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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용서와 화해 그리고 진실 규명으로 희생자들의 한이 풀리길 바라며

2023년 1월 31일 595

11월 15일 저녁 7시 한국전쟁 당시 충남 태안지역에서 벌어졌던 ‘민간인학살’을 다룬 구자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태안’을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를 비롯한 17개 시민사회단체 공동 주최로 상영하였다. 작은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고향인 울릉도에서 경찰에 의해 끌려가 경북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서 희생되셨고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에서 근무할 당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 일원으로 활동했던 나에게는 영화 ‘태안’의 관람이 남달랐다. 한국전쟁 당시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자행되었던 ‘민간인학살 사건’을 영화로 알리고 있는 구자환 감독은 2013년의 ‘레드툼’, 2017년의 ‘해원’에 이어 세 번째로 ‘태안’을 제작했다. 영화 ‘태안’은 1950년 여름 보도연맹사건을 시작으로 좌우 보복 학살을 다루고 있는데 태안유족회 상임이사인 강희권, 유민 아빠로 알려진 세월호 유가족인 김영호 씨가 출연해 태안 곳곳의 학살지역을 비추고 같은 동네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유가족이 사건 후에도 마주 보고 살아야 했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한다. 영화 ‘태안’에서 증언해 주신 유가족분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대다수가 민간인학살 당시 14살, 15살 정도의 어린 나이였고 이제 70년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응어리진 한과 슬픔을 차마 가늠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영화에 출연하신 분들은 좌우 보복 학살의 두 주체가 한 마을에서 70년이나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면서 자신의 아픔만큼 상대의 아픔도 컸음을 알고 있었고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개개인이 스스로 깨우치고 용서하며 화해의 길로 나가고 있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감독과의 대화에서 구자환 감독은

우리의 요구는 정의와 평화다

2023년 1월 31일 268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 없다”는 진리를 굳게 믿는 평화시민 여러분! 전주 김판수가 인사 올립니다. 일본군 강제연행 종군‘위안부’ 성노예 피해자는 가해 전범국 일본에게 엄중하게 요구한다. 1. 침략 전쟁 범죄를 인정하라 1. 진상을 규명하라 1. 공식 사죄하라 1. 법적 배상하라 1. 책임자 처벌하라 1. 역사에 기록하여 교육하라 1. 피해자 추모시설 건립하라 1992년 1월 8일부터 이 자리에서 시작한 수요집회는 30년 동안 ‘1573차’인 오늘까지 한결같이 일본의 책임 있는 반성을 촉구한다. 이곳 평화로는 평생을 세상에서 따돌림 당한 억울하고 절통한 성노예 피해자와 평화시민들이 연대하며, 피해자의 ‘수난과 고통’ ‘상처와 아픔’ ‘수모와 치욕’을 함께 기억하며, 명예와 인권의 회복을 간절히 염원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서있는 평화의 성지입니다. 평화를 폭력으로는 얻을 수 없기에 우리는 가해 전범국 일본에게 증오와 적대로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고, 오직 가해 일본국의 성의어린 위로로 피해자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유하여 용서와 화해, 공존 평화 세상을 열자고 한결같이 호소했습니다. 이제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일본은 피해자에게 지금 즉시 직접 사과하고 직접 용서받아 전범국 오명을 씻어버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다시 한 번 충고합니다. 정의와 평화를 끝까지 지켜내려는 평화 시민 여러분께 용기가 샘솟는 선물을 선사하겠습니다. 도종환 작 ‘담쟁이’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출판기념회 성황리에 열려

2023년 1월 31일 408

[초점]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출판기념회 성황리에 열려 • 편집부 함세웅 이사장의 저서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출판기념회가 1월 14일 오후 2시 광화문 교보빌딩 컨벤션홀에서 열렸다. 이책은 ‘해방에서 촛불까지 기억하고 기리고 소망하다’라는 부제에서 보이듯, 민주화운동 인권운동‧노동운동‧통일운동의 역사를 한 권에 응축시킨, 불의와 독재에 항거한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체험적 증언록이자 민족의 바람직한 미래를 열어갈 지혜를 담은 이정표라 할 수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공식 추천사를 실어 함세웅신부의 삶과 투쟁에 경의를 표했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안병욱 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유시춘 EBS 이사장,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김상근 목사, 문정현 신부 등 저자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이들의 축하 말씀에 이어, 저자가 출간 소회와 감사의 뜻을 밝힌 뒤 붓글씨 스승인 이동천 박사와 출판 관계자들을 일일이 소개하는 순으로 진행됐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참석해 진심어린 축하와 함께 개인적 각오도 밝혀 행사장을 가득 메운 내빈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출판기념회가 끝난 뒤 교보문고 매장에서 진행된 사인회에는 수백 명이 줄을 서 기다려 평생을 민주화와 역사정의 실현에 헌신한 저자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의 존경을 가늠하게 해주었다. 함세웅 이사장은 행사 후 “인권회복과 민주화, 남북평화공존의 역사현장에서 만난 선후배동지들과 사랑하는 모든 형제자매 교우, 수도자, 사제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인권의학연구소,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정의구현사제단 회원들과 가족 모든분들께 동지적 사랑과 일치 안에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전해왔다. 

국사편찬위원회 주관 교원연수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려

2023년 1월 31일 359

[초점] 국사편찬위원회 주관 교원연수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열려 • 김승은 학예실장 지난 1월 11일과 18일 양일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교원연수가 열렸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주관한 이번 연수에는 초등교원 30명, 중등교원 40명이 참가하였다. 작년 8월 식민지역사박물관 상설전시 해설 관람과 특별전 관람으로 진행했던 교원연수에 이어 두 번째로 진행한 연수이다. 이번에는 이순우 책임연구원이 용산의 역사에 대한 특강을 맡았다. 그리고 김승은 학예실장과 조한성 연구원의 해설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이 이어졌다. 특히 과거사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 인권회복의 단계를 거쳐 기억과 기념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과거청산의 역사를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관람객과 어떤 공감을 나누고 있는지를 둘러싸고 교사들과 대화도 이어졌다. 박물관에서 오전 특강과 오후 관람을 마치고 교사들은 효창공원 답사와 백범김구기념관 관람을 이어갔다. 용산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중심으로 근현대사의 역사를 되새기는 교사들의 발걸음이 더 많은 학생들의 단체관람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또한 생생한 교육의 현장으로서도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더욱 많이 활용되기를 바란다. 

식민지로 전락한 도시 풍경

2023년 1월 31일 930

<병합기념 조선사진첩>에는 ‘청일전쟁 전의 경성日淸戰役前の京城’의 모습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총독관저, 경성시가, 남대문, 경복궁 등 경성의 모습 44장과 인천, 개성, 평양, 압록강, 부산, 수원, 목포, 군산 등 지방 명소와 고적 사진 86장이 실려 있다. 이 사진들은 강제병합 직전에 촬영된 이미지가 아니라 한반도 곳곳의 모습을 길게는 20여 년에 걸쳐 담은 것이다. 일제의 조선 ‘보호국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조선에 대한 체계적인 사진기록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병합기념첩>, <일한병합기념 대일본제국조선사진첩> 등 여러 종류의 ‘병합’을 ‘기념’하는 사진첩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진첩에는 ‘대한제국’은 ‘조선’으로, 황도皇都 ‘한성’은 ‘경성’으로 전락한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침략자의 시선으로 담아내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학교이름에 도(道), 방위, 숫자 명칭의 흔적이 성행했던 시절 내선일체 완성을 위한 식민교육제도의 변경이 빚어낸 부산물

2022년 12월 26일 1215

[식민지비망록 88] 학교이름에 도(道), 방위, 숫자 명칭의 흔적이 성행했던 시절 내선일체 완성을 위한 식민교육제도의 변경이 빚어낸 부산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여러 해 전에 박완서(朴婉緖, 1931~2011)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1992)를 아주 흥미롭게 읽다가 일제강점기의 학교생활과 관련한 내용에 눈길이 끌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목에 따로 책갈피를 꽂아둔 기억이 퍼뜩 떠오른다.   (22~23쪽) …… 오빠는 면 소재지에 있는 사년제 소학교를 졸업하고 송도로 가서 이 년을 더 다녀 그때 개정된 학제로 육년 동안의 초등교육을 마쳤다. 숙부들은 다 사년제 소학교만 나왔는데도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학문을 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오빠가 송도에서 이년 더 배운 걸 굉장한 고학력으로 여기셨다. (60쪽) …… 문안에 있는, 엄마 마음에 드는 학교 중에서 다시 나의 통학거리를 감안해서 골라잡은 학교가 매동국민학교였다. 현저동에서 그 학교엘 가려면 산을 하나 넘어야 했다. 인왕산 자락이었다. 현저동 중턱에서 성터가 남아있는 근처까지 더 올라가면 사직공원으로 통하는 꽤 평탄한 길이 나 있었다. (82쪽) …… 국민학교 입학식은 4월이었다. 나는 또 수단 두루마기를 입고 엄마 손잡고 산을 넘어 학교에 갔다. 점잖은 동네아이들이라 과연 우리 동네 아이들하고는 달라 보였다. 예쁘장하고 깡똥한 양복으로 차려입은 애가 대부분이었다. 학부형은 일주일 동안만 따라오라고 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일제 때의 초등학교는 당초 4년제였다가 6년제로 바뀐 것이라든가 그 당시 입학식을 거행하는

제82주년 부산항일학생의거를 기념하며

2022년 12월 27일 476

[후원회원마당] 제82주년 부산항일학생의거를 기념하며 이상국 부산동구문화원 전문위원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 출처 <조선부산명소>(1928) 1940년 11월 23일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가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부산·경남지역 18개 남녀중등학교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 대회는 학생체육대회가 아닌 군사훈련을 모방한 이상한 대회이다 보니 경기규정도 조악했다. 경기종목은 ‘수류탄던지기, 모래운반, 비상소집, 환자 들것 운반, 무장 행군’ 등 15개 종목이었다. 특히 심판관인 일본군 학교배속장교들이 한국인 학교인 동래공립중학교(현 동래중·고등학교)와 부산제2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중·고등학교)에 대해 편파적인 경기판정을 일삼아, 일본인 학교인 부산공립중학교(현 부산중·고등학교와 다름)에 우승을 안겨 줬다고 판단한 1천여 명의 한국인 학생들이 폐회식에서 일본인에게 폭행과 폭언으로 경기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또한 의분이 격화된 200여 명의 한국인 학생들은 야간에 대회심판장인 경남지역 학교배속장교 총책임자인 ‘노다이 켄지’(乃臺兼治) 육군대좌[현 대령]의 관사로 몰려가 돌팔매질로 기물을 크게 파손하는 등,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을 물리적으로 토해내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일제는 중일전쟁 등의 침략전쟁을 확대하면서 한국인 학생들에게 식민지교육을 통한 동화정책과 아울러 우민화·황민화 정책을 펼쳐, 향후 한국인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려고 중등학생들에게도 군사 집체훈련을 강화했었다. 그리고 일본제국의 군인으로서 일왕을 위해 영광스러운 목숨 바치기를 세뇌화시켰으며, 애교심을 앞세운 학교 간의 군사훈련 경쟁을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학생들은 이날의 국방경기대회를 통해 일제 식민정책의 기만성을 깨우침과 동시에 민족차별에 대한 잠재적 저항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한국인 학생 15명(동래중학 9명, 부산제2상업 6명)을 ‘폭력행위 등의 죄’로 재판에 회부시켜

걸개그림 그리던 미대생이 우리 역사문화 콘텐츠 전도사가 되다

2022년 12월 26일 1662

[인터뷰] 걸개그림 그리던 미대생이 우리 역사문화 콘텐츠 전도사가 되다 방학진 기획실장   2020년 9월 ‘디자인 가안채’(www.gaanche.com)라는 회사가 민족문제연구소에 전화해왔다. 가안채는 3·1절을 기념하여 태극기와 독립신문을 디자인한 손수건을 제작·판매하였고 그 수익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와 우리 연구소에 각각 기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독립운동과 함께한 태극기·독립신문 손수건’이라는 주제로 제작된 이 손수건은 ‘카카오 메이커스’ 플랫폼에서 2주 만에 3,500여 장이 판매되는 등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 강효숙 가안채 대표는 기부와 함께 연구소 후원회원에 가입하였고, 2022년 8월 1일 연구소에서 진행한 ‘독립운동을 활용한 문화컨텐츠 제작사례’ 강좌에 강사로 참여해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강효숙 가안채 대표에게 기부 이유를 물었다. “2019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유물을 활용한 상품개발을 계기로 우리 근현대사 관련 콘텐츠로 상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독립의 역사를 기억하거나 이를 알릴 수 있는 유물을 찾아 <대한독립과 함께한 태극기, 독립신문>이라는 주제로 손수건을 제작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 임시의정원 태극기와 임시정부 소식지 역할을 한 독립신문을 큰 주제로 손수건을 만들어 판매했는데 예상 외로 반응이 폭발적이었고 이 상품을 구매하신 분들의 뜻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처음에는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하려 했으나 전액 기부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기부처를 찾던 중 임시의정원과 독립신문에 가장 연관성이 높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 현금과 현물을 기부했어요. 그런 다음 평소 개인적인 관심이 있었던 민족문제연구소에 기부하게 되면서 연구소와 소중한 인연이 시작되었네요.” 소규모 제조업체들이 밀집되어 있는 부천시

조선의용군 전모, 자료소개 귀국한 관계자 좌담회

2022년 12월 27일 674

[자료소개] 조선의용군 전모, 자료소개 귀국한 관계자 좌담회 1945년 9월 초 옌안(延安) 나가평(羅家坪)을 출발하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는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대원과 가족들 출석자 명단 심운(沈雲) 전 조선의용군 제2지대원 이일청(李一淸) 전 조선의용군 선견종대원(先遣縱隊員) 박훈(朴薰) 전 조선의용군 공작반원 고찬보(高贊輔) 전 조선의용군 선전부원   ① 왜군과 감투(敢鬪), 천하에 용명(勇名) 연안을 중심한 진동남변구(晋東南邊區)를 근거로 하여 팔로군과 함께 포악무쌍한 왜군과 영웅적인 전투를 감행하여 그 용명을 천하에 날린 조선의용군의 존재는 우리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독립동맹이 경성에 특별위원회를 조직하는데 따라 입경한 동맹원 중에는 조선의용군에 적을 두고 분투했던 관계자들이 많다. 본사에서는 이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용군의 전모를 이야기 들을 기회를 얻었다. 본사 : 조선의용군이 조직된 경로부터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고찬보 : 조선의용군은 1942년 7월 20일 하북(河北)과 산서(山西)의 접경인 진동남변구에서 무정(武亭) 장군의 통솔 아래 결성된 것입니다. 심운 : 이보다 먼저 1938년 10월 10일 황포군관학교의 후신인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300여 명을 중심으로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라는 것을 조직하였습니다. 이것이 한구 함락 직전의 일인데 그 후 정세 변화에 따라 양자강 이북에 있던 제1지대, 이남에 있던 제2지대와 제3지대가 행동을 개시하여 낙양(洛陽)을 향하여 북으로 올라오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940년 3월에는 전원이 낙양 에 집결하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고찬보 : 낙양에 집결한 우리는 목적지인 진동남변구를 향하여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낙양서 진동남변구를 가려면 황하를 건너야 하고 이 황하를

덕수궁

2022년 12월 27일 350

[후원회원 마당] 덕수궁 김유 광동지부장 도심 속의 고궁, 그러나 쓰라린 역사를 간직한 곳. 분주한 도시생활 중에 세월의 유장함을 느끼고자 오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알고서 찾는 것일까. 나는 지난주에 우연히 시청 앞에 있는 덕수궁을 가 볼 기회가 있었다. 늦가을의 단풍은 노란색과 붉은 빛이 어우러졌다. 그리고 소나무의 푸른빛도 함께였다. 이제 단풍도 오늘이 지나면 아마도 마지막일 것이다. 서산의 저녁 햇살, 만추의 길목에 서있는 낙엽들의 향연, 단풍을 즐기러 온 사람들 그들 모두는 손마다 카메라를 들고 사라지는 가을을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을을 즐기러 온 사람들, 그러나 바람에 소소히 날리며 떨어지는 나뭇잎, 하루의 쓰러져가는 황혼 빛에 하나의 왕조가 무너지는 비운의 터임을 알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중에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중화문과 이따금 달력의 그림에도 나오는 중화전을 거쳐 석조전의 계단에 앉았다. 여기서 쓰러져가는 왕조를 회상하였다. 연못이 있고 몇 포기 가을 억새가 지는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시성 두보는 쓰러진 왕조를 두고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가 무너져도 산과 강은 남아있네).”라고 피눈물을 뿌리며 읊었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중명전은 여기서 멀지않다. 고종의 처소인 함녕전은 지척이다. 이곳은 선조가 임진왜란의 전화(戰禍)가 끝나 한양으로 돌아와 즉시 왕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임시로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집을 임시 거처로 삼으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고 나중에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경운궁이라고 불리었다. 인조가 반정에 성공한 후 왕위에 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