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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장항습지 지뢰폭발사고를 당한 김철기 회원, 어려운 역경을 딛고 생명・평화운동가로 나서

2021년 12월 28일 1672

11월 24일 오후 5시 연구소 3층 회의실에서 김철기 회원, 민병래 회원, 방학진 기획실장,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등이 모여 김철기 회원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가졌다. 6월 4일 사고 이후 오랜 기간 치료와 재활 과정을 거쳐 씩씩한 모습으로 연구소를 찾은 김철기 회원을 보니 참으로 반가우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 2021년 12월 4일자 기사 「민병래의 사수만보 65화」 “내 발이 없네, 내 발이…” 발목지뢰로 오른발을 잃은 김철기를 전재한 것이다. 어려운 처지에도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준 김철기 회원과 기사 전재를 허락해준 민병래 회원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 편집자 지난 6월 4일 오전 9시 45분 펑 소리와 함께 작은 모래기둥이 솟구쳐 오르며 김철기의 몸은 뒤로 튕겨져 나갔다. 매캐한 먼지로 주변이 어지러웠다. 누군가 “철기씨, 이를 어째!” 하며 악을 썼다. 순간 정신을 차린 김철기는 몸을 일으켰는데 오른쪽 다리의 무릎 아래가 형체도 없이 바스라졌고 피범벅이 된 살점과 뼈가 너덜거렸다. 그는 소리쳤다, “내 발이 없네, 내 발이…” 함께 작업을 하던 동료들은 안절부절하며 김철기를 평평한 곳으로 옮겼다. 폭발로 살점과 핏줄이 엉겨 붙은 탓인지 피가 줄줄 흐르는 정도였다. 그들은 수건을 동여매 지혈을 하고 119에 출동을 요청했다. 한편 9사단 한강대대, 고양시 환경정책과, 한강유역환경청 등 여기저기에 연락을 했다. 근처에 있던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고양지부장 박평수는 오전 9시 47분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한강’의 조합원 김철기는 이날

연구소 주관, 제1522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2021년 12월 28일 716

[초점] 연구소 주관, 제1522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연구소는 12월 15일 ‘1522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를 주관했다.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시위에는 연구소 상근자 10여 명도 참가하였다. 전영민 시드니 평화의 소녀상 대외협력담당 활동가와 김서경, 김운성 평화의 소녀상 작가도 동참하여 연대발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엄마부대 주옥순, 낙성대연구소 이우연 등 극우주의자들은 수요시위를 방해하기 위해 고성능 확성기를 통해 이승만과 박정희 찬양 발언 심지어 일장기를 흔들기도 하는 등 시종 혐오와 폭력적 언동을 일삼았다. 이에 연구소 상근자들은 그들을 향해 ‘양심거울’을 만들어 대응하였다. 사실 연구소는 12월 8일 사전조사를 위해 정기 수요시위에 참가하였다. 평화롭던 수요시위가 일부 극우 세력들의 공격으로 인해 변질되고 있었다. 확성기를 사용하여 사회자의 목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노골적인 방해하며 ‘수요시위 중단’, ‘위안부는 가짜다’라며 허구의 이야기를 사실처럼 떠들었다. 그래서 거울에 비춰진 본인들의 모습을 보면 스스로 부끄러운 행동임을 자각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양심거울’을 준비하기로 했던 것이다. 내년 1월 5일이면 수요시위 30주년이 된다.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과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연구소의 투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 기획실 총무 부팀장 신다희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학술 심포지엄 개최

2021년 12월 28일 737

[초점]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학술 심포지엄 개최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을 맞아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12월 9일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한 이번 행사는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에서 진행되었으며 온라인으로 생중계 되었다. 심포지엄은 방학진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윤경로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의 인사로 시작되었다. 기조강연은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신흥무관학교를 다시 생각한다’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신흥무관학교 상층지도부 중심의 기존 경향을 지양하고 한인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신흥학우단과 신흥학우보의 역할로 연구의 초점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독립운동기지건설운동이 항일운동 전반에 미친 영향을 재조명하고, 열악한 여건에도 굴하지 않은 독립운동자 사회의 민족의식과 신념을 21세기 청소년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완태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은 제1주제 ‘신흥무관학교와 국군의 독립정신 계승’ 발표에서 한말에서 국군 창설에 이르기까지 군의 변천사를 개관하고, 대한제국군-대한의병군대한독립군-한국광복군-대한민국 국군으로 이어지는 군의 정통성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일제의 대한제국 정규군 해산 뒤에는 고종의 밀지를 받은 의병군이 정통성을 계승했고 그 역량이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국군의 역사적 연원도 이러한 항일세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토론자로 나선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는 국군의 정통성 문제에 대해 학계뿐만 아니라 국방부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지원 대림대 교수는 제2주제 ‘신흥무관학교와 여성 독립운동’ 발표에서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과 이상룡의 손부 허은의 회고록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 관련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관, 강화도와 안동 등 국내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2021년 12월 28일 670

[초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관, 강화도와 안동 등 국내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 기념 국내 답사’를 진행했다. 중국 내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대신 올해는 국내 답사로 전환한 것이다. 코로나19로 답사 인원을 25명 이내로 제한한 가운데 11월 29일은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대하며 이후 독립전쟁론의 시발이 된 정미의병의 격전지인 강화도를, 12월 4일~5일은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의 고장인 안동을 다녀왔다. 특히 안동답사 때는 석주 이상룡의 임청각에서 숙박하여 답사의 보람을 더했다. 당초 신흥무관학교 출신 김원봉·윤세주의 고향인 밀양과 신흥무관학교 설립 자금 마련에 큰 역할을 했던 영석 이석영 선생의 유적지인 남양주 답사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전격 취소하였다. • 방학진 기획실장

‘근로보국’이란 이름의 강제동원

2021년 12월 28일 2939

[소장자료 톺아보기 33] ‘근로보국’이란 이름의 강제동원 • 강동민 자료팀장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하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노동력 확보는 당연한 수순이다. 일제는 이렇게 필요한 노동력을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동원해 전쟁을 뒷받침하려 했다. 강제동원의 형태는 여러 방식이 존재했는데 ‘근로보국대’도 그중 하나다. ‘근로보국’이란 ‘힘써 일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뜻으로 일제는 성별·계층·나이를 가릴 것 없이 일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동원 대상은 14~50세 남자와 14~25세의 미혼 여성으로 주 임무는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하는 공출이나 군사상 필요한 토목 건축·운반 작업에 대한 부역, 지역 단위의 공공 이익과 필요에 의한 작업에 대한 부역, 관 알선이나 징용 등 노무 인적 자원 보급이었다. 일제는 1938년 6월 ‘학생생도의 근로봉사작업 실시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을 발표하고 학생들을 근로보국대에 편입시켰다. 학생들의 경우 학기 중에는 학업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근로보국’ 활동은 주로 방학에 이루어졌지만, 중학교나 전문학교에는 방학을 ‘심신단련’ 기간으로 부르고 방학이라는 관념을 아예 없애 버렸다. 방학은 전쟁을 치루기 위해 후방에서 ‘땀을 바치는’ 시간이 되었다. 1939년 조선총독부는 근로보국 활동을 학기 중에도 실시하게 되고 아예 ‘근로보국’을 정식과목으로 편입하여 성적까지 매겼다. 1941년 이후에는 부족한 노동력을 확충하기 위해 「국민근로보국협력령」을 시행하여 모집, 관알선 등 단계적으로 확대 편성하였다. 특히 1943년부터는 공장·사업장의 손쉬운 작업은 근로보국대의 노무로 충당할 것이 지시되면서 그 동원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제는 조선 내의

일제의 잔존 기념물 가운데 유독 사각뿔 모양이 많은 이유는?

2021년 12월 7일 2763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라고 하면 근대시기에 아주 이름난 서화대가(書畵大家)의 한 사람이다. 창덕궁 희정당에 그려진 벽화(‘내금강 만물초 승경도’와 ‘해금강 총석정 절경도’)가 그의 손에서 나왔고, 금강산 구룡폭포의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彌勒佛)’ 큰 바위 글씨도 그의 작품이다. 일찍이 그는 궁내부(宮內府)에서 주사, 비서관, 시종의 자리를 지내면서 영친왕(英親王)의 서예 스승으로도 있었고, 워낙 많은 글씨를 남긴 탓에 지금도 전국의 여러 사찰에는 그가 쓴 편액(扁額)과 주련(柱聯)이 수두룩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그는 또한 사진가(寫眞家)인 것으로도 유명한데, 서울 석정동(石井洞, 지금의 소공동)에 천연당사진관(天然堂寫眞館)을 개업하고 이곳에 고금서화관(古今書畫觀)을 함께 운영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의 사업영역은 여기에만 그치질 않고 서예에 관한 자신만의 확고한 필력을 바탕으로 ‘석공장(石工場)’을 부설(附設)하여 꾸려왔던 모양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16년 6월 30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 문안이 수록되어 있다. 본관(本館)에서 고금서화매매(古今書畵賣買)와 현판(懸板), 주련(柱聯), 표장조각(裱粧彫刻)의 다년 수응(多年 酬應)함은 일반임지이금우(一般稔知而今又) 석공장(石工場)을 부설(附設)하고 남포오석(藍浦烏石), 강화애석(江華艾石), 화강석(花岡石)으로 입비(笠碑), 무립비(無笠碑), 상석(床石), 지석(誌石), 공동묘지 표석(共同墓地 標石) 급(及) 양옥문미(洋屋門楣), 석각자(石刻字) 등(等) 제반 부속석물(諸般附屬石物)을 교묘조제(巧妙彫製)하며 전(篆), 예(隷), 해(楷), 행(行), 초(草), 안(顔), 유(柳), 구(歐), 유(劉) 등(等) 각가법체(各家法躰)로 본인(本人)이 친서(親書)하여 사일등선수(使一等善手)로 지정전각(至精鐫刻)하여 수구수응(隨求需應)하오며 원근(遠近)을 불구(不拘)하고 입석(立石)까지 의청구시행(依請求施行)하오니 선로기차(船路汽車)의 운수편리(運輸便利)한 차시(此時)에 위선사업(爲先事業)의 유지(有志)하신 경향 첨군자(京鄕 僉君子)는 속속청구(速速請求)하시요. …… (중략) 경성 장곡천정(京城 長谷川町) 고금서화진열관(古今書畵陳列館) 김규진 고백(金圭鎭 告白). 여기에는 이 석공장에서 생산하는 여러 종류의 석물도안을 함께 그려놓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예를 들어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정연태

2021년 12월 7일 984

학술부문 수상자 정연태 수상저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는 순간 당황스러운 나머지 너무 부담스럽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일제 침략사와 친일 배족사와 사투를 벌이며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 삶 전체를 바치신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고, 지금까지 저의 삶이나 역사연구는 말할 것도 없고 수상의 계기가 된 이번의 졸저 또한 선생님의 그 치열한 삶과 실천적연구를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얼떨결에 받은 통보에 심정은 복잡했습니다만, 그동안의 나태하고 부족한 자세와 성과를 성찰하고 ‘한국 근현대사의 진실 규명과 역사정의 실현’에 더욱 정진하라는 격려 차원에서 저를 수상자로 선정하셨으리라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는 한국 근대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 역사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19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의 한국 근대는 근대 세계가 경험할 수 있었던 온갖 역사과정, 다시 말해 종교전쟁 이외의 각종 야만성과 문명성이 뒤섞여 회오리 친 세계 근대의 전시장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근대는 한편으로는 피침략과 피식민 지배, 분단과 전쟁과 학살, 독재와 종속으로 점철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하고 평화를 지키고 통일을 모색해온 다채롭고 역동적인, 역사적 시간대였습니다. 한국 근대의 역동성은 현재도 진행 중이라고 봅니다. 한편으로는 촛불시민혁명, K-컬쳐의 세계적 유행, K-방역의 잠정적 성공 등에서 보듯, 이제 한국사회는 외부로부터 근대적 제도·시스템·문화 등을 수용하는 단계에서 새로운 제도, 시스템, 문화 등을 외부로 발신하는 단계로

임종국상 언론부분 수상 김종성

2021년 12월 7일 599

언론부문 수상자 김종성 시월의 마지막 금요일인 지난달 29일, 임종국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오마이뉴스 편집국의 전언을 받은 뒤, 또 민족문제연구소와 전화통화를 한 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는 느낌에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날이 도적같이 오리라’는 말처럼 임종국 선생이 홀연히 제 옆으로 다가와 곁에 계시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친일문제 전문가인 정운현의 <임종국 평전>은 선생을 잉태한 어머니가 설중매를 목격하는 꿈을 태몽으로 꾸었다는 일화를 전합니다. 눈이 하얗게 덮인 벌판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하얀 매화꽃을 본 뒤 선생을 낳았다는 일화입니다. 눈 덮인 겨울과도 같았던 박정희·전두환 치하에서 친일청산을 위해 힘겨운 분투를 했던 선생의 일생과 상당히 잘 어울리는 태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임종국 선생을 기리는 상을 받게 된다고 하니, 너무도 뜻밖이라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친일파·위안부·강제징용 등에 관한 그간의 글 속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결함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글을 좋게 보아 주시고 임종국상을 주신 민족문제연구소와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에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더불어, 죄송스러운 마음도 함께 올립니다. 더 깊고 더 나은 글을 쓰지 못한 아쉬움이 뒤늦게 가슴을 누릅니다. 그리고 민족문제에 관한 기사를 많이 쓰도록 격려해주고 글의 문제점을 냉정하게 비판해준 오마이뉴스 기자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 글쓰기의 주요 참고자료인 <친일인명사전>을 집필하신 분들께도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 사전이 발간될 거라는 말을 2001년에

김동인 소설의 환멸의식 연구

2021년 12월 7일 1368

이 글은 10월 23일 친일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에서 발표된 「김동인 소설의 환멸의식 연구」 요약문이 다. 이 요약문을 작성하여 보내준 최창근 교수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편집자 1. 서론 김동인은 이광수와 함께 서구문학 수용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근대의 문을 연 인물들이다. 그들의 공과 과는 지금까지 다소 분리해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친일행적이 자신들의 경험이나 기질과 그로 인해 형성된 가치관 및 예술관으로부터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살피는 작업은 친일행위를 보다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판단된다. 김동인의 경우에도 그의 문학과 친일을 연결하는 것은 다소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김동인만의 문학세계가 가지고 있는 현실부정과 도피의식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동인의 소설과 평론을 통해서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여기에 내재된 친일의 가능성을 추출해 보고자 한다. 2. 인간의 원소화와 과학실험 김동인에게 소설은 작가의 창조에 의해 생겨난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였다. 문학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가치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김동인의 예술론에서는 근대, 그 중에서도 과학적 성과에 대한 그의 동경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과학자는 실험실에서 원소를 발견하고 화학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며 현대 문명의 기초를 닦았다. 김동인이 근대의 가치를 증명하고 인간의 창조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과학과 예술 모두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많은 글에서 찾을 수

니콜라이 부처 추방 전말

2021년 12월 7일 643

1949년 8월 서울시경 사찰과는 서울 서대문구 정동 1번지에 자리잡고 있던 소련영사관을 수색하여 영사관 관리인 니콜라이 크레오셉과 그의 아내 니콜라이 줄리안을 간첩 협의로 검거했다. 이들은 1947년 5월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을 때 소련측 대표 스티코프 중장의 수행원으로 와서 영사관 관리인이란 명목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6월 공세’를 펼쳐 국회 프락치 사건을 획책하고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며 공안정국으로 몰아갔다. 소련영사관 관리인 부부의 체포, 구속 수사도 반공 의식의 강화를 조장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이들에게 간첩 혐의로 실형을 가하면 엄청난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이들에게 국외추방령을 내리고 소련영사관 폐쇄 조치를 취했다. <신천지> 1950년 1월호에 실린 <니콜라이 부처 추방 전말>은 니콜라이 부부의 구속수사와 간첩 혐의, 그리고 국외추방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편집자 주 대단한 인물은 아니지만 니콜라이 크레오셉과 그의 아내 줄리안은 문제의 소련인이기 때문에 그들을 추방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뉴스였다. 지금도 일부에서 말하기를 결국 3・8 이북으로 쫓아 보내고 말 것을 진작부터 그렇게 할 것이지 왜 구속한다는 둥 송청한다는 둥 불기소한다는 둥 한바탕 떠들썩하고 나서야 추방하느냐고 하지만 두 달 동안은 그러는 동안에 대수롭지 않은 이 니콜라이 부처는 완전히 화제의 인물로 클로즈업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10월 4일 그러니까 일요일 다음에 개천절이 끼어 연이틀의 공휴일 후에 서울시 경찰국 트럭에 실어 개성지구 3·8선으로 호송되어 이북으로 추방되었는데 그들이 추방되던 당일로 그러하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