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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한일 과거청산 운동의 기억과 전망> 국제회의 개최
[초점] <한일 과거청산 운동의 기억과 전망> 국제회의 개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한지 20년이 되었다.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중심이 되어 2001년 2월 23일 결성한 보추협은 2003년부터 연구소와 힘을 합쳐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위해 싸워왔다. 지난 20여 년간 한일 과거청산 운동을 총결산하는 국제회의〈한일 과거청산 운동의 기억과 전망〉이 10월 13일에 열렸다. 보추협이 주최하고 연구소가 주관한 이번 국제회의를 위해 특별히 식민지역사박물관과 마주하고 있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가 강당을 제공해 주었다. 국제회의에는 일본과 한국에서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과 피해 회복 투쟁을 해 온 피해자들과 지원단체 활동가, 변호사, 전문가 등 80여 명이 참석했다. 한국과 일본 측에서 발표와 토론을 서로 마주하는 구성으로 모두 8편의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1부 “한일 과거청산의 성과와 과제”에서는 일본의 ‘전후보상운동’의 역사에 대해 야노 히데키(강제동원 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한국의 강제동원 관련 특별법에 대해 장완익(보추협 공동대표, 변호사)의 발표가 있었다. 토론은 김민철(전 보추협 집행위원장)과 나카타 미쓰노부(일본제철 전 징용공재판을 지원하는 모임)가 맡았다. 이 4명은 모두 1990년대 후반부터 보추협 회원들과 일본제철 재판투쟁, 재한군인군속재판 등을 함께 해 왔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 30년의 강제동원 문제를 총괄했다. 2부 “한일 과거청산의 현안과 쟁점”에서는 현재까지 일본 법정에서 투쟁 중인 ‘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회 소송’, 일본 관계 정부와 지속적인 교섭을 하는 ‘유골문제’를 다루었다. 두 현안은 남상구(동북아역사재단)와 우에다 케이시(전몰자 유골을 가족의 품으로 연락회)가 발표하고, 즈시 미노루(노!합사재판지원회)와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이
민족사랑 202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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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워싱턴디씨 지부 6월 역사캠프 ‘책거리’ 행사
[후원회원 마당] 민족문제연구소 워싱턴디씨 지부 6월 역사캠프 ‘책거리’ 행사 Louis Knight 후원회원 행사 취지 2022년 8월 시작된 〈영어로 배우는 한국사, 역사캠프〉(이하 역사캠프)가 이번 학기 마지막 수업을 맞았다. 역사캠프는 미국 워싱턴디씨, 매릴랜드, 버지니아 지역의 초등학교 2, 3, 4학년을 위한 기초 한국사 강의로, 영어에 더 익숙한 교포 2, 3, 4세들이나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을 위해 기획되었다. 그동안 역사캠프는 버지니아 페어팩스 지역의 공립 도서관에서 매월 셋째 주 토요일 4~6시에 진행되었다. 역사캠프의 이번 학기 마지막 수업인 책거리 행사는 6월 17일 토요일 한인커뮤니티센터 대강당에서 열렸으며 종강파티인 만큼 연령제한 없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책거리’는 지난 1년간 배워 온 한국사 전반에 대한 리뷰로 시작되어 한반도의 선사시대부터 문화강국이 된 지금의 대한민국 이야기까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로 각 시대의 중요한 흐름을 짚어보았다. 축사 1년 동안 열심히 한국사를 배워온 아이들과 그 가족들을 응원하기 위하여 워싱턴디씨 지부의 이사장인 윤흥노 박사와 전 독립기념관 관장인 이준식 교수의 축사가 있었다. 윤흥노 이사장은 미국에서 자라는 학생들에게 지금처럼 꾸준히 한국사를 공부하며 우리의 뿌리를 잊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한국에서 영상으로 인사를 한 이준식 관장은 일제강점기 해외에서 활동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리며 그 후손이나 다름없는 이곳 학생들이 열심히 한국사를 배우고 있는데 대한 격려의 말씀을 남겼다. 필립 커디 씨 라이브 인터뷰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손자이자 미 해군 최초 아시아계 여성 장교였던 안수산 여사의 아들인
항일무장투쟁 유적지 간도(間島)를 가다
[답사기] 항일무장투쟁 유적지 간도(間島)를 가다 김재광 경기 북부 후원회원 DMZ 녹슨 철조망 앞에서 대륙으로 달리는 꿈을 꾸다 지난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북부지역위원회에서 주최하고 연천지회에서 주관한 ‘정전협정 70주년기념 연천평화기행’이 진행되었다. 허리 잘린 한반도 DMZ를 사이에 두고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남북의 청년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대치하고 있는 이 비극의 현장 연천군 태풍전망대를 견학하고 분단된 조국의 뼈아픈 현실 앞에 가슴이 조여드는 심정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이면 누구나 느끼는 감회일 것이다. 말없이 남북을 흐르는 임진강은 알아주려나… 무거운 짐을 가슴에 안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동행한 이진선이 본인 소개 시간에 홍보한 ‘항일무장투쟁유적지 간도를 가다’ 역사탐방 프로그램을 듣고 “북녘땅이 아니면 어떠랴! 북중 국경을 가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5박 6일 역사탐방에 참여하려면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아내의 허락을 받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역사탐방에 동행한 동지 박충식이 함께 가자는 강력한 권유에 이끌 려 용기를 내서 아내에게 허락을 받고 결정하니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번 역사탐방을 통해서 보고 느끼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첫째, 윤석열 보수정부가 취임한 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북중러 관계가 노태우 정권에서 추진한 북방외교의 성과인 한중·한소 수교 전보다 더 분위기가 냉각되어서 북중러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옌벤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살고있는 조선족의 감상을 알고 싶었다. 둘째, 북중러 삼국 접경지 훈춘시 방천풍경구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두만강의 현재 모습과 동해를 친견하고 싶은 꿈과 단둥에서 바라보는
‘녹두장군’ 전봉준은 왜 좌감옥(左監獄)에서 최후를 맞이했을까?
[식민지 비망록 94] ‘녹두장군’ 전봉준은 왜 좌감옥(左監獄)에서 최후를 맞이했을까? 근대시기 이후 사형제도의 변경과 처형장의 공간 변천사 이순우 책임연구원 이번 호를 끝으로 ‘식민지 비망록’은 막을 내립니다. 2015년 5월 「위문대의 시초는 일본군 위문용」을 시작으로 8년여 동안 94회를 연재해왔습니다. ‘식민지 비망록’은 이순우 책임연구원의 제안으로 글감을 다양화하고자 10월호부터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이란 코너로 바뀝니다.(필자는 그대로입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만든 건축물이나 기념비 등에 얽힌 사연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제껏 한 호도 거르지 않고 좋은 글을 집필해준 이순우 책임연구원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하고 새 코너에 대한 후원회원들의 꾸준한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군기시 앞길(軍器寺前路, 무교), 철물전로(鐵物前路, 종로 철물전교 앞길), 서소문 밖 큰길(西小門外 通衢), 모화관 앞(慕華館前), 당현(堂峴, 당고개), 청파 앞길(靑坡前路), 노량사장(露梁沙場, 새남터), 만천평(蔓川坪), 양화진 나루터(楊花津頭) ……. 여기에 나열한 곳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효수(梟首)를 하거나 처형장(참형 또는 교형)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공간들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러한 처형장은 대개 서울 도성의 서쪽 일대에 몰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서경(書經)』, 하서편(夏書篇) 감서(甘誓)에 “명을 따르면 ‘조’에서 상을내릴 것이고, 명을 따르지 아니하면 ‘사’에서 죽이며 내 너희를 노륙(孥戮; 처자식까지 함께 처형하는 것)할 것이니라[用命 賞于祖 不用命 戮于社 予則孥戮汝]”라고 한 구절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조(祖)’는 종묘(宗廟)를 말하며 ‘사(社)’는 사직(社稷)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리고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일컫기를 “좌조우사 전조후시(左祖右社 前朝後市;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 앞쪽에
독립신문에 기록된 봉오동·청산리 전투
[자료소개] 독립신문에 기록된 봉오동·청산리 전투 올해는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지 103주년이 되는 해다. 일제 강점기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에 직접 맞붙어 대승한 3대 대첩으로 1920년 6월의 봉오동 전투, 10월의 청산리 전투, 1933년 대전자령 전투가 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모두 참전하여 대승을 이끈 주역은 바로 홍범도 장군이다. 최근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다섯 분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육군사관학교의 발표가 있었는데 이는 명백히 반민족적 처사이므로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 이번 호에는 독립신문에 기록된 봉오동 · 청산리 전투 기사를 전재한다. 『독립신문』 제88호(1920.12.25.) 4면의 「북간도(北墾島)에 재(在)한 아독립군(我獨立軍)의 전투정보(戰鬪情報)」와 『독립신문』 제95호(1921.2.25.) 3면의 「대한군정서 보고」이다. 원문이 국한문 혼용체여서 이를 읽기 쉽게 요즘 어법으로 풀어썼다. 끝으로 ○○는 원문의 ○○를 그대로 두었고, ●●는 원문 중 판독되지 않는 글자임을 밝혀둔다. ― 편집자주 북간도에 있는 우리 독립군의 전투정보 1920년 11월 12일 군무부(軍務部) 발표 삼둔자 부근의 전투 (1) 전투 전 피아(彼我)의 형세 적은 아군의 도강 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두만강 연안에 방어(경계)선을 배열하다. 아군은 현재 전투를 목적하지 않고 전쟁 준비를 목적함으로써 중국 길림성 연길, 화룡, 왕청, 혼춘 각 지방에서 모집 훈련중이었으나 우리나라 안에서 활동할 필요가 있으므로 아군의 기습부대와 전령부대는 끊임없이 강 건너 왕래함으로 적의 경찰대를 격파케 되다. (2) 전투경과의 상황 대한민국 2년(1920년) 3월 1일 이래로 6월 초까지 32회의 작은 전투를 하였는데 아군의 기습대와
도산서원 철폐운동
[연구실 글방 – 7] 도산서원 철폐운동 권시용 선임연구원 한때 조선시대 서원을 공부했습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미련이 있어선지 가끔 연구 논문을 흘깃거리곤 합니다. 최근 옛 동학의 논문에서 눈길이 가는 사건을 봤습니다. 이름하여 ‘도산서원 철폐운동’입니다. 도산서원이라면 한국의 서원을 대표하는 곳인데다 그곳에 모셔진 분이 퇴계 이황이니,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합니다. 퇴계는 학문은 물론 그의 삶 자체가 오랫동안 공경의 대상입니다. 특히 그는 서원제도에 관심을 두고 제자들과 함께 서원건립운동을 펴나갔습니다. 이를 통해 유학을 공부하고 동시에 본받을 만한 유학자를 제사하는 공간이라는 한국 서원의 정체성이 마련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 퇴계가 돌아간 후 마련된 것이 도산서원입니다. 이후 도산서원은 영남 유학의 총본산이란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도산서원을 없애버리자는 운동이 벌어진 겁니다. 이런 놈들은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야 한다 1925년 10월 초, 경상북도 안동 도산서원에서 일이 났습니다. 서원 마당에 소작인 세 사람이 잡혀 왔습니다. 조수철 황원돌 이은석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소작인을 잡아온 사람은 도산서원 재임(齋任)으로 있던 이동흠(李棟欽)과 이원각(李源慤)이었습니다. 재임은 서원 원장을 도와 교육과 제사 등 서원 운영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유사(有司)라고 합니다. ‘양반이 부르는데 즉시 오지도 않고, 게다가 도조(賭租)는 왜 이때까지 바치지 않느냐.’ 소작인들을 잡아온 이유는 도조, 즉 한 해 동안 서원이 소유한 농지를 부친 세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놈들은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야 한다’며 소작인들을 형틀에 붙잡아 매고 매질했습니다. 끝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사랑 202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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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다른 경찰서에 비해 빈번하게 청사의 위치를 옮긴 까닭은?
[식민지 비망록 93]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반도 민심의 근원을 차단하는 억압기구 다른 경찰서에 비해 빈번하게 청사의 위치를 옮긴 까닭은? 이순우 책임연구원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당시의 시점에서 서울 전역에는 창덕궁경찰서(昌德宮警察署), 본정경찰서(本町警察署),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동대문경찰서(東大門警察署), 서대문경찰서(西大門警察署),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 영등포경찰서(永登浦警察署), 성동경찰서(城東警察署), 성북경찰서(城北警察署), 마포경찰서(麻浦警察署) 등 도합 10개의 경찰관서가 촘촘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 경찰서의 연혁을 정리하다 보니 한 가지 퍼뜩 눈에 띄는 것이 본정(‘남부’로 개칭), 서대문, 성동, 성북, 마포 등과 같이 해방 이후 한 번도 청사를 옮기지 않고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경찰서가 많다는 사실이다. 나머지의 경우도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 위치 이전이 있었던 것이 확인되지만, 이와는 다르게 좀 예외적인 것이 종로경찰서의 사례이다. 간략하게만 살펴보더라도 종로경찰서는 처음에 탑골공원에 인접한 옛 북부경찰서 청사(1915년 6월)에서 시작하여 일한와사전기회사 사옥(옛 한성전기회사 사옥, 1915년 9월), 공평동의 경성복심법원 청사(1929년 9월)를 거쳐 인사동의 태화여자관(1943년 10월) 자리로 거듭 옮겨 다녔고, 해방 이후 시기에는 공평동 청사(1949년 1월)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경운동 신축 청사(1957년 3월)로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처럼 빈번한 청사 이동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가 처음 세상에 등장한 것은 헌병경찰제도(憲兵警察制度)로 상징되는 이른바 ‘무단통치(武斷統治)’가 한창 정점을 치닫고 있던 1915년 6월 1일의 일이었다. 이때 북부경찰서는 물론이고 여기에 속한 동대문분서(東大門分署)와 서대문분서(西大門分署)가 한꺼번에 통폐합되면서 종로경찰서가 생겨났고, 이와 함께 기존의 남부경찰서는 본정경찰서로 개칭되는 한편 용산경찰서가
1918년 ‘태평양’으로 간 조선인 노동자들
[연구실 글방 – 6] 1918년 ‘태평양’으로 간 조선인 노동자들 김명환 선임연구원 근대 이후 우리가 태평양을 가로질러 나아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1902년 12월 인천을 떠난 100여 명의 조선인들이 이듬해 1월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1905년에는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멕시코에 닿았다. 그리고 이즈음 뜻을 지닌 선각자들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근대 이후 우리와 태평양의 대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태평양의 내부, 이를테면 사이판 같은 중부 태평양, 혹은 적도 가까이 있는 팔라우 같은 태평양의 한가운데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언제였을까? 이글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중에 확인한 일부 사실을 정리해본 것이다. 1918년, 태평양으로 가는 길이 열리다 1918년 6월 28일자 『매일신보』에 「태평양 중의 신천지, 남양군도로 일 가는 조선사람들」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약 1,100글자로 작성되었고, 3면 1단에 게재되었다. 꽤 비중을 가진 기사였다는 의미이다. 기사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북으로는 만주 노령은 말할 것도 없고 고향과는 낮과 밤이 서로 바뀌는 남북 미주에서 다수의 동포가 활동하는 것은 오래인 사실이거니와, 수년 내로 내지의 공업이 발전됨으로 인하여 노동을 가는 사람이 근자에 많더니, 이번에는 멀리 망망무제한 태평양 중의 남양군도에도 새로이 동포의 활동할 문호가 열렸더라. 19세기 후반 이래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을 떠나 이역에 터전을 잡았다. 고향은 모두 달랐겠으나 그들이 떠난 이유는 비슷했을 것이다. 1910년대에 접어들면 만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