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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1)
[소장자료 톺아보기 56] 표지화로 보는 청일전쟁의 실상 『풍속화보 임시증간 : 일청전쟁도회·정청도회』(1) ➊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78호 일청전쟁도회 제1회』(1894.9.25.) 청일전쟁 관련 기사를 다룬 첫 번째 풍속화보지. 아산만 풍도해전(豊島海戰, 7.25)과 성환에서의 육지전투(7.29)를 상세히 다루었다. 표지화는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국 순양함 ‘제원’과 ‘광을’을 격침시키는 장면이다. ➋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2호 일청전쟁도회 제4회』(1894.12.20.) 7월 개전 후 일본군은 평양, 의주를 거쳐 북진을 계속해 11월 이후 구련성, 금주성, 대련, 여순을 함락시켜 압도적 우위에 섰다. 표지화에서 보듯이 일본군 장군이 청국군 지휘관을 군기로 깔아뭉갤 정도로 일본군은 승전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➌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4호 정청도회』 제5편』(1895.1.25.) 제5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더불어 조슈(長州) 3걸로 일컬어지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角五郞. 1836~1915)의 조선 체류 기록인 『한성내잔몽(漢城廼殘夢)』(1891.10)을 전재하였다. 이노우에는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말 조선에 건너와 조선의 외교고문에 임명되었고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와 교류하며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하였고 거사가 실패하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조선과 일본을 왕래했으며 1894년 직후 조선공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한성내잔몽』은 갑신정변 당시의 조선 정세와 외교관계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표지화는 갑신정변 실패 후 다케조에 이치로(竹添進一郞) 공사와 개화파가 일본으로 도주하자 이에 격분한 조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을 불태우는 모습을 담았다. ➍ 『풍속화보 임시증간 제86호 정청도회』 제6편』(1895.2.25.) 1894년 12월초 일본군 제1군사령부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육상교통로의 요충지인 해성(海城) 공략에 전력을 기울였다. 12월 13일 해성을 점령했으나
민족사랑 202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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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斷想) 1
[후원회원마당] 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斷想) 1 – 수운 최제우 시천주(侍天主) 사상에 입각한 인간상 – 이정아 서울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어린이 인권 선언’ 100주년을 맞아 작년 11월 9일부터 11월 12일까지 ‘방정환과 21세기 세계의 어린이들’이라는 주제로 2023 세계방정환학술대회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필자는 11월 11 숙명여대 르네상스 프라자에서 진행된 <제4부 연구발표> 중 ‘어린이에 관한 한국의 사상운동과 21세기 어린이운동’을 주제로 한 <제3분과>에 발표자로 참여하였다. 발표 제목은 「천도교를 바탕으로 한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에 관한 서설」이었다. 감사하게도 박상진 서울대 교육연구소 객원연구원이 토론을 맡아 주셨다. 이날 발표된 글은 『신인간(834호)』에 실린 졸고 「소파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의 내용에서 ‘인내천 사상’을 ‘시천주 사상’으로 수정하고 발췌하여 핵심내용을 짧게 요약한 글이었다. 의암 손병희의 사상은 보통 ‘인내천(人乃天)’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본래 수운 최제우의 자각은 ‘인내천’이 아니라 ‘시천주’였다. ‘시천주’는 ‘모든 사람 안에 거룩한 한울님이 모셔져 있다’는 의미이다. 시(侍)는 ‘모심’을 의미하며, 천(天)은 한울이며, 주(主)는 존칭어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소파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이 아닌 「천도교를 바탕으로 한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에 관한 서설」로 제목을 바꾸어 발표하였다. 그리고 천도교를 바탕으로 한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으로 첫째, 시천주 사상에 입각한 평등사상, 둘째, 동심천사주의와 대비되는 동심한울사상, 셋째, 보국안민을 위한 개벽정신을 들었다. 이번 <민족사랑>에 싣는 글은 방정환의 사상적 기반이 천도교에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하여 소파 방정환에 관한 교육적 단상의 첫 번째 논의이다.
망향의 동산에서 맞이한 새해
[후원회원마당] 망향의 동산에서 맞이한 새해 전민창 인턴.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2월 15일 민족문제연구소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와 함께 특별한 2024년 새해를 맞이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천안에 소재한 망향의 동산에 가서 신년 차례를 올린 것이다. 이곳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를 비롯하여 일제에 의해 고향을 잃고 타국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이 잠들어 있다. 망향의 동산은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고통받은 이들을 위한 안식처이자, 식민지배의 아픔을 성찰하는 의미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번 15일 망향의 동산 차례(茶禮)에는 이희자 보추협 대표(이사현 님의 딸, 군속으로 동원돼중국에서 사망)를 비롯하여 박남순(박만수 님의 딸, 군속으로 동원돼 남양군도에서 사망), 박진부(박선봉 님의 아들, 노무자로 동원돼 북해도에서 사망), 신명옥(박헌태 님의 며느리, 군인으로 동원돼 중국에서 사망), 정윤현(박운석 님의 며느리, 노무자로 동원돼 일본에서 사망) 보추협 회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이들의 아버지는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되었고, 태평양전쟁 시기에 모두 사망했다. 어떤 이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와 생이별하였고, 어떤 이는 시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좌절하지만은 않았다. 일본 정부를 향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며 현재도 역사의 현장 위에 서있다. 이러한 투쟁을 지속한 지 30여 년이 지나, 이들의 나이는 벌써 산수(傘壽 80세)를 넘겼다. 어느덧 치열한 싸움을 이어가기에 힘에 부치는 고령이 되었지만 일본에 사죄를 받아내겠다는 의지만큼은 여전히 뜨겁다. 망향의 동산에 가는
조선신궁 탓에 외진 곳으로 떠밀려난 ‘한양공원 표지비석(1912년)’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5] 조선신궁 탓에 외진 곳으로 떠밀려난 ‘한양공원 표지비석(1912년)’ 왜성대공원, 경성공원, 한양공원, 그리고 결국에 남산공원 이순우 특임연구원 길을 가다가 어떤 이가 ‘남산공원’으로 찾아가는 행로를 물어온다면 퍼뜩 그 대답이 떠올려지지 않는 때가 있다. 목적지가 ‘남산서울타워’ 쪽인지, 옛 남산식물원과 분수대가 있던 ‘조선신궁 터’ 쪽인지, 충무로역에 인접한 ‘남산골한옥마을’ 쪽인지, 힐튼호텔이 자리한 남산성벽의 끝자락 쪽인지 ……, 뭐, 대략 이런 정도의 특정지점을 먼저 얘기해주지 않으면 도무지 어디를 알려달라는 것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남산공원의 범주 자체가 워낙 너르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흔히 ‘장충단공원’으로 알려진 지역도 이미 1984년 9월 22일에 건설부 고시 제374호에 따라 “장충근린공원(297,500㎡)을 폐지하고 남산자연공원(2,971,546㎡)에 병합 처리”되었으므로 이곳 역시 일찍이 남산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남산공원’이라고 하면 남산의 동서남북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광대한 남산공원도 실상은 최초에 사방 1정(町; 1정=109.09미터) 정도의 작은 땅에서 시작되었다. 경기도(京畿道)에서 편찬한 『경기지방의 명승사적(京畿地方の名勝史蹟)』(조선지방행정학회, 1937), 35~36쪽 부분에는 ‘남산공원’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남산공원(南山公園): 경성부 왜성대정(倭城臺町, 와죠타이쵸)에 있고, 원내(園內)에 경성신사(京城神社)를 봉사(奉祀)한다. 여기부터 조선신궁(朝鮮神宮)에 이르는 참도(參道)의 부근 일대를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 부른다.] 명치 30년(1897년)에 이르러 경성일본거류민(京城日本居留民) 사이에 숙제(宿題)로 있던 공원설치의 논의가 진전되어, 당시의 공사(公使) 카토 마스오(加藤增雄)는 한국정부(韓國政府)에 교섭하여 동년(同年) 3월 17일 현 갑오기념비(甲午記念碑)를 중심으로 한 약 1정사방(町四方)의 지역에
신흥무관학교 의감(醫監)을 지낸 안사영과 그 형제들
[연구소 글방 10] 신흥무관학교 의감(醫監)을 지낸 안사영과 그 형제들 박광종 특임연구원 연구소는 오랫동안 신흥무관학교 출신 및 관련 인물에 대한 상세한 이력을 추적해왔다. 1911년 6월 개교부터 1920년 가을 폐교 때까지 10년 간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한 졸업생 수를 최대 3,5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엄청난 졸업생 수에 비해 정작 구체적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300여 명 안팎에 불과하다. 물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한 서울의 이회영·이시영 일가, 경북 안동의 이상룡·김대락 일가에서 배출한 졸업생들은 이름 뿐 아니라 그 족적이 남아있으나 대부분의 졸업자는 이름 석 자에 출신지 정도만 나와 있어 그 이력을 추적하기가 만만치 않다. 신흥무관학교 의감을 지낸 안사영(安思永, 1890~1967)도 그런 분들 중의 한 분이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원병상이 쓴 「신흥무관학교」(『신동아』 1969.6월호, 243쪽)에 “(신흥무관)학교가 이곳 (고산자) 대두자로 옮길 때의 교직원 부서…의감 안사영”이라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안사영에 대한 일제강점기 신문잡지, 각종 문헌과 문건뿐 아니라 온라인 정보를 뒤지던 중 어느 블로그에서 ‘음악가 안기영 인물 발표회’ 발표 : 안기영의 생질 이화옥, 「KBS 社友會」 라는글을 찾았다. 거기서 안사영의 이력뿐 아니라 그의 동생 안기영(安基永, 1900~1980)1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안사영과 안기영을 비롯한 6남 3녀의 형제자매와 그들의 이름이 실린 안사영 일가의 기념사진을 찾은 것은 큰 수확이었다. 무슨 잔치인지 모를 이 가족사진(1944년)에서 부친 안석호(安奭鎬, 1874~1948)와 모친 이경애(李敬愛) 슬하의 형제자매가 부모님을 가운데 두고 여느 회갑
중국 대륙의 조선인 김성호를 아십니까?
[기고] 중국 대륙의 조선인 김성호를 아십니까? 원희복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 북경 천안문 동쪽으로 17km 떨어진 곳에 통주(通州)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현재 북경시 통주구지만 원래 통현(通縣)이라 불리는 별개 도시였다. 이곳은 조선에서 북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열하일기』에 나오는 팔리교(본명 영통교)가 있다. 북경 대운하의 종착지로 북경으로 들어가는 물자의 기착지이기도 했다. 1922년 중국 여행증명제도가 철폐되고, 1923년 조선인이 대거 학살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북경에 있는 중국 대학교 진학이 상대적으로 쉬워 교육에 유리했고, 또 상해처럼 일본의 경찰권 행사가 허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북경에 비해 땅값도 저렴하고, 조선에서 오는 소식도 빨랐기 때문에 일제 강점하 조선인 정착이 많았다. 1925년 일본 조사자료에 따르면 통현에 정착한 조선인은 세 가구, 22명이다. 이중 최초의 정착인은 1915년 평북 의주 출신의 기독교 장로로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됐던 김기창(金基昌)이고 다음이 황해도 진남포 출신으로 역시 기독교 장로였던 김병순(金炳恂) 가족이 1921년 이주했다. 한편 강원 철원 출신으로 미국에서 군사학을 공부하고 이승만과 의형제 사이일 정도로 가까웠던 박용만(朴容萬)도 이주했다. 박용만은 이곳에 어머니가 먼저 이주해 있던 것으로 보아 박용만 가족은 이미 이전에 이주했을 것이다. 김병순은 큰아들 환(煥), 둘째아들 우경(又卿), 큰딸 일경(日卿), 막내아들 찬(燦), 막내딸 순경(順卿) 등 3남 2녀를 뒀다. 김병순은 김기창과도 교회 장로로 친했지만, 동향인 백범과 친했다. 그래서 백범이 북경에 오면 김병순 집에 묵었다고 한다. 김병순의 자식 중 김찬과 순경은 각각 중국인 여성 도개손(陶凱孫)과
『전지사진첩(戰地寫眞帖) : 압록강전투』(2)
[소장자료 톺아보기 55] 구니키다 돗포와 『전시화보(戰時畵報)』 『전지사진첩(戰地寫眞帖) : 압록강전투』(2) 구니키다 돗포(國木田獨步, 1871~ 1908)는 치바현 출생으로 히로시마현과 야마구치현 등에서 자라났다. 아명은 가메키치(龜吉)이며 뒤에 데쓰오(哲夫)로 개명했다. 돗포(獨步)는 필명이며, 학력은 도쿄전문학교[현 와세다대학] 영어정치과를 중퇴했다. 1893년부터 일기 『거짓 없는 기록(欺かざるの記)』을 쓰기 시작해 사후에 출판되었다. 1893년 10월 개화기 작가인 야노 류케이(矢野龍溪)에게 소개받아 오이타현 쓰루야학관(鶴谷學館)의 영어 및 수학 교사로 부임했고 이듬해 8개월 만에 퇴직했다. 1894년 출판사 민우사(民友社)에 입사했다가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1890년에 창간한『국민신문(國民新聞)』의 기자가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위해위(威海衛) 전투에 국민신문 종군기자로서 일본해군 군함에 승선하여 전투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 남동생에게 부치는 서간체 형식으로 전쟁르포 ‘애제통신(愛弟通信)’을 연재해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떨쳤고, 사후에 동명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호치신문(報知新聞)』『민성신보(民聲新報)』 등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하다가 1903년 야노 류케이(矢野龍渓)가 창간한 보도사진 잡지 『동양화보(東洋畵報)』의 편집장으로 발탁되어 3월호부터 제작하였고 9월호부터는 제호가 『근사화보(近事畵報)』로 변경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개전하자 월 1회 발행을 3회로 늘리고 이름도 『전시화보(戰時畫報)』로 바꾸었다. 구니키다 돗포는 전쟁 상황을 자세히 알리기 위해 생생한 현장 사진의 게재와 판형 확대를 도모하는 등 편집자로서의 재능을 맘껏 발휘하였다. 또한 종군기자들의 독창적인 만화 그림도 실어 호평을 받았으며 전성기 때의 발행 부수가 월간 10만 부를 넘어서기도 했다. 러일전쟁 개전 초기 『전시화보』(1904.2. 창간)와 박문관(博文館)의 『일로전쟁사진화보(日露戰爭寫眞畫報)』(1904.4. 창간)가 발간되자 뒤이어 그림과 사진을 삽입한 화보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창간되었다. 수십 종의 화보잡지 중에서도 『전시화보』가 단연 두각을 나타낸 까닭은 글보다는
듣도 보도 못한 진주역사 김경현의 진주이야기 100선
[책소개] 듣도 보도 못한 진주역사 김경현의 진주이야기 100선 박광종 특임연구원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2005년)인 김경현 회원이 25년 만에 『진주이야기 100선』을 새단장하여 올 1월에 『듣도 보도 못한 진주역사, 김경현의 진주이야기 100선』을 출간했다. 이 책의 초간본 발행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대 옛 <진주신문> 기자를 지냈던 저자는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 진주 지방 구석구석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각종 근현대 신문잡지와 역사책을 샅샅이 훑어 마을의 설화와 건축물・기념물의 유래 등을 수집하였다. 그중에서 저널리스트의 안목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100가지 주제를 가려뽑아 1998년 『진주이야기 100선』를 펴냈었다. 당시 진주토박이들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어떻게 취재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생소하고 내밀한 주제를 다루어 진주 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다만 진주문화원에서 비매품으로 펴낸 탓으로 전국적으로 소개되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판되어 잊혀지면서 이 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는데, 이번에 기적적으로 부활한 것이다. 이번에 출간한 책은 초간본보다 더 풍부하고 재밌는 내용으로 재구성한 개정・증보판인데, 내용이 훨씬 보완된 알찬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은 시대적으로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사까지 관통하고 정치・사회・교육・문화・예술・역사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관련한 기록들이 많이 실려 있다. 저자의 이력을 보면, 그가 이 책에서 일제강점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천착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저자는 2000년대 중반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진주를 떠나 서울에 왔는데,
배달쟁이가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 생기는 일
[후원회원마당] 배달쟁이가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 생기는 일 안욱현 후원회원 안녕하세요. 저는 관악구 신림동에서 배달의민족라이더스에서 전업기사로 일하고 있는 민문연 후원회원 안욱현입니다. 민문연 답사 중에 생각해낸 발상을 소개하려고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올해 1월 민문연 홈페이지에서 의열단 밀양 역사기행 공지를 보고 신청하여 같이 답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첫 일정으로 백민 황상규 선생님 묘소를 가게 되었는데, 약간의 지연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개인 차량으로 참가하신 분도 계시어 단체카카오톡방에서 묘소 위치의 약도와 주소가 공지된 후 각자 출발하게 되었는데 그 주소대로 내비게이션 안내를 받아가니, 구치소 앞을 지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염없이 단체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다시 단톡방에서 거기가 아닌 부북면사무소로 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30분 지연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가 생각해낸 발상이 만약에 지도앱에 황상규선생묘소가 표시가 되어있다면, 이런 해프닝이 생길 것인가 하는 배민라이더 특유의 직업적 의문이었습니다. 묘소에 가서 곧바로 위치를 확인하고 좌표와 사진을 찍어 백민황상규선생묘소라고 지도어플회사들에게 장소제안양식(폼)을 온라인(스마트폰)으로 제출하였습니다. 위 사진은 카카오맵에 새롭게 생긴 황상규선생묘소 표시이고 집결지에서 묘소까지의 경로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혼선을 겪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지도에 황상규선생 존함이 떡하니 새겨졌으니, 국민들에게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밀양 역사답사과정에서 동화학교 터, 고인덕 생가 터, 전홍표 생가 터, 김대지 생가 터, 최수봉 투탄 의거지 등등 밀양 답사코스의 사적지등이 지도앱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답사를 다녀와서 인터넷으로 여러 사이트(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