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병참기지 조선반도를 관통해 달린 성화(聖火) 계주행렬의 정체는?
흔히 성화봉송(聖火奉送)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올림픽 대회의 사전행사 또는 개막식의 한 장면이 퍼뜩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언젠가 이것의 영어식 표현이 궁금하여 뒤져보았더니, ‘Olympic flame’, ‘Olympic fire’, ‘Olympic torch relay’ 등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근데 암만봐도 여기에 ‘성스럽다’거나 ‘신성하다’거나 하는 부가적인 뜻이 담긴 것 같지는 않고 이건 단지 화염(flame), 불꽃(fire), 횃불(torch)이라거나 하는 단어로 읽혀질 뿐인데 어쩐 일로 이것의 번역어는 애당초 ‘성화(聖火)’로 둔갑하여 정착된 것인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올림픽 성화의 유래는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마라톤 타워(Marathon Tower)를 설치하고 이곳에 불을 밝히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그 이후 1932년 제10회 로스엔젤레스 대회에서도 동일한 방식의 점화가 이뤄졌다고 알려진다. 그러다가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 때 그리스에서 채화한 불꽃을 직접 계주방식으로 옮겨와 경기장 성화대를 밝히도록 한 것이 성화봉송 릴레이의 첫 사례가 되었다. 이에 따라 1940년으로 예정된 제12회 도쿄 올림픽 당시에도 성화봉송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6월 9일자에 수록된 「동경(東京)의 오륜대회(五輪大會)에 성화계주(聖火繼走)를 제창(提唱), 해로는 일본군함이 옮기라고, 희랍측 위원(希臘側 委員)의 소론(所論)」 제하의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와루소 6일 발] 올림픽 백림대회에서 각국에 가장 감명을 준 성화(聖火) ‘리레-’는 동경대회에서는 거리 ‘코-스’의 문제로 일단 중지가 되었는데 그 전부터 성화 ‘리레-’의 거행을 열망하여 일본조직위원회에까지 그 안을 제시하고 있던 희랍 IOC ‘호라낫치’ 씨 등은 이 희망을
굿즈(Goods)에 역사를 담다
[후원회원마당] ‘독립운동가로 키링(Keyring : 열쇠고리)을 만들어 보자.’ 광복절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내가 입사한 ‘디자인가안채’ 대표님도 그에 발맞춰 상품을 출시해 보자고 말씀하시던 무렵에 우리디자인팀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정한 아이템이 키링이었다. 키링을 선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침 출근길에 만난 학생들의 책가방에는 모두 한 개 이상의 귀여운 캐릭터나 아이돌 키링이 매달려 있고, 퇴근길에 만난 이삼십대 청년들의 가방에도 마찬가지일 정도로 청년층의 키링 수요는 높았다. 저마다 저 작은 소품 하나로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내고 다녔다. 저렇게 가볍게 소지할 수 있으면서 나의 개성과 취향을 나타내는 소품이 또 뭐가있을까? 그런 소품에 독립운동가를 녹여내면 청년들이 조금 더 쉽게 독립운동사에 접근할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부터 그런 제품을 갖고 싶었다. 다양한 문화콘텐츠 산업이 흥행하면서 만화·드라마 캐릭터나 좋아하는 아이돌의 세계관에 이입하고, 그 내용을 다양한 제품으로 소비하는 문화가 비교적 최근에 생겨났다. 그런 제품을 굿즈(Goods : 상품·재화를 뜻하는 용어이지만, 한국 아이돌에 관련된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문화에서 파생되어 지금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상품을 제품으로 디자인한 물품을 통칭한다)라고 한다. 심지어 그 세계관을 확장하여 또 다른 창작물이 나오기도 한다. 그 작용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에도 대입하고 싶다. 독립운동가를 담은 멋진 제품이 있다면 자신에게 울림을 주는 역사 속 인물들에 이입하여 그들을 좋아하고, 더 나아가 역사가 담긴 소품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돌 굿즈를 넘어
K-컬쳐시대, ‘청년백범’의 홍소연, 조선동 님을 만나다
지난 9월 12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의 배우와 감독이 미국 에미상 남우주연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아시아 배우가 주연상을 받은 것도, 비영어권 드라마가 감독상을 수상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번 시상식에서 오징어게임은 6관왕을 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하는 한국의 뉴스 콘텐츠와 인터넷 커뮤니티들에는 이런 댓글이 올라왔다. ‘김구 선생님 보고계십니까?’, ‘김구 선생님 저는 실시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국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인터넷 ’(인터넷 유행어) 중 하나다. 이른바 ‘국뽕’이 차오르는 뉴스와 이야기에 김구 선생이 ‘소환’되고 있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남긴 ‘부강한 나라보다는 아름다운 나라, 한 없이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가 되길 바란다’는 소망도 함께 회자된다. 바야흐로 K-컬쳐의 시대, 9월 16일에 ‘어린이 백범학교’를 30년 동안 운영해온 ‘청년백범’의 조선동, 홍소연 님을 만났다. ● ‘청년백범’에 대해서 소개해 주세요. ○ 1985년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주관으로 ‘백범강좌’가 열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강사가 좋으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요. 그때 임종국 선생님도 오시고, 리영희, 송건호, 강만길, 조동걸, 이만열 선생님 등 명사들을 모셔서 강좌를 열었어요. 거기에서 서로 알게 되고,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 민족문제연구소 모습하고 비슷해요. 처음에는 제대로 된 공간도 없고, 혼자서 접이의자를 깔고 행사 준비하니까, 강좌에 온 청년들이 의자를 나르고, 차를 대접하는 허드렛일을 도와주면서 가까워지게 된거죠. 그렇게 함께 행사를 도우면서 공부모임을 하던 청년들이 ‘우리 공부만 하지 말고 뭔가 좀 해보자’ 해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 현지 보고
[자료소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 현지 보고 해방 직후 조선 민중들은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소식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화북 지방에서 결성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의 근황과 활약상을 알고 싶어했으며 아울러 동 단체의 지도자들이 조속히 귀환하여 조국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힘써주기를 바랐다. 이번 호에는 먼저 <신조선보(新朝鮮報)>와 <중앙신문>에 실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대 관련 기사를 싣는다. 기고자는 연안에서 활동하다 귀국했거나 8·15 해방으로 옥중에서 풀려난 관련자 3인인데 조선의용군 제2지대원 심운(沈雲)과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으로 유명한 김학철(金學鐵), 경성제대 조선문학 강사이자 경성콤그룹의 일원이었던 김태준(金台俊)이다. – 편집자 주 해외동포는 언제 오나? ― 연안독립동맹(延安獨立同盟)의 근황 8월 15일 이래 우리민족의 가장 관심되는 일은 다년간 국외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워온 모든 혁명전사와 혁명단체의 동향이다. 이제 본사는 연안서 돌아온 심운(沈雲) 씨의 담화를 얻어 독자의 궁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고자 한다. 심운 씨는 1935년에 상해 교통대학(交通大學)에 재학하는 일방, 당시 김원봉(金元鳳) 씨가 주재하던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서 당무공작에 종사하였으며 그 뒤 1942년부터는 조선독립동맹 만리장성 북경지부 분맹원으로, 동당 직속의 조선의용군 제2지대에 소속되어 정치지도에 종사, 동년 말에 천진에 공작차로 잠입하였다.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바 되어 조선으로 압래(押來), 15년 구형에 8년 언도를 받아 투옥되었다가 8월 15일 후에 출옥한 혁명 전사의 한 분이다. ◇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각지에 흩어져있던 조선 유학생과 망명청년들은 남경으로 모여들었다가 곧 한구로 가서 중앙육군군관학교에
프락치 김순호와 J에게 – 적당히 밥만 먹고 사시길
[후원회원 마당] 프락치 김순호와 J에게 – 적당히 밥만 먹고 사시길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김순호 경찰국장의 프락치 의혹 기사를 보고 잊혀진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프락치로 유혹 당한 일과 내게 정보원임을 고백하던 J의 이야기가…1997년 만 19살 여름. 학생운동으로 경찰에 쫓기던 3개월 중 어느 날. 부친의 지인이 “경찰정보원으로 이름을 올리면 처벌받지 않는다. 네가 원하면 연락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른바 프락치 작업. 집 앞엔 경찰이 상주했고 학교도 갈 수 없어 친척집을 전전했다. 막연함과 초조함, 배고픔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청춘의 혈기는 이런 제안이 오히려 치욕적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결국엔 경찰의 조사 후 기소되어 법원에서 징역형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 지금도 선명한 2가지 토막이야기가 있다. 경찰서에서 조사받던 중 경찰관이 시위 중 찍은 사진첩을 펼치며 아는 이의 이름을 적으라 했다. ‘모른다고 시치미 떼면 한 대 맞는거 아닌가’라는 얄팍하지만 진정 어린 근심으로 사진첩을 보는데 앞서 취조당한 학생들의 자취를 보니 뭉클하고 아렸다. 사진 속 얼굴에 선을 그어 이름을 적어놨는데 학생 대표들 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얼굴에 가명을 남겨 둔 것이다. 앞선 이들의 노력에 동참해 “적혀진 이름 말고는 몰라요” 했는데 다행히 큰 강요없이 지나갔다. 나는 사건이 종결되는 시점이 어서 취조가 덜했지만, 앞선 학생들에겐 얼마나 많은 폭력과 협박, 회유가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양심을 팔지 않은 그들이 있었다. 다음 토막은 강원도 철원군에서 군 복무중 재판받던 시기의 이야기다.
항일역사 토크콘서트 1강 후기
[후원회원 마당] 항일역사 토크콘서트 1강 후기 김나우 예일여고 2학년 항일 역사 토크콘서트 1강은 ‘규운 윤기섭’ 선생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그분의 생애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다뤘습니다. 토크장 안으로 들어가니 공연석과 관객석의 거리가 멀지 않은 것을 보고, 관객과 함께 소통하는 형식으로 진행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토크 중간중간 저와 제 친구를 언급해주시며 참여를 유도해주셨고, 덕분에 정말 재밌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 우리나라의 역사, 그중에서도 특히나 항일역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어 중고등 역사교사를 꿈꾸는 저에겐 이번 강의가 정 말 유익하고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한국의 고등학생 아무나를 붙잡고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하나만 대보라고 하면 대부분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 매헌 윤봉길 의사 등을 말할 것입니다. 학생들이 바로바로 이분들의 이름을 댈 수 있는 것은 초등학생 때부터 받아온 역사교육을 통해 주입식으로 배우고 암기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관심이 많아서 자주 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독립을 위해, 조국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받쳐 한국 독립을 위해 애써주셨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항일역사라면 어느 정도 자신있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저는 ‘규운 윤기섭’ 선생의 이름을 이번 강의를 통해 처음 들었습니다. 많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내용만으로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껴지며 많은 사람들이 역사토크 콘서트와 같은
경기도박물관 특별전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 관람 후기
[박물관 답사기] 경기도박물관 특별전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 관람 후기 김혜영 선임연구원 지난 9월 14일 연구실 및 자료실 상근자들은 경기도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 관람을 다녀왔습니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주최, 주관하고 우리 연구소가 후원 으로 참여한 이번 전시는 경기도의 독립운동과 친일파(親日派)에 대해서 조명하는 특별전입니다. 연구소와 밀접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또 연구소에서 대여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어서인지 익숙하기도, 새롭기도 했습니다. 규모가 큰 박물관을 방문할 때면 매번 ‘우리 박물관도 이런 곳에서 전시가 이루어지면 좋겠다. 이런 전시 방법은 우리도 시도하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번 관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물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무인티켓 발권기가 있습니다. 박물관은 무료지만 입장권을 출력해서 기념으로 소장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관람했던 곳의 표를 수집하고 있어서 꽤 괜찮은 서비스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입구 정면에는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종류가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실제 사용하기 좋은 물건들도 많아서 저는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있는 손수건을, 다른 분은 기념으로 간직할 수 있는 마그넷을 구매했습니다. 연구소가 운영하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관람료를 받지 않는 대신 이런 기념품을 다양하게 만들어 판매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전은 캐나다 출신의 영국인기자 메켄지가 찍은 유명한 의병사진을 시작으로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대한제국의 비극, 그들의 선택’에서는 한말과 대한제국기에 펼쳐지는 일본제국주의 국권침탈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청일전쟁 다색판화도 자세한 설명과
SBS 뉴스, 연구소가 발굴·조사한 일제 잔재 연속 보도
[초점] SBS 뉴스, 연구소가 발굴·조사한 일제 잔재 연속 보도 SBS 뉴스는 8월 25일, 26일 이틀에 걸쳐 ‘전범기업 마크가 교표? 학교에 남은 일본 잔재’, ‘유관순 기념탑도 일제식, 곳곳에 남은 일본 잔재’ 보도를 내보냈다. 보도의 주요 내용은 전범기업 미쓰이(三井)의 로고를 학교 교표로 사용하고 있는 부천 삼정초등학교 사례를 비롯해 일장기와 욱일기 모양의 교표를 사용하고 있는 학교를 지적하였다. 또한 유관순, 손병희 등 독립운동가 관련 표석은 물론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송덕비, 충혼탑 모양도 일제의 묘비석 양식을 무비판적으로 따라서 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SBS의 보도는 연구소의 자료 제공과 자문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연구소는 2020년 경기도의 의뢰를 받아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을 수행하면서 경기도 소재 초·중·고등학교 약 2,400개의 교표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과정에서 부천 삼정초등학교 사례를 발견하였다. 또한 이순우 책임연 구원은 <민족사랑> 2021년 11월호에 ‘일제의 잔존 기념물 가운데 유독 사각뿔 모양이 많은 이유는? 사각주(四角柱)에 방추형(方錐形)인 일본군 묘비석 양식의 기원’이라는 글에서 1879년12월 26일에 제정된 일본 해군의 「하사졸묘표촌법(下士卒墓標寸法)의 건(件)」이라는문건이 사각기둥에 사각뿔 형태의 일본군 묘지석 양식의 기원임을 밝힌 바 있다. 방송 이후 연구소 부천지부는 교육청 등 지역의 관련단체들과 함께 부천 삼정초등학교 교표 개정을 위해 움직일 예정이라고 밝혀왔다.
조선총독부 통계엽서
[소장자료 톺아보기 41] 식민통치의 시각적 선전 – 조선총독부 통계엽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배의 치적을 드러내기 위해 매년 사회 전 분야를 조사하여 <통계연보> 를 발행했다. 통치 주체인 일본은 식민지 지배로 조선에 도로, 전기, 철도 등 근대적 시설이 마련되었고 토지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 등을 실시하여 근대적 등기제도를 통한 토지 소유권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하였다. 숫자로 작성한 통계는 이러한 근대화 정책에 힘입어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지표인 셈이다. 조선총독부는 <통계연보> 작성에 그치지 않고 성장지표를 그래프를 통해 대중에게 선전하기 위해 통계엽서를 제작, 배포하였다. 시정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발행한 시정기념엽서 총 38매 중 7매가 농수산물의 증산과 기반시설 등의 통계를 비교한 근대화 관련 관제엽서로 조선의 산업화를 선전하고 있고, 이와 함께 ‘조선의 통계 朝鮮之統計’를 따로 제작하여 조선의 호구戶口, 무역, 재정, 농업, 광산, 수산, 교통, 교육, 토지의 증가를 그래프로 이미지화하여 발행하였다. 일제는 각종 시각 매체를 통해 통치정책을 홍보하였는데 식민지 정부인 조선총독부가 대량 생산한 엽서는 일반 대중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다는 특성상 선전 효과가 컸으며 엽서라는 실용적 용도에 힘입어 보다 은밀하게 제국의 정책을 선전할 수 있는 도구였다. 엽서에 새겨진 성장지표는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해 조선인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논리였던 근대화 관련 이미지였다. 즉 근대화를 환상이 아닌 실제로서 증명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배의 합리화, 조선 근대화의 선전 및 자원 수탈의 정당성을 굳혀나갔다. 일제
멀쩡했던 교가(校歌)와 교표(校標)가 무더기로 개정된 연유는?
이순우 책임연구원 많은 사람들에게 좀 생소한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일제강점기의 상황에서도 ‘조선어장려시험(朝鮮語獎勵試驗)’이란 것이 한창 성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도 이른바 ‘내지인(內地人, 일본인)’ 관리들을 대상으로 이러한 조선어 능력시험이 치러졌고 그 성적에 따라 장려수당(獎勵手當)까지 줬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의아한 일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겠다. 이러한 일의 연원을 찾아보니까 무엇보다도 1921년 3월 9일에 제정된 칙령 제34호 「조선총독부 및 그 소속관서 직원의 조선어장려수당에 관한 건(件)」이 눈에 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내지인’ 판임관(判任官) 이하의 직원으로서 조선어(朝鮮語)가 통하는 자에게는 조선총독(朝鮮總督)이 정하는 바에 따라 당분간 월액(月額) 50원(圓) 이내의 수당을 지급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21년 5월 6일에는 조선총독부 훈령 제28호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조선어장려규정」이 정식으로 제정되어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에 속한 ‘내지인’ 판임관, 판임관대우, 고원에 대해 조선어장려시험에 합격하거나 또는 시험위원의 전형(銓衡)을 거쳐 학력(學力)을 인정받은 경우 그 종별등급(種別等級)에 따라 정해준 조선어장려수당(갑종은 4년간, 을종은 2년간)을 지급받도록” 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갑종시험은 “조선어의 통역(通譯)에 차질이 없는 정도”의 수준을 나타내며, 을종시험은 “보통의 조선어를 이해할 정도”의 여부를 측정하는 것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조선총독부가 이처럼 조선어능력을 습득할 것을 일본인 관리들에게 적극 장려하고 이를 위해 특별수당까지 지급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점에 있어서는 일찍이 <매일신보> 1912년 5월 11일자에 수록된 「일선동화(日鮮同化)의 방법(方法)」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었던 것이 눈에 띈다. 야마가타 정무총감(山縣政務總監)은 각도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