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김원봉 루트를 가다
[항일유적 답사기] 김원봉 루트를 가다 이영철 연구소 후원회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현재 중국 영토내 독립군의 투쟁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역사탐방기행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내심 두근거리고 혹시 지원이 늦지 않았을까 하는 조바심이 있었지만 다행히 마감 전이어서 아주 기뻤다. 약산 김원봉과 조선의용대에 대해 깊이 있게 알고 있지는 않았고 인터넷 등의 정보만 간간히 듣고 있는 정도였다. 약산 김원봉에 관한 연구를 하신 분도 참여한다고 하여 아주 큰 기대에 들떠 있었다. 역사란 문자로 남겨진 사실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 비록 그때와 같을 수만 없지만 지형과 환경을 몸소 겪어보는 것도 당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첫날 남경대학살기념관과 남경대학교 민혁당 창립장소에 가기로 했지만 인천공항 보안 검색부터 끊임없는 기다림과 항공기의 이륙 지연 등의 사유로 말미암아 남경 도착시간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져 남경대학살기념관은 입장 제한시간에 5분 지각했고 남경대학교는 사전 출입허가를 받지 않아 입장불가 등으로 첫날부터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저녁은 공자와 관련된 부자묘 옛 거리(중국 AAAAA 관광지)에서 잠시 쉬어가며 김원봉과 의열단이 관련된 장소인 교부영 거리를 스치듯 별다른 감흥 없이 걸었다. 두 번째 날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훈련소였던 천녕사(옛 도교 사원)를 찾았다. 이튿날도 순탄하지 않았다. 진입로 초입에는 쇠창살문에 가로막혀 옆 건물 배수로를 따라 돌아서 2, 300여 미터를 올라가자 폐허가 된 사원터와 건물잔해가 나타났다. 독립투사들이 머물던 역사적인 장소가 점차 흔적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대관령 굽이길의 바위면에 새겨진 ‘도로개수 준공기념 석각(1917년)’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 대관령 굽이길의 바위면에 새겨진 ‘도로개수 준공기념 석각(1917년)’ 제1기 치도공사의 막판을 장식한 이천 강릉선의 이등도로 개설공사 이순우 특임연구원 1917년 10월 7일은 그 시절에 흔히 ‘초도식(初渡式)’, ‘시도식(始渡式)’, ‘도교식(渡橋式)’ 따위의 이름으로 표현되던 한강인도교(漢江人道橋)의 개통식이 거행된 날이다. 굽이치는 한강의 한쪽에 모래톱이 넓게 펼쳐져 있었으므로 중간 부분에 제방 형태의 섬[이른바 ‘중지도(中之島, 노들섬)]’을 조성하고 이곳을 각각 노량진 쪽의 한강교(漢江橋, 큰 다리)와 용산 쪽의 한강소교(漢江小橋, 작은 다리)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이 다리는 만들어졌다. 이 자리에는 하세가와 조선총독(長谷川 朝鮮總督)을 비롯하여 야마가타 정무총감(山縣 政務總監), 마츠카와 조선주차군사령관(松川 朝鮮駐箚軍司令官), 미노베 조선은행총재(美濃部 朝鮮銀行總裁), 우사미 토목국장(宇佐美 土木局長) 등이 참석했고, 조선귀족(朝鮮貴族)으로는 이완용 백작(李完用 伯爵)과 조중응 자작(趙重應 子爵)도 행사장에 함께 했다. 그런데 이날의 행사는 한강인도교의 개통식이기에 앞서 일찍이 조선총독부가 철도건설, 토지조사, 축항(築港)과 더불어 4대 급무사업(四大急務事業)의 하나로 추진해오던 제1기 치도사업(第一期 治道事業)의 완성을 경축하는 내용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한강인도교는 ‘일등도로 경성 인천선(一等道路 京城 仁川線)’을 겸하여 ‘이등도로 경성 이천선(二等道路 京城 利川線)’ 가운데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한강 구간을 마지막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그 자체의 완성은 곧 1911년 이후 6년간이나 지속해왔던 제1기 치도공사사업의 마무리를 뜻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17년 10월 7일자에 수록된 「조선(朝鮮)의 치도계획(治道計劃)」 제하의 기사에는 총독관방 토목국장(總督官房 土木局長, 당시 내무부 장관 겸직) 우사미 카츠오(宇佐美勝夫)가 제1기 치도사업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설파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한글 글씨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
[인터뷰] “한글 글씨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 – 김성장 세종손글씨연구소장 방학진 기획실장 국방부가 8월 25일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 등 독립전쟁 영웅 흉상을 전격 철거하려 했지만 온 국민의 저항으로 말미암아 4개월이 지난 지금도 영웅들의 흉상을 훼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연구소도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이름으로 때로는 민족문제연구소 이름으로 흉상을 지키기 위해 온라인·거리 서명운동, 스티커 제작·보급, 여러 차례의 걷기대회와 기자회견 등을 전개하며 독립전쟁 영웅 흉상 지키기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당연히 연구소 후원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가능한 일이다. 마침 올해는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이다. 연구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는 장군님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대전·안산·광주·대구·춘천 등 전국 주요 도시에 추모부스를 설치·운영하기로 했다. 우리 연구소는 10월 25일부터 28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에 부스 설치와 운영을 담당했다. 그러나 25일 부스를 설치하러 아침 일찍 현장에 나온 연구소 상근자들에게 서대문구청 직원은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으로 공원 이용객의 불편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공원 이용 질서 유지를 위해 장소 사용을 불허하오니 양해해 달라”는 공문을 건네주며 부스 설치를 불허했다. 전날까지의 전화 통화에서 추모 부스를 설치해도 된다는 구청의 입장이 돌변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여러 명의 기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 부스 설치 현장에 도착했고 결국 물리적 충돌 없이 연구소는 부스를 설치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었는지 홍범도 장군 부스 설치 소식은 뜻밖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연구소가 맡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 부스에서 헌화는 물론
식민지역사박물관 〈Yellow Memory(노란기억)> 두 번째 기억 개막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Yellow Memory(노란기억)> 두 번째 기억 개막 11월 10일부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새로운 전시를 시작했다. 지난 9월 1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먼저 시작한 전시에 이어 열리는 전시다. 개막식은 11일 오후 4시 박물관에서 열렸다. 이 전시의 공동주최를 맡은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과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의 인사말씀이 있었다. 이어서 독일에 있는 유재현 총감독이 전시 개최의 취지와 경과를 영상으로 전했고, 책임큐레이터인 이나바 마이가 전시 개최 경과보고와 작가 소개를 했다. 특히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임흥순의 ‘파도’와 이키바위쿠르르의 ‘열대이야기’․‘기념비’가 전시되고 있다. 개막식에 참석한 이키바위쿠르르 3명의 작가는 태평양 섬 일대 남아 있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흔적들과 이름 모를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나누려고 했다는 작품의 의미를 직접 설명했다. 1층 전시공간에 연구소 발간도서들이 진열된 책장을 배경으로 전시된 ‘기념비’들은 우리 연구소와 박물관이 지향하는 기억과 성찰, 인권․평화․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과 맞닿아 있는 듯한 작품이었다. 개막식을 위해 퍼포먼스를 보여준 하전남 작가의 예측할 수 없는 말걸기, 무언의 공감, 격렬한 묻기는 60여 명의 참가자 모두를 전율케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라는 작가의 질문은 우리가 망각의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할 누군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어떤 이는 공감의 눈물로, 어떤 이는 작가와의 손잡음으로 퍼포먼스에 녹아들었다. 개막식에 이어 작가와 대화가 진행되었다. 이키바위쿠르르 세 작가와 하전남 작가의 작품 제작 배경, 관람객과 나누고자 하는 작품의 의미 등에 대해 진솔한 대화가 이어졌다. 12월말까지 열리는 전시의
제17회 임종국상 시상식과 임종국 선생 34주기 추모식
[초점] 제17회 임종국상 시상식과 임종국 선생 34주기 추모식 11월 10일 오후 6시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회원 및 각계 인사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7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열렸다. MC 노기환의 사회로 진행된 시상식은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의 기념사를 시작으로,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축사, 임종국 선생의 일대기 영상 상영, 이민우 연구소 운영위원장의 기념사업회 경과보고, 윤경로 심사위원장의 선정경위 발표, 시상과 수상자들의 수상 소감,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 순서로 진행됐다. 올해 수상자 후보 공모에는 학술·문화 부문 13건, 사회·언론 부문 5건 등 총 18건이 올라왔다. 9월 27일 열린 예심에서 각 부문 3건을 선정하였고, 10월 18일 열린 심사위원회 본심에서 열띤 토론 과정을 거쳐 문화부문에 방현석 중앙대 교수를, 사회부문에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을, 특별상에 히구치 유이치 재일조선인단체사전 한일공동편찬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제17회 임종국상 수상자로 최종 결정하였다. 심사위원장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을 비롯해 도면회 대전대 교수, 이지원 대림대 교수, 장완익 변호사, 한상권 덕성여대 명예교수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문화부문 수상자인 방현석 중앙대 교수는, 역사와 현실 문제에 관한 밀도 있는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수상 저작인 소설 『범도』는 오랜기간 치밀한 취재와 자료조사를 거쳐 펴낸 노작으로, 홍범도 장군과 동지들의 항일무장투쟁을 새로운 시각으로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전쟁 영웅들을 폄훼하는 역사반동이 일상화하고 있는 가운데, 소설 『범도』는 세간의 호평을 받으면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올해가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여서 그
이준 열사 유해봉환 60주기 추모 특별전 연계 강좌 및 탐방
[초점] 이준 열사 유해봉환 60주기 추모 특별전 연계 강좌 및 탐방 근현대사기념관은 이준 열사 유해봉환 60주기 추모 특별전과 연계하여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강좌 및 탐방을 11월 4일부터 11월 25일 매주 토요일 총 4회에 걸쳐 진행하였다. 1강 한국 근대 검사제도와 이준(전병무 강릉원주대 연구교수), 2강 이준의 애국계몽운동과 상동청년회(윤경로 근현대사기념관장), 3강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이계형 국민대 교양대학 교수) 등 총 세 강좌를 개설하였다. 연계 탐방으로 이준 열사 관련 서울 유적지를 탐방하였다. 장원석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실장의 특별전 해설을 시작으로 이준 열사 묘소, 황성기독교청년회관(YMCA), 평리원 터, 한성감옥 터, 한성재판소 터, 법관양성소 터 그리고 상동교회를 탐방하며 이준 열사의 애국정신을 되새기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독립민주시민학교 강좌는 12월 2일부터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 및 유튜브를 통해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사 이현아
제66회 역사학대회 자유패널 ‘2023, 조선인 강제동원, 이슈와 연구의 최전선’ 개최
[초점] 제66회 역사학대회 자유패널 ‘2023, 조선인 강제동원, 이슈와 연구의 최전선’ 개최 10월 27일~28일 서강대학교에서 제66회 전국역사학대회가 개최되었다. 역사학대회는 전국의 역사관련 단체가 참여하는 축제로 민족문제연구소는 작년부터 자유패널로 참여하고 있다. 이번 역사학대회 대주제는 ‘역사속의 인구변동’이다. 인구변동은 통상적으로 출생, 사망, 이주로 인한 인구 규모 및 구조의 변화를 의미하고 이는 중요한 역사적 변화를 추동하였기에 이에 대해 역사학적 측면에서 논하여 보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주제 속에서 민족문제연구소는 ‘2023, 조선인 강제동원, 이슈와 연구의 최전선’이라는 주제로 28일 서강대학교 정하상관 327호에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최근 강제동원의 이슈와 연구성과를 확인하고 향후 연구와 운동의 방향을 가늠해보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첫 번째 발표는 동북아역사재단에 있는 양지혜 박사가 ‘일본 근대산업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관련 연구동향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2015년 이후 현재까지 국문, 영문, 일문으로 발표된 연구를 토대로 일본근대산업유산 관련 논의의 동향을 파악하고, 한국과 미국 등 여러 주변국, 그리고 일본 현지에서 메이지산업유산의 등재가 가져온 파장과 변화를 가늠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압축 성장을 넘어 압축소멸을 향하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일본근대산업유산이라는 ‘오래된 미래’의 현재를 함께 고민하고자 하였다. 양지혜 박사의 발표에 민족문제연구소 김승은 학예실장이 토론하였다. 두 번째 발표는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인 김명환 박사가 ‘강제동원 관련 명부자료의 정리와 활용례 분석’이라는 주제로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국내 각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관련 명부의 현황을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명부자료를 활용한 연구사례를 살펴보았다.
『다이쇼대진화재지(大正大震火災誌)』(1925)
[소장자료 톺아보기 53] 일본 경찰의 조선인 학살 책임을 철저히 은폐한 『다이쇼대진화재지(大正大震火災誌)』(1925) 『다이쇼대진화재지(大正大震火災誌)』는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지 1년 10개월이 지난 1925년 7월 31일에 경시청이 발간한 화보 140쪽, 본문 1500여 쪽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경찰 백서이다. 1925년 당시 경시총감이었던 오타 마사히로(太田政弘)는 서문에서 이 책의 발간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는 본청 당시의 노력을 기념하고 영구히 기억을 환기시키며 나아가 훗날의 발분(發奮)에 이바지하고자 하고, 하나는 미증유의 체험을 기술하여 광범한 실상을 전달하여 후대에 참조키 위해서다. 본청 문서과의 관례에 따라 당시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 화도와 함께 정리 보철하는데 1년을 소비하여 본청 사관(史官)의 임무에 부응하려는 까닭이다. 이 책의 발간 경위는 일러두기에 상세히 나와 있어 그대로 싣는다. 1. 본서는 대정 12년(1923년) 9월 1일 이후 경시청이 진재(震災) 이후의 사회상태에 대응하고 질서 유지상 실시하여 특수활동의 개요를 기록하여 이를 기념하고, 또한 장래의 참고에 이바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1. 본서의 자료는 본청 각 부(部), 과(課), 계(係) 각 경찰서와 파출소에서 수집하고 전편을 본청 및 각서 활동의 2편으로 대별하고 나아가 장절로 분류하여 재해 후에 있어서의 활동 경과를 검토하고 그간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힘쓴다. 1. 화보와 사진판은 본청 형사부 감식과, 보안부 건축과 및 위생부 의무과, 위생과 및 자경회가 촬영한 700여 장 및 동경시역소와 관련한 300장을 수집하고 이 중에서 선택 분류하고 지진·화재의 피해
길을 만든 사람들, 이어가는 발걸음
[후원회원마당] 길을 만든 사람들, 이어가는 발걸음 김현정 후원회원 옥수수밭을 헤치고 나아가다 “여러분, 다 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직진하시면 됩니다!” 방학진 실장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크게 들려왔다. “앞에 얼룩소가 있습니다. 다 왔습니다.” 우리는 어느 공장 외벽을 따라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곧이어 옥수수밭이 시작되는 곳에서 1시 방향으로 한참을 더 걸었다. 앞사람을 놓칠세라 부지런히 걸으면서 두 손으로 연신 눈앞의 이파리를 꺾어냈다. 밭고랑을 디딜 때마다 진흙이 들러붙어 발이 몹시 무거웠다. 팔에 상처가 나기는 했지만 모두 무사히 신흥무관학교 고산자 터에 도착했다. 신흥무관학교, 길을 만들다 1911년 문을 연 신흥무관학교는 3•1운동 이후 찾아오는 청년들이 크게 늘었다. 본교였던 합니하를 분교로 하고 새로 교사를 지어 확장한 곳이 바로 고산자다. 학생이 700여 명 정도로 가장 번성한 시기였다. 생도들은 역사와 지리를 배우고 군사 훈련을 받으며 독립군의 주역으로 거듭났다. 10년 동안 약 3천 5백 명이 졸업했고 해방을 맞기까지 우리나라 독립전쟁 역사의 굵은 줄기가 되었다. 고산자 터에서 제를 올리다 잎이 무성하고 풀이 우거진 여름은 다른 계절과 다르게 터를 찾기가 어렵다. 키 넘게 자란 옥수수가 특정 지형지물을 가리기 때문이다. 홀로 선 나무와 몇 그루 모여 자란 나무, 이 두 곳을 기준삼아 고산자 터를 조망할 자리를 잡았다. 햇볕을 받은 옥수수-만주 어디에 가도 끊임없이 보이는 옥수수, 옥수수밭 위로 집 한 채와 기지국 송수신탑이 올려다보였다. 우리가 선 자리를
누에의 혼령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식 풍습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 누에의 혼령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식 풍습 한국잠사박물관(청주)에 남아 있는 ‘충북 잠령탑(1934년)’의 조성 연혁 이순우 특임연구원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이 땅에서 벌어진 참으로 괴기스럽고 별난 일들이 한둘이 아닐 테지만,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손꼽아보면 우선은 온갖 동물(動物)의 혼령(魂靈)에다 제사를 지내거나 이것들을 위한 비석 또는 위령탑을 세우는 장면들이 퍼뜩 떠오른다. 가령, 도수장(屠獸場, 도살장)에서 죽은 짐승들의 수혼비(獸魂碑)를 조성하여 위령제를 올린다거나 총독부의원(總督府醫院) 구내에 실험동물공양탑(實驗動物供養塔)을 설치한다거나 군용모피(개가죽)의 공출에 희생된 개들을 위한 견혼비(犬魂碑)를 만든다거나 일본군 기병대와 포병대에 속한 군용마를 위한 마혼비(馬魂碑)를 세우는 따위의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신문자료를 뒤져보면, 심지어 부산요리조합 같은 곳에서는 식재료로 사람들이 먹어 치운 하돈(河豚, 복어)의 혼을 달래고자 법요(法要)를 거행했다고도 하고, 조선조어연맹(朝鮮釣魚聯盟)에서는 낚싯줄에 걸려 최후를 마친 무수한 부어(鮒魚, 붕어)를 위한 공양제 행사를 올렸다고 하는 흔적도 눈에 띈다.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일본 오사카에서 효능 좋은 해충박멸제 ‘이마즈 승취분(イマヅ 蠅取粉, 파리약)’에 의해 몰살의 위기에 처한 파리떼를 위한답시고 커다란 승(蠅, 파리) 모형을 걸어두고 죽은 해충들의 명복을 빌며 조문(弔文)을 낭독하고 향을 피워 올리는 공양회가 벌어진 소식이 전해지는 등 우스꽝스럽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 장면이 곧잘 연출되곤 하였다. 그러고 보면 축령(畜靈)이니 축혼(畜魂)이니 수령(獸靈)이니 수혼(獸魂)이니 어령(魚靈)이니 견혼(犬魂)이니 마혼(馬魂)이니 우혼(牛魂)이니 하여 ‘무슨 혼(〇魂)’이니 ‘무슨 령(〇靈)’이니 하는 따위의 용어들이 속출하고, 덩달아 ‘무슨 령제(〇靈祭)’,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