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uge collection of 3400+ free website templates, WP themes and more http://jartheme.com/ at the biggest community-driven free web design site.

민족사랑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 보고서 중 조선인문제

2024년 1월 2일 770

[자료소개]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 보고서 중 조선인문제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의 일부를 폭파한 류탸오후(柳条湖)사건을 일으켰다. 이것은 관동군이 만주 침략의 빌미를 삼기 위해 벌인 철저한 자작극이었다. 이를 기화로 관동군은 동북 삼성 일대를 침략하고 193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집정으로 삼아 일제의 식민지인 ‘만주국’을 건국했다. 1932년 3월 중화민국이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일본이 동의하여 국제연맹이 류타오후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리튼 조사단을 파견했다. 리튼 조사단은 3개월간 만주를 조사하고 9월에 리튼 보고서를 제출했다. 리튼 보고서는 1932년 3월 1일 일본의 조종에 따라 건국을 선언한 ‘만주국’이 중국인의 자발적인 운동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만주를 중국 주권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만주에 지방적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하고 만주에 관한 일본의 권익도 승인했다. 리튼 보고서는 10월 2일 공표되었다. 일본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리튼 보고서의 채택과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19인 위원회의 보고서가 국제연맹총회에서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삼천리』 제4권 제12호(1932.12.1.)에 실린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보고서 중 조선인문제」이다. 리튼 보고서 중에서 가장 쟁점이 되었던 류탸오후(柳条湖)사건에 대한 일본측 설명과 중국측 설명 그리고 조사단의 의견을 번역해 실었고 아울러 ‘만주 신국가 출현에 대한 제민족의 태도’ 항목 중에서 만주인과 조선인의 입장과 태도를 발췌하였다. – 편집자주 [9월 19일 사건] 9월 19일 토요일 아침 봉천시민이 잠에서 깼을 때

1907년 의병전쟁과 상주

2024년 1월 2일 605

[연구소 글방 9] 1907년 의병전쟁과 상주 심철기 연구실장 1. 일제의 침략과 경상도 의병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그 결과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넘어갔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어 내치(內治)에 대해서도 간섭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만주(滿洲) 문제로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던 러시아로부터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초청을 받았다. 고종은 이 회의를 통해 일본의 불법침략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는 계기로 삼고자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특사사건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일본이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키고, 차관정치를 실시하여 대한제국의 사법권 등 최소한의 주권마저도 강탈하였다. 또한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강제해산에 반발하여 서울 주둔 시위대(侍衛隊)가 봉기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하였지만 탄약이 떨어지면서 결국 진압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위대의 봉기를 시작으로 원주 주둔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가 봉기하였다. 원주진위대의 봉기는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신호탄이 되었으며, 해산군인과 의병세력의 연합의병이 출범하는 시작이 되었다. 경상북도에서도 의병전쟁이 크게 일어났는데,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이강년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동부지역은 신돌석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남부지역은 산남의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들은 이들 의병부대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를 맺으면서 활동하였다. 상주 출신 의병들도 이들 의병부대와 연계되거나 이들 의병부대에 가담해서 활동하였다. 2. 상주 출신 의병장과 의병전쟁 상주는 충북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과 접하고 있으며, 강원도와 전라도로 진출하기 용이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그렇기에 1592년(선조 26년)까지 경상감영이 설치되었으며, 일찍부터

참군인 김오랑 중령 기념사업을 20년간 이어오고 있는 김준철 회원

2024년 1월 2일 335

[인터뷰] 참군인 김오랑 중령 기념사업을 20년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김준철 회원 방학진 기획실장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앞두고 있다. 이 영화의 흥행이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2030세대들의 관심 때문이다. 그동안 10·26이나 5·18과 관련한 수준 높은 영화들이 많았지만 12·12에 대한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10·26 이후 신군부의 등장과 5·18 학살 직전의 상황을 설명해줄 영화라는 점에서도 <서울의 봄>은 영화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이 영화에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인물은 장태완 장군과 김오랑 중령이다. 특히 영화배우 정해인이 특별출연하여 짧지만 강렬하게 연기한 김오랑의 모습은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항상 좋은 역사영화 뒤에는 축적된 연구성과와 의식 있는 분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 김오랑의 명예회복과 기념사업을 20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김준철 후원회원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다. 김준철 회원은 김오랑 중령의 유일한 평전인 『김오랑 – 역사의 하늘에 뜬 별』(2012, 책보세)의 저자이다. 김준철 회원과 김오랑은 어떤 관계일까. “저는 ROTC 28기로 임관 후 맹호부대와 특전사에서 근무했으며, 스키와 암벽등반 훈련시 무릎 부상(상이군인)으로 7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1996년에 전역했습니다. 전역 후 H증권에서 15년, 현재는 M화재에서 13년째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군 자살자, 의문사유가족 단체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차에, 광주의 시민단체에서 김오랑 중령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자 ‘김오랑중령추모회’를 만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주에 계시는 김오랑추모회 분들이 김오랑 중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와

민족사랑 2023년 12월호

2023년 12월 26일 716

[바로보기] * 왼쪽 바로보기로 들어가셔서 표지의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민족사랑 2023년 11월호

2023년 11월 27일 626

[바로보기] * 왼쪽 바로보기로 들어가셔서 표지의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약산과 석정, 그리고 육사의 자취를 찾아서

2023년 11월 29일 386

[항일유적 답사기] 약산과 석정, 그리고 육사의 자취를 찾아서 최필숙 역사랑톡톡 대표 탕탕탕! 남경으로 떠나는 아침은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총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생을 마감한 날이다. 명량해전 승리의 날, 게다가 노태우의 죽음까지 보태진 날이라 착잡함과 약산 김원봉의 길을 따라간다는 기대감이 뒤섞인 새벽! 2시 반에 시작된 준비는 3시 50분 주재석 안향미 부부와의 만남으로 정신을 차리고 동대구 버스 환승센터에서 인천을 향하면서 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인천제1터미널 F7에서 낯선 또는 조금의 익숙함이 얽힌 분위기 속에서 인사도 없이 각자도생처럼 이곳저곳에서 만남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어색한 동거가 1년 이상 지속되었기에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선열을 찾아가는 비통한, 그러면서 무모한 용기에 힘입어 캐리어를 끌며 출국심사대에 올랐다. 그러나 황선락 어르신의 배려로 너무 빨리 출국하게 되었다. 뒤늦게 도착한 일행에게 미안함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황선생님은 숙녀에게 뭔가를 대접하는 것은 남자의 특권이라는 말씀과 함께 먼 길을 마다않고 바바나 우유(단지형)를 사주셨다. ‘베풂은 이런 것이야’를 몸소 보여주셔서 첫날부터 좋은 기억이 쌓여간다. 추억이 많은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했던가! 그렇게 여행의 추억이 첫 순간부터 만들어졌다. ‘우호’가 무엇인지 고민할 만큼 쉽지 않은 입국심사, 죄인 아닌 죄인처럼 열 손가락의 지문을 등록하고 그것도 모자라 많은 시간과 마음을 들인 후에야 도착한 남경 공항을 다음 일정 을 위해 빨리빨리만 외치며 나섰다. 약속된 남경대도살 기념관 탐방이 어려울 수 있다는 가이드의 안내에도 ‘설마’하며

김원봉 루트를 가다

2023년 11월 29일 425

[항일유적 답사기] 김원봉 루트를 가다 이영철 연구소 후원회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현재 중국 영토내 독립군의 투쟁사가 이루어진 곳으로 역사탐방기행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내심 두근거리고 혹시 지원이 늦지 않았을까 하는 조바심이 있었지만 다행히 마감 전이어서 아주 기뻤다. 약산 김원봉과 조선의용대에 대해 깊이 있게 알고 있지는 않았고 인터넷 등의 정보만 간간히 듣고 있는 정도였다. 약산 김원봉에 관한 연구를 하신 분도 참여한다고 하여 아주 큰 기대에 들떠 있었다. 역사란 문자로 남겨진 사실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 비록 그때와 같을 수만 없지만 지형과 환경을 몸소 겪어보는 것도 당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첫날 남경대학살기념관과 남경대학교 민혁당 창립장소에 가기로 했지만 인천공항 보안 검색부터 끊임없는 기다림과 항공기의 이륙 지연 등의 사유로 말미암아 남경 도착시간이 예정보다 많이 늦어져 남경대학살기념관은 입장 제한시간에 5분 지각했고 남경대학교는 사전 출입허가를 받지 않아 입장불가 등으로 첫날부터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저녁은 공자와 관련된 부자묘 옛 거리(중국 AAAAA 관광지)에서 잠시 쉬어가며 김원봉과 의열단이 관련된 장소인 교부영 거리를 스치듯 별다른 감흥 없이 걸었다. 두 번째 날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훈련소였던 천녕사(옛 도교 사원)를 찾았다. 이튿날도 순탄하지 않았다. 진입로 초입에는 쇠창살문에 가로막혀 옆 건물 배수로를 따라 돌아서 2, 300여 미터를 올라가자 폐허가 된 사원터와 건물잔해가 나타났다. 독립투사들이 머물던 역사적인 장소가 점차 흔적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대관령 굽이길의 바위면에 새겨진 ‘도로개수 준공기념 석각(1917년)’

2023년 11월 28일 424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 대관령 굽이길의 바위면에 새겨진 ‘도로개수 준공기념 석각(1917년)’ 제1기 치도공사의 막판을 장식한 이천 강릉선의 이등도로 개설공사 이순우 특임연구원 1917년 10월 7일은 그 시절에 흔히 ‘초도식(初渡式)’, ‘시도식(始渡式)’, ‘도교식(渡橋式)’ 따위의 이름으로 표현되던 한강인도교(漢江人道橋)의 개통식이 거행된 날이다. 굽이치는 한강의 한쪽에 모래톱이 넓게 펼쳐져 있었으므로 중간 부분에 제방 형태의 섬[이른바 ‘중지도(中之島, 노들섬)]’을 조성하고 이곳을 각각 노량진 쪽의 한강교(漢江橋, 큰 다리)와 용산 쪽의 한강소교(漢江小橋, 작은 다리)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이 다리는 만들어졌다. 이 자리에는 하세가와 조선총독(長谷川 朝鮮總督)을 비롯하여 야마가타 정무총감(山縣 政務總監), 마츠카와 조선주차군사령관(松川 朝鮮駐箚軍司令官), 미노베 조선은행총재(美濃部 朝鮮銀行總裁), 우사미 토목국장(宇佐美 土木局長) 등이 참석했고, 조선귀족(朝鮮貴族)으로는 이완용 백작(李完用 伯爵)과 조중응 자작(趙重應 子爵)도 행사장에 함께 했다. 그런데 이날의 행사는 한강인도교의 개통식이기에 앞서 일찍이 조선총독부가 철도건설, 토지조사, 축항(築港)과 더불어 4대 급무사업(四大急務事業)의 하나로 추진해오던 제1기 치도사업(第一期 治道事業)의 완성을 경축하는 내용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한강인도교는 ‘일등도로 경성 인천선(一等道路 京城 仁川線)’을 겸하여 ‘이등도로 경성 이천선(二等道路 京城 利川線)’ 가운데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한강 구간을 마지막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그 자체의 완성은 곧 1911년 이후 6년간이나 지속해왔던 제1기 치도공사사업의 마무리를 뜻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17년 10월 7일자에 수록된 「조선(朝鮮)의 치도계획(治道計劃)」 제하의 기사에는 총독관방 토목국장(總督官房 土木局長, 당시 내무부 장관 겸직) 우사미 카츠오(宇佐美勝夫)가 제1기 치도사업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설파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한글 글씨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

2023년 11월 28일 534

[인터뷰] “한글 글씨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 – 김성장 세종손글씨연구소장 방학진 기획실장 국방부가 8월 25일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 등 독립전쟁 영웅 흉상을 전격 철거하려 했지만 온 국민의 저항으로 말미암아 4개월이 지난 지금도 영웅들의 흉상을 훼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연구소도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이름으로 때로는 민족문제연구소 이름으로 흉상을 지키기 위해 온라인·거리 서명운동, 스티커 제작·보급, 여러 차례의 걷기대회와 기자회견 등을 전개하며 독립전쟁 영웅 흉상 지키기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당연히 연구소 후원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가능한 일이다. 마침 올해는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이다. 연구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는 장군님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대전·안산·광주·대구·춘천 등 전국 주요 도시에 추모부스를 설치·운영하기로 했다. 우리 연구소는 10월 25일부터 28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에 부스 설치와 운영을 담당했다. 그러나 25일 부스를 설치하러 아침 일찍 현장에 나온 연구소 상근자들에게 서대문구청 직원은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으로 공원 이용객의 불편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공원 이용 질서 유지를 위해 장소 사용을 불허하오니 양해해 달라”는 공문을 건네주며 부스 설치를 불허했다. 전날까지의 전화 통화에서 추모 부스를 설치해도 된다는 구청의 입장이 돌변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여러 명의 기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 부스 설치 현장에 도착했고 결국 물리적 충돌 없이 연구소는 부스를 설치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었는지 홍범도 장군 부스 설치 소식은 뜻밖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연구소가 맡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 부스에서 헌화는 물론

식민지역사박물관 〈Yellow Memory(노란기억)> 두 번째 기억 개막

2023년 11월 28일 286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Yellow Memory(노란기억)> 두 번째 기억 개막 11월 10일부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새로운 전시를 시작했다. 지난 9월 1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먼저 시작한 전시에 이어 열리는 전시다. 개막식은 11일 오후 4시 박물관에서 열렸다. 이 전시의 공동주최를 맡은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과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의 인사말씀이 있었다. 이어서 독일에 있는 유재현 총감독이 전시 개최의 취지와 경과를 영상으로 전했고, 책임큐레이터인 이나바 마이가 전시 개최 경과보고와 작가 소개를 했다. 특히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임흥순의 ‘파도’와 이키바위쿠르르의 ‘열대이야기’․‘기념비’가 전시되고 있다. 개막식에 참석한 이키바위쿠르르 3명의 작가는 태평양 섬 일대 남아 있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흔적들과 이름 모를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나누려고 했다는 작품의 의미를 직접 설명했다. 1층 전시공간에 연구소 발간도서들이 진열된 책장을 배경으로 전시된 ‘기념비’들은 우리 연구소와 박물관이 지향하는 기억과 성찰, 인권․평화․미래를 생각하는 역사행동과 맞닿아 있는 듯한 작품이었다. 개막식을 위해 퍼포먼스를 보여준 하전남 작가의 예측할 수 없는 말걸기, 무언의 공감, 격렬한 묻기는 60여 명의 참가자 모두를 전율케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라는 작가의 질문은 우리가 망각의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할 누군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어떤 이는 공감의 눈물로, 어떤 이는 작가와의 손잡음으로 퍼포먼스에 녹아들었다. 개막식에 이어 작가와 대화가 진행되었다. 이키바위쿠르르 세 작가와 하전남 작가의 작품 제작 배경, 관람객과 나누고자 하는 작품의 의미 등에 대해 진솔한 대화가 이어졌다. 12월말까지 열리는 전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