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기념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 개막
[초점]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 기념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 개막 특별전 <나는 의병입니다 그리고 독립군입니다>가 2020년 12월 22일 근현대사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과 독립기념관이 공동 개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는 이번 전시의 제1부 <나는 의병입니다>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제2부 <나는 독립군입니다>는 독립기념관이 준비하였다. 제1부 <나는 의병입니다>는 ‘군대해산, 자결로 답하다’, ‘시위대, 서울에서 의병전쟁의 서막을 열다’, ‘진위대, 전국으로 의병전쟁을 확산하다’, ‘의병과 군인, 연합부대를 만들다’, ‘13도 창의군, 서울로 진군하다’, ‘유격전의 확산과 일본군의 잔인한 탄압’, ‘압록강 너머 두만강 건너, 만주로 연해주로’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1907년 군대해산 직후 박승환의 자결은 의병전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전시는 시위대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전국적 의병전쟁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박승환의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임명장」, 1900년대 초반 경성부 지도, 1907년 프랑스 잡지 L’ILLUSTRATION에 수록된 일본군과 전투 후 시위대 병사들의 모습, 1907년 8월 민긍호 의병부대와 일본군의 활동지역을 나타낸 지도,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이 해외동포에게 보낸 격문 내용을 알 수 있는 신문기사, 1910년 초에 작성된 연해주 13도의군의 서명록으로 추정되는 「의원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2부는 2020년 독립기념관 기획전 <나는 독립군입니다>의 순회전시로 ‘독립군, 독립전쟁을 쓰다’, ‘독립군을 양성하라’, ‘독립전쟁이 시작되다’, ‘우리의 군대, 한국광복군’, ‘독립전쟁 제1회전, 봉오동 전투’, ‘만주에 울려 퍼진 승전보, 청산리 전투’, ‘전진하는 독립군’, ‘독립군을 지키는사람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활동이 어려워진 의병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재편되어 독립전쟁을 하는 여정과 광복 후
인권변호사 이돈명 선생 10주기 맞아 추모비 세워
[초점] 인권변호사 이돈명 선생 10주기 맞아 추모비 세워 범하(凡下) 이돈명 선생(1922~2011)은 황인철・조준희・홍성우 변호사와 더불어 인권변호사 4인방으로 불리며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 관련 시국사건들을 도맡아 온 인권변호사들의 대부역할을 했다. 민청학련사건, 인혁당 재건위사건, 청계피복노조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사건, 광주민주화운동 등 1970년대 이후 주요 시국사건에서 빠지지 않고 활약했으며 3·1민주구국선언, 동일방직·원풍모방 시위사건, 와이에이치(YH) 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 등을 변호하면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전신인 정법회 고문, 조선대학교 총장, 상지대학교 이사장을 맡아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애썼으며, 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천주교인권위원회 창립이사장을 역임하며 천주교 사회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돈명 선생은 1995년 6월부터 1999년 9월까지 연구소가 사단법인으로서 새로 출범할 때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선생의 10주기를 맞아 함세웅 이사장의 제안으로 연구소를 비롯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4·9통일평화재단,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거시기 산우회, 천주교인권위원회가 함께 남양주시 별내읍 천주교영복산묘원에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 내용과 글씨는 각각 민주화운동의 원로인 김정남, 오병철 선생이 썼고, 비석은 김서경·김운성 작가가 제작했다. 추모비를 제작하기까지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이 큰 도움을 주었으며 실무적으로는 정소진 후원회원의 노고가 컸다. 이돈명 선생의 기일인 1월 11일에는 선생의 자녀와 몇몇 지인들이 참석했다. 연구소는 코로나19가 다소 진정되면 별도의 추모비 제막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 방학진 기획실장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며 임종국 선생을 기억합니다
신축년(辛丑年) 새해 민족문제연구소를 위해 애쓰시는 회원 여러분과 임직원들에게 축복을 기원하며 코로나19로 고생하시는 우리 사회공동체 구성원 모든 분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소는 우직하고, 성실하며, 깊은 인내심을 상징합니다. 특히 하얀 소는 신성하여 상서로운 일이 많이 생기는 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와 연구소에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거듭 축복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는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은 우리 연구소가 창립 30주년을 맞습니다. 선생께서는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를 보면서 ‘세계만방이 한집이다.’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우려하며 <친일문학론>을 펴내셨고 이후 친일파의 실체를 밝히고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선생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후 후학들이 선생의 뜻과 정신을 이어가기를 다짐하고 ‘반민족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꾸어 30주년이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도둑처럼 찾아왔던 해방의 기쁨은 단 하루뿐이었다는 역설을 우리는 아픈 마음으로 되새기곤 합니다. 선생께서 일제침탈의 잔혹상을 다시 생각하셨던 1965년 당시 한국사회는 ‘친일파’가 득세 했던 시기였습니다. 5·16 군사 반란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군부 핵심이 친일세력이었으며 그 군부는 미군정 이후 국가의 행정, 사법 권력을 장악했던 친일파를 거침없이 호위 세력으로 이용한 때였습니다. 선생께서는 친일의 핵심적인 문제가 ‘정신’ 곧 ‘가치관’, ‘역사관’이라 생각하셨습니다. 친일파의 가장 큰 문제는 일제의 가치관, 역사관에 동화된 정신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일제의 요구에 따라 조선의 백성을 수탈과 억압의 대상으로 삼았고 교화와 개조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군부 독재가 가능했던 이유이며 독재의 방식이었습니다. 새해는 해방 76주년, 연구소 창립 30주년입니다. 한국사회는 그 변화를
남산 기슭 군경유자녀원의 앞뜰에 남겨진 러시아제 대포의 정체
[소장자료 톺아보기•23] 남산 기슭 군경유자녀원의 앞뜰에 남겨진 러시아제 대포의 정체 어느 특정한 주제에 관심이 꽂혀 이에 관한 흔적이나 단서를 찾기 위해 해묵은 신문자료를 맹렬히 뒤질 때가 있는데 그러다 보면 정작 찾고자 하는 내용은 아니 나오고 이것과는 전혀 무관한 별스럽고 흥미로운 자료들을 우연하게 마주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지금 소개하려는 <동아일보> 1962년 6월 27일자에 수록된 「6.25의 유산(遺産) ③ 전쟁고아(戰爭孤兒)」라는 제목의 연재기사가 바로 그러했다. 여기에는 서울 남산에 있는 ‘군경유자녀원’(軍警遺子女院, 예장동 8-6번지; 지금의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에서 양육하고 있는 전쟁고아들의 실상을 알리는 가운데 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이 곁들여진 것이 퍼뜩 눈에 들어온다.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잔뜩 매달려 있는 것이 처음에는 무슨 나무기둥이나 놀이기구인줄 알았더니 기사의 말미에 “무심히 뛰어노는 전쟁고아들 … 그들이 장난감으로 삼고 있는 대포는 일로전쟁 당시의 유물이다”라고 설명한 구 절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 대포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는 낱장 사진 묶음 속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된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십여 명의 교복 차림의 아이들이 함께 촬영한 이 단체사진에는 대포의 모습이 훨씬 더 또렷이 드러나 있다. 사진의 뒷면에는 “1962, 남산예식장 안, 졸업앨범”이라고 쓴 메모가 남아 있으므로 두 사진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아원의 앞뜰에 남아 있는 대포라니, 이건 어찌 된 연유일까? 이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는 일제강점기에 이곳이 바로 노기신사(乃木神社)가
일제패망기에 매달 8일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까닭
보라, 성전(聖戰) 이에 3년, 다시 겨울은 복수의 날, 해방의 아침, 잊을 수 없는 8일을 맞이하네. 그대 아는가, 아시아의 수호신은 무쇠가 아니라 아시아의 수호신은 일억(一億)의 피, 젊은이의 치솟는 혈기. 피는 쇠보다 강하며 아시아는 하나의 피 무엇인가 능히 깨뜨릴 수 있는 불괴(不壞)의 결속임을. 그렇다면 이날 우리들은 붓을 던져 검을 들고 내일은 또 그대와 저 넓은 하늘에 서로 마주하리라. 마음은 오로지 달려가네, 마유하(マユ河, 버마 인도 접경지)의 선혈에 혈관은 힘차게 뛰는 산호도(珊瑚島)의 총탄빗발. 용서하라 벗이여, 눈물을, 우리들의 두 뺨에 쏟아지게 잠시 흐르도록 내버려 두어라. 보아라 그대, 아시아의 수호신이야말로 참으로 무쇠가 아니라, 탄약더미가 아니라 실로, 그것은 오직 십억(十億)의 분노에 찬 눈물 젊은이의 치솟는 혈기와 뒤섞인 뜨거운 눈물인 것을. 뭐가 이런 정신 나간 글이 있나 싶지만, 이것은 <경성일보> 1943년 12월 8일자에 수록된 「12월 8일의 맹서」라는 시(詩)의 전문이다. 여기에 그려진 삽화는 에구치 케이시로(江口敬四郞)의 것이고, 글은 마츠무라 코이치(松村紘一)가 썼다. 이 이름은 다름 아닌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창씨명이다. 일제패망기의 12월 8일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날이다. 이른바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태평양전쟁)’의 시작이 바로 이날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 해군기지와 필리핀 클라크공군기지에 대한 기습공격과 영국령 말레이반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신호탄으로 하여 대미대영 선전포고(對美對英 宣戰布告)의 조서(詔書)가 내려진 것이 이날이고, 그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천우(天佑)를 보유(保有)하야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조(天祚)를 천(踐)하는 대일본제국천황(大日本帝國天皇)은 소(昭)히 충성용무(忠誠勇武)한 여유중(汝有衆)에 시(示)하노라. 짐(朕)
냉전시대의 고정관념 허물기(2)
연줄로 미군 JACK부대 경비원이 되었는데, 마침 종군작가로 해군중령이었던 염상섭의 조카와 그 딸이 같이 근무하는 걸 알고 그 소개로 자기 소설을 염상섭에게 전하게 되어 싹수가 있다는 촌평을 들었다. 1953년(22살), 미군 기관 경비원으로 상경한 그는 황순원과 연이 닿아 문예살롱으로 찾아가 소설 습작을 본격화했다. 1954년, 한국은 예술원을 설립했는데, 초대 회원으로 염상섭 박종화(이상 서울 출신), 김동리 조연현 유치진(이상 경상도 출신), 서정주(호남) 윤백남(공주 출신)으로 월남 문학인은 전무했다. 제2대에야 황순원(평남) 이헌구(함북 명천) 모윤숙(함남)이 김말봉(부산) 곽종원(경북 고령)과 함께 추가되었고, 1960년에는 신석초(충남 서천) 박영준(평남 강서)이 추가됐다. 그러나 주요한 오상순 유치환 김광균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광섭 김동명 신석정 이은상 노천명 김현승 김용호 등 시인, 주요섭 안수길 계용묵 박계주 정비석 오영수 등 작가, 김팔봉 백철 등 평론가들은 초기에 소외되어 있었다. 이 명단을 참고하면 예술원의 편파성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게 한국문단을 파벌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황순원과 인연을 맺은 이호철이 보기에 한국문단은 조연현과 <현대문학>의 독무대였다. 예술원이 발족하자 이에 대한 반감으로 한국자유문학자협회가 창립(1955.4)되었는데, 위원장 김광섭, 부위원장 이무영, 백철 모윤숙 김팔봉 서항석 이헌구 등이 주도했다. 문단 비주류 파인 한국자유문학자협회는 기관지로 <자유문학>(1956.6)을 창간했으나 1963년 8월호 통권 71호로 종간됐다. 비록 단명으로 끝났지만 <자유문학>은 <현대문학>과는 달리 현실비판 의식이 강한 작가 남정현 최인훈 박용숙 유현종 등과 시인 권용태 황명걸 이세방 등을 등단시켰다. 역시 비주류파가 주동이 되어 나온 <문학예술>은 1954년 4월에
[인터뷰] 노래로 만인보(萬人譜)를 엮어내다
찌뿌드드한 하늘, 새벽부터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하루종일 해를 볼 수 없었던 날, 가수 이지상 씨를 만났다. 역촌동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 흔히 예술인의 작업공간이라면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살짝 지저분함을 상상했겠지만 뜻밖에 그의 사무실은 너무나도 깨끗했다. 이런 걸 상상하진 못했는데……. 암튼 깔끔한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를 처음 본 건 28년 전인 1992년 그가 마지막 학생이던 시절이었다. 경희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통기타 하나를 어깨에 메고 정오차의 ‘바윗돌’을 부르던 모습이었는데, 그게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시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첫 질문은 그의 가수생활에 대한 것으로 시작했다. ● 언제부터 노래를 시작하셨나요? ● 군대를 다녀오고 1989년에 국문과 노래패를 만들었어요. ‘궁상각치우’라는 이름의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하면서부터일 겁니다.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 활동이 잘 되니까 옆 과들도 노래패들을 만들기 시작했죠. 또 당시 단과대 학생회의 제안으로 단과대 차원으로 과노래패협의회(과노협)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게 모태가 되어서 ‘장작불’이란 단과대 노래패도 만들게 되었어요. 말 그대로 계통을 제대로 밟아가며 노래패를 만들고 조직화했던 모양이다. 그 당시는 학생회 활동, 학생운동이 융성하던 시절이었으니 가늠이 되었다. 이야기를 이어갔다. ● 어떤 계기로 그런 활동을 했나요? ● 따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고, 과 노래패 ‘궁상각치우’를 만들었는데, 기타 칠 사람이 없다고 해서 기타 반주를 해 줬어요. 그러다가 노래패 회장을 하게 되었고, 과노협 회장도 하고, 단과대 노래패 패장도 했죠. 그리고 1991년도에는 ‘전대협
효창독립커피 4탄 김창숙 커피, 5탄 지청천 커피 출시
[초점] 효창독립커피 4탄 김창숙 커피, 5탄 지청천 커피 출시 연구소는 일상 속에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자 효창독립커피를 기획하여 4월 차리석 커피를 시작으로 이상룡, 권기옥 커피에 이어 12월 24일부터 김창숙 커피와 지청천 커피를 선보인다. 김창숙 커피의 디자인은 국외 독립운동유적지를 찾아 알리고 있는 사진작가 김동우 회원이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안에 있는 김창숙 선생 동상을 촬영했으며 한글 글씨는 이진경 작가가 써주었다. 지청천 커피의 디자인은 이윤엽 판화가가 제작했다. 효창독립커피 구입은 hyochangmall.com(효창몰)에서 가능하다.
[후원회원마당] 줏대있는 중립이 우리의 몫이다
이 땅 한반도에서 오천년 역사를 일궈온 우리민족은 당연히 한반도의 토박이고 주인이다. 우리의 무사안일과 외세의 침탈로 인하여 식민지나 분단이라는 쓰디쓴 역사도 있지만, 오늘의 북한 땅이나 남한 땅 모두 한 덩어리의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갖은 곡절 끝에 지금은 미국과 중국 두 초강대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내 땅에 살면서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태도는 타파해야 하며 그 책임은 우리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이제 당당하게 주권을 찾아야 한다. 첫째, 우리 국민, 우리 민족의 주체성 확립이 선결조건이다. ‘근본이 서야 길이 생긴다’(本立道生)는 옛 성인의 말씀을 빌릴 필요가 없이, 우리가 피동적으로 남에게 끌려가거나 의탁하지 않고, 줏대 있게 사는 것은 우리의 당당한 고유권한이다. 우리는 지금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세계 10위 이내 강국 내지 중견국의 지위에 있다. 자생 자립 자위에 필요할 정도의 물질적 실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정신적으로 다시금 ‘3.1 독립혁명정신’이나 ‘사월혁명정신’을 발휘하면 확실히 ‘자기확립’이 되는 것이다. 주인다운 주인이 되려면 타자의 간섭이나 강요는 배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초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상대적으로 약소함을 비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대국들이 우리를 서로 ‘자기 편’ 또는 ‘자기와 유대관계 유지’를 바라고 있는 것은 우리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의 반영임으로, 우리의 지혜 있는 대처가 ‘중요도’의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둘째,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싸우고 말고는 우리와 상관없다. ‘투키디데스
[기고] 국가보안법 폐지는 일제잔재 청산이다
12월 1일 한국진보연대를 비롯, 137개 사회단체와 161명 인사가 “국가보안법 이제는 폐지해야 합니다”를 외쳤다. 이날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하는 청년학생 기자회견이 열렸고, 여타 많은장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를 가졌다. 이날 국가보안법 폐지 행사가 집중된 것은 국가보안법이 1948년 12월 1일 제정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대법전을 펼치면 나오는 국가보안법 제정날짜만보면 그렇다. 현행 법조문만으로 보면 그럴 수 있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이는 ‘단견’이다. 문제는 이 ‘단견’이 국보법 운동의 의미와 실제 효과를 크게 반감시킨다는 것에 있다. 지금이라도 빨리 수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짚어본다. 일단 현재 사용하는 대법전을 접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자. 보안법에 대해 “1907년 7월 24일(27일의 오류-편집자주) 집회와 결사·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게 제정, 반포하게 한 법률”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당시 분위기를 설명해 보자.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행정권을 행사했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이에 <대한매일신문>과 <황성신문>이 일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조선 팔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이완용 내각을 강제해 법률 제1호(1907.7.24.)로 제정한 것이 바로 신문지법(新聞紙法)이다. 그리고 3일 후 일제는 자국의 치안경찰법을 본따 보안법(保安法)을 강제했다.(법률 제3호는 출판법) 그 주요 내용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결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경찰관은 사회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집회 또는 다중(多衆)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