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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용산지역 답사 두 차례 진행

2022년 7월 26일 1009

[초점] 용산지역 답사 두 차례 진행 연구소는 이순우 선생의 저작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출간 기념으로 용산지역답사를 7월 2일과 9일 주말인 토요일에 두 차례에 걸쳐 진행하였다.  2일, 1차 답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집결한 참가자들에게 답사 코스에 대한 개략적인 안내 설명을 하면서 답사가 시작되었다. 효창원 진입도로, 연합군포로수용소(조선부로수용소), 갈월동 굴다리, 용산 연병장(남단터), 연병정(남영동), 경룡관(성남극장)으로 답사가 진행되었으며 최근 이순우 선생이 발견한 코바야카와교 돌기둥도 직접 확인해볼 수 기회를 가졌다. 일제 강점기 해당 시설물과 건축물 등이 형성된 연원과 기능 등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해설이 진행될 때마다 참가자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무더위도 잊은듯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전쟁기념관(용산 보병 제79연대) 나무 그늘진 너른 마당에서에서 1차 답사를 마무리 하였다. 더운 날씨에도 30명이 넘는 후원회원과 일반인이 참가하였으며, 진행스태프로 임무성, 국세현, 김혜영 상근자가 함께하였다. 9일, 2차 답사는 삼각지역에서 시작하는 코스로 용산총독관저 진입도로, 경성전기 용산출장소, 용광사 터(융문당 융무당), 하자마구미 경성영업소, 조선군사령부 진입도로, 용산역, 연복사탑중창비(철도회관)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마무리는 용산철도병원 자리에 들어선 용산역사박물관에서 하였다. 특히 박물관 직원들의 배려로 시원한 실내 1층 로비에서 이열치열 더위를 이겨낸 힘겨웠지만 보람찬 역사답사를 종료하였다.  종료 후 인근 식당에서 7~8명의 참가자와 진행스태프는 답사에 대한 소회를 나누며 더위를 식히고 귀가하였다. 2차 답사도 30명의 참가자와 임무성, 김무성, 신다희 상근자가 함께하였다. 사족. 답사 와중에 뜻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였다. 검은색 셔츠 차림의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불침번

2022년 7월 26일 533

[후원회원 마당]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불침번 이동훈 후원회원 일상이 잠시 쉬는 것 같은 코로나 시절에도 인터넷 공간과 언론 지형은 한층 더 뜨거웠습니다. 주어지는 뉴스들과 출처 불명 영상과 소식 문자들은 이해와 소통은커녕 소음의 음량만큼 서로의 간극만 더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소란의 와중에 몹시 반갑게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6월 후원회원 초대의 날”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 및 효창공원 인근 답사안내 문자를 받자마자 마치 신선한 해방구를 찾은 듯 나서서 참가 신청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 긴 얘깁니다만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1922~2010)이 말하길 “언론의 자유가 주어진다 해도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그 첫째는 언론의 자유란 단순히 ‘예, 아니오’의 문제가 아니며 그것은 또한 ‘얼마나 많이’의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자유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돈을 갖고 있는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가, 또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어떤 물질적자원을 갖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무도 우리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만약 우리가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이 나라에서 또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또 우리 정부가 국내나 해외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런 정보가 없으면, 우리 자신을 표현할 자유를 가진다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하워드 진 <오만한 제국>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 효창원 답사 소감문

2022년 7월 26일 533

[후원회원 마당] 식민지역사박물관, 효창원 답사 소감문 정수연 후원회원 우선 박물관 1층의 강제동원 특별전 연장전시에 대한 특별한 해설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일본의 군함도 산업유산 등재라는 몰염치와 기만성에 맞서 외롭게, 그러나 꿋꿋이 애써주시는 연구소와 박물관이 자랑스럽습니다. 강제동원, 강제노동의 진실과 역사를 알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등재결정을 일궈내신 과정의 이야기가 큰 감동이었습니다. 상설 전시 유물에 관한 해설도 일제 시기, 특히 전시 총동원 체제하 조선인의 삶이 어떠했을 지에 대해 참 많이 이해시켜 주셨습니다. 학생, 일반인까지 동원된 군 위문품이었던 천인침 복대, 주술적인 조끼와 당시의 사람들과 서울 일대가 찍혀있는 흑백사진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잘 모르던 효창원이 해방 전후로 나라의 운명과 함께 하듯 그 역사성과 의미에 있어 변질, 왜곡의 과정을 거쳐서 여전히 과제를 남기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장소라는 것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효창운동장, 원효로의 명칭과 그 일대에 관한 이야기, 무엇보다 삼의사, 임정요인, 그들의 후손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고도 의미 깊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많은 만큼 더 알고 싶고 더 공부하고 싶게 해 주신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모두의 힘겨운 대면활동 자제 시기 끝에 반갑고도 뜻깊은 답사와 공부의 기회를 만들어 주신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개관 이후 바쁘다는 핑계로 관람과 공부를 미루다가 이제야 예전에 미처 모르던 소중함을 느끼며 방문하게 돼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더위에도 반갑게 맞이하고 진행해 주신 국세현 선생님, 너무나 생생하고

돌모루 동네배움터 ‘우리 동네 박물관 둘러보기’ 실시

2022년 7월 26일 490

[초점] 돌모루 동네배움터 ‘우리 동네 박물관 둘러보기’ 실시 • 국세현 기획실 회원사업부팀장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은 지역주민과 후원회원을 대상으로 돌모루 동네배움터 Part1 <우리 동네 박물관 둘러보기-마을역사해설사 양성>을 6월 13일부터 7월 11일까지 진행하였다. 동네배움터는 지역의 의미 있는 공간을 지역 주민을 위한 학습공간으로 활용하는 서울시의 평생학습 지원 사업이다. <우리 동네 박물관 둘러보기>는 자료로 보는 일제강점기1~3, 기증자료에 깃든 사연, 일 출신문조선쌍륙 실습 등으로 강동민 자료팀장, 안미정 주임연구원, 김슬기 연구원 강의로 식민지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유물과 기증자료를 실제로 확인하며 총 5회를 진행하였다. “자료를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어서 매우 좋았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앞장서서 식민지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을 제시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조선 폭압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일제의 긴 칼을 박물관에 전시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좀더 충분한 시 간을 확보하여 한 번 더 진행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프로그램이 수강 참여로 끝나지 않고 참가자가 지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합니다.” 등등 유물과 기증자료를 바로 눈앞에서 직접 보며 생동감 있게 진행된 강좌여서 참석자들의 의견과 호응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돌모루 동네배움터’를 통해 6월~10월까지 <우리 동네 박물관 둘러보기>, <독립운동을 활용한 문화콘텐츠 제작 사례1, 2>, <우리 동네 민주 역사 자원 활용하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강좌들을 운영할 예정이다.

뜨겁고 의로운 이름, ‘미스터 션샤인’

2022년 7월 26일 2069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러나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죽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오.” 어린 소년부터 장년까지 가지각색의 복장을 착용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어설프게 집총執銃했지만 결의에 찬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 한국의 독립운동 관련 도서에서는 어디서나 한 번쯤은 마주한 대표적인 의병 사진이다. 이 사진은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기자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Frederick A. Mackenzie)가 남긴 것으로,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당한 직후 경기도 양평에서 만난 의병을 인터뷰하면서 찍었다. 의병은 일제가 이 땅을 유린蹂躪하기 시작한 때부터 해방이 찾아올 때까지 끊임없이 저항하였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찾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그마저도 대부분 일본 군경에 잡혀 일제의 ‘성과기념’으로 기록된 사진이다. ‘영롱한 눈과 자신만만한 미소’라고 표현한 결의에 찬 의병의 모습은 맥켄지가 촬영한 장면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박제되어 책으로만 접하던 이 사진 한 장이 2018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다. 한 방송사에서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무명의 의병들’이라는 기획으로 ‘의병 사진’을 소재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제작해 방영한 것이다.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고 잘 짜여진 시나리오와 볼거리 많은 연출로 인기리에 방영되었는데 몇 가지 역사 왜곡으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잃기 직전의 암울한 대한제국 시기, ‘자유’를 위해 이름도 없이 싸우다 사라진 이들의 기록을 극화한 경우가 드물었고, 다양한 계층이

‘반민특위’ 표석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2022년 6월 24일 1228

해마다 맞는 6월 6일은 전몰장병과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기념일인 ‘현충일(顯忠日)’이다. 반기(半旗, 조기)를 다는 공휴일에다 오전 10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일제히 묵념을 하는 날로 기억되며, 특히 전국의 유흥업소도 이날만큼은 가무음곡(歌舞音曲)을 삼간다는 뜻에서 경찰당국의 요청 및 지도에 따라 관례적으로 문을 닫고 있다. 그런데 6월 6일이라고 하면 비단 ‘현충일’뿐만이 아니라 또 하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적 폭거가 있었던 날이기도 한데, 1949년 6월 6일에 친일경찰세력에 의해 저질러진 ‘반민특위 사무소 습격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일보> 1949년 6월 7일자에 수록된 「경찰(警察) 돌연(突然) ‘특위(特委)’를 포위(包圍), 무기압수(武器押收), 20명(名)을 인치(引致)」 제하의 기사에는 이날의 사건 진행이 이렇게 채록되어 있다. 서울시 경찰국에서는 최운하(崔雲霞) 사찰과장이 반민특위에 피검된 지 하루를 경과한 5일 오후에 이르러 440여 명의 경찰관이 사표를 제출하고 오후 2시부터는 사찰과원 전체가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까지 하고 있었으며 4, 5 양일간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모종 중요한 협의를 한 바 있어 그 결과 여하가 주목되고 있던바 작 6일 오전 8시 반 경 돌연 중부서(中部署) 윤기병(尹箕炳) 서장 지휘 하에 중부서원을 주동으로 하는 각 서원 약 80여명은 남대문로 있는 특위를 포위하고 때마침 출근하는 조사관 및 직원들이 휴대하고 있던 권총을 압수하는 한편 특경대원(特警隊員) 20여 명을 인치하여 갔다. 그런데 이에 앞서 작 6일 아침 7시부터 8시 사이에도 특별조사위원 박우경(朴愚京), 특별검찰관 서성달(徐成達), 동 서용길(徐容吉) 씨 댁에 무장경찰관이 와서 무기의 유무를

문학인들은 도덕과 윤리의 상징적 존재 친일문학상 반드시 폐지돼야 권위상 민족문학연구회 사무국장 인터뷰

2022년 6월 24일 954

[인터뷰] 문학인들은 도덕과 윤리의 상징적 존재 친일문학상 반드시 폐지돼야 권위상 민족문학연구회 사무국장 인터뷰 인터뷰 : 방학진 기획실장 최우현 주임연구원   “친일파가 전부 다 주도하고 해서 친일 청산이 안 됐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요즘에 무슨 친일파 자꾸 얘기하고 그러냐고. 지금 세상이 어떤때인데. 꼭 그런 분들 보면요. 낮도깨비 만나고 온 사람들 같아요.” 대선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작년 여름, 모 라디오 프로그램 패널로 출연했던 정치인 김재원 씨의 발언이다. 아마도 이런 논리인 듯하다. 첫째, 요즘 세상에 친일파는 없다. 즉 다 죽었다. 둘째, 애초부터 청산하고 말고 할 친일이란 게 없었다. 친일청산이란 마치 ‘낮도깨비’처럼, 그 실체가 없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지극히 단순한 접근이지만) 2022년 현재, 생물학적 수명을 유지하고 있는 친일행위의 당사자들은 없다. 그렇다면 친일청산은 어떨까? <친일인명사전>이 나왔으니, 국가차원에서 친일반민족행위를 조사했으니 그걸로 마무리 됐다고 볼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 일제 부역자들에 의해 고착화된 인적, 물적, 문화적 잔재는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친일파 현창을 위한 기념사업, 문학·가요제, 언론·학술상 등은 여전히 ‘성업’ 중이고 친일의 장물(贓物)인 ‘친일재산’은 2005년 관련 법 제정 이래 환수가 이어지고 있으며 징용노동자와 같은 친일행위의 직·간접적 피해자들은 재판 투쟁에 나서고 있다. 이번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난 권위상 민족문학연구회 사무국장은 이 같은 친일잔재의 거대한 한 축이라고 볼 수 있는 ‘친일문학상’ 폐지를 위해 전력을 투구해온 인물이다. 우리 연구소

임진왜란 왜장 이름 딴 다리, ‘코바야카와교’ 돌기둥 최초 확인

2022년 6월 24일 802

[초점] 임진왜란 왜장 이름 딴 다리, ‘코바야카와교’ 돌기둥 최초 확인 • 편집부 최근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전2권)을 펴낸 이순우 책임연구원이 ‘출간 기념 용산답사’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코바야카와교(小早川橋)’ 돌기둥[橋名柱]의 존재를 최초로 확인했다. 이 돌기둥은 전쟁기념관 북문의 길 건너편 지금은 폐쇄된 캠프 킴(Camp Kim) 구역의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자리는 이태원 쪽에서 발원하여 미군기지 안쪽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이 한강로와 만나는 지점에 해당한다. 코바야카와교의 ‘코바야카와’는 임진왜란때 왜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이다. 코바야카와는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무장으로 임진왜란 때 벽제관에서 명군(明軍)을 대파하는 등 명성을 얻었으나 행주대첩에서 권율 장군에게 패배했다. ‘코바야카와교’는 일제강점기 용산 주둔 일본군 병영지 외곽에 군사적 목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카다 코(岡田貢)가 <경성휘보> 1942년 3월호에 남긴 자료에 의하면 이번에 발견된 돌기둥이 1926년 11월에 기존의 다리를 석교(石橋)로 개조하면서 조성된 것이다. 일제는 이 다리 외에도 지금의 전쟁기념관 구역 북쪽을 따라 흐르는 소하천에도 ‘코바야카와(小早川)’라는 이름을 붙였다. 연구소는 관련 기록과 함께 이를 입증하는 사진자료도 공개했다. 이순우 책임연구원은 “옛 둔지미와 이태원리 일대를 강제점유한 일본군은 용산병영지 곳곳에 일본의 언어 관행을 좇아 융경산(隆景山, 류케이잔)이라거나 사방견산(四方見山, 시호미야마), 선견산(船見山, 후나미야마), 월견대(月見台, 츠키미다이), 용대(勇台, 유다이), 하강(霞ケ岡, 카스미가오카), 학강(鶴ケ岡, 츠루가오카) 따위의 일본식 지명을 부여하였다. 소조천(小早川, 코바야카와)도 이런 유형의 하나이지만 임란 때의 왜장을 기념한 명칭이라는 점에서 그 의도가 매우 불순하다”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연구소는 이를 계기로 용산 미군기지

전기호 지도위원 별세

2022년 6월 24일 698

[초점] 전기호 지도위원 별세 전기호 지도위원이 6월 14일 별세했다. 고인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1960년 경희대 민족통일연구회를 만들어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나섰고 이후 경희대 교수로 재직했다. 고인의 대표 저작인 <일제시대 재일 한국인노동자계급의 상태와 투쟁>은 일제강점기 재일 한국인 노동자계급의 형성요인, 일본 자본주의의 후진성·반봉건성·군사성이 한국인 노동자계급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에 미친 영향을 논증하였다. 고인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며 징용·징병으로 인한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 규명과 보상에 힘썼다. 그 밖에 사월혁명회 이사장,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지낸 고인은 2016년 6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써달라며 성금 1천만원을 기부하여 박물관 건립에도 큰 힘을 보탰다. 한편 6월 16일 오후 6시 경희의료원 장례식장 영결식장에서 열린 ‘전기호 교수 추모의 밤’에 임헌영 소장, 윤경로 식민지역사박물관장, 조세열 상임이사, 박수현 사무처장 등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반민특위가 패망하던 날의 비극

2022년 6월 24일 715

[자료소개] 반민특위가 패망하던 날의 비극 김상돈 민의원 의원 글은 1949년 당시 반민특위 부위원장이었던 김상돈 의원이 <진상(眞相)> 1957년 12월호에 기고한 것이다. 김상돈 의원은 반민특위 설치 초부터 1949년 6월 6일 특경대 습격 때까지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했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위정 당국자의 맹성(猛省)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1949년 1월 8일부터 기소 만료일인 8월 31일까지 반민특위가 체포, 소환한 친일파는 688명이고 이 중에서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자는 293명이었다. 특별재판부가 해체되기 전까지 판결 받은 자는 78명이고 미결수가 215명이었다. 78명 중 징역 1년 이상의 금고형(禁錮刑)을 받은 자는 10명뿐이고 나머지는 집행유예, 공민권정지, 무죄, 형면제, 공소기각으로 미약한 처벌을 받거나 무죄 방면되었다. 금고형을 받은 자들도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모두 풀려나 실제로 온전히 처벌받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편집자 주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설치되었던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자못 컸었다. 그러나 당초에는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는 듯 하더니 나중에는 자취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이제 당시의 부위원장이었던 김상돈(金相敦) 씨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선수(先手)를 쓰는 친일파 정부가 수립되자 국가와 민족의 기강을 살리기 위해 지극한 소수 악질 친일파들을 일단 숙청하여야 된다는 것이 국민들의 공통된 여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그리 조급하게 처리할것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조사에 임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해괴한 것은 반민법에 저촉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