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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군사쿠데타와 국가폭력에 저항해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켜내려 한 의인義人들
[특집] 군사쿠데타와 국가폭력에 저항해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켜내려 한 의인義人들 편집부 12월 3일 밤 10시 23분경 긴급 브리핑을 연 윤석열은 종북과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고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전국 대상의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국회의사당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민주당사, 언론사 등 주요 기관에 무장 계엄군을 동원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를 통해 ①국회 및 정당의 정치활동 일체 금지, ②모든 언론과 출판의 자유 통제, ③전공의 및 의료인 불복종 시 처단, ④재판 절차나 영장 없는 일방적인 체포, 구금, 압수수색 등 전 국민의 정치적·사회적 기본권을 박탈하는 통제 조치를 공표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조국혁신당 등 야당은 불법 계엄령에 의한 친위 쿠데타이자 전대미문의 국헌문란 행위라 규정하고 유튜브 방송과 SNS를 통해 국회의원과 시민들에게 국회의사당에 모이도록 호소했다. 국회 정문에서 출입을 금지하는 계엄군과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국회의장을 비롯한 여·야당 대표와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해 12월 4일 새벽 1시경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하였고 오전 4시 30분 국무회의 의결로 계엄 해제를 선포함으로써 6시간 만에 완전히 종료하였다. 야당은 계엄 해제 즉시 내란 수괴인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였다. 국회는 12월 14일(토) 오후 4시 본회의를 열고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이에 따라 윤석열의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고 이제 윤석열에 대한 완전한 탄핵은 헌법재판소의 손으로 넘겨졌다. 윤석열이 국방부, 방첩사, 수방사, 특전사 등 군 수뇌부와 함께 오래전부터
대구지역위원회 총회
[초점] 대구지역위원회 총회 대구지역위원회 총회가 12월 12일 대구 대명동 봉자주막에서 열렸다. 이날 총회에서는 이상술 대구지부장 후임으로 권주연 후원회원(피아노 학원 운영)을 대구지역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날 총회에는 권주연 후원회원을 비롯해 권혜민 김광출 김영범 김영희 박종혜 송정훈 이상술 이수진 이원식 장현주 정종훈 조현제 채영희 천윤경 후원회원이 참석했다. 권주연 신임 위원장은 고령 출신으로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상덕선생기념사업회 활동을 비롯해 지역의 시민사회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고문에는 이상술 전 지부장을 추대한 데 이어 이수진(재정), 천윤경(홍보), 김광출(관리) 후원회원이 각각 집행부에 선출되었다. 부위원장 등 후임 집행부는 추후 선출키로 했다. 총회에는 김순흥 광주지역위원장, 변량근 부산지역위원장을 비롯해 송필경(전태일의 친구들 대표), 유민아빠(김영오) 윤솔지(영화 제로썸 감독) 등도 참석해 축하해 주었다. 그동안 대구지역위원회는 홍준표 대구시장이 동대구역에 박정희 동상 설치를 공표한 이후 여러 대구지역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박정희 우상화 반대 범시민운동본부’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10월 항쟁 추모식, 합천군 일해공원 철거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또한 광주에서 시작해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은 광주 탕탕전에 이어 올해 첫 번째로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열린 ‘탕탕전’ 행사의 하나인 분장대회에 참여해 대상을 받기도 했다. 대구지역위원회는 2025년에는 ‘인혁당’ 희생자 50주기 행사, 광복 80주년 기념행사 등 여러 사업에 참여할 계획이다. 한편 새로 개정된 (사)민족문제연구소 정관과 운영위원회 세칙에 의거하여 부산지부를 부산지역위원회로 바꾸었으며 신임 권주연 지역위원장은 (사)민족문제연구소 사원총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추인받아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
『세계유산으로 역사배우기 – 사도광산에서 기억해야 할 한국인 강제동원의 역사』 역사부교재 발간
[초점] 『세계유산으로 역사배우기 – 사도광산에서 기억해야 할 한국인 강제동원의 역사』 역사부교재 발간 11월 30일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세계유산으로 역사배우기—사도광산에서 기억해야 할 한국인 강제동원의 역사』 역사부교재 2종(초등용·중등용)을 발간하였다. 2024년 경기도 일제잔재 청산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제작한 이 교재는 세계유산의 진정한 가치와 일본 산업유산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을 부정하며 산업유산 현장에서 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을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이번 역사부교재 발간 사업은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2종의 책에는 일본에 있는 세계유산,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산업유산 현장을 직접 방문 조사하고 그 과정에서 축적한 사진기록과 관련 사료 분석 내용이 풍부하게 실렸다. 유네스코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친 인류가 과거 잘못에서 비롯된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미래 세대에게 교육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두운 역사를 상징하는 공간조차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일본의 산업유산도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성과와 밝은 면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침략전쟁으로 이룬 근대화의 어두운 면,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으로 희생된 이들을 제대로 추모하고 알려야 한다. 『세계유산으로 역사배우기 – 사도광산에서 기억해야 할 한국인 강제동원의 역사』 역사부교재는 세계유산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2015년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메이지일본의 산업혁명 유산’과 2024년에 새로 지정된 사도광산이 어떤 곳인지, 그곳에 끌려간 한국인들과 그밖에 강제노동에 희생된 이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를 다루었다. 특히 하시마탄광과 사도광산에 동원된 피해자들의 이야기까지
‘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초점] 동학농민혁명·청일전쟁 130주년 특별전 ‘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은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던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가른 역사적 순간이자,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뒤흔든 중대한 사건이었다. 근현대사기념관은 동학농민혁명·청일전쟁 130주년을 맞아 특별전시 ‘지도에 새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개막식을 지난 10월 16일(수) 개최하였다. 이번 특별전은 서울시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천도교중앙총부와 강덕상자료센터 후원으로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여 12월 31일까지 진행된다. 개막식은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 임헌영 소장, 근현대사기념관 윤경로 관장, 강북구 이순희 구청장, 강북구의회 김명희 의장,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 관장 등 많은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전시 구성은 1부 <동학 창시, 사람이 하늘이다>, 2부 <1차 봉기, 사발에 담긴 농민의 꿈>, 3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 4부 <2차 봉기, 보국안민(輔國安民) 깃발 들고 일어선 항일 농민봉기> 등 네 시기로 나누어, 대동여지도, 대한여지도, 일본 점령지 실측지도, 조선내란지도 등 19세기 후반 조선과 일본에서 제작된 다양한 지도를 통해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의 전개과정을 상세히 조명하였다. 이와 함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의 최초 판본인 1880년 인제 경진판과 현존하는 『용담유사』 판본 중 가장 오래된 1893년 계사판,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당시 포고문, 임명장, 농민군 편지를 비롯해 202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전시된다. 또한 청일전쟁 화보집, 사진, 일본 군인들이 사용하던 화투패와 같은 희귀 유물도 함께 소개된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국제 정세가 다시금 요동치는 상황에서, 1894년의 혁명과
민족사랑 202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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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3)
[소장자료 톺아보기 65] 통계 수치를 활용해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를 선전하는 시정기념엽서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3)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발전상을 홍보할 목적으로 시정기념엽서 도안에 산업과 교육, 운송과 관련한 통계 수치와 관련 막대 그래프를 이용해 그 추이를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그 대표적인 시정기념엽서는 위에 제시된 시정5주년(1915), 시정6주년(1916), 시정25주년(1935), 시정30주년(1940) 기념엽서이다. 먼저 시정5주년기념엽서에서는 쌀과 면화의 수확량과 유출량을 1912년부터 1914년까지 3년간 비교했다. 이를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위 표에서 쌀과 면화의 경작면적과 수확량, 그리고 어획량이 해마다 증가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쌀과 면화의 경우 해마다 생산량 대비 일본으로의 유출량이 증가하고 있다. 즉 쌀의 경우 1912년에 6.4% 1913년에 8.6% 1914년에 10.8%로 늘어나고 면화도 1912년에 8.2% 1913년에 10% 1914년에 12.2%로 증가하여 생산량이 늘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쌀과 면화가 일본으로 유출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출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물자 수탈 양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파악된다. 시정6주념기념엽서에는 축우(畜牛)와 소가죽, 엽연초 경작면적과 생산량의 증가 추이를 1912년부터 1914년까지 통계표로 보여준다. 시정25주년기념엽서에는 ‘성장해가는 조선(伸び行く朝鮮)’이란 제목으로 한반도 지도 위에 농공산품 생산량, 우편·전신·전화, 철도 길이, 무역량을 1910년과 1933년의 수치로 비교하였다. 농공산업, 우편산업, 철도와 무역 부문에서 조선총독부 시정 25년간의 성과를 가시적으로 선전하는 것이다. 1940년 10월 1일 시정30주년기념엽서가 발행되었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인해 이후 시정기념엽서의 발행이 중단되고 말았다. 시정30주년기념엽서 봉투의 앞면에는 “국위선양 견인지구(國威宣揚 堅引持久)”라는
나는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후원회원마당] 나는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민족문제연구소를 다녀와서 전여주 더불어민주당 관악을 청년위원회 간사 10월 26일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겹치는 날로 1909년에 안중근 장군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20년의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 모두 10월 26일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일제 식민지에 대항하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기에 청년위원회는 이런 정신을 기념하고자 민족문제연구소를 찾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기업이나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순수하게 시민들의 자발적 후원으로 운영되는 곳으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식민지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는 특별히 국세현 기획팀장님의 친절한 맞이를 받았고 이어 방학진 기획실장님의 세세한 가이드로 처절했던 35년의 시간여행을 시작했다. 그중 나의 발길과 마음에 유난히 깊이 남은 곳은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온 사람들을 심문하고 가두었던 곳을 재현해 놓은 곳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온 사람들을 심문한 기록들이 남아있고 이를 토대로 하여 실제 음성으로 그 내용을 들어볼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장소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나무로 된 책상과 의자에 앉아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목소리로 옮겨져 있는 분들은 모두 학생이었고 질문은 모두 같았는데 이름과 나이, 독립운동에 찬성하는 이유, 독립운동에 참가한 이유, 독립운동을 하면 독립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지 등을 물었다고 한다. 나는 그 딱딱하고 차가운 의자에 앉아 질문과 답변을 들으며 ‘나라면 이렇게 답할 수 있었을까? 나라면
신채호 선생 추도사와 순국한 조선혁명군 동지 약력
[자료소개] 신채호 선생 추도사와 순국한 조선혁명군 동지 약력 편집자주 – 이 달에 소개하는 자료는 조선민족혁명당 기관지 『민족혁명』 제2호(1936.4.15)에 실린 것이다. [출전]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7: 조선민족혁명당 및 기타 정당』, 국사편찬위원회, 2009 고 단재 신채호 선생을 추도함 진인(震人) 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은 근세 조선민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초의 정치적 선각자의 하나며, 진정 열렬한 혁명가의 하나이며, 단연 인류를 초월한 천재적 사학가이며, 그리고 망인국종(亡人國種)의 가련한 비고(悲苦)를 철두철미하게 비상(備嘗)한 망국 조선민족의 대표적 표본이었다. ‘단재 신채호’의 명칭이 처음으로 조선 전국에 알려지기는 선생이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신문기자 시대로부터이었다. 왜적의 침략으로 인하여 4천여 년 조국이 조석에 경복(傾覆)되고 있고, 노예의 철강이 민족의 두상에 박근(迫近)하고 있거늘 부패한 정부와 우매한 민중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봉건적 심몽(深夢)에 방첨(方甛)하고 있던 당시 한말의 정세에 있어서 오직 선각한 선생은 1개의 빈곤한 청년학생으로서 서안(書案)을 일척(一擲)하고 신문기자가 되어서 전국적 궐기에 의한 국가의 구망(救亡)을 절규하였던 것이다. 그 열렬한 애국사상, 명확한 논리, 그리고 사람의 가슴을 짜개고 붇는 듯한 그의 독특한 필치에서 짜서 나오는 신문사설과 논문은 보통의 신문이 아니고 이는 곧 군중을 격동하는 애국의 혈화(血火)이었으며, 간적(奸賊)을 참수하는 정의의 상검(霜劍)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의 언론이 기재된 신문이 전국에 전파될 때마다 전국의 방방곡곡에서는 기천기만의 애국지사가 용출하고, 의병이 궐기하고, 광범한 군중이 정치적 사상에 각성되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문기자이냐? 선생 이전에 이같은 위대한 신문기자를 조선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고,
마산정수장 터에 남아있는 사이토 총독의 휘호석판 ‘산명수청(1930년)’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3] 마산정수장 터에 남아있는 사이토 총독의 휘호석판 ‘산명수청(1930년)’ 뇌물사건을 일으킨 야마나시 총독의 ‘피운결수(披雲決水)’ 휘호는 폐기 이순우 특임연구원 마산(馬山), 진해(鎭海), 충무(忠武), 장승포(長承浦), 삼천포(三千浦) ……. 이들은 한때 시(市) 단위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했으나 도농복합시의 탄생과 통합창원시의 출범과 더불어 지금은 전면에서 사라진 — 우연찮게도 전부 항구도시이기도 한 — 지역들의 이름이다. 이들 가운데 1899년 5월 1일 이래 개항장이었던 마산은 조선총독부가 공식 출범하던 1910년 10월 1일에 맞춰 ‘종래의 창원부 일원(昌原府 一圓)’을 관할구역으로 하는 ‘마산부(馬山府)’의 이름으로 처음 전면에 등장하였다가 1914년 3월 1일에 이르러서는 각국거류지(各國居留地)와 그 주변을 ‘마산부’로 따로 떼어내고 잔여 지역은 창원군(昌原郡)으로 개편되는 변화가 있었다. 일찍이 일제는 개항과 함께 이곳에 ‘부산영사관 마산분관’을 두었다가 그 이듬해인 1900년 4월 19일에 ‘마산영사관(馬山領事館)’을 정식으로 개설한 바 있었다. 그 이후 국권침탈과정에서 1906년 2월 1일에는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에 따라 “종전 일본영사관이 담당했던 사무와 관할구역 내 경찰, 재판, 감옥사무 등을 관장하는 통감부의 소속기구”로서 ‘마산이사청(馬山理事廳, 경상도 서남부 일대를 관할)’이 이를 대체하였다. 이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진해항(鎭海港)에 군항(軍港)을 설치한다는 결정이 구체화하면서 진해만(鎭海灣) 일대에서 군용지 수용절차가 착착 진행되었고, 그 결과로 1911년 1월 1일에는 제5해군구(第五海軍區;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가 창설되어 대마(對馬, 쓰시마) 및 조선(朝鮮)의 해안해면(海岸海面) 일체가 이곳의 관할로 귀속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새로 구축되는 진해만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저도와 가덕도에 배치되어 있던 포병대(砲兵隊)는 1909년 7월 31일에
일본의 일상 속 우경화와 역사수정주의(2)
[연구소 글방 17] 일본의 일상 속 우경화와 역사수정주의(2) – 일본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 김덕영 책임연구원 3. 일본 애니메이션이 과거를 말할 때 (1) 곤조(根性)의 문제 일본 애니메이션이 과거를 말하는 방식은 반드시 지난 역사를 주제로 했을 경우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작품에서 말하는 주된 메시지가 낡은 사고방식일 경우도 또한 과거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고 본다. 배구만화 <Attack NO.1> 야구만화 <거인의 별> 등 스포츠 만화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곤조는 지금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된 정신적 기둥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TV시리즈물로 방영된 코시타 테츠히로의 <불꽃의 투구아 돗지 탄페이(炎の鬪球兒ドッジ彈平)>(국내명 <피구왕 통키>)다. 이런 류의 애니메이션에는 주인공이 이른바 ‘지옥훈련’이라 불리는 온갖 특훈을 이겨내고 끝내 승리하여 패자를 자기 앞에 무릎 꿇게 만든다. 패자는 용서를 빌거나 패배를 자인하며 승자는 넓은 아량으로 이를 받아주는 일관된 스토리를 갖고 있다. 지옥훈련의 과정은 가혹하다. 집체 만한 바위를 굴러 떨어뜨리고, 절벽에서 떨어지고, 맨손으로 땅을 파며 때론 훈련을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한다. 훈련에 게으른 자에게 혹독한 체벌이 가해진다. 그런 훈련을 받는 선수들은 초등학생이다. 그들에게 더 이상 스포츠는 체력단련이나 유희의 의미가 없다. 반드시 승리만이 의미가 있다. 스포츠가 체력단련과 유희의 의미를 잃기 시작한 것은 일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6년 총독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1938년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의 3대 교육방침으로 조선 학생의 황국신민화를 꾀하고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학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