하고 있는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 “재조일본인의 사회경제자료 통합DB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열렸다. 학술회의에는 한국, 일본, 대만 등 각국의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일본인의 식민지 이주현황 및 생활상은 물론, 귀환 일본인의 식민지 인식 및 ‘재외재산’ 보상청구 운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논문 7편을 발표하였고 이어 참가자들과 청중이 어우러져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재조일본인의 자산 실태조사 등 프로젝트의 이행과정을 점검하는 한편, 귀속재산 관련 자료 분석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등 향후 연구 방향을 모색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전범기업 상대 손배소 연이어 승소 2018년 대법원이 일제 강제동원피해자에 대한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이후 2024년에 이르기까지 강제동원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제철, 후지코시, 미쓰비시중공업 등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잇따라 승소하고 있다. 그러나 2023년 윤석열 정부는 포스코 등 우리 기업의 기부금으로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이른바 ‘제3자 변제’라는 해괴한 해법을 내놓고 원고들에게 이를 수용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에 우리 연구소 등 지원단체와 소송 대리인단은 일본 정부와 기업의 진정성 있는 사과조차 요구하지 않는 굴욕적 ‘제3자 변제’를 규탄하고 대법원에 특별현금화명령에 대한 조속한 최종 판결을 촉구하는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청일전쟁 130년, 러일전쟁 120년 기획 행사 추진 동학농민혁명·청일전쟁 130년, 러일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