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사랑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관련 자료
[자료소개]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관련 자료 1925년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 경과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925년 3월 13일 곽헌·최석순 등 10명의 의원이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상정했고, 3월 21일 탄핵 심판서가 제출되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함”이라는 짧은 주문과 함께 세 가지 이유가 덧붙여졌다. 3월 23일 임시의정원이 이를 통과시켰다. 이승만 탄핵안이 통과된 그 자리에서 박은식이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12월말부터 개헌의 중심축에 서 있던 박은식은 3월 24일 제2대 임시대통령에 취임하고, 바로 새 내각을 구성했다.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제42호(1925.4.30)에 실린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 결의안」과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 심판서」, 그리고 이승만 탄핵의 시발점이 되었던 신채호 등 54인이 연서한 「(대미 위임통치청원) 성토문」(1921.4.19)이다. — 편집자 결의안 주문 1. 본원(本院: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임시헌법 제21조 제14항에 의하여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심판에 부치기를 결의함 이유 1. 헌법 제14조에 부기한 서약과 동 39조를 위반하였나니라. 증거 가. 민국 6년(1924) 12월 22일자로 전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발송한 대통령 공첩(公牒)에 의하면 “하와이[布哇] 교민의 인구세 중지한 것은 다 본통령(本統領: 이승만을 가리킴)의 지휘에 의하여 행한 바이니 위원이나 단장을 힐책할 것이 아닙니다”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본통령이 하와이 민단장과 부인회장에게 신칙(申飭)하여 상해로 납송할 공전(公錢)을 다 정지하고 더욱이 훈칙(訓飭)을 기다리라 하였나니”라고 하였음 설명 헌법 제14조에 부기한 선언문을 들면, “나는 일반 인민의 앞에서 성실한 심력(心力)으로 대한민국 임시대통령의 의무를 이행하여 민국
조선부로수용소(연합군포로수용소) 탐방기
[식민지 자료관 1] 조선부로수용소(연합군포로수용소) 탐방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이번 호부터 새로 꾸며지는 「식민지 자료관」은 일제침탈사와 관련한 숨은 자료를 발굴하여 소개하는 코너이며, 이순우 특임연구원의 기존 연재물인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과는 격월제로 게재될 예정이다. (편집자) 여기에 소개하는 ‘조선부로수용소(1942년 7월 5일 개설)’는 태평양전쟁의 확전 초기 단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거쳐 19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때 십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병력이 대거 포로로 전락하면서 생겨난 결과물이었다. 전투현장도 아니고 일본 본토도 아닌 곳에 난데없이 포로수용수가 설치된 것은 “반도인(半島人, 조선인)의 영미숭경관념(英米崇敬觀念)을 일소하고 필승의 신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매우 유효하므로 …… 영미부로(英米浮虜) 각 1천 명을 조선에 수용하고 싶다”는 조선군사령부의 요청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42년 8월 16일 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서 출발한 1천 명에 달하는 영국군 포로(호주군 100여 명 포함)가 3천 톤급 수송선 후쿠카이마루(福海丸)을 타고 1942년 9월 24일에 부산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고, 그 다음날인 9월 25일 경부철도를 통해 용산역에 당도하여 삼각지와 용산경찰서 앞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조선부로수용소 본소(本所; 지금의 청파동 3가 100번지 신광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안착하였다. 이 가운데 일부 포로들은 영등포역에서 분할되어 상인천역을 경유하여 인천에 있는 ’조선부로수용소 분소(分所)‘에 배치되었다. 일제는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전쟁수행을 위한 생산력 확충에 일조하도록 하겠다는 계략에 따라 1943년 9월에는 함경남도 함흥에 흥남(興南) 캠프가 새로 설치되어 경성과 인천에서 선별된 230명의 포로들을 이곳으로 재배치한 적도 있었다.
광화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애국가와 신흥무관학교 교가가 울려 퍼진 이유
[돌려보기] 광화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애국가와 신흥무관학교 교가가 울려 퍼진 이유 이정윤 독립운동가 후손 지난 12월 3일, 대한민국 국군이 국민을 향해 무기를 겨누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윤석열은 국회의 입법독재에 대해 국민에게 호소하기 위한 계엄을 선포했다고 하지만,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대가 정권의 도구로 전락한 사건으로, 군이 국민을 억압하던 독재정권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이후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 질서를 훼손하고 내란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국가 주요 기관들이 혼란에 빠졌고, 국내외적으로도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정치적 압박이 거세졌다. 그러던 중, 법원은 절차적 문제와 구속 필요성에 대한 재검토 끝에 윤 대통령의 구속 취소를 결정했고, 검찰 또한 즉시 항고를 포기하면서 그는 52일 만인 3월 8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석방되었다고 해서 그가 무죄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 질서를 위반하고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했다는 혐의로 여전히 탄핵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헌법재판소에서는 그의 직권남용, 군을 동원한 불법적 조치, 계엄령 선포 과정에서의 법적 정당성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윤석열을 심판하는 것은 헌재만이 아니다. 매주 토요일,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주최하는 집회가 광화문에서 열리고 있다. 지금까지 14차에 걸쳐 열린 집회는 시민들의 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보여주는 공간이 되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군 동원을 ‘헌정 질서 파괴’로 규정하며, 그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지킨 가치,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팔라우의 조선인들
[연구소 글방 20]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팔라우의 조선인들 김명환 연구실 학술팀장 대구 출신 ‘태구만’의 묘 1973년 10월 어업기지 업무파악을 위해 팔라우(Palau) 코로르(Koror)에 머물던 김찬구(金燦球)는 섬 동쪽 산기슭 우거진 잡초 속에 묻혀있던 쓸쓸한 묘지 하나를 발견했다. 기단 위에 세운 묘비에는 「고태구만지묘(故太具萬之墓)」라고 새겨져 있었다. 묘지의 주인인 태구만은 대구 출신으로 1939년 10월 11일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사망 당시 64세로, 그의 죽음을 애도한 조선인들이 “파라오선인친목회(パラオ鮮人親睦會)” 명의로 비석을 세운 것이었다. 64세면 적지 않은 나이였을텐데, 그는 어찌하여 이역만리 타국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일까? 김찬구는 섬사람들로부터 “2차대전 때 징용 와서 일본인들에게 강제노동을 당하면서 고생하던 조선인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였다. 그가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이러하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조선인 20여 명이 끌려와 비행장을 닦기 시작했으며, 태구만도 그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일하던 태씨를 일본인 감독이 채찍으로 때려 기절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징용’되어 온 조선인들이 고통에 못 이겨 ‘아이고’ 소리를 냈던 것을 모르는 현지 사람이 없다고 했다. 김찬구의 전언은 전시총동원체제기 강제동원 되었던 조선인의 참상을 고스란히 전해준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찬구가 원주민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온전히 사실일까? 이야기해준 원주민으로서는 30년 전의 일이고, 또 모르는 사람의 고난을 지켜본 것일 뿐이었다. 혹시 기억의 착오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찬구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우리는 흘려들을 수만은 없다. ‘팔라우’라는 곳 팔라우는 낙원과 같은
후지코시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김명배 할아버지와 한일시민들의 연대
[기고] 후지코시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김명배 할아버지와 한일시민들의 연대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윤석열 내란 세력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선언한 2018년 강제동원 대법원판결을 무시하고 반헌법적이며 반역사적인 ‘제3자 변제’를 밀어붙였다. 고령의 피해자들에게 ‘부당한 선택’을 강요한 윤석열 정부의 폭거에 맞서 일본 전범 기업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지코시(不二越)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해 온 연구소의 김영환 대외협력실장과 김세호 전략홍보팀장은 지난 3월 26일 일본 도야마(富山)에서 열린 후지코시 주주총회에 원고 김명배 할아버지를 모시고 참가하여 일본 시민, 재일동포들과 함께 후지코시가 대법원판결에 따라 하루빨리 사죄, 배상할 것을 요구하는 방일 항의 행동을 벌였다. 지난 3월 26일 일본 도야마현 도야마시에서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기계·부품회사 후지코시의 주주총회가 열렸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고 임영숙 씨의 남편 김명배 할아버지는 아내의 존엄과 인권의 회복을 위해 94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후지코시 주주총회를 찾았다. 이 자리에서 김명배 할아버지는 회사 측에 “일본 정부와 후지코시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배상 문제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지만, 강제노동을 시키고 피해자들에게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은 채 ‘다 끝났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며 “후지코시는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을 이행해야 한다”고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 후지코시의 무책임한 태도를 강하게 질타했다. 김명배 할아버지의 아내 고 임영숙 할머니는 충청북도 충주에서 12살의 어린 나이에 근로정신대로 도야마로 끌려와 무기 부품을
삼일절 106주년 기념 특별행사 〈삼일절에 뭐하지? – 나만의 깃발을 만들어 독립, 민주, 인권, 평화를 외쳐보자!〉
[초점] 삼일절 106주년 기념 특별행사 〈삼일절에 뭐하지? – 나만의 깃발을 만들어 독립, 민주, 인권, 평화를 외쳐보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삼일절 106주년을 맞아 나만의 깃발을 만들어 보는 행사를 진행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현장에 있었다면 어떤 깃발을 들고, 어떤 구호를 외쳤을지, 106년이 지난 현재의 한국에서는 어떤 깃발을 들고, 어떤 구호를 외치고 싶은지 고민해 보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깃발을 만들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완성된 깃발을 기증하면 4월 예정되어 있는 기획전시 〈민주주의와 깃발(가제)〉에 전시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포토존에서 사진을 남기고 깃발을 기증해 주었다. 이번 행사에는 깃발 만들기 외에도 ‘독립군가 오르골’, 3D 퍼즐 ‘탑골공원’과 ‘유관순’ 만들기도 같이 진행되었다. 특별행사 〈삼일절에 뭐하지?〉 외에도 ‘카카오 톡 채널’을 통해 참가 신청을 받은 특별해설도 2회 진행하였다. 선착순 20명으로 진행된 특별해설 신청은 홍보 포스터 클릭 수 및 공유 수가 높은 만큼 단 몇 시간 만에 마감되었다. 미처 참가 신청을 하지 못한 관람객이 현장에서 참가 요청을 할 정도로 해설에 대한 큰 관심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도 다양한 체험활동과 전시해설을 진행할 예정이며,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린다. • 김혜영 학예부팀장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4주년 기념식 개최
[초점]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4주년 기념식 개최 2월 22일(토) 오후 3시, 식민지역사박물관 인근에 위치한 한국순교복자수녀원 강당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4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번 기념식은 2021년 코로나19 펜데믹 속에서 열린 30주년 기념식 이후 4년 만에 개최된 행사였다. 올해 기념식은 3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는 ‘내란·탄핵’ 정국 속에서 역사정의 실현을 위한 회원들의 결의를 다지는 다짐의 날로 마련됐다. 행사에 앞서 오후 1시부터 긴급특강 “계엄과 폭력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조선대학교 노영기 교수가 ‘신군부의 계엄과 5·18의 부역자들’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이어 오후 3시부터 창립 34주년 기념식이 열렸으며, 이후 참석자들은 광화문으로 이동해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집회에 참가하고 시민들과 함께 행진했다. 행진이 끝난 뒤에는 인근 식당에서 회원들과 상근자들이 모여 역사정의 실현을 향한 결의를 다지는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기념식은 2024년 연구소 활동 보고 영상 상영 후, 임헌영 소장의 여는 말로 시작됐다. 임헌영 소장은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현재의 사태가 벌어졌으며, 연구소가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후원회원 수가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다”고 밝혔다. 이어 김승은 학예실장이 2025년 사업계획을 발표했으며, 상근자들이 참석한 후원회원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축전은 방학진 기획실장이 대독했으며, 조국혁신당 김선민 대표 권한대행과 진보당 김재연 상임대표는 축하 영상을 보내왔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역대 이사장을 기리는 회고 시간이 마련됐다. 초대 이사장인 이돈명 변호사에 대한 추모의 말을 문국주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이사장이 전했으며,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일본어판 나와
[초점] 『재일조선인단체사전 1895~1945』 일본어판 나와 106주년 3·1절을 앞두고 연구소가 『재일조선 인단체사전 1895~1945』(이하 사전) 일본어판을 도쿄 유마니쇼보(ゆまに書房) 출판사에서 E-Book으로 출간했다. 연구소는 2007년부터 재일조선인단체를 조사·연구해 지난 2021년 한글판 사전을 펴낸 데 이어 3년 만에 일본어판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이 사전 E-Book은 대형 서점 배급망을 통해 일본 내 주요 대학과 도서관에 보급되어 재일조선인 사회를 탐구하는 기초 학술자료로 활용된다. 이 사전은 일제하 재일조선인의 조직활동을 처음으로 집대성한 전문서적이다. 일본 내 독립운동단체에서부터 친일단체, 일제의 관제조직에 이르기까지 무려 551개 단체의 연혁과 활동을 망라한 대저작이다. 설립 목적으로는 정치·사회·경제·문화·종교·사상·교육·노동·친목·상조 단체로 구분되며, 실행 주체에 따라서는 청년·학생, 노동자, 여성, 실업자, 임차인 단체 등으로 분류된다. 이렇듯 분야나 성격이 다른 다양한 단체의 다면적인 활동을 1차 자료에 근거하여 수록했다는 점이 이 사전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것이다. 즉 재일조선인 사회의 일면을 부조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단체의 형태로 나타난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다각적이고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데 이 사전의 효용성이 있다. 2022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이 주관하는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어 이미 그 성과를 객관적으로도 평가받았다. 사전은 한일 시민사회와 연구자·활동가들이 한일공동편찬위원회를 구성해 1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공동작업을 진행해 얻은 소중한 결실이다. 일본어판의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히구치 유이치 전 고려박물관장과 미즈노 나오키 교토대 명예교수의 손길이 미쳤다. 이들과 함께 공동편찬위원장을 맡았던 김광열 광운대 명예교수 또한 민족문제연구소 일본어판 편찬팀에 조언을 아끼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준 정미칠적(丁未七賊)
[소장자료 톺아보기 68]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내정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준 정미칠적(丁未七賊) 일제는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폐위하고 1907년 7월 20일 순종을 즉위시켰다. 일제는 한국의 내정을 철저히 지배하기 위해 정미 7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이완용 친일내각은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해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7월 24일 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신협약을 체결 및 조인하였다. 이 조약을 정미 7조약, 한일 신협약, 제3차 한일협약 등으로 다양하게 일컫는다. 그 조문은 다음과 같다. 한일협약 일본정부 및 한국정부는 속히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한국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목적으로 다음 조관(條款)을 약정함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대해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한국정부의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행정사무와 구별할 것 제4조 한국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이를 시행할 것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임명할 것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고용하지 않을 것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협약 제1항은 이를 폐지할 것 한편 정미 7조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한일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도 함께 체결되었으나, 공포되지는 않았다. 이 각서에는 재판소와 감옥의 설치를 강제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다는 실행사항을 담고 있었다. 정미 7조약과 실행 각서의 체결로 국가를 보위하는 군사력을 빼앗기고
김학규 장군의 역사소설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
[자료소개] 김학규 장군의 역사소설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낸 백파 김학규 장군이 집필한 역사소설 『독립운동실화(獨立運動實話) 파데강반(江畔)』이다. 한평생 조국광복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김학규 장군이 이러한 역사소설을 썼다는 점이 놀랍기도 한데,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등 각종 인명사전에 김장군이 『독립운동실화 파데강반』을 집필했다는 내용이 전혀 기술되지 않은 점이 더 한층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김학규 장군에 대한 심층적인 학술 연구가 미흡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백파 김학규(1900~1967)는 평안남도 숙천 태생이다. 1919년 겨울 신흥무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 견습사관으로 유하현 삼원포 일대에서 활동했다. 1920년 경신참변 후 중국 고급학교에서 6년간 수학한 후 동명중학교 교원 및 교장을 지냈다. 1931년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장군의 참모장, 1935년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1937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중국지역 의원 등을 역임했다. 1940년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대리, 광복군 제2지대장 겸임, 산동지역 광복군 초모위원장, 1945년 4월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도 한국주화대표단 동북총판사처 부처장으로 만주지역 조선동포의 귀환을 위해 힘썼다. 1948년 4월 귀국하여 김구 휘하의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약했다. 1949년 6월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에 취임했다. 그해 6월 26일 김구 선생 피살 사건시 안두희를 한독당에 가입시키고 김구에 소개시켰다는 이유로 김구 살인교사범으로 몰려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정작 살인범인 안두희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아 이듬해 풀려나 육군 소위로 복직했으나, 김학규 장군은 1960년 4·19 직후 허정 정부에서의 석방 때까지 12년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1962년 건국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