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지금도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지뢰 !!!
지뢰 사고,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 6월 4일(금요일) 오전 9시 50분경, 고양시 장항습지에서 습지 정화작업을 하던 50대 남성이 발목지뢰(M14) 폭발 사고로 무릎 아래가 절단되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장항습지는 람사르 습지에 등록된 생태계의 중요 지역으로 인구 100만의 고양은 물론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생물 다양성 보전과 인간의 환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지뢰 폭발은 장항습지의 생태 보전과 정화작업을 진행하던 중 일어난 사고이기에 더욱 안타깝다. ‘지뢰’ 하면은 흔히 DMZ나 민통선 인근 군사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고 정도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지뢰사고는 지금 이 순간 고양, 파주, 김포 등 수도권 일대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휴전선 인근 지역에 지뢰가 매설된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대량 살포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된 1964년을 기점으로 북한은 휴전선을 넘나들며 게릴라식 도발을 감행하였고, 휴전선의 철책선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이 시절 미군은 이 지역에 플라스틱 재질의 대인지뢰 M14를 대량으로 살포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우리군도 민통선 지역에 M14를 대량 살포한다. 이번에 장항습지에서 발견된 대인지뢰 M14는 강원도 화천, 양구, 인제 등 민통선 이북 지역에 매설해 놓은 이들 M14 대인지뢰가 장마와 폭우 등으로 유실되어 나뭇가지 등에 휩싸여 떠내려오다 장항습지에 가라앉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M14는 그 재질이 플라스틱이어서 폭우에 유실되면 땅으로 가라앉지 않고 나뭇가지 등과 함께 떠내려
대륙고무,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
조선총독부에서 매달 발행하던 기관잡지(機關雜誌) <조선(朝鮮)> 1924년 3월호에는 「호모화(護謨靴) 전성(全盛)의 조선(朝鮮)」이라는 제목의 토막글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는 ‘고무(ゴム)’의 일본어식 음차(音借) 표기이므로, ‘호모화’는 곧 ‘고무신’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근시(近時) 호모화공업의 발달에 따라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력(耐久力)과 방수력(防水力)이 있어서 중류자 이하(中流者 以下)의 수요가 격증(激增)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선내생산(鮮內生産)의 상황을 보면, 대정 9년(1920년)에는 극히 미미했던 것이었으나 10년(1921년)에는 가격(價格) 17만 8천 원(圓)에 13만 7천 족(足)의 생산이 있었고, 11년(1922년)에는 일약(一躍) 94만 원에 달했으며, 12년(1923년)에는 아직 정확한 숫자를 판별하지는 못하나 적어도 280만 원(400만 족)의 거액에 달할 것이다. 이밖에 내지(內地, 일본)에서의 이입액(移入額)은 12년에는 약 480만 원(685만 족)이었으니까 내선(內鮮)을 합산하면 실로 1,165만 족이라는 놀랄만한 수요를 나타내고 있다. 호모화의 수용(需用) 탓에 양화(洋靴) 및 조선화(朝鮮靴)는 비상한 타격을 받았고, 대정 9년에는 양화의 생산이 32만 6천 족이었으나, 동 10년에는 18만 8천 족, 동 11년에는 다시 13만 3천 족으로 줄어들고 있다. 또 선화(鮮靴)의 쪽은 대정 9년에는 54만 4천 족이었다가, 10년에는 일시(一時) 70만 4천족으로 증가하였으나 11년에는 급전직하 32만 8천 족으로 감소했다. 이 글은 바야흐로 조선 고무신의 탄생과 더불어 가히 고무신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일찍이 이 땅에 고무신의 등장은 1919년 무렵에 시작된 일이었는데, 이때까지는 일본 쪽에서 건너온 ‘단화형(短靴型)’ 고무화가 전부였다. 이것은 서양식 구두를 본떠 만든 형태이며, 구두 자체를 전부 고무로 만들었다고 하여 ‘총고무화(總ゴム靴)’라는 이름으로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조정래 감독
[인터뷰] 영화 <광대 : 소리꾼 감독판> 조정래 감독 인터뷰 :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의 흥과 한이 다시 울려 퍼진다. ’ 작년 7월, 코로나19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독창성과 풍부한 볼거리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 <소리꾼>이 <광대>라는 이름의 ‘감독판’ 영화로 다시 돌아온다. 감독판이니 만큼 이전 개봉작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서사들이 과연 어떤식으로 가미되었을지, 연출자의 시선을 따라 가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포인트다. 연구소에서는 오는 9월 전격 재개봉을 앞두고 전국을 돌며 시사회를 진행하고 있는 <광대 : 소리꾼 감독판>의 조정래 감독을 만나 보았다. ● 개봉 1년여 만에 ‘감독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나? ● 일단 나부터가 판소리 고수(鼓手), 즉 국악인 출신이다. 인간문화재이신 정철호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이수자 자격까지 얻었다. 대학교 시절 영화 <서편제>를 보고 국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거의 미쳐있다시피 했던것 같다. 졸업 후 ‘바닥소리’라는 단체를 만들고 전국으로 공연을 다닐 정도였 으니까.(웃음) 어쨌든 대학교 때 판소리를 주제로 한 단편시나리오를 하나 구상했는데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모태가 된 ‘회심곡’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다. 영화 <귀향> 역시 판소리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나눔의 집’과 수요집회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판소리 공연을 나가게 되면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판소리는 영화감독인 나 스스로의 서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콘텐츠다. 이런 판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 <소리꾼>, 게다가 그걸 감독판으로까지 선보일 수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 온라인 기념식
[초점]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 온라인 기념식 올해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11년부터 연구소가 사무국을 맞고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 www.sh100th.org)는 설립 기념일인 6월 10일 온라인 기념식을 진행했다. 이날 기념식은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하여 모든 순서를 사전녹화를 통해 제작한 영상을 6월 10일 유튜브 등에 공개했다. 온라인 기념식의 첫 순서는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드로잉 쇼’로 제작하여 선보였다. 드로잉 쇼는 안중걸 만화가의 작품에 이은혜(경희대 동문) 님이 내레이션을 맡아 주었다. 드로잉 쇼에 이어서 윤경로 상임대표의 기념사, 김정수 육사 교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끝으로 신흥무관학교가 육사의 뿌리임을 상징하기 위해 6월 4일 육사 모든 생도들이 펼친 ‘화랑의식’(분열)으로 온라인 기념식을 마무리했다. 한편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는 110주년을 맞아 음악회, 전시회, 학술회의, 국내 유적지 답사, 콘텐츠 공모전 등을 계획하고 있다. • 방학진 기획실장
박근혜 정권과 양승태 사법부의 추악한 재판거래, 그 책임을 묻다
[초점] 박근혜 정권과 양승태 사법부의 추악한 재판거래, 그 책임을 묻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지난 5월 25일 일제강점기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와 고 김규수 할아버지의 유족은 박근혜 정부 시기 사법농단, 재판거래의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기했다.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아 지원해 온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은 지난 2018년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음에도 일본 정부의 방해로 가해 기업이 아직까지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번 소송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정무수석, 윤병세 외교부 장관, 피고기업의 대리인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들과 양승태 대법원장, 임종헌 법원행정처장 등 법관다수가 조직적으로 공모하여 실행한 재판거래에 대해 국가배상법에 따라 공무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묻는 소송이다. 이 사건 원고들은 2005년 2월 한국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1, 2심에서 패소하였으나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에서 역전 승소했다. 2013년 7월 10일 서울고등법원의 파기환송심에서 승소한 원고들은 대법원 재상고심의 최종 승소 판결이 곧 내려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최종 확정판결이 내려지기까지 5년의 시간 동안 박근혜 청와대와 양승태 사법부는 판결을 뒤엎기 위해 피고기업의 대리인까지 동원하여 조직적인 재판거래를 자행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추악한 재판거래가 이루어지는 동안 연구소와 원고들은 조속한 판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고 기자회견을 여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사법농단으로 판결이 지연되는 동안 네 분의 원고
근현대사기념관 신흥무관학교 110주년 기념 특강 〈항일무장투쟁의 뿌리-신흥무관학교〉 진행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신흥무관학교 110주년 기념 특강 〈항일무장투쟁의 뿌리-신흥무관학교〉 진행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은 2021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을 맞아 신흥무관학교 출범의 시대적 배경과 중심세력, 독립전쟁사에서의 위상,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을 조명하는 독립민주시민학교 특별강좌 <항일무장투쟁의 뿌리-신흥무관학교>를 진행하였다. 강좌는 5월 22일에서 5월 30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현장수강과 함께 온라인 수강을 위한 촬영도 병행하였다. 첫 번째 강의는 원광대학교 김주용 교수의 <간도 한인사회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을 주제로 진행되었다. 서북간도 지역 이주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과 신흥무관학교로 상징되는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대해 현장답사를 통해 축적된 다양한 자료들과 함께 설명하여 항일무장투쟁의 공간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었다. 2강은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의 중심역량>이란 주제로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가 강의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핵심적 인물들과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독립을 향한 의지, 3·1운동 이후 독립전쟁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중요성에 이르기까지 신흥무관학교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강의였다. 3강 <신흥무관학교와 초기 독립전쟁>은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 관장이 강의하였다.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독립전쟁에 미친 영향에 대해 알아보고 독립전쟁의 분수령인 3·1운동 이후 늘어난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 그들의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서 알아봄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의 뿌리로서 신흥무관학교를 이해할 수있었다. 마지막 4강은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항일투쟁 -‘아리랑’ 김산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작가 님웨일즈의 옌안에서의 만남을 시작으로 김산이 기억하고 있는 신흥무관학교, 김산의 항일투쟁에 영향을 준 많은 인물들, 그리고 역경의 항일투쟁의 과정을 알 수
근현대사기념관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특별사진전 개최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특별사진전 개최 •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연구원 홍정희 근현대사기념관은 5월 18일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 특별사진전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전시는 오랜 기간 쿠바, 멕시코, 만주, 연해주 등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찾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만나 한인 디아스포라의 흔적을 기록한 김동우 작가의 사진 52점이 전시되었다. 쿠바 한인 이주의 시작점인 마나티 항구, 멕시코 한인 독립운동의 성지 메리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국방경위대, 헤이그특사가 참석하지 못한 네덜란드 빈넨호프,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인도 레드포트 훈련지, 카자흐스탄 바슈토베의 고려인 무덤, 경학사가 설립된 중국 길림성 삼원보 대고산 일대,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의 전로한족대표자회의 개최지 등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사진으로 만나 볼 수 있다. 또한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모습을 통해 한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개막식은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 5월 18일 오전 11시 2층 기획전시실 앞에서 윤경로 전 한성대총장, 박겸수 강북구청장,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 김동우 작가 등 관계자 20여 명이 참석하여 개막사와 격려사, 작가의 인사말, 테이프커팅식 순서로 간소하게 진행하였다. 테이프커팅식 이후에는 김동우 작가의 설명과 함께 전시를 관람하였다. 이번 특별사진전은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2021년 8월 18일까지 사전예약을 통해서 관람할 수 있으며 VR전시로도 제작되어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에서 만나볼 수있다.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 기념 특별사진전 “기억,
청춘만장靑春輓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모든 자원의 효과적 동원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병력이 부족해지자 그동안 조선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무기’를 쥐어주게 된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조선인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게 한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바로 ‘육군특별지원병’으로 입소한 청년, 이은휘가 남긴 유품인 장행기다. 장행기는 지원병으로 차출되어 가는 청년들을 환송하기 위해 면에서 만들어 준 깃발이다. ⇐ 장행기壯行旗, 170X56 “축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 입소 궁본은휘 군 국민총력 김제군 월촌면 제남부락연맹” 지원병 출정 깃발인 장행기는 ‘장렬하게 떠난다’는 뜻이지만 조선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죽으러 가는 깃발과 같다고 해서 ‘청춘만장靑春輓章’이라고 불렀다. 깃발 상단에는 금치훈장金鵄勳章을 중심으로 뒤에 일장기와 일군기를 어긋나게 배치하였다. 깃봉에 금치金鵄가 앉았는데 마치 훈장 위에 앉은 것처럼 보이도록 그려넣었다. ⇐ 금치훈장이 새겨진 엽서, 9.1X14.1 1890년에 제정된 일본의 훈장 가운데 하나로 일본제국의 육군과 해군을 대상으로 수여하였다. 금치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 건국의 상징새로 전쟁 승리의 대명사로 표현되어 메이지 유신 이후 다양한 디자인으로 활용되었다. 이은휘는 1921년 9월 9일 전북 김제군 월촌면 입석리 606번지에서 태어났다. 1940년 옆마을인 월촌면 복죽리의 처녀 정복례(당시 19세)와 결혼했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이은휘는 부인과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살림을 꾸리기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이리농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1년 지방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면사무소에 갔다가 지원병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하필
[식민지비망록] 평식원(平式院) 혹은 상공과 용산분실 자리의 공간 내력
지난 2006년 12월 4일에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의 관리유물인 「국가표준 근대도량형기」(154건, 331점)가 문화재청 고시 제2006-103호를 통해 등록문화재 제320호로 등록고시되었다. 이와관련하여 문화재청에서는 2006년 11월 8일자로 「근대기(1902~1945) ‘국가표준 도량형기’ 문화재로 등록예고,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탄생된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는데, 그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보인다. …… 그러나 과거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도량형이 지역마다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도량형을 정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항 이후 근대적인 도량형을 도입하기 위하여 1902년(광무 6년)에 평식원(平式院)이라는 담당 관청을 설립하여 서양식 도량형제(미터법)를 일부 채택하고 1905년(광무 9년) 3월 21일에 이것을 바탕으로 대한제국 최초의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하였다. 이처럼 당시 고종은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제정할 정도로 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나 새로운 도량형이 정착되기까지는 그 후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미돌법(米突法)을 아시나요?」라는 별도의 첨부자료를 통해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 이러한 당시 사회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에서는 1905년(광무 9년) 3월에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하고 농상공부에서 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 법은 1902년에 발표되었던 도량형법과 내용은 같으나 법률 제1호로 공표할 정도로 도량형 개정에 대하여 당시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근대적 도량형 제도의 도입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도량형법이 당시 법률 제1호였다는 사실에 기대어 그 의의를 더욱 확대해석하고 있는 부분이 확연히 눈에 띈다. 그런데 도량형법(度量衡法)을 일컬어 대한제국 최초의 법률이었다는 맥락과
[인터뷰] 미얀마 민주화투쟁과 연대하다
이번 호의 인터뷰는 최근 팟빵과 유튜브에 업로드된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내역사)’의 <미얀마투쟁과 연대하다>를 발췌 정리하였다. 내역사 시즌6의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시민의 투쟁’ 2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로 민족문제연구소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가 공동 제작하였다. 인터뷰는 4월 23일 연구소 5층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출연자는 내역사 전문 MC 노기환과 연구소 연구위원이자 경희대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민철,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 흘라민툰(HlaMIn Tun), 헤이만(Hay Man)이다. 2월 1일 시작된 미얀마 군부 쿠데타에 맞서 미얀마 시민들의 목숨을 건 민주화투쟁이 3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 두 분으로부터 미얀마의 상황,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들어보았다. 군부의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에 맞서는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에 적극적인 연대와 지지를 보낸다. <미얀마투쟁과 연대하다> 동영상은 팟빵과 유튜브에서 ‘내역사 미얀마청년연대’로 검색하면 시청할 수 있다. MC노 │김민철 교수께서 오늘의 방송 주제를 제안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민철 │두 가지 이유인데요. 하나는 1980년 광주에서 참사가 일어났을 때, 군부에 의한 학살이 일어났을 때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부산에 살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광주에서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런 소식들만 들었거든요. 언론이 통제된 시기였으니까요.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광주 참사의 실체를 알고, 특히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거꾸로 국민을 향해 총을 쏘고 학살했다는 것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제 20대는 광주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 기억이 되살아났고요. 직접적으로는 19세 젊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