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2021년 상반기 특수분야 교원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 읽기 2 - 근대 사진 자료로 역사 읽기>
[초점] 2021년 상반기 특수분야 교원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교과서 사료 읽기 2 – 근대 사진 자료로 역사 읽기>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작년 교원연수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읽기>에 이어 5월14일부터 5월 16일까지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 사료 읽기 2 – 근대 사진 자료로 역사읽기>를 진행하였다. 이번 연수는 교과서에 소개된 식민지역사박물관 소장 자료 중에서도 사진에 초점을 맞추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 자료를 직접 보고 활용법을 토론하며 교과서에 실릴 새로운 사료 발굴 차원의 다양한 사료 소개와 역사부교재 개발을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기존40명의 참가인원을 계획하였으나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연장됨에 따라 인원을 간소화하여 24명의 교사가 참여하였다. 5월 14일(금) 진행된 첫 강의 「사진엽서에 담긴 식민지 조선과 근대 표상」은 권혁희 강원대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교과서나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많은 사진엽서를 제시하며 당시 일본 제국이 조선인을 야만적이고 미개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의도를 담아 촬영하여 제작·보급했음을 상기시켰다. 특히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관광 상품화하여 그 홍보 수단으로서 사진엽서를 적극 활용하였던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평한 참가자들이 많았다. 이어진 강동민 자료팀장의 실습 시간에는 이러한 근대 사진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사이트를 소개하고 직접 접속해 보여주어 참가자들로 하여금 수업시간에 사진을 활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5월 15일(토)의 첫 번째 강의 「사진자료에 담긴 근대사의 공간과 사건」에서는 이순우 자료실 책임연구원이 근대시기 어떻게 사진 기술이 등장하고 보급되었으며 그 한계는
[후원회원마당] ‘정관장’, 조선총독부가 버리고 간 이름
‘친일부역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홍삼에게도 해당되는 모양이다. 부역이름 ‘정관장’을 보면. 홍삼에 붙어 우리 민족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부역한 1급 친일반민족행위 이름(‘정관장’)이 해방 독립된 나라에서는 홍삼의 대표 노릇을 하고 있다. 우리는 배알도 없나?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다. 먹고 살길이 없어 해외에 홍삼 몇 뿌리 가지고 나가 행상하고 있던 한인 홍삼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그날 그날 홍삼 판 돈에서 조금씩 모아 애국금 독립의연금을 내고 독립공채를 사서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고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도왔다. 그같은 동포들의 도움으로 임시정부와 독립군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은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1939년까지 활발하게 진행되던 홍삼 팔아 독립자금 마련하는 일이, 1940년 일제의 홍삼 감시딱지 ‘정관장’이 홍삼에 붙어 홍삼을 감시하기 시작한 뒤로는 홍삼 팔아 독립자금 마련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실제로 1940년 이후로는 눈에 띄는 독립운동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결과의 원흉인 ‘정관장’은 1급 친일반민족 부역이름으로 해방 후 즉시 처단되어 이 땅에서 척결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한국인삼공사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버리고 간 부역이름 ‘정관장’을 주워다가 지금까지 애지중지 쓰고 있다. 이름에는 목적이 있다. ‘정관장’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세금 수탈, 홍삼상권 강탈, 그리고 독립자금 차단을 통한 한민족의 말살이었다. 이 사실을 한국인삼공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기 위해 만든 그 ‘저주스런’ 이름을 쓰면 안된다는 사실을 한국인삼공사는 누구보다도
[초점]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6 시작
한국근현대사를 전문으로 다루는 국내 유일의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가 벌써 시즌 6을 맞이했다. 이번 시즌은 연구소 30주년 특집으로 연구소의 과거-현재-미래를 테마로 제작한다. 과거편은 연구소 30년 활동사를 소개하는 코너로 창립 초기 이야기부터 주요 활동과 잘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흥미롭게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편은 연구소의 현재 모습을 소개하기 위해 지부 후원회원을 초대해 그들의 활동 이야기를 듣고 더불어 상근활동가를 통해 연구소의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한다. 미래편은 시민사회단체와 연대를 모색하는 의미로 외부 전문가와 활동가를 초대해 역사, 평화, 민주주의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1편에서는 ‘행동하는 미얀마청년연대’ 공동대표들을 초대해 미얀마 민주화 투쟁을 위한 연대의 방송을 하였고 2편에서는 다큐멘터리<김군>의 강상우 감독을 초대해 5.18를 기억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향후 30주년을 맞이한 1991년 5월 투쟁, 광주지부 활동이야기, 대중적 역사글쓰기로 유명한 김형민 PD의 새책이야기, 김진향 개성공단 이사장의 개성공단과 종전선언,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의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의 조건, 국가보안법, 강제동원과 유네스코 산업유산 이야기 등이 준비되어 있다. 연구소 30년사이야기는 하반기 백서 발간에 맞춰 방송할 예정이다. 자체 스튜디오를 마련한 만큼 연구소 고유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제작하고 있다. 회원과 시민들의 많은 시청과 아낌없는 성원을 부탁드린다. • 김세호 PD
[후원회원마당] 흙비 / 김해규
세월호 7주기였다 7년 전 오늘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에 비가 내렸다 그날 병풍도 북쪽 20km 맹골수도에도 파도가 일었고 가끔씩 비도 뿌렸다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실려 기울어가는 여객선 속에서 비명이 들렸다 “엄마, 엄마 숨막혀 …. 보고 싶어” 아, 가슴에서 천불이 났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 생때같은 아이들 목숨이 아래로 깊이 가라앉을 때 성형한 얼굴로 깔깔대며 드라마에 몰두했던 사람이 있었다 서초동 룸싸롱에 앉아 갖은 음모와 술수로 희락하던 놈들도 있었다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쳐 나와 소주 한잔 들이키며 안도하는 놈들 팽목항 어귀에서 꺼이꺼이 울어대던 부모와 가족들을 조롱하고 모독했던 놈들 그들을 비호하고 동조했던 보수언론과 검찰놈들 제 자식 아니라고 아이들 목숨을 값싸게 버린 놈들도 있었다 그놈들은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서 세상이 자기 것인냥 거리를 활보하며 자식새끼 입에 맛난 것 넣어주고 좋은 옷 입히고 땅값 오르고 아파트값 올랐다며 희희락락 거리는데… 철수야 순이야 미안하다 팽목항 방파제에서 들리는 엄마의 통곡소리 맹골수도 바다 속에 뚝뚝 떨어졌던 아빠의 눈물 누가 소매를 걷어 그들의 눈물 닦아줄 것인가 하늘은 뭘 하는지 하늘 … 이놈의 하늘은 아이들의 죽음 잊지 않겠다, 생장(生葬)시킨 놈들 반드시 벌 받게 하겠다 약속했던 하늘은 지금 뭘 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그래서 오늘 흙비가 내렸나 (2021.04.16.)
구리나 철을 남기는 것은 부끄러움을 남긴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확대될수록 식민지조선은 더욱 황폐해갔다. 강제병합 후 식민지조선의 ‘땅’과 함께 ‘쌀’의 수탈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중일전쟁 이후에는 한반도 곳곳의 지하자원과 해양자원 그리고 삼림까지 통제해 전쟁자원으로 동원했다. 흔히 ‘공출’이라고 하면 전쟁에 사용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곡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쟁은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쌀 이외의 전시수탈이 더욱 강화되었다. 무기생산을 위해 전쟁 직전인 1941년 9월 <금속류회수령>을 공포하여 조선에 남아 있는 온갖 쇠붙이를 약탈해 갔다. 식기, 제기와 같은 그릇은 물론이고 농기구를 비롯해 교회의 종이나 절의 불상까지 빼앗아 무기로 만들었다. 특히 구리는 해군함정 중 잠수함 건조에 필요한 재료로 막대한 수량이 필요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놋그릇을 식기로 사용하고 청동화로를 난방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을 그냥 두고 보고있을 침략자들이 아니다. 일본 당국은 조선인들의 각 가정에 엄청나게 사용되는 놋그릇과 청동화로 같은 구리제품 공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조직인 애국반 등에 의해 금속류의 공출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미국에서 수입하던 설철(屑鐵:쇠 부스러기)마저 단절되자 무기생산에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전국에서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긁어모았다. 구리로 제작한 동상(銅像)이나 쇠 난간, 철제 가로등을 비롯해 가마솥까지 공출됐다.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 젓가락마저 빼앗겨야 했던 식민지조선의 민중은 이제 일제가 나누어주는 소량의 배급품으로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저작권자 ⓒ 민족문제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강동민 자료팀장
권총을 지닌 그는 왜 이완용을 칼로 찔렀을까? 이재명 의사의 정확한 의거장소에 대한 재검토
[식민지 비망록 69] 권총을 지닌 그는 왜 이완용을 칼로 찔렀을까? 이재명 의사의 정확한 의거장소에 대한 재검토 이순우 책임연구원 여러 해 전에 몇몇 인터넷 사이트에 언제부터인가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의 키 높이에 관한 엉뚱한 주장 하나가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해서 살펴봤더니 김구 선생은 알고 보면 굉장한 장신거구(長身巨軀)였다는 것인데, 이를 입증하려는 듯이 창덕궁 인정전 월대에서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나란히 선 김구의 모습과 같은 것이 그럴싸하게 증거자료로 제시되어 있었다. 1947년 7월 15일에 개최된 한국민족대표자대회의 기념사진으로 찍은 이 장면만 놓고 보면 확실히 이승만의 신장에 비해 김구 쪽이 월등히 키가 커 보인다. 그래선지 이런 종류의 자료들을 근거로 어떤 이는 김구의 키가 190센티미터는 된다고 하고, 못해도 180센티미터는 넘는다고 공공연히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다 틀렸다. 김구 선생의 키에 대해서는 이미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서대문감옥에서의 수형생활과 관련한 대목에서 본인 스스로 써놓은 구절이 있으므로 이를 통해 명쾌하게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옥중의 고통은 여름, 겨울 두 계절에 더욱 심하다. …… 감옥생활에서 제일 고생을 많이 하는 사람은 신체가 큰 사람이다. 내 키가 5척 6촌 중키에 불과하나 잘 때 종종 발가락이 남에 입에 들어가고 추위도 더 받는다. ―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02 개정판), 252쪽. 이로써 그의 키는 다섯 자 여섯 치(곧,
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3)
[돌려보기] 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3)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 편집자주 7. 진달래 활짝 피다 감방에서는 겨울과 여름은 길고 봄과 가을은 짧다. 춥거나 덥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독재 권력이 땡깡을 부려도 시간은 흘러 추위가 풀리고 4월이 되자 온 구치소는 축제를 맞은 분위기로 변했다. 진달래가 활짝 폈기 때문이다. 내가 구속됐던 그 삼엄한 겨울에 피신 중이었던 김지하가 무슨 재주로 영치금을 넣어줘 깜짝 놀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잡혀와 나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바로 4.3 긴급조치 3호 위반자들과 함께였다. 유홍준(미술평론가, 명지대 교수)이 바로 내 옆방에 들어오더니 이어 강진 출신의 윤한봉(민주화 운동가), 일본인 하야가와 요시하루(早川嘉春) 등이 나와 같은 5사 하층으로 들어왔고, 앞 뒷동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꽉 들어차 서대문 구치소는 광복 이후 정치범이 가장 북적대는 때를 맞았다. 5동의 내 방과 거의 마주보고 있던 3동에는 인혁당의 서도원이 들어와, 자주 통방을 하면서 계속 안부를 확인했다. 그들은 우리의 빨간 딱지와는 달리 노란 걸 달았기에 ‘진달래’로 호칭했다. 온
한 평생 일본의 부조리에 맞서 싸운 BC급 전범 이학래 회장 숨을 거두다
[초점] 한 평생 일본의 부조리에 맞서 싸운 BC급 전범 이학래 회장 숨을 거두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3월 28일 마지막 조선인 BC급 전범으로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기 위해 마지막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은 이학래 동진회 회장이 일본에서 한 많은 96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이학래는 1925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열일곱의 나이에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1942년 봄, 그는 면장으로부터 남방 포로감시원을 모집하는 데 근무기간은 2년, 한 달 월급은 50원이라는 말을 듣고 포로감시원으로 지원했다. 2년만 고생하면 징용과 앞으로 시행될 징병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학래와 같이 포로감시원으로 지원한 조선 청년들은 부산에 있는 일명 ‘노구치(野口)부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민간인 군무원 신분임에도 철저한 군대식 교육을 받았는데, 반복적으로 주입된 내용은 “포로는 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것 이었고,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사실은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 돌입한 뒤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의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모집했다. 이때 ‘모집’된 조선 청년은 3,000여 명. 형식상으로는 ‘모집’이었으나, 실제는 지역별로 인원을 배정한 후 각 지역의 관리와 경찰이 할당된 인원을 동원했다.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사실상의 강제동원이었다. 이학래는 타이에서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해진 ‘죽음의 철로’, 타이·미얀마철도 건설현장에 투입된 1만 1천 명의 포로들을 대면했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에 소속되었으나 이등병보다 못한 일본군의 최말단 신분이었다. 그들에겐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으며, 시키는 대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다큐영화 여파(Aftermath) – 김진혁 교수의 반민특위 이야기
성큼 들어선 봄날, 4월 9일(금) 오후에 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교수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만났다. 김진혁 교수는 EBS PD로 재직 중이던 2013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1년 넘게 제작하다 회사로부터 갑작스레 제작 중단 명령을 받고, 결국 그해 EBS를 퇴직하였다. 8년의 세월이 흐른 올해 과거취재했던 반민특위 관련자들을 다시 만나며 재구성한 다큐영화 ‘여파(Aftermath)’를 4월말에 열리는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하였다. 김진혁 교수를 만나 반민특위 다큐 제작 중단에서 ‘여파’ 출품까지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EBS 재직 당시 반민특위를 다루기 시작한 것이 언제이지요? ● 2012년부터 시작해서 2013년 초까지요. ● 아이템 선정은 본인이 했나요? 그 이유는요? ● 제가 했습니다. 해방공간에서의 일들이 궁금했어요. 1945~50년까지. 뒤지다보니 반민특위가 있더라구요. 미군정도 그렇고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반민특위가 눈에 딱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한 번 연출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고, 연출적으로는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유대인 감독이 만든, 자신들을 반성하는 애니메이션 다큐에 몰입된 거죠. 두 가지를 섞으면 반민특위에 있었던 일을 비용걱정 안하면서도 눈에 띄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용도 좋고 연출가로서 욕심도 생기고 했어요. ● 짧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좋겠습니다. 나중에 저희와 함께 다시 한번 작업해보시죠. ● 그러면 애니메이션 감독을 따로 영입해서 해야 되는데요. 제가 총연출하고요. ● 2012년도에는 어떤 다큐들을 만드셨어요? ● 2012년에는 이거(반민특위) 하나 만들었다고 봐야 해요. 그 밖에도 지식채널, 과학다큐 만들었는데 지식채널 빼고는 그다지 유명하진 않아요. 지식채널을 만들 때 <잊혀진
기증자료
[기증자료] 심정섭 지도위원 제76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1점 보내와 • 안미정 자료실 주임연구원 • 3월 13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76회차 자료를 기증했다. 해방 이후 발행한 도서와 함께 직접 엮은 책 <(한말지사주촌심의선선생실기)노루묵의 단심가>도 함께 보내왔다. 심정섭 지도위원 기증자료 김종철 후원회원 • 3월 4일, 정용진 후원회원(광주지부)이 ‘민주장정100년, 광주 전남지역사회운동사’(총 13권)을 기증했다. • 3월 11일, 김종철 후원회원(대전지부)이 연구소에 방문해 친일파 이재곤(정미칠적)과 이두황(전라북 도 장관)의 글씨 각 1점, 일제강점기 제대기념접시 7점 등 총 9점을 기증했다. 연구소의 활동에 변함없이 지지하며 기증 자료가 친일파 연구와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유용하게 쓰이길 바란다고 전했다. • 3월 17일, 임무성 상임교육위원이 한국사, 세계사 등 교양도서 400여 권을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