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 기념 콘텐츠공모전 시상식
[초점]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 기념 콘텐츠공모전 시상식 • 방학진 기획실장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을 맞아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공모전을 개최했다.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해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음악, 회화, 문학, 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응모작을 모집한 결과 50여 점이 출품되었다. 9월 13일 열린 심사에는 김완태 전 육사 교장, 역사학자 조재곤 박사, 이지상 가수가 참여해 대상 4명, 우수상 10명을 선정했다. 심사 결과 대상인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회장상은 이석영 6형제를 소재로 한 희곡을 출품한 이종화님, 국가보훈처 처장상은 석주 이상룡을 소재로 타임슬립 형식의 웹툰을 출품한 김준성 님, 육군사관학교 교장상에는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한 창작곡을 출품한 오태석 님, 경희대학교 총장상에는 여성독립운동가를 주제로 한 뮤지컬을 출품한 대구 성서고등학교 뮤지컬동아리 블 랙홀이 각각 선정되었다. 우수상은 1929년부터 1938년까지 만주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한 조선혁명군의 깃발을 꽃으로 표현한 김수빈 님을 비롯한 10명이 선정되었다. 시상식은 10월 22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에서 열렸고 대구MBC, YTN라디오 등이 취재했으며 선정작품은 연구소 홈페이지 등을 통해 순차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일본의 산업유산, 왜곡의 현장과 은폐된 진실> 웹페이지 일본어 서비스 시작
[초점] <일본의 산업유산, 왜곡의 현장과 은폐된 진실> 웹페이지 일본어 서비스 시작 • 김승은 학예실장 2020년 연구소는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개관에 대응해 일본 근대 산업유산 시설이 은폐하고 있는 역사를 알리는 웹페이지를 만들어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이어 올해 10월에는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의 번역으로 일본어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웹페이지는 2017년 한일 시민이 함께 만든 세계유산 가이드북 <일본의 메이지산업혁명유산과 강제노동>의 내용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최근까지 현장 답사를 통해 조사한 내용도 담겨 있다. 이 웹페이지에서는 산업유산 등재 과정과, 이후 일본이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외면한 채 강제동원․강제노동 사실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선전을 강화해 온 사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각 산업시설에 담긴 전체역사와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 연합군포로의 강제노동 실태도 소개했다. 특히 강제동원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요약해 소개하고 있으니 실제 산업시설 현장에서 벌어진 생생한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일본이 식민지배와 강제동원의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는지도 일본 교과서를 통해 짚어 보았다. 이러한 상세한 내용과 자료의 소개는 지난 6년간 일본의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와 함께 한 현지조사와 연구작업을 통해 가능했다. 특히 강제동원 전문가 다케우치 야스토 씨가 적극 협력해 주셨고, 일본어 페이지의 감수도 맡아 주셨다. 지난 7월 22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 정부에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설명하도록 시정할 것을 촉구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일본 산업유산 시설의 진실을 알릴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적극적인 행동 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이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출간 기념 대담
[초점]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 출간 기념 대담 • 방학진 기획실장 문학평론가인 임헌영 소장은 10월 8일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펴냈다. 이 책은 임헌영의 유년 시절부터 두 번의 수감생활을 거쳐 민족문제연구소장을 역임하고 있는 현재의 생애까지를 집약한 자전적 기록으로 유성호(한양대 국문과 교수)와 함께한 대화록이다. 2005년 리영희 선생의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대화>에서 질문자로 나선 임헌영 소장은 이번에는 자신의 삶과 세계관을 밝히고 있다. 임헌영 소장과 유성호 교수의 첫 대담을 시작한 지 13개월 만에 출간을 기념하는 이번 대담이 10월 20일 식민지 역사박물관 5층 강당에서 열렸다. 임헌영 소장, 유성호 교수가 출연했고 방학진 기획실장이 진행했다. 대담에서 임헌영 소장은 유년시절 대구 10월 항쟁의 여파로 희생당한 가족 이야기를 시작으로 안동사범학교 졸업 후 모교인 조문초등학교 교사 재직 시절 맞이한 4·19를 통해 학교를 그만두고 상경해 문학인의 길에 들어선 계기와 여러 문인들과의 교류, 순수-참여문학 논쟁의 본질, 정치인 김대중·김상현과 월간 <다리> 활동, 박현채·권오헌 등 평생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동지들, 유신 이후 조작 사건인 ‘ 문인간첩단 사건’과 ‘남민전’ 사건의 뒷이야기를 풀어냈다. 하지만 책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만 약 520명, 주요 사건과 단체가 약 200개가 넘기에 대담 시간 2시간은 너무 부족하여 조만간 대담 2부를 진행키로 했다. 2부에서는 한길사,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산문, 민족문제연구소 등을 주로 다룰 예정이다. 이날 대담에는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출판한 한길사 김언호 대표,
황금물결 출렁이는 빼앗긴 들
황금빛 들판으로 변해가는 수확의 계절 10월. 농촌은 한 해 농사의 결실에 힘든 줄도 모르고 일에 여념이 없을 시기다. 그러나 풍성한 들판을 보고도 웃지 못할 때가 있었다. 일제가 강제 병합한 1910년 이후 조선의 쌀 가격은 일본의 시장과 연동되어 일본이 쌀가격을 마음대로 책정하게 되었다. 지속되는 전쟁 속에 일본 국내에서 쌀 수요가 폭증하자, 일제는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대대적인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했다. 산미증식계획의 명분으로 조선농촌의 경제적 향상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일본 국내의 쌀 부족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을 식량기지화하는 것이었다. 일제가 역점을 둔 사업이 토지개량사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사업이 수리조합사업이었다. 쌀 증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리시설의 안정화와 경작지의 확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쌀 생산량이 증가하게 되면서 싼 가격에 일본으로 쌀 이출(移出)이 크게 늘어났다. 그 결과 조선은 극심한 식량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부 지주들은 배를 불리는 반면 대부분의 농민은 초근목피로 근근이 생활하였다. 부족한 조선인의 식량은 만주산 잡곡으로 보충하였지만,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식량문제가 점점 악화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수요를 억제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식량 절약 운동을 전개하여 조선인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빼앗긴 들에 봄이 올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티는 삶을 살았다. 불과 80여 년 전의 일이다. • 강동민 자료팀장
조선 전역의 신사(神社) 및 신사(神祠) 총목록(1)
[식민지 비망록 74] 조선 전역의 신사(神社) 및 신사(神祠) 총목록(1) 이순우 책임연구원 정리 지난달에 이곳 지면에 소개한 「식민지비망록 일흔 세 번째」 “식민통치기간에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일제 신사가 만들어졌을까?”라는 글을 통해 일제 때 무수하게 존재했던 일제 신사(神社, 진쟈)와 신사(神祠, 신시)의 조성배경과 허가추이, 그리고 지역적 분포에서 나타난 특징을 두루 살펴본 바 있다. 이때 신사조성 연혁의 기초자료로 삼기 위해 조선 전역의 신사목록을 함께 정리하였는데, 이번에 다시 그 내용을 두 차례에 걸쳐 일괄 공개하고자 한다.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 존재했던 신사의 총 숫자에 대해서는 보통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가 지은 <조선종전의 기록 ― 미소양군의 진주와 일본인의 인양(朝鮮終戰の 記錄 ― 米ソ兩軍の 進駐と 日本人の 引揚)>(1964), 108쪽에 수록된 것이 가장 유용한 근거자료로 사용된 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쉽게도 세부 목록 없이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부여신궁(扶餘神宮)을 포함하여 조선 전체의 각종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합쳐 모두 1,141개소(1945년 6월말 현재)가 존재했다는 집계표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관보>의 「휘보(彙報)」에 수록되는 ‘신사 창립 허가’와 ‘신사 설립 허가’의 내역을 전부 취합하더라도 그 숫자는 949개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다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의 <대륙신사대관(大陸神社大觀)>(1941)에 정리된 신사 목록을 대조하여 누락분(49-3=46개소)을 가려내고 또한 <경기도보(京畿道報)>에서 확인한 사례(14개소)를 모두 합하더라도 1,009개소를 넘지 못한다. 요컨대 일제가 패망하던 바로 그 순간에 이 땅에는 모두 1,141개의 신사관련시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조선신궁과 부여신궁을 포함하여 모두 1,011개소만 그 구체적인 위치가 확인될 따름이고, 나머지
심산 김창숙 선생의 유품인 안경을 기증받아
[초점] 심산 김창숙 선생의 유품인 안경을 기증받아 • 방학진 기획실장 성균관대학교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인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의 안경을 손녀인 김주 여사와 외손주 김태욱님이 8월 27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김태욱님은 효창 독립커피를 기획한 연구소 후원회원이기도 하다. 김창숙선생의 안경테는 망실된지 오래되어 안경알만 김주 여사가 보관해 오던 것을 연구소가 전문업체에 의뢰하여 당시 안경테로 복원을 마친 것이다. 김주 여사는 “테가 망가져 버려 알만 남긴채 참 오랫동안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사하면서 안경알이 나왔다”면서 “기증처로 성균관대학교와 심산김창숙기념사업회를 생각하기도 했으나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심산 선생의 뜻을 잘 이어갈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날 안경을 기증받은 윤경로 식민지역사박물관장은 “심산은 선비의식을 끝까지 지키신 분”이라며 “그분의 한 몸과 같았던 안경을 우리 박물관에 보관함으로써 그 정신을 잘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기증식에는 성균관대 민주동문회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기증자료
[기증자료] •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 6월 21일, 이춘상기념사업회는 서화가 여태명 교수의 글씨 1점을 기증했다. 글씨의 내용은 “너는 환자들에게 못된 짓을 많이 하였으니 내 칼을 받아라!”로 이춘상 의사가 소록도 갱생원 원장 스오 마사스에를 처단하면서 외친 말이다. 이춘상 의사는 1916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1940년 소록도갱생원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로 당시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인 갱생원 원장 스오를 처단하여 소록도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1943년 2월 19일 대구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 안미정 자료실 주임연구원 • 8월 17일, 중국 광동지부(지부장 김유)에서 <정률성 평전> 등 관련 도서 12권을 기증했다. • 9월 1일, 이건제 후원회원이 <함석헌 전집>, <우남노선> 등 도서 60권을 기증했다. • 9월 6일, 서승(일본 리츠메이칸대학 법학과 특임교수, 우석대학교 석좌교수, 동아시아평화연구소 소장) 후원회원이 평생을 수집한 도서 약 300박스를 기증했다. 1945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서승 교수는 도쿄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하던 중 1971년 4월 보안사에 불법 체포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당국의 공작에 맞섰고, 고문 수사를 받던 중 분신을 시도하 여 온몸에 중화상을 입었다.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동생 준식과 함께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0년 2월 28일 석방될 때까지 ‘비전향장기수’로 19년간 갇혀 있었고 석방 이후에는 리츠메이칸 대학 법학부 교수로 일하며 고문 반대운동 등 인권 운동을 벌였다.
2021년 근현대사기념관 학술회의 〈신간회, 식민지 조선의 ‘정치’와 운동〉 개최
[초점] 2021년 근현대사기념관 학술회의 〈신간회, 식민지 조선의 ‘정치’와 운동〉 개최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9월 3일 금요일, 서울글로벌센터 9층 국제회의장에서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며, 강북구와 한국역사연구회가 후원하는 2021년 근현대사기념관 학술회의 <신간회, 식민지 조선의 ‘정치’와 운동>을 개최하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신간회 해소 9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신간회의 ‘정치’운동과 조선총독의 정책에 대한 연구, 1920년대 좌우통합의 독립운동과 일제하 합법적 정치운동의 의미, 신간회에 참여하였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분석함으로써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의 동향에 대해 조명하는 자리였다. 학술회의는 임헌영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를 시작으로 Ⅰ부에서 주제발표 및 토론, Ⅱ부 종합토론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신간회, 식민지 조선의 ‘정치’와 운동> 학술회의 Ⅰ부는 심철기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실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제1주제 「일본 정당정치기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와 신간회」는 광운대학교 전상숙 교수가 발표하였다.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신간회가 일제하 ‘문화정치’시기 합법적 정치운동 단체로 결성될 수 있었던 ‘정치참여의 공간’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고 그것이 식민지시기 일본의 조선지배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분석하였다. 토론자 김민철 경희대학교 교수는 ‘정치’를 근대국민국가를 전제로 하는 좁은 인식에서 벗어나 광의의 개념으로 확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어서 제2주제 「신간회의 ‘민족동권’운동과 식민지배 체제의 균열적 성격」은 순천대학교 윤효정 교수가 발표하였다. 발표자는 재만동포운동으로 대표되는 신간회의 ‘민족동권’운동은 직접적인 식민지배 체제를 전복하고자 했던 반제투쟁은 아니었지만,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를 균열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반(反)식민주의적이었다고 분석하였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발표자가
일본 산업혁명유산 시설에 동원된 한국의 피해자 증언
[학술심포지엄 요지] 일본 산업혁명유산 시설에 동원된 한국의 피해자 증언 김승은 학예실장 지난 9월 18일, 일본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주최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묻다-7.22 유네스코 결정이란?”이라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제목에 나오는 “7.22 결정문”이란 제4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일본 정부가 ‘메이지 일본 산업 혁명 유산’에 관한 권고를 ‘완전히 이행하지 않은 것은 지극히 유감’이라며 채택한 결정문을 말한다. 이 결정에 앞서 유네스코와 이코모스(ICOMOS)는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하였다. 그리고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강제로 노역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해설이 충분하지 않다’,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전시가 없다’, ‘전체 역사에 관한 해설에 있어서도 비슷한 역사를 가진 다른 산업유산과 비교해 볼 때 강제 노역과 군사 목적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충분히 설명된 국제적 모범 사례에 미치지 못 하고 있다’, ‘(한·일 간에) 향후 대화가 중요하며 추구되어야 한다’라고 결론지었다. 일본 정부는 그 동안 ‘약속한 조치를 포함해 성실히 이행해 왔다’고 했지만 유네스코는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따라서 이번 심포지엄은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를 유네스코 결정에 따라 개선하라고 촉구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 심포지엄에서는 유네스코 결정문의 채택 배경과 의의, 산업유산정보센터의 문제점 등을 주제로 4개의 발표가 있었다. 그 가운데 김승은 학예실장이 발표한 ‘일본 산업혁명유산시설에 동원된 한국의 피해자 증언’을 요약해 소개한다. 이 발표문은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특별전을 위해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에 동원된 피해자 구술 기록의 조사와 공개 과정에서 파악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기록의 현황과 문제점, 피해자 증언이 밝힌
추석에 떡을 금지한다 – 경고문
[소장자료 톺아보기 30] 추석에 떡을 금지한다 – 경고문 • 강동민 자료팀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 한여름의 땡볕을 이겨내고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수확의 계절인 가을. 달이 유난히도 밝은날에 우리는 풍요를 기리면서 햇곡으로 빚은 송편과 각종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이때는 오곡이 익는 계절로 모든 것이 풍성하고 즐거운 놀이로 밤낮을 보냈기 때문에 늘 이날처럼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빼앗긴 들에서 수확한 곡식으로는 풍성한 추석을 보내기 어려웠다. 1943년 9월 3일자 <경고문>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이 어떻게 추석을 보내야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경고문>은 1943년 추석을 맞이해 상주군 유도회와 상주군, 국민총력상주군연맹, 상주경찰서가 침략전쟁시기 전시생활 지침을 내린 문서이다. 5개의 문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경고문>은 1. 매일아침 궁성요배와 정오 묵도를 할 것, 2. 8월 15일 추석제사에는 절대로 떡을 장만하지 말 것, 3. 비용을 극도로 절약하고 관혼상제시 새 옷을 만들거나 떡을 절대 만들지 말 것, 4. 8월 15일, 기타 명절에는 새 옷을 절대로 만들어 입지 말 것, 5. 국민개로운동에 순응하여 부녀자의 옥외운동을 힘쓸 것(단, 몸뻬를 착용할 것) 등이 적혀 있다. ‘절미운동, 추석에 떡하지 맙시다’, <매일신보> 1939.9.25.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시국의 급박함’을 내세워 쌀을 아끼기 위해 추석에 떡을 하지 말 것을 선전하고 있다. 또한 경성부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등 각계 인사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