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후원회원 마당]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김순흥 광주지부장(전 광주대학교 교수) 당신들이 군사독재 밑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을 압니다. 당신들이 겪고있는 군부의 폭력과 학살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들이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낼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Miyanma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내일 아침에 갑자기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다음 주나 다음 달이나 내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는 여러분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자유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꿈과,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여러분 앞에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바람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갑니다. 손에 손을 잡고 모두 함께 갑니다. 광주의 시민들은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여러분을 지지합니다. 세계만방의 모든 인민들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코, 결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자유를 위해 나아갑시다. 민주주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갑시다.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힘내세요 미얀마. 미얀마 만세 !!! 민주주의 만세 !!! ※ 위 시는 김순흥 광주지부장이 4월 10일 광주광역시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매주 토요일 열리는 ‘미얀마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광주시민’ 6차 딴봉띠 집회에서 직접 영어로 전달한
노을에 그리는 얼굴
[후원회원 마당] 노을에 그리는 얼굴 최홍이 전 서울시 교육위원장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산 천부의 아들 아무나 낯익은 타향 누구도 낯선 고향 노을에 약지 자른 왼손 낙관 그 유묵 그리며 마음 숙인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순국 111주년 오늘에 2021. 3. 26
일본의 침략전쟁 비용까지 강제한 ‘국방헌납’
[소장자료 톺아보기 25] 일본의 침략전쟁 비용까지 강제한 ‘국방헌납’ – ‘애국기’ 헌납 “여러분의 적성으로 된 애국 제10호기 조선호가 도착하였습니다. 아울러 무사히 오게 된 것은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올립니다.” – <매일신보>, 1932년 4월 15일자 2면 1932년 4월 14일 정오 무렵, 경성 하늘에 이와 같은 오색(五色) 선전문을 뿌리는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식민지 조선 ‘최초의 헌납기’ 조선호가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선호는 경성 상공을 한 번 돌더니 조선군사령부 수뇌부와 체신국 간부들의 환영을 받으며 여의도 비행장에 곧 착륙을 하였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년) 후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하기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는 한편, 부족한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국방헌납운동’이라는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애국기 헌납’이다. ‘애국기’는 지역민이나 기업, 단체 그리고 개인이 낸 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를 일컫는데 육군용은 애국기(愛國機), 해군용은 보국기(報國機)라 불렀다. ‘애국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기종에 따라 1대에 최저 6만 원(현재 약 6억 원)에서 20만 원에 이르는 거액이 필요했다. 따라서 부호 몇 명의 힘으로 충당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역 조직과 단체를 동원한 모금운동이 조선 전 지역에 벌어졌다. 일본인 유력자와 행정기관장이 나서서 ‘애국기 헌납 운동’을 시작한 후 ‘1군(郡) 1기(機) 헌납운동’을 주도한 문명기를 필두로 조선인 헌납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37년 중일전쟁 발발후에는 애국기 헌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김연수, 문명기, 최창학, 김용주 등 조선인 부호들을 비롯해 부·도·군민 등의
일제가 경성(京城) 지역에만 두 곳의 감옥을 만든 까닭은?
일제가 이른바 ‘만세소요사건(萬歲騷擾事件)’이라고 불렀던 거족적인 삼일만세운동의 여운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절인 1921년의 어느 늦은 가을날, 이른 아침부터 4, 5백 명이 훨씬 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삐 아현(阿峴, 애오개)을 넘기 시작했다. 누구는 전차로, 누구는 자동차로, 누구는 직접 걸어서 각기 도착한 곳은 먼저 온 이들로 꽤나 혼잡해진 어느 감옥의 문 앞이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잔뜩 모여든 까닭은 바로 ‘독립선언사건(獨立宣言事件)’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이날 한꺼번에 만기출옥(滿期出獄)을 하는 16명의 인사들을 맞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날의 광경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21년 11월 5일자에 수록된 「악수(握手)하고 감루(感淚)만 종횡(縱橫), 경성감옥 문밖에는 5, 6백 명의 고구 친척이 산 같이 모였다, 작조(昨朝) 감옥(監獄)에서 출감(出監)된 17인(人)」 제하의 기사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작(昨) 4일 오전 9시로부터 아현리(阿峴里) 경성감옥(京城監獄) 앞에는 남녀 합하여 4, 5백 명의 인원이 감옥으로 들어가는 전차길 옆으로부터 감옥 문 앞까지 사람이 피하여 다닐 수 없이 섞기여 섰고 자동차 7, 8대는 감옥 들어가는 어구에서 누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 사람의 얼굴에는 오랫동안 그리웠던 사람을 일 분 일 초라도 얼른 좀 보았으면은 하는 빛이 나타난다. 이 일은 다른 일이 아니라 이미 본지로 보도되었던 바와 같이 손병희 일파 중에 2년 징역의 언도를 받고 장구한 사이에 춥고 더운 것을 참아가면서 또는 엄밀한 옥칙을 지키여 가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살이를 하다가 금월 3일까지가 만기되어 작
일제를 빛낸 사람들 – 이상호 화백이 들려주는 작품 해설
전남 영암 출신인 이상호 화백은 조선대학교 서양학과 4학년이던 1987년, 조선대학교 미술패 후배들과의 공동 작품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를 제작해 미술인 최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됐다. 악명 높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받아 출감 후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 이상호 화백은 불교를 주제로 한 그림에 몰입하면서도 동학혁명, 4·19, 5·18, 통일 등 역사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당초 작년에 개최 예정이던 제13회 광주비엔날레는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4월 1일부터 5월 9일까지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열린다. 광주비엔날레에 초청받은 이상호 화백은 친일파를 주제로 한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라는 대작을 출품해 주목받고 있다. 이 작품은 연구소와 광주지부 회원들과 광주시민들의 후원으로 완성되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이상호 화백과의 인터뷰를 광주지부에 부탁하였다. 인터뷰를 기꺼이 맡아준 이지훈 사무국장과 인터뷰에 응한 이상호 화백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 편집자주 ●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 잘못된 역사가 시작된 곳이 궁금했어요. 부정한 권력 앞에 왜 다수의 민중들이 희생되는 시대가 계속되는지. 저는 그 잘못된 역사의 뿌리에는 ‘친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친일의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니까 계속해서 굴절된 역사가 이어온 것입니다. 저는 이 잘못된 역사가 후세까지는 연결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 그림 그리는 데에는 얼마나 걸렸나요? ● 작품에 대한 구상은 2019년도에 처음 했구요. 본격적으로 붓을
연구소가 참여한 KBS 단독 보도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방영
연구소가 참여한 KBS 단독 보도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방영 박광종 선임연구원 KBS는 지난 3·1절 저녁 9시 뉴스에 ‘간도참변에 관여한 한국인 경찰 공적서 발굴’ 사실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KBS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일제가 1921년 6월에 작성한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 보고>라는 제목의 문서 철에서 한국인 경찰 48명의 공적명세서를 확인하고, 1920년 간도참변 당시 한국인 경찰들이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한 일제의 만행에 적극 가담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KBS가 입수한 <간도사건에 관한 공적조서 보고>는 <응원경찰관 공적조서>(재간도일본영사관), <간도사건 공적명세서> (두도구분관과 용정촌총영사관), <간도사건 공적조사서>(국자가분관) 등 4종류, 600여 쪽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중 한국인 경찰 48명의 ‘공적서’가 상세하게 담겨있다. 이 문서들은 간도참변을 지휘한 일본군 부대장들이 ‘토벌’에 참여했던 일제 경찰(한국인·일본인)들에 대한 공적서를 작성하고, 간도총영사관이 이 공적서를 취합해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것이다. 연구소는 각종 사료(자료)를 조사해 간도참변에 참가한 한국인 경찰 48명 가운데 조선총독부 소속 순사로 간도로 파견된 ‘응원 경찰’ 9명이 일제로부터 종군기장(從軍記章)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종군기장은 일본이 대외침략을 기념하며 전쟁에 참전한 이들에게 수여하던 일종의 상훈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했던 이들 역시 종군기장을 받았던 것이다. 이들은 주로 첩보 수집 및 보고,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에게 변절을 강요하는 귀순 업무 등을 맡았는데 독립운동가 체포와 민간인 마을 ‘초토화’에도 직접 가담했다. 48명 중 간도참변 당시 간도총영사관경찰서에 근무하던 일본 외무성 경부
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2)
[돌려보기] 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2)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 편집자주 4. 국립서대문대학 빙고동 호텔에서 원 스타가 된 우리 다섯 별들은 그 계급에 걸맞게 따로따로 지프차로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1월 25일 서대문구치소로 이송, 수감 당했다. 이 날은 내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세 가지 추억이 겹쳐져 있다. 내가 등 따시고 배부른 편안한 고향의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 두고 상경한 날(1961.1.25.)이자, 맏아들의 생일(1972)인데, 여기에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서대문구치소로 넘어간 날이 추가되었다. 이 대학 면접은 까다로웠다. 이미 밤이 저물어 각 경찰서에서 보낸 일반수들은 다 입방해버린 뒤여서 덩그런 넓은 방에는 몇몇 교도관들이 난로 가에서 한담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 대뜸 일반사범이 아님을 알아보고는 직업을 묻기에 대학 강의도 하고 글도 쓴다니까 무슨 과 교수냐기에 국문과랬더니 “보나마나 민족문화예술이 어떻고 하다가 들어왔겠군요!”하고는 “안 됐구만요. 몸이나 조심하시오. 여기선 건강이 제일이니…”라고 하자 요시찰 담당 교도관이 나타나 “잡담 하지 마시오! 따라오시오!”라고 윽박질렀다. 널직한 방에 죄수는 나 혼자였다.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나를 홀랑
역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 선생 1주기 묘소 참배
역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 선생 1주기 묘소 참배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3월 15일(월) 민족문제연구소 상근자들은 역사학계의 ‘녹두장군’ 이이화 선생의 별세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한 성묘를 다녀왔다. 이이화 선생은 코로나19 대유행이 막 시작되던 작년 봄(3월 18일), 암 수술에 따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 장례 또한 수많은 시민들의 애도 속에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선생은 생전 <친일인명사전> 편찬,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등에 함께 참여하며 연구소와 깊은 인연을 맺어온 바 있다. 선생의 묘소는 파주 동화경모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별세 후 1년이 지났음에도 선생을 기리고 존경하는 시민과 팬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 성묘 당일에도 어느 시민이 두고 간 듯한 꽃이 묘소 곁에 놓여있었다. 연구소에서는 제수용품과 음식, 꽃다발과 함께 생전 선생이 즐겼다던 맥주와 담배를 준비해 제단에 올렸다. 성묘는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임헌영 소장의 참배로 시작되어 조세열 상임이사의 추도문 낭독으로 이어졌다. 추도문은 선생의 뜻을 존경하고 따랐던 후학들의 마음을 담아 조 이사가 작성한 것으로,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를 필두로 선생의 연구업적을 기리는 한편 ‘역사 대중화’를 위해 정열을 바쳤던 한 역사학자의 삶을 되새기는 내용을 담았다. 아울러 이날 성묘에는 이이화 선생의 부인 김영희 여사도 함께 자리했다. 김 여사는 묘소를 찾아온 연구소 상근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연구소가 이이화 선생의 유지를 이어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주길 당부했다. 코로나19로 각박한
연구소 설립 30주년 기념식
[초점] 연구소 설립 30주년 기념식 학예실 김슬기 연구원 1991년 2월 27일 문을 연 민족문제연구소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2월 27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기념식’을 진행하였다. 코로나로 회원들을 초대하지 못하는 대신 유튜브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된 이 행사에는 동시 접속자 300여 명이 온라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당일 2천여 명이 행사영상을 감상하였다. 먼저 회원들과 각계 인사들의 30주년 축하인사를 담은 영상을 감상한 후 광주지부 회원이자 작가인 주홍 씨가 샌드아트로 그린 연구소 30년사 영상으로 기념식의 문을 열었다. 함세웅 이사장은 30주년 기념사를 통해 “나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이듯 지금까지 민족문제연구소가 든든히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과 뿌리가 되어주신 분들은 후원회원 분들”이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어 김영환 대외협력실장과 안미정 자료실 주임연구원의 사회로 지난 30년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10대 뉴스’를 진행했다. 마지막 순위를 발표하기 전 막간을 이용해 회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소식 5가지를 소개하는 ‘당신이 몰랐던 민족문제연구소’ 뉴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어 모두가 예상했던 ‘친일인명사전 발간’이 1위로 선정되고 당시 영상이 재생되자 모두에게 그때의 감격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 음악 교사이자 <항일음악 330곡집>을 집필한 고 노동은 선생의 자제인 노관우 회원의 밴드는 축하공연으로 항일음악 ‘대한혼가’, ‘광복군 아리랑’ 등을 선보였다. 특히 연구소 30주년을 기념하여 새롭게 편곡·헌정한 ‘장타령’에는 흥겨운 가락과 함께 가사 ‘삼십년을 한결같이, 삼백년도 끄떡없게, 삼천리에 퍼져가세’가 울려 퍼지자 현장에 있던
‘후원회원 초대의 날’ 첫 행사
‘후원회원 초대의 날’ 첫 행사 김무성 회원사업 부팀장 연구소는 3월 19일 금요일 저녁 7시에 연구소 30주년을 맞아 기획한 ‘후원회원 초대의 날’ 행사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25년 이상 연구소를 후원해온 후원회원 중에서 수도권에 거주하는 후원회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30주년 기념식 때 방영한 회원극장의 주인공인 유동성 회원을 비롯해 김기흥 회원, 김석규 전 부 위원장, 김성종 전 이사, 김희준 회원과 동반인, 민삼홍 전 이사, 신창헌 전 이사 부부, 신희철 회원, 이수익 강남서초지부장, 이용훈 회원, 장필수 서울동부지부 자문위원, 최수전 감사, 황평우 전 부위원장 등 총 15명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연구소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자리를 띄워두고 칸막이를 설치하여 방역지침을 철저히 지켰다. 1부 행사에서는 25년 이상 후원을 지속해온 회원들인 만큼 그간의 연구소 활동에 참여하며 쌓은 추억을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2부 행사는 ‘나의 삶과 민주화 운동’이란 주제로 함세웅 이사장과 회원들 간의 토크콘서트였다. 한평생 민주화 운동에 몸 바쳐 온 함세웅 이사장의 진솔한 얘기는 회원들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들어 크나큰 감명을 주었다. 연구소는 이번 행사를 포함해 올해 총 7회에 걸쳐 후원회원을 초대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아울러 30년 동안 꾸준하고 독보적인 연구와 실천의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근간이 바로 함께 하고 있는 후원회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다가가는 회원친화적인 사업을 준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