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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병합기념 조선사진첩 속 이미지(1)
땔감용 솔잎과 그릇을 파는 지게꾼들 풍속사진 중에는 물동이, 항아리, 땔감 등을 지게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운반하는 짐꾼들의 사진이 많다. 자기 키보다 더 큰 짐을 짊어지고 있는 하층 육체노동자들을 이미지화하여 ‘전근대적’인 조선인의 모습을 각인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길가에서 낮잠을 자는 사람 사진이나 엽서 등 조선인의 이미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풍속’이라는 이름으로 이색적이라기보다 나태하고 아무 곳에서나 자는 조선인의 모습은 미개한 상태로 치부되었다. 하층민의 터전 진흙과 새끼줄로 지은 집은 근대 석조 건축물과 대비하며 원시성을 강조했다. <사진첩>의 ‘평양의 농가平壤の田舍’와 <사진첩조선>(1921)에 실린 같은 사진 한번 촬영한 이미지는 다른 사진첩이나 엽서, 그림 등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사용되었다. 같은 모습을 반복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이용한 것은 일본의 지배로 ‘발전된 조선’의 비교 대상이 되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첩이나 화보 자료를 보면 주로 표지나 특정한 내용이 수록된 면을 펼쳐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부내용을 살펴보고 싶은 욕구가 있어도 접근이 쉽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은 디지털 패널을 이용한 자료관람도 이루어지고 있으나 원자료의 느낌을 오롯이 살리기는 어렵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자료 역시 공간상의 제약으로 많은 자료를 배치하기 어려워 일부는 복제물을 제작하는 방식을 택했다. 관람객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와 함께 부족한 부분은 『민족사랑』을 통해 꾸준하게 자료를 소개하고 있는데
제15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
[초점] 제15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 1월 18일 금요일 오후 5시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7층 체칠리아홀에서 제15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이 열렸다. 시상식은 함세웅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이사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사회자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의 강만길연구지원금 경과보고, 박태균 서울대 교수의 심사평 발표, 지원금 수여, 조광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축사, 수령 소감 발표순서로 진행됐다. 강만길연구지원금은 신진 연구자들이 진보적 학술성과를 심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위해 2008년 제정되었다. 올해 심사대상은 2020년 후기와 2021년 전기 박사학위취득 논문으로 총 28편(개항기 8, 일제시기 8, 현대사 12)이었다. 대상 논문들은 전반적으로 새로운 연구방법론과 자료발굴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치열한 경합 끝에 2020년 8월 동국대에서 「1950년대 중소기업개발계획의 전개와 성격」(지도교수 : 한철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박광명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전문연구원이 수여대상자로 선정됐다. 심사위원회(위원장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선정 사유로 “이 논문이 미국의 대한원조와 중소기업 간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그 기본성격에서부터 작동방식과 결과에 이르는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조명했다”는 점을 들었다. 또 “기존의 연구들이 미국의 원조 총량이나 정책 등에 집중하였던 데 비해, 중소기업개발계획이라는 세부 분야에 구체적인 분석을 가한 새로운 시도로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고 높이 평가했다. • 김혜영 선임연구원
제16회 임종국상 시상식
[초점] 제16회 임종국상 시상식 11월 11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회원 및 각계 인사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6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열렸다. 시상식은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의 기념사를 시작으로, 이재정 전 경기도교육감의 축사, 임종국 선생의 일대기 영상 상영, 이민우 연구소 운영위원장의 기념사업회 경과보고, 윤경로 심사위원장의 선정경위 발표, 시상과 수상자들의 수상 소감,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 순서로 진행됐다. 올해 수상자 후보 공모에는 학술·문화 부문 10건, 사회·언론 부문 9건 등 총 19건이 올라왔다. 지난 9월 27일의 예심을 거쳐 10월 13일 열린 심사위원회 본심에서 열띤 토론을 벌인 결과 학술부문에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를, 사회부문에 일본의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岡まさはる記念長崎平和資料館)’을 제16회 임종국상 수상자로 최종 선정하였다. 심사위원장인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을 비롯해 박찬승 한양대 명예교수, 장완익변호사, 조재곤 서강대 연구교수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학술부문 수상자인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는, 한국근대사 전공자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 업적을 쌓아왔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과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학계의 현실참여에도 앞장서왔다. 수상 저서인 <독립운동 열전1 – 잊힌 사건을 찾아서>와 <독립운동 열전2 – 잊힌 인물을 찾아서>는 옛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와 조선총독부 고등경찰의 기록을 비교·검토하여 독립운동 선상의 비사를 발굴 정리한 역작이다. 임 교수는 이념적 지형 아래 사회주의를 독립운동사에서 배제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진실한 역사상과는 거리가 먼 또 하나의 역사왜곡이라 주장한다. 나아가 무명의 독립투사에 주목하여 이들의 헌신을 조명하거나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립총회
[초점]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립총회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기념하기 위한 ‘약산 김원봉과 함께’가 10월 26일 우리 연구소 5층 회의실에서 발기인대회를 연 데 이어 11월 10일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정식 출범했다. 이날 창립총회에서는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의 경과보고,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의 김원봉 선생 약력보고 후 약산의 연설 모습이 담긴 영상이 방영됐다. 이어서 김언호 창립준비위원장의 사회로 ‘약산 김원봉과 함께’ 기념사업회 ‘정관(안) 심의와 의결’, ‘임원·집행부 선임’, ‘사업계획(안) 심의와 의결’ 등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임원·집행부 선임’에서는 김언호 한길사 대표를 상임대표로,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와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공동대표로, 장완익 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감사로,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을 집행위원장으로 각각 선출했다. 이날 안영민 ‘평화의 길’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창립총회에는 박중기 추모연대 이사장, 함세웅 연구소 이사장, 임헌영 소장,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등 100여 명이 참여했다. ‘약산 김원봉과 함께’는 시민들의 힘과 자발적 참여로 운영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앞으로 △김원봉의 독립운동과 사상에 대한 학술연구사업 △김원봉의 독립정신을 구현하는 기획‧홍보사업 △민주사회 건설과 평화통일을 위한 사업 △김원봉 서훈 추진 등 현창사업 등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내년 첫 사업으로 ‘조선혁명선언’ 발표 100주년을 맞아 ‘의열단 역사기행’을 기획하고 있다. • 방학진 기획실장
연구소가 기획한 “사라지는 목소리들” 강제동원 특별전 열려
[초점] 연구소가 기획한 “사라지는 목소리들” 강제동원 특별전 열려 11월 1일,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한 “사라지는 목소리들, 석탄과 철에 은폐된 역사 그리고 희생자의 이야기” 특별전이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는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이 외면하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피해자의 목소리로 재구성하였다. 일본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선전하는 일본 근대화의 성공스토리에 은폐된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드러내고, 세계시민이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세계유산의 가치가 무엇인지 되돌아보기 위한 자리이다. 개막식은 전시를 주최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심규선 이사장의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윤경로 관장의 축사에 이어 사도광산 피해유족 김광선 님이 부친의 강제동원 피해를 더 기록하고 남기지 못한 점이 아쉽다는 소감을 밝혀 이 전시의 소중함과 함께 숙연함을 더했다. 전시는 크게 2부로 구성되었다. 1부에서는 군함도 등 일제의 산업시설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한 한국인 피해자, 중국인‧연합군 포로, 사도광산 피해자의 증언과 강제동원의 실태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전시되었다. 사도광산강제동원의 역사는 이번 전시로 처음으로 공개되는 내용과 자료들이다. 2부에서는 일본산업유산 등재 논란 속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전하는 이야기와 다른 나라의 ‘부정적 세계유산’ 전시사례를 함께 전시했다. 이번 전시에는 피해자 유족과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강제동원 관련 소장사료들을 출품하였고, 일본 오카마사하루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POW연구회,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등의 일본 시민단체의 적극적인 협조로 모두 190여 점의 사료와 사진자료 등이 전시되었다. 전시를 기획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소장유물과 증언영상, 일제 산업유산 관련 사료 이미지 등도 다수출품되었다. 특히 5개의 영상부스에서 소개되는 증언영상은 강제동원
‘항일전쟁 시기 한중 공동전선의 전개’ 학술심포지엄
[초점] ‘항일전쟁 시기 한중 공동전선의 전개’ 학술심포지엄 한중수교 30주년과 한중 문화교류의 해를 기념해 ‘항일전쟁 시기 한중 공동전선의 전개’를 주제로 한 학술심포지엄이 10월 28일(금) 오전 10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다목적홀에서 열렸다. 학술심포지엄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서울시강북구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였다. 이번 심포지엄은 일제 침략기 한중 항일세력의 협력과 공동대응을 시기별, 지역별, 분야별로 재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기조 발제와 제1부 독립전쟁과 한중연대, 제2부 문화예술로 보는 항일연대, 종합토론 순으로 진행되었다. 기조 발제를 맡은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중국혁명」이란 제목으로 한중수교 이후 독립운동사 인식의 변화를 개관하고, 일제 침략기 한중 항일세력 상호 간의 연대와 영향을 분석했다. 손염홍 건국대 교수(중국측)는 「중국 공문서를 통해 본 한국광복군 창설과 한중협력」 발표에서 한국광복군 창설과정에서 일어난 교섭과 협력, 갈등을 중국 쪽 사료를 활용해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문미라 충북대 연구교수의 「조선의용대(군)의 항일연극 활동과 한중연대」 논고는 조선의용대(군)의 항일투쟁 방략으로서 연극활동을 조명했다. 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은 「1930년대 중국 동북지역(만주)에서의 한·중 연대투쟁」을 주제로 발표했다. 맹문재 안양대 교수는 「단재 신채호와 중국인 지우들의 항일문학 활동」을 아나키즘운동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그 문학적 성과를 조명했다. 이명숙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항일음악에 나타난 한중연대를 「공연활동과 음악을 통한 한중연대」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홍성후 한국미술사연구소 연구원은 「장진광의 연안 항일투쟁과 미술활동」을 통해 남쪽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술가 장진광의 항일운동을 추적했다. 남기웅 아주대 강사는 「상하이안 커넥션 : 조선 영화인과 중국전영인(電影人)의 영화 교류」라는 발표문에서 1920~1930년대
통제와 규율로 가득한 교실
[소장자료 톺아보기 43] 통제와 규율로 가득한 교실 – 식민지 학교 잿빛 색깔의 단단한 벽으로 지어진 건물. 옥상보다 더 높은 곳에서 펄럭이는 일장기. 흙먼지 날리는 황량한 공터. 굳게 닫은 철문과 이어진 차가운 울타리. 마치 감옥을 연상하게 하는 풍경.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바로 ‘학교’다. 지식을 습득하고 동무들과 함께 뛰어노는 희망과 설렘의 공간을 왜 이렇게 두렵고 공포스럽게 지었을까?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면서 그들의 교육목표는 ‘내선일체’, ‘황국신민’ 따위의 슬로건을 내걸고 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일본화’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학교 건물도 학생들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쉬운 공간으로 만들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 곧은 일직선 형태의 복도를 따라 교실이 이어져 배치되었다. 복도 한쪽 끝에 서 있으면 반대쪽 끝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통제기능을 담당하는 교장실과 교무실은 건물의 가장 중간에 배치된다. 교실의 벽면은 완전히 가리지 않는다. 허리 높이까지 벽돌로 쌓아 올리고 복도에서 항시 교실 내부를 관찰할 수 있게 눈높이 정도는 유리로 된 창으로 만든다. 밀폐된 곳은 학교의 최고 통제권자가 머무르는 교장실밖에 없다. 학교가 복층인 경우는 상층 중앙에 교장실을 배치하여 운동장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구조로 지어졌다. 마치 군대의 막사같이 위압적이고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교실 내부는 어떠한가. 교실 전면에는 벽면을 가득 채운 칠판이 부착되어 있다. 교사가 학생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교단과 교탁이 중앙에 자리 잡는다. 칠판의 중앙 상단에는 일장기, 좌우에는
이육사 시의 실증적 고찰
서울에서 안동까지의 길은 멀었다. 이육사문학관을 찾아가는 길이다. 서울에서 3시간 넘게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이제 대구~안동간의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다시 반시간 넘게 달리면 안동에 도착한다. 시내를 벗어나면 이제 퇴계의 본향답게 고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낙동강과 안동호가 보이고 다시 꼬불꼬불한 길을 산을 끼고 달리다 보면 어느덧 원촌마을에 도착한다. 길의 오른편에 ‘청포도 농원’이라는 표지판이 보이면 거의 다 온 것이다. 시계를 보았다. 아침 9시에 출발을 하였는데 벌써 3시가 다 되어있다. 이옥비 여사는 많이도 기다렸을 것이다. 여사는 나에게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 1927년에 광저우에 갔던 사람은 이육사가 아닌 내무부장관을 지낸 이호의 형, 무역협회장과 고려대학교의 이사장을 지낸 ‘목당 이활’ 임을 확인하여 주었다. 그는 광저우에 가서기남(曁南)대학을 나오고 다시 일본과 영국에 유학, 와세다(早稻田)대학과 런던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단정하고 깨끗하게 일생을 살다간 사람, 나는 이육사를 생각하면 글과 생각, 행동이 일치하는 시인이자 지사임을 느낀다. 그는 나이 마흔에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 짧은 사이에 일제에 열 일곱 번이나 투옥되었었다. 사실 시인의 문학적 성취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는 무관하지는 않으나 시인으로서의 평가는 그 작품에 먼저 두며 역사적 배경은 작품을 쓰게 되는 마이너한 요소로 고려될 것이다. 이육사가 저항시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뜻깊고 서정적인 많은 수의 그의 시들이 단순히 저항시의 대명사로 분류되어 버리고 마는 데서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알다시피 이육사는 이퇴계의 후손으로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44년 북경감옥에서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
[자료소개] 환국한 임시정부요인들의 일생(1) 호담강직(豪膽剛直)으로 일관, 유명한 인천탈옥기(상), 김구(金九)씨편 우리의 지도자 김구 선생을 수반으로 한 대한임시정부의 요인들은 해방의 환호소리가 3천리 금수강산에 차고 넘친 가운데 고국으로 23일 환국하였다. 기미년 만세 전후 피가 뛰는 젊은 혁명가들은 조국의 해방과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해외와 해내에서 피로 엉킨 투쟁을 오늘까지 거듭해왔다. 처자와 가정과 형제를 버리고 오직 민족해방을 위하여 피를 뿌려 싸워왔다. 잡힌 목이 되면 악착한 극형도 달게 받았고 철창 속에서 쓰라린 고초도 견디고 참았으며 큰 뜻을 이루기 위하여는 파옥(破獄) 혹은 살상도 감행하였다. 천신만고 역경 속에서 사선(死線)을 헤매기도 하였다. 자기 한몸의 목숨과 고생을 돌보지 않고 민족을 위하여 살고 죽었다. 이 모든 희생과 고통은 오늘의 광명을 찾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역경과 가시덤불 속에서 청춘을 짓밟고 반생을 바쳐 싸워온 선생의 거대한 발자국에 방울방울 엉킨 혈루(血淚)의 기록을 더듬으려 한다. ◇ ◇ 우리민족의 지도자 김구 선생의 풍모와 성격을 먼저 말하다 (판독불가) 젊어서부터 기운이 장사이라 금년이 71세인데 (판독불가) 오셨다. 그러나 원래가 건장하기 때문에 지금도 40세 (판독불가) 과묵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반생의 혁명운동의 역사를 볼 때 의(義)를 위하여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강파로우며 그 생활은 청렴강직하고 검소함을 위주로 하시었다. 자기 한 몸의 이로움을 위하여서는 아무 생각도 일도 안하는 것으로서 선생의 성격 전부를 대변할 수 있다. 선생은 해주 태생이시다. 극히 빈한한 농가에서 나셨다. 어려서부터 넉넉지
한강리(漢江里)가 느닷없이 한남정(漢南町, 한남동)으로 둔갑한 까닭
“청량리동(淸涼里洞), 상왕십리동(上往十里洞), 하왕십리동(下十里洞), 답십리동(踏十里洞), 염리동(鹽里洞) …….” 언젠가 서울 지역의 지명유래에 대한 공부도 할 겸 법정동(法定洞) 명단을 쭉 살펴보다가 조금은 이색적인 이름을 지닌 동네 몇 군데를 골라본 적이 있다. 여기에 나열한 것들은 끝자리가 모두 “무슨 무슨 리동”인 경우에 속하는데, 이를 테면, 그냥 ‘청량동’이 아니고 구태여 ‘청량리동’이라고 하여 마을이라는 뜻글자가 두 번씩이나 겹쳐 있다. 그러자니 약간 시골 냄새가 나는 ‘리(里)’라는 이름을 지금껏 그대로 꿰차고 있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에 관한 흔적을 찾아서 관련 자료를 거슬러 올라가며 훑어보았더니, <조선총독부관보> 1936년 3월 30일자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32호 「정동리(町洞里)의 명칭 및 구역(개정)」의 ‘경성부(京城府)’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리(里)’의 흔적을 품고 있는 정동(町洞) 명칭 개정 내역(1936년 4월 1일 시행) 이들 가운데 ‘염리’가 ‘염정(鹽町, 염동)’으로 되지 않고 ‘염리정’으로 바뀐 것은 ‘정동(貞洞)’이 ‘정동정(貞洞町)’이 된 것처럼 세 글자로 맞추는 방식을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청량리정’이니 ‘왕십리정’이니 ‘답십리정’이니 하는 이름이 생겨난 것도 모두 이 시기의 일이었는데, 아쉽게도 구태여 ‘리(里)’라는 것을 남겨둔 까닭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경원선 철도의 개통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청량리정거장’과 ‘왕십리정거장’이라는 이름을 익숙하게 사용하던 상태이다 보니, 짐작컨대 아마도 이런 이유로 ‘청량리’와 ‘왕십리’라는 지명을 그냥 살려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답십리정’의 경우에는 기차역의 소재지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