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근현대사기념관 3·1절 체험행사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3·1절 체험행사 근현대사기념관은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기념관 안과 밖에서 다채로운 행사를 열었다. ‘근현대사기념관 3·1절 체험행사’는 방문한 어린이, 청소년 50여 명을 대상으로 3·1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였다. 체험은 상설 전시를 관람하고 3·1운동에 관련한 퀴즈를 풀고 3·1절 의미를 담은 글귀만들기, 그림으로 꾸며보는 ‘손거울 키링 만들기’로 구성하였다. 참여자들의 높은 만족도로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한편 ‘약산 김원봉과 함께’ 김언호 상임대표(한길사 사장), 서중석 교수(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등 회원 30여 명이 기념관을 방문해 심산 김창숙 서거 60주기 추모 특별전 ‘시대에 맞서 싸운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을 관람하고 여운형 묘소 등 인근 독립운동가 묘소를 답사하였다. 또한 강북구가 주최하는 제20회 강북구 3·1독립운동 기념행사 ‘그날의 함성이’에 참여하여 부스를 운영하였다. 우이동 만남의 광장에서 열린 행사에서 ‘압록강 행진곡 오르골’ 만들기 체험을 진행하여 3·1절의 의미와 근현대사기념관을 홍보하는 자리가 되었다. 강북구 어린이, 청소년 200여명이 참여하여 근현대사기념관 체험 부스가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 정햇살 학예연구사
식민지역사박물관, 삼일절 104주년 기념 특별 행사 <독립선언서 배달꾼을 찾습니다!>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삼일절 104주년 기념 특별 행사 <독립선언서 배달꾼을 찾습니다!> • 김선영 학예연구사 3월 1일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삼일절 104주년을 맞아 독립선언서를 주제로 다양한 행사와 카드 뉴스 형태의 전시를 선보였다. 대형 크기로 제작된 독립선언서는 관람객에게 압도감과 몰입감을 주어 선언서 내용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친일파를 그린 작품 「일제를 빛낸 사람들」과 마주보게 배치함으로써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삼일절 오전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에서 대학생 연합 역사 동아리 ‘사다리’를 대상으로 김승은 학예실장이 삼일절 특강(강의명 ‘일본은 왜 사과하지 않을까’)을 개최하였다. 강의에 참석한 많은 학생들이 학예실장과의 대화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나누며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또한 1층 관람객 휴게 공간에는 연구소가 자체 제작한 영상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1-1편 -기록으로 보는 3·1운동」을 통해 3·1운동의 전개과정과 진압 상황을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 박물관은 삼일절에 방문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특별 활동지를 제작, 배포하였다. 우리박물관이 특화해서 다루고 있는 친일 인물과 친일 기관에 집중해 만든 이 활동지는 식민지시기 독립운동을 저지하려 했던 인물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으며, 어떤 기관들이 있었는지 시야를 넓혀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어졌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제작된 활동지는 아이들이 전시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풀이를 완료하면 독립군가가 흘러나오는 오르골을 증정했다. 3월 1일 박물관에는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삼일절을 좀 더 의미있게 기리기 위해 자녀들의 손을 잡고 방문한 부모님들은 다소 어려울
해방 직전 일제의 블랙리스트 <조선인요시찰약명부> 출간
[초점] 해방 직전 일제의 블랙리스트 <조선인요시찰약명부> 출간 • 편집부 연구소는 3·1절을 앞두고 일제의 사찰 관련문서철을 번역·분석한 <조선인요시찰약명부>을 펴냈다. 원본은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소장돼 있는 <쇼와20년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다. 1945년 3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식민지 조선의 각 도에서 생산된 요시찰대상 인명부를 하나의 서류철로 묶은 것이다. 전남 206명, 전북 131명, 경남 44명, 충남 129명, 함북 280명 모두 790명의 인물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인물 정보는 이름, 창씨명, 별명(이명), 출생일, 본적, 거주지, 얼굴과 신체 특징, 시찰요점으로 구성됐다. 약명부에 수록된 요시찰대상은 주로 반일 성향을 지닌 인물로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노동운동가, 외국인 등이 포함됐다. 사상전향자나 밀정과 같은 협력자들도 그 대상에 올랐다. 이를 통해 조선 안(한반도)의 요시찰인물은 물론 일본에 건너갔거나 중국, 러시아에 망명한 조선인도 감시대상으로 삼아 관리했다. 명부에는 요시찰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담겼다. 조선공산당의 주역 박헌영은 “화요회계 공산주의자로서 러시아와 상하이에서 활약,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 집요한 투쟁경력을 가진 자”로 기록됐다. 또한 건국훈장독립장을 받은 이규창(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들)은 이규호라는 이명으로 나오는데 “현재 주소는 광주형무소, 키 5척3촌. 머리카락은 5푼 길이로 짧게 깎음. 얼굴은 둥글고 희며 이마가 넓다. 오른쪽 눈 아래에서 윗입술까지 약 2촌 길이의 상흔이 있다”라는 등 상세한 인물묘사가 특징적이다. 연구소는 일제강점기 기초자료 연구와 발간을 체계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며,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를 바탕으로 독립유공자가 새로이 발굴되기를 기대한다.
연구소, 경기도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 설치 사업 적극 지원
[초점] 연구소, 경기도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 설치 사업 적극 지원 • 방학진 기획실장 연구소는 지난 2020년 경기도 의뢰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용역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그 내용은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아카이브 포털서비스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moveforward.library.kr) 경기도의 친일문화잔재 청산사업을 위임받은 경기문화재단은 2021년부터 2022년까지 경기도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 설치사업을 진행하여 우여곡절 끝에17개의 안내판를 제작, 설치하였다. 안내판 설치사업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우선 해당 안내판이 들어설 땅의 소유권자(개인이나 단체, 공공기관 등)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친일청산 사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많은 곳에서 안내판 설치를 거부하였다. 어렵사리 설치된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을 향후에 어떻게 관리하고 활용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해 연구소를 비롯한 관련 전문가와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관계자들이 2월 23일 경기도 일대에 설치된 안내판을 함께 현장답사한데 이어, 3월 3일에는 경기상상캠퍼스 컨퍼런스홀에서 성과 공유회를 가졌다. 성과 공유회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17개 광역단체 중 가장 모범적이며 지속적으로 친일잔채 청산에 앞장서고 있는 경기도가 앞으로도 다크투어 코스 개발, 문화콘텐츠와 접목 등 교육적‧문화적 차원으로 친일청산 문제를 발전시켜 나가기를 당부하였다. 한편 연구소는 17개의 친일잔재 상징물 안내판을 활용하여 교육용 영상자료를 제작 중이다.
식민지 조선을 장악한 헌병경찰
[소장자료 톺아보기 47] 식민지 조선을 장악한 헌병경찰 –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속의 전국 경찰서 지난 민족사랑 2월호 ‘소장자료 톺아보기’에 소개된 사진 중 「반도의 명사」는 강제병합 당시 조선인 주요 관료들과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구성된 부분으로 친일 인사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기 순사 온다”라는 말에 우는 아이의 울음도 뚝 그치게 만들었던 무단통치의 핵심인 일제의 헌병경찰. ‘순사’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악랄하고 무서운 이미지로 각인된 것은 칼 찬 제복 차림으로 민중들의 사소한 일상까지 감시, 탄압함으로써 가장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은 무단통치를 실행한 식민지 조선의 경찰서 현황을 담은 사진첩이다. 항일 의병을 가혹하게 탄압했던 헌병사령관 겸 경무총장 아카시 모토지로를 필두로 하여 본부의 직원과 경성, 광주, 대구, 평양, 신의주 등 13개 권역의 지방 경찰서와 그 직원들의 사진을 볼 수 있는데 마지막에는 조선의 경찰 연혁과 직원명단이 기록되어 있다.(민족사랑 2019년 6월호 참조)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한국주차군헌병대로 편성되어 있던 헌병을 증강하고 조선인 4천여 명을 헌병보조원으로 모집해 병력 규모가 2배 이상 확대되었다. 주차군헌병사령관, 즉 군대의 수장은 경찰 수장인 경무총장을 겸하도록하여 민간인까지 탄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겸직은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그대로 이어져 악명 높은 헌병경찰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각 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로 경무부와 경찰서가 설치되어 도(道) 헌병대장이 경무부장을 겸직했다. 경찰서장은 재판절차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그의 발자취를 따라
[김상옥의거 100주년 특집]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그의 발자취를 따라 이순우 책임연구원 17일 오전 5시 시내 〇〇통에서 종로경찰서 타무라(田村) 형사를 총살한 범인은 즉시 남산을 넘어서 왕십리(往十里) 방면으로 도주한 것을 알고 수색중이더니 범인은 다시 시내 효제동(孝悌洞) 73번지에 잠복한 것을 알고 어제 아침 7시반경에 수색대가 그 집을 에워싸고 범인을 체포코자 할 새 범인은 벌써 눈치를 채이고 두 손에 육혈포를 가지고 나와 대항하여 동대문서의 쿠리다 경부(栗田警部)는 뒷어깨에 탄환을 맞아 넘어지고 다시 격투를 계속하여 마침내 범인도 경관의 탄환을 맞고 넘어져 현장에서 죽었더라(경찰부발표). 작일 호외 재록. 중국 상하이 시절에 촬영한 김상옥 의사의 인물사진이다. (<동아일보> 1924년 4월 8일자) 이것은 딱 1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동아일보> 1923년 1월 23일자에 등장한 「순사총살범(巡査銃殺犯), 작효(昨曉) 효제동(孝悌洞)에서, 수색대(搜索隊)와 격투후 피살(格鬪後 被殺), 어제 아침 일곱시 반 수색대에게 싸여서, 효제동에서 격투한 후에 총에 맞아 죽어, 동대문서(東大門暑) 쿠리다 경부(栗田 警部) 중상(重傷)」 제하의 신문기사이다. 여기에는 이 내용이 그 전날에 호외(號外)로 발행된 것을 재수록한 것이라는 표시가 들어 있다. 그런데 정작 이 기사에는 ‘범인’의 정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에 관해서는 일제 경찰의 철저한 보도제한조치가 내려져 있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신문기사의 한쪽에는 이러한 구절이 함께 인쇄되어 있다. [근고(謹告)] 이 사건에 대하여는 경찰당국에서 일부만 발표하였으므로 범인의 성명과 기타에 대하여는 도저히 발표할 자유가 없기로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손해배상 판결을 환영한다
[시론]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손해배상 판결을 환영한다 장완익 변호사·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1. 2000년 12월 일본 도쿄에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열렸다. 개별 전범들에 대한 형사책임과 일본의 국가책임을 묻는 법정이었다. 1946년 4월부터 1948년 11월까지 도쿄에서 열렸던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일본군 성노예 전범에 대한 역사의 법정이 열렸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제소한 현실의 법정에서는 일본군‘위안부’를 포함한 모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졌다. 한국에서는 2000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으로 2005년에는 일본제철(당시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 등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2016년에는 일본군‘위안부’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제기되었으며 일부는 승소, 일부는 각하 내지 패소라는 결과를 낳았다. 극히 일부 피해자만이 한국법원에서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소하여 승소한 것이다. 그나마 확정판결에 따라 강제집행까지 마친 소송은 단 한 건도 없다. 2004년 설립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과가 나오면서 피해자들이나 유족들은 한국전쟁 전후시기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였고 피해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판결도 일부 있었지만, 한국 정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다수의 판결이 쏟아져 나왔다. 필자도 여수·순천 10·19사건이나 한국전쟁시기 보도연맹 사건의 유족들을 대리하여 한국정부의 책임을 묻는 몇 건의 소송을 담당하였다. 대부분 승소하였고,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패소한 소송도 몇 건 있었지만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하고 다시 재심 소송을 통하여 최종 승소하였다. 2017년에는 제주4·3 수형인 재판이 진행되었고, 2019년 1월에 제주4·3 당시
대한독립에 바친 이름, ‘지대형’의 ‘지청천’ 되기
[연구실 글방 1] 대한독립에 바친 이름, ‘지대형’의 ‘지청천’ 되기 김명환 선임연구원 일제강점기를 수놓은 독립운동가 중에는 이름까지도 독립의 제단에 바친 사람들이 있다. 의열단원 이원록은 3년의 옥살이를 한 후 이육사가 되었고, 고향 안동에서 계몽운동을 하던 김긍식은 서간도로 망명한 후 김동삼이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들을 본명보다도 이육사와 김동삼으로 기억한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지청천(池靑天)도 본명을 대한독립에 바쳤다. 청년시절까지 본명으로 살던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이청천(李靑天)’으로 이름을 고쳤다. 해방 이후 소원하던 독립이 완성되었다고 기뻐하며 본명으로 돌아갔으나, 곧 ‘지청천’으로 개명하였다. 본명보다 이청천으로 살아온 날이 길고 강렬해서 개명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이름 ‘지청천’은 오랜 항일역정과 민족국가 건설의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필자가 어쩌다 지청천의 이름에 집착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특별히 그의 본명을 찾아본 기억은 없는데, 어느 순간 머릿속에 ‘지청천의 본명은 지대형(池大亨)’이 들어앉았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필자는 독립운동 전공자도 아닌데 말이다. 어느 날 일 때문에 정신없이 문헌을 뒤지던 중 지청천을 소개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독립기념관에서 발행한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이라는 책이었는데, 여기에서 지청천은 “관향(貫鄕)은 충주, 관명(冠名)은 석규(錫奎)였고, 아명(兒名)은 수봉(壽鳳)”이라고 소개되었다. ‘이런, 지대형이라는 본명이 빠졌네’라는 생각이 들어 그의 항일역정을 알만한 사람들에게 본명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젊은 연구자 중에는 지청천의 본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답한 사람이 꽤 있었다. 만주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된 인물인데도 말이다.
신흥무관학교의 노래 (3) : 실낙원가
[항일노래 함께 보기 3] 신흥무관학교의 노래 (3) : 실낙원가 이명숙 선임연구원 신흥무관학교에서 만들어 부른 노래로는 앞서 소개했던 <신흥무관학교 교가>와 두 개의 <신흥학우단 단가>만이 알려져 있었다. 오늘 소개할 노래는 필자가 처음으로 발굴한 ‘신흥무관학교의 노래’이다. 새 노래 발굴의 힌트는 앞서 소개한 〈신흥학우단가〉에서 얻었다. 이 노래가 신흥학우단의 단시(團是)를 변용했을 것이라 전제했을 경우, 또 다른 신흥무관학교의 시나 글들도 노래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 자료 속에서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로 변용된 경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는 현재까지 신흥교우단·신흥학우단의 기관지인 <신흥교우보> 제2호(1913.9.15.), <신흥학우보> 제2권 제2호(1917.1.13.)와 제2권 제10호(1918.7.15.)이다. 신흥교우(학우)단의 중요 사업 중 하나로 꼽힌 ‘각종 간행물을 통하여 혁명이념의 선전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고자 한 계획이 <신흥교우보>·<신흥학 우보>의 발간을 통해 실현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내용은 주로 ‘논단(論壇)’, ‘강단(講壇)’에 잘 나타나며 한편으로 조국의 역사와 국문 연구에 관한 글들도 꾸준히 소개되었다. ‘문림(文林)’란에는 시, 한시, 소설 등의 창작 문학 작품도 실렸다. 특히 운율이 있는 시는 노래 가사로 변용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 <독립신문> 수록 시가의 항일가요 변용에 대해 연구한 한 논문(김경남, 「상해 <독립신문> 소재 시가와 항일 가요 연구」, 2018)에서 분석 시가 90여 개 중 노래로 확인되는 것이 20여 편 정도였고, 그 중 현재까지 전해진 노래도 10여 편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러한 연구에 힘입어 각 교우보・학우보에 실린 시들을 주요하게 살펴보았다. <신흥교우보> 제2호에는 대우강(大愚姜)의 ‘오늘밤’, 이규훈(李圭勛)의 ‘시내물두고’,
조선의 민중이 독립을 이뤄냈다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밀양역사기행 소회
[후원회원마당] 조선의 민중이 독립을 이뤄냈다 -조선혁명선언 100주년 기념 의열단밀양역사기행 소회 최보금 용인 프로칸영어학원 원장 1923년 1월 28일, 약산 김원봉이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 지 딱 100년이 되는 2023년 1월 28일에 그의 고향 밀양으로 역사기행을 갔었습니다. 사실 100여 년이 지난 독립운동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었고,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필요성도 딱히 보이지 않기에 저는 가벼이 산책가듯 추운 날씨만 걱정하며 오랜만의 새벽 버스를 탔습니다. 38명을 꽉 채운 버스 안은 놀랍게도 근현대사의 대가들이 다 모여있었습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 한국현대사를 쓰신 전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 안경환 전 서울대 교수, <차미리사 평전>의 저자 한상권 교수,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윤세주 평전>을 쓰신 김영범 대구대 교수, 전 성신여대 양보경 총장, 전 독립기념관 이준식 관장, <김원봉 평전>의 이원규 작가 등이 편안히 웃고들 계셨습니다. 이분들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만나기도 쉽지 않지만, 이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너무나 낯설어 참으로 당황스러웠습니다. 게다가 우연히 앉은 옆자리가 <김산 평전>의 이원규 작가인 줄도 모르고 “김산이 누군가요?”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4시간이 넘게 차근히 설명해 주시는 행운을 얻었건만 그분이 쓰고자 했던 독립운동이 이 시대 왜 필요한지는 묻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몇몇 영웅들의 이야기 같았던 독립운동은 동화학교의 보통학생들이 장터에 모여 독립을 외치고,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는 우리 민중의 이야기였습니다. 36년간 우린 정말이지 끝없이 싸우고 싸웠던 것이었습니다. 이 답사를 위해 전국에서 모인 81명과 함께 산기슭 굽이굽이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