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감상문
[후원회원 마당]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감상문 김유 광동지부장 이 책은 그야말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새삼 지나간 시절의 열정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다시 한 번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다. 독서의 목적이 그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시대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고, 그 시대에 맞추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고 옳은 일인지 생각하게 한다는 것은 글 쓰는 작자의 목적이라면 이 책은 대단히 성공한 책이다.“ 에라, 늘그막에 객기 한번쯤 부려 보고자 추려 본 것들이 이 평론집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객기”가 아니다, “정론집”이다. 책은 정치를 질타하는 장용학의 소설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문학에 커다란 획을 그은 대가들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잊지 않고 손석춘 씨 등 새로운 작가의 소개도 빠지지 않는다. 최인훈의 <광장>과 <회색인>, <총독의 소리>, <주석의 소리>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그와의 개인적 친분도 에세이처럼 잔잔하게 풀어놓는다. 그가 좀 더 살아서 6·25 때 납북되었 던 이광수와 반민특위의 김상덕 위원장과 아마도(?) 같은 차 안에서 만나 이야기를 했었다면 어떤 얘기가 오갔을까? 남정현 작가를 언급할 때는 식민지의 정의와 함께 그의 대표작 <분지>와 <허허 선생> 연작을 빼놓지 않는다. 남정현의 반외세 의식과 민족의식의 각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우리 자신의 운명까지도 한 손에 잡고 흔들어 왔던 미국, 그리고 그 우산 밑에서 기생하여 맘껏 달리는
개혁은 파고(波高)가 높다
[후원회원 마당] 개혁은 파고(波高)가 높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장 아버지는 어부였다. 소년시절부터 중선中船을 타고 먼 바다를 항해했다. 과거 어업은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일기예보가 정확하지 않고 통신시설이 미비했던 시절 자칫 폭풍우라도 만나면 난파당하기 일쑤였다. 아버지가 소형어선을 구입해 선주가 된 뒤로는 나도 가끔 어선을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다. 1톤 미만의 소형어선은 3~4m의 파고 앞에선 강물 위에 뜬 가랑잎과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은 천당과 지 옥을 오갔지만,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배를 운전했다. 큰 파고를 넘는 것은 정면승부로는 안 된다. 옆으로 항해하면 뒤집힌다. 정면과 옆면 사이의 빈틈을 정교하게 가로지를 줄 알아야 무사히 항구에 당도할 수 있다. ‘역사는 피를 먹고 진보한다’고 말한다. 개혁의 피, 혁명의 피가 역사를 진보시킨다는 말이다. 혁명은 한 번 성공했다 할지라도 곧 반혁명의 파고가 덮치며 위기를 맞곤 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앙시앵레짐 다시 말해서 구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됐다. 자본주의 발달로 상공시민계급인 ‘부르주아지’가 성장해서 나라의 중추를 이뤘지만, 권력과 특권은 여전히 구체제의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가 갖고 있었다. 부의 편중도 극심했으며 민중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생활을 했다. 민중들은 불만이 컸지만, 혁명의 주체가 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은 지식과 경제력을 갖춘 부르주아지가 시 작했다. 하지만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불만해소, 다시 말해서 귀족과 성직자가 독점한 권력과 특권을 나눠 갖고 신분제 타파와 입헌군주정을 수립하는 수준에서 혁명을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혁명을 전개하면서
빛나는 삶
[후원회원 마당] 빛나는 삶 김원근 전 교사 숨죽여 그늘을 걸을지라도 누군가에게 흙탕물 튕기지 않았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쓰린 이별 뒤 어딘가 둥지 틀고 살지라도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긴긴 겨울밤 뒤척이고 있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울고 싶어 어딘가를 홀로 떠돌지라도 부모님의 소소한 안부를 잊지 않고 이따금씩 떠올린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보잘 것 없고 든든한 배경이 없을지라도 누군가의 작은 햇살 한 줌으로 미소에 젖어 있다면 그 또한 빛나는 삶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누군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또는 이따금 비스듬히 떠받치기도 하며 저마다의 초저녁 어스름 길을 가고 있는 거 아닌가
대전지부,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추모식과 백선엽 안내문 철거
[초점] 대전지부,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추모식과 백선엽 안내문 철거 대전지부(지부장 박해룡)는 2월 5일 독립운동가 조문기(연구소 2대 이사장) 선생의 13주기 추모식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서 진행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대전지부 후원회원을 비롯해 광복회 대전지부(지부장 윤석경) 회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헌화, 묵념, 약력보고, 추모사 순으로 진행됐다. 조문기 선생은 유만수, 강윤국과 더불어 1945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이다. 이 의거는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이 주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에 사제 시한폭탄 두 개를 설치해 폭발시켜 대회를 무산시킨 사건이다. 조문기 선생은 2001년 이돈명 변호사에 이어 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으나 사전 발간 1년 전인 2008년 별세하였다. 정부는 2008년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2014년에는 모교인 화성매송초등학교 교정에 회원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제작 : 김서경 김운성)을 세 우기도 했다. 동상과 묘비에는 평소 선생의 어록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이날 추모식을 마친 참가자들은 당초 작년 7월 장군2묘역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선엽 묘와 바로 맞은편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된 광복군 출신 김준엽 선생(전 고려대 총장) 묘를 둘러보며 국립묘지법 개정의 필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고자 했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백선엽 묘를 찾기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 역사부교재 발간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 역사부교재 발간 지난 12월 경기도, 지역사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함께 친일청산 교육부교재 개발을 위해 공동 작업을 진행하여 <우리 지역의 일제잔재를 찾아라>(전5권)를 발간하였다. 2019년 경기도가 추진하고 우리 연구소가 조사연구를 맡아 진행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사업의 성과를 토대로 학교현장에서 교사들에게 필요한 부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고자 하는 취지에서였다. 경기도의 일제잔재는 크게 인적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친일인물’과 물적 잔재인 ‘친일 관련기념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경기도 출신 ‘친일인물’ 선정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를 근거로 하였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4,389명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1,006명의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경기도 출생・출신자는 모두 267명이다. 이들의 주요 경력에 따라 매국・귀족, 일제 통치기구 협력자인 관료・중추원・법조인, 경찰・군인, 문화계, 예술계 친일인물 등 6개 영역으로 분류하였다. ‘친일 관련 기념물’은 일제강점기 건축물, 친일 인물의 기념비·송덕비, 그 외 기념조형물 등 71개를 조사하였다. 역사부교재는 경기도를 4개 권역으로 나누어 일제잔재를 소개하고, 일제잔재 청산의 방법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도움 자료를 함께 실었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1권은 일재잔재의 개념과 유형별 분류를 제시했고, 친일인물 가운데 경기도 내 지역을 특정할 수 없는 인물들과 친일 관련 기념물 중 경기도의 신사(神社) 해설, 학교생활 속 일제잔재와 그 청산 사례를 소개했다. 그리고 2권~4권은 동부, 남부, 서부・북부 4개 권역별로 친일인물, 친일 관련 기념물, 교수-학습과정안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5권 사료편에는 친일인물 근거 사료, 친일파 관련규정・법령과 분야별 사료 해제, 친일 문제
군대해산식이 거행된 옛 훈련원(訓鍊院) 일대의 공간해체과정
지금은 사용빈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지만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옛 서울의 특정지역을 일컫는 독특하고 고유한 표현들이 그런대로 잘 남아 있었던 흔적이 곧잘 확인된다. 북촌(北村, 백악 밑)이니 남촌(南村, 남산 밑)이니 동촌(東村, 낙산 근처)이니 서촌(西村, 서소문 안팎)이니 하는 것은 그마나 제법 알려진 사례에 속하고, ‘동구내(洞口內, 동구안)’라든가 ‘통내(通內, 통안)’처럼 지금은 완전히 잊힌 용어도 없지 않다. 이 가운데 ‘동구내’는 창덕궁 돈화문 앞길을 가리키는 속칭(俗稱)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예를 들어 단성사(團成社, 수은동 56번지)와 같은 곳은 이곳의 위치를 알리는 문구에 ‘동구내 단성사’ 또는 ‘동구안 단성사’라는 식으로 짝을 이뤄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통내’는 배오개 쪽에서 함춘원(含春苑)에 이르는 지역의 통칭(通稱)인데, 이로 인해 지금의 종로 4가 사거리를 일컬어 ‘통안네거리’라고 불렀던 흔적이 완연하다. 이것 말고도 상촌(上村, 웃대)과 하촌(下村, 아랫대)이라는 것도 그 시절 서울사람들의 일상대화 속에 자주 오르내린 말이었는데, 박태원(朴泰遠, 1909~1986)의 소설 <천변풍경(川邊風景)>(1938)에도 ‘웃대’와 ‘아랫대’의 표기가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소춘(小春)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김기전(金起田, 1894~?)이 <개벽> 제48호(1924년 6월)에 수록한 글을 보면, “광통교 이상(廣通橋 以上)을 우대, 효교이하(孝橋 以下)를 아래대”라고 부른다고 하여 이들 지역의 개략적인 위치를 일러주는 내용도 남아 있다. 그리고 경성부에서 편찬한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1936), 556쪽에는 일본인 거주지와 그 주변의 옛 모습을 그려내는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고래(古來)로 상대(上臺, 웃대), 하대(下臺, 아래대)라는 말이 있는데, 전자(前者)는 서리(胥吏)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야마노테(山の手)’에 비견되며, 주로 현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과 실천적 지식인 김태준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 1940년 여름, 명륜학원(성균관대학교의 전신) 강사인 김태준은 경북 안동 출신의 제자 이용준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고향집에 조상 대대로 가보로 전해져 내려오는 훈민정음 원본(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다는 것이다. 김태준은 훈민정음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이용준과 함께 안동군 와룡면 주촌에 세거(世居)하던 후촌 이한걸 댁을 방문했다. 훈민정음 원본을 자세히 살펴보니, 세종대왕이 집필한 예의편(例義篇)과 왕명에 의해 정인지·신숙주 등 집현전 8학사가 쓴 해례편(解例篇), 정인지 서문 등 세 부분 31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예의편의 첫째와 둘째 장이 없었다. 이한걸 선생이 훈민정음 소장 내력과 두 장의 결락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은 본관이 진성 이씨로 퇴계 이황의 종파이며, 일찍이 선조 이정(李禎)께서 여진 정벌의 공이 있어 세종대왕으로부터 훈민정음을 상으로 받아 늘 궤짝에 감추어 세전가보로 간직해 오다가, 연산군 때 언문책 소지자를 엄벌할 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득이 첫 머리 두 장을 뜯어 버리고 돌돌 말아서 비장(秘藏)해왔다는 것이다.¹ 김태준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28년(1446) 9월 29일 기사에 훈민정음 예의편이 있음을 알고 이용준과 함께 결락된 두 장을 보수하기로 했다. 이용준은 이한걸 선생의 셋째아들로 12세때부터 서예에 뜻을 두고 안진경체를 익혀 16세 되던 1931년에는 동아일보에 ‘서예계의 신동’으로 대서특필되었다. 이용준은 <조선왕조실록>의 훈민정음 예의편 앞부분을 안평대군 필체로 모사하여 결락된 두 장을 복원하였다. 복원과정에서 세종대왕 서문 말미에 “편어일용이”(便於日用耳)를 “편어일용의”(便於日用矣)로 잘못 필사하였다. 김태준은 이한걸 선생에게 훈민정음이 국어학 연구자료로 매우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한 시대 다른 삶』 만화와 웹툰으로 제작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한 시대 다른 삶> 만화와 웹툰으로 제작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는 2020년 경기도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삶-웹툰 ‘한 시대, 다른 삶’>을 웹툰과 만화로 제작하여 보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과 항일의 각각 다른 길을 걸었던 역사 인물들을 비교하여 독립운동가의 애국정신을 우리 공동체의 가치로 재인식함과 동시에 사회 일각에 여전히 존재하는 식민지배 미화 등 반역사적 행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다는 취지이다. 이 사업에는 전국시사만화협회(회장 최민) 소속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만화에 등장하는 역사 인물과 작가는 다음과 같다. 신석구・정춘수(최승춘), 한용운・강대련(하재욱), 차미리사・김활란(성덕환), 신채호・최남선(정태권), 여운형・김성수(국태이), 지청천・이응준(최인수), 안재홍・방응모(최승춘), 조명희・김동인(전진이), 이육사・서정주(오금택), 한형석・현제명(서상균). 각 작품마다 전문가의 감수를 받아 작품의 수준을 높였는데 강태구(한국음악연구소 연구원)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박광종(연구소 선임연구원) 이순우(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준식(독립기념관장) 장신(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장원석(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학예실장) 한상권(덕성여대 명예교수) 등이 참여했다. 470쪽 분량의 2권으로 제작된 이 만화는 경기지역 모든 초·중·고등학교 2,400곳에 무상으로 보급되었으며 조만간 부천지부사이트(minjok21.kr)를 통해서도 웹툰 형식으로 공개된다. • 방학진 기획실장
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 가수 이지상을 만나다(2)
●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北>에 재미난 구절이 많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혹 한두 개 정도 소개해주세요. ●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시각의 차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인데, 어느 분교에서 17년 동안 졸업생 7명을 배출했대요. 선생님이 있고, 교장 선생님도 있는 그런 학교죠. 어떤사람은 ‘대단하다. 진짜 사람을 위한 교육을 하고 있네’라고 평할 것이고. 다른 시각의 어떤 사람은 ‘아니 그런 학교를 없애지 않고 왜 그냥 놔두지?’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겠죠. 이런 상반된 시각에 대해서 내 의견을 담아 책에 실었어요,. 그런 건 가능한 거잖아요? 그것이 작가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하고요. 또 하나는 종교에 대한 생각을 적은 구절이 있어요. 북에 종교의 자유가 있느냐? 부터 시작해서 왜 기독교는 북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가? 라고 적은 구절이 있는데요. 우리는 그것이 북의 종교탄압의 증거라고 말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었죠. 그런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북에서 종교탄압의 흔적은 찾아보기 쉽지 않아요. 그런데 미국이란 나라가 기독교를 신봉하는 나라잖아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북에 어마어마하게 폭탄을 투하해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구분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폭탄에 의해 희생을 당했어요. 그런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사회에서 미국을, 또 기독교를 이야기하고 종교를 믿어보라 권유한다면 그 사람들에게 씨알이 먹히겠어요? 그는 이렇게 두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교육과 종교라는 두 가지 사례로만 살펴봐도 북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다. 소위 합리성과
철도이설 고유문(鐵道移設 告由文)
철도이설 고유문(鐵道移設 告由文) 오늘은 근 80년 동안 임청각 앞을 가로지르던 철로가 옮겨지는 날입니다. 임청각은 한 가문의 종가인 동시에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곳입니다. 1896년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될 무렵, 당시 임청각의 주인 이상룡 선생은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만들어 외세에 저항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 경학사와 부민단을 조직해 항일투쟁의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3,500여 명의 졸업생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 수많은 항일투쟁 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선생은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 등의 중임을 맡아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1932년 만주에서 생을 마치셨습니다. 광복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석주 이상룡, 동구 이준형, 소파 이병화로 이어지는 3대(代) 종손과 형제 숙질 등 11명이 서훈되었고, 임청각은 ‘현충시설’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철길과 방음벽에 가로막힌 임청각은 예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과거사는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고, 국토는 분단되어 민족의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에는 남북(南北)과 여야(與野)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독립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석주의 정신이 오늘날 갈등을 잠재우고 미래를 가리키는 등대가 되길 바랍니다. 아! 드디어 오늘 국가와 국민의 노력으로 철로가 옮겨지고 임청각은 일제 강점기 이전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휘어지며 앞을 막았던 철도가 곧게 펴지며 제자리를 찾음은 철도 본연의 역할인 ‘소통과 이동의 자유 회복’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철길이 이어져 금강산과 백두산을 연결하고, 대륙을 횡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