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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전지사진첩 : 압록강전투』(1)

2024년 1월 29일 393

[소장자료 톺아보기 54] 러일전쟁 초기 대규모 육상전투인 압록강전투 『전지사진첩(戰地寫眞帖) : 압록강전투』(1) 러일전쟁은 1904~1905년 한국과 만주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이다. 러시아의 만주 장악을 우려한 영국과 미국의 재정적 지원에 힘입어 일본이 벌인 전쟁이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대리전이라고도 평가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러일 간의 전투가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전개되어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더구나 러일전쟁 초기인 2월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의 무력 시위 속에 한일 양국 간에 「한일의정서」가 강압적으로 체결되어 한국 식민지화의 첫발을 떼 게 되었다. 러일전쟁의 개전은 1904년 2월 8일 밤 여순(旅順)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아울러 일본군은 2월 9일 인천 앞바다에 정박한 2척의 러시아군함을 전격적으로 격침시켰다. 그리고는 이튿날인 2월 10일에야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여순 봉쇄에 성공한 도고(東鄕平八郞) 함대는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하였고, 육군 제1부대는 4월 말 인천에 상륙해 평양과 의주를 거쳐 압록강에서 격전을 치른 끝에 도하하여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만주로 진입하였다. 6월 일본군은 15개 사단으로 편성된 만주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그해 9월에 요양(遼陽)을 점령하였다. 노기(乃木希典) 대장이 지휘하는 제3군은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하였다. 일본군은 3월에 봉천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육상전투를 마무리지었다. 이번 달에 소개하는 『전지사진첩(戰地寫眞帖) : 압록강전투』는 개전 초기인 2월 우지나항(宇品港)에서의 군대 승선부터 5월 초 구련성(九連城) 함락에 이르기까지 근위사단(近衛師団)과 제2·12사단의 진군과 전투 장면을 찍은 사진 화보집이다. 이 사진첩은 1904년 7월 10일

민족사랑 2024년 1월호

2024년 1월 25일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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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 잊지 말자 그들의 죄(罪)를

2024년 1월 2일 272

[후원회원마당] ‘서울의 봄’ : 잊지 말자 그들의 죄(罪)를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장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다 1979년 10월 27일, 평소처럼 자취방에서 일어나 습관처럼 라디오를 틀었다. 세수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신나는 아침방송이 나와야 할 라디오에서 장송곡만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 침통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국민 여러분 슬퍼하십시오. 어제저녁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순간 다리 힘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장(國葬)이 거행되었다. 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장래를 걱정하며 국장을 지켜봤다. 계엄사령관에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임명되었다. 최규하 국무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 이삼일쯤 지나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의 얼굴이 자주 TV 화면에 잡혔다. 빨갱이의 대명사였던 김대중과 민주투사로 각인된 김영삼, 만년 국무총리만 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눈 밖에 나서 한동안 보이지 않던 김종필도 TV에 등장했다. 또 며칠이 지나자 18년 독재, 민주회복과 같은 단어가 횡행했다. 좀 더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평등한 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언론과 대중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일부 지식인들은 유신독재 청산과 민주주의의 봄을 논의했다. 시민사회 원로들은 유신헌법 폐지와 민주적 선거에 따른 정권교체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깨어나고 있었다. 12·12 군사반란 민주화의 봄을 얼어붙게 해 박정희 대통령 국장이 끝나자 여론은 급격히 바뀌었다. 대통령은 박정희뿐이라고 생각했던 국민이 ‘대통령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선택하는 것이다’, ‘사회비판은 당연한 권리’라고

토막 난 몰골로 전해지는 ‘하나부사 공사 일행 조난지비(1933년)’

2024년 1월 2일 468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3] 토막 난 몰골로 전해지는 ‘하나부사 공사 일행 조난지비(1933년)’ 함께 세워졌다는 ‘정지용 인천부사 기념비’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순우 특임연구원 근대 개항기 이래 우리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일본(1876년), 미국(1882년), 영국(1883년), 독일(1883년), 이탈리아(1884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1892년), 청국(1899년), 벨기에(1901년), 덴마크(1902년) 등 11개국에 이른다. 이에 따라 이들 국가가 개설한 자국의 공사관 또는 영사관이 — 오스트리아와 덴마크는 미개설 — 속속 이 땅에 들어섰고, 이것들을 통칭하여 ‘각국공사관(各國公使館)’이라고 일컫는다. 이들 가운데 그 선두에 선 나라는 의당 일본(日本)이었는데, 조선주차 일본공사관(朝鮮駐箚 日本公使館)이 한성(漢城)에 처음 개설된 것은 1880년 12월의 일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일찍이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가 맺어진 때가 1876년 2월 26일(음력 2월 2일)이었으니, 대략 따져도 그로부터 4년하고도 10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이만한 편차가 생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다음의 몇 가지 자료를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1]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제2관(第二款);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후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京城)에 이르러 친히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접해 교제사무를 상의하며, 해사신(該使臣)이 주류(駐留)하는 기간의 길고 짧음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맡긴다. 조선국 정부도 역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東京)에 이르러 직접 외무경(外務卿)을 만나 교제사무를 상의할 수 있으며, 해사신이 주류하는 기간의 길고 짧음은 역시 그때의 형편에 맡긴다. [2] 『고종실록』 1877년 10월 12일 기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본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호남(湖南) 개항지방의 수심(水深)을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 보고서 중 조선인문제

2024년 1월 2일 664

[자료소개]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 보고서 중 조선인문제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의 일부를 폭파한 류탸오후(柳条湖)사건을 일으켰다. 이것은 관동군이 만주 침략의 빌미를 삼기 위해 벌인 철저한 자작극이었다. 이를 기화로 관동군은 동북 삼성 일대를 침략하고 193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집정으로 삼아 일제의 식민지인 ‘만주국’을 건국했다. 1932년 3월 중화민국이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일본이 동의하여 국제연맹이 류타오후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리튼 조사단을 파견했다. 리튼 조사단은 3개월간 만주를 조사하고 9월에 리튼 보고서를 제출했다. 리튼 보고서는 1932년 3월 1일 일본의 조종에 따라 건국을 선언한 ‘만주국’이 중국인의 자발적인 운동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만주를 중국 주권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만주에 지방적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하고 만주에 관한 일본의 권익도 승인했다. 리튼 보고서는 10월 2일 공표되었다. 일본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리튼 보고서의 채택과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19인 위원회의 보고서가 국제연맹총회에서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삼천리』 제4권 제12호(1932.12.1.)에 실린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보고서 중 조선인문제」이다. 리튼 보고서 중에서 가장 쟁점이 되었던 류탸오후(柳条湖)사건에 대한 일본측 설명과 중국측 설명 그리고 조사단의 의견을 번역해 실었고 아울러 ‘만주 신국가 출현에 대한 제민족의 태도’ 항목 중에서 만주인과 조선인의 입장과 태도를 발췌하였다. – 편집자주 [9월 19일 사건] 9월 19일 토요일 아침 봉천시민이 잠에서 깼을 때

1907년 의병전쟁과 상주

2024년 1월 2일 519

[연구소 글방 9] 1907년 의병전쟁과 상주 심철기 연구실장 1. 일제의 침략과 경상도 의병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그 결과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넘어갔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어 내치(內治)에 대해서도 간섭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만주(滿洲) 문제로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던 러시아로부터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초청을 받았다. 고종은 이 회의를 통해 일본의 불법침략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는 계기로 삼고자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특사사건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일본이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키고, 차관정치를 실시하여 대한제국의 사법권 등 최소한의 주권마저도 강탈하였다. 또한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강제해산에 반발하여 서울 주둔 시위대(侍衛隊)가 봉기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하였지만 탄약이 떨어지면서 결국 진압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위대의 봉기를 시작으로 원주 주둔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가 봉기하였다. 원주진위대의 봉기는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신호탄이 되었으며, 해산군인과 의병세력의 연합의병이 출범하는 시작이 되었다. 경상북도에서도 의병전쟁이 크게 일어났는데,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이강년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동부지역은 신돌석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남부지역은 산남의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들은 이들 의병부대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를 맺으면서 활동하였다. 상주 출신 의병들도 이들 의병부대와 연계되거나 이들 의병부대에 가담해서 활동하였다. 2. 상주 출신 의병장과 의병전쟁 상주는 충북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과 접하고 있으며, 강원도와 전라도로 진출하기 용이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그렇기에 1592년(선조 26년)까지 경상감영이 설치되었으며, 일찍부터

참군인 김오랑 중령 기념사업을 20년간 이어오고 있는 김준철 회원

2024년 1월 2일 259

[인터뷰] 참군인 김오랑 중령 기념사업을 20년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김준철 회원 방학진 기획실장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앞두고 있다. 이 영화의 흥행이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2030세대들의 관심 때문이다. 그동안 10·26이나 5·18과 관련한 수준 높은 영화들이 많았지만 12·12에 대한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10·26 이후 신군부의 등장과 5·18 학살 직전의 상황을 설명해줄 영화라는 점에서도 <서울의 봄>은 영화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이 영화에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인물은 장태완 장군과 김오랑 중령이다. 특히 영화배우 정해인이 특별출연하여 짧지만 강렬하게 연기한 김오랑의 모습은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항상 좋은 역사영화 뒤에는 축적된 연구성과와 의식 있는 분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 김오랑의 명예회복과 기념사업을 20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김준철 후원회원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다. 김준철 회원은 김오랑 중령의 유일한 평전인 『김오랑 – 역사의 하늘에 뜬 별』(2012, 책보세)의 저자이다. 김준철 회원과 김오랑은 어떤 관계일까. “저는 ROTC 28기로 임관 후 맹호부대와 특전사에서 근무했으며, 스키와 암벽등반 훈련시 무릎 부상(상이군인)으로 7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96년에 전역했습니다. 전역 후 H증권에서 15년, 현재는 M화재에서 13년째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군 자살자, 의문사유가족 단체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차에, 광주의 시민단체에서 김오랑 중령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자 ‘김오랑중령추모회’를 만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주에 계시는 김오랑추모회 분들이 김오랑 중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와

민족사랑 2023년 12월호

2023년 12월 26일 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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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2023년 11월호

2023년 11월 27일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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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과 석정, 그리고 육사의 자취를 찾아서

2023년 11월 29일 342

[항일유적 답사기] 약산과 석정, 그리고 육사의 자취를 찾아서 최필숙 역사랑톡톡 대표 탕탕탕! 남경으로 떠나는 아침은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총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생을 마감한 날이다. 명량해전 승리의 날, 게다가 노태우의 죽음까지 보태진 날이라 착잡함과 약산 김원봉의 길을 따라간다는 기대감이 뒤섞인 새벽! 2시 반에 시작된 준비는 3시 50분 주재석 안향미 부부와의 만남으로 정신을 차리고 동대구 버스 환승센터에서 인천을 향하면서 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인천제1터미널 F7에서 낯선 또는 조금의 익숙함이 얽힌 분위기 속에서 인사도 없이 각자도생처럼 이곳저곳에서 만남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어색한 동거가 1년 이상 지속되었기에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선열을 찾아가는 비통한, 그러면서 무모한 용기에 힘입어 캐리어를 끌며 출국심사대에 올랐다. 그러나 황선락 어르신의 배려로 너무 빨리 출국하게 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일행에게 미안함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황선생님은 숙녀에게 뭔가를 대접하는 것은 남자의 특권이라는 말씀과 함께 먼 길을 마다않고 바바나 우유(단지형)를 사주셨다. ‘베풂은 이런 것이야’를 몸소 보여주셔서 첫날부터 좋은 기억이 쌓여간다. 추억이 많은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했던가! 그렇게 여행의 추억이 첫 순간부터 만들어졌다. ‘우호’가 무엇인지 고민할 만큼 쉽지 않은 입국심사, 죄인 아닌 죄인처럼 열 손가락의 지문을 등록하고 그것도 모자라 많은 시간과 마음을 들인 후에야 도착한 남경 공항을 다음 일정 을 위해 빨리빨리만 외치며 나섰다. 약속된 남경대도살 기념관 탐방이 어려울 수 있다는 가이드의 안내에도 ‘설마’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