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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역사만화 <반민특위>를 펴낸 조남준 작가

2019년 12월 20일 1901

[인터뷰] 역사만화 <반민특위>를 펴낸 조남준 작가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문 : 이번에 발표하신 <반민특위전-청산의 실패, 친일파 생존기>(한겨레출판) 서문을 보면 작가님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광주 5.18과 87년 6월항쟁인데, 반민특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 1980년대 대학교 1학년 때 당시 필독서라고 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보면서 반민특위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당시 친일세력이 우리나라에 어느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어요. 친일세력의 1세대들은 이제 사라졌고 친일파는 없다라고 생각했었죠. 박정희도 일본육사 출신인 게 알려지지 않았죠. 계속적으로 사회운동을 하고 시사만화를 그리면서 우리나라의 권력구조는 친일파가 장악하고 그 뿌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김대중 정부에서 조중동에 대한 세무조사를 시작으로 언론개혁을 진행했는데 엄청난 저항으로 인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봤었고요. 2005년에는 사학법 개혁을 하면서 사학재단의 비리를 밝혀보 려고 했을 때 당시 야당의 박근혜가 한달 동안 청계천에 나와 촛불을 들고 반대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개혁이 제대로 안 되는 것들도 보았죠. 이승만 정권 때 친일세력들이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사학을 만들었고 그 학교들에서 비리가 횡행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또 올해 가장 큰 이슈였던 검찰개혁이 있었잖아요. 친일세력에서 벗어난 정부마다 항상 언론개혁, 검찰개혁, 사학개혁을 위해 노력하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고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는걸 보면 맨 위 상위 권력인 정부만 바뀌고

근현대사기념관 ‘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 개최

2019년 12월 20일 1007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일맥상통 백두대간’ 사진전 개최   근현대사기념관은 11월 19일 한반도 평화기원 백두대간 사진전 ‘일맥상통一脈相通 백두대간白頭大幹’ 기획전을 개막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는 이번 기획전은 한반도의 평화와 대화의 진전을 갈망하는 민족의 염원을 담아 남녁과 북녘의 산하를 한 자리에 펼쳐놓은 사진전이다. 뉴질랜드 산악인 로저 셰퍼드는 2007년부터 남쪽의 백두대간을 먼저 탐사한 데 이어 ‘조선-뉴질랜드 친선협회’의 협조로 북측 구간을 종주하면서 남북 백두대간 풍광을 사진에 담았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수많은 사진 중 50여 점을 엄선해 전시한다. 개막식은 11월 19일 오후 2시 근현대사기념관 건너편 통일교육원 제1교육관에서 백준기 통일부 통일교육원장, 김정륙 광복회 사무총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 관계자들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개막식 직후 로저 셰퍼드가 관람객을 대상으로 ‘백두대간 종주기–북한의 산하 그리고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기념관 앞뜰에서 진행된 개막 테이프 커팅식에 강북구 박겸수 구청장, 천준호 민주당 지역위원장 등도 함께 하였다. 이번 전시는 2020년 2월 28일까지 2층 기획 전시실에서 열린다. 백두산 천지와 삼지연에서 개마고원, 태백준령을 지나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의 비경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로 시민과 학생들의 큰 호응을 기대한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연구소, ‘친일 문제’에 관한 시민 인식 조사 실시

2019년 12월 20일 1076

[초점] 연구소, ‘친일 문제’에 관한 시민 인식 조사 실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그간 친일청산운동의 성과를 점검하고 좀 더 미래지향적・공익적 차원의 과거사 청산 방향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친일문제 전반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친일문제에 관해서는 과거 몇몇 언론들이 부분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지만, 구체적이고 광범하게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조사는 친일문제뿐 아니라 과거사 문제 전반에 걸쳐 폭넓게 진행됐다. 조사는 11월 1일부터 4일까지 실시됐으며, 지역별・성별・연령별・학력별・직업별・이념성향별 비례할당으로 추출한 전국의 만19세 이상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조사는 웹조사(휴대전화 문자와 이메일을 통해 url 발송) 방식이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조사 내용과 결과는 <민족사랑> 신년호 특집으로 실릴 예정 이번 조사에서 대다수 시민들은 아직도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특히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 10명 중 8명 이상이 해방 이후 지금까지 친일파 처벌은 물론이고 친일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답했으며, 사회지도층의 친일 행위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기보다는(18.1%) 개인의 안위를 위한 적극적인 친일(72.2%)로 보았다. 이에 따라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위는 더 엄격히 따져야 하며(82.7%), 이들 에 대한 기념사업 중단(81.3%), 국립묘지에 안장된 인물 이장(74.4%), 서훈을 취소(65.6%) 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한 박정희・김성수・방응모 등 저명인사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데 대해서도 적절하다고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별세

2019년 12월 20일 743

[초점]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별세   오종렬 한국진보 연대 총회의장이 12월 7일 별세했다. 고인은 교사 생활을 하던 지난 1987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 출범 참여를 시작으로 민중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전국교사협의회 대의원 대회 의장을 맡았고, 전교조 초대 광주지부장으로 활동하다 구속되고 해직되기도 했다. 고인은 지난 1999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상임의장을 맡으면서 민중운동 지도자 반열에 올랐고, 이후 통일연대 상임대표, 전국민중연대 공동대표,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 등을 맡으며 국가보안법 폐지투쟁,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한미FTA 저지 투쟁, 광우병 소고기 투쟁 등의 중심에 서서 수배와 구속, 수감 생활을 반복했다. 지난 2014년 2월 간경화와 급성신부전증으로 건강이 악화됐고 6년여 투병하다 향년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2월 1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고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민족통일장 영결식이 거행되었으며 11일 광주 망월동 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함세웅 이사장과 임헌영 소장은 고인의 장례위원회에 고문으로 참여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방학진 기획실장

시민방송에 내린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는 위법, 대법원 판결

2019년 12월 20일 804

[초점] 시민방송에 내린 방송통신위원회의 제재는 위법, 대법원 판결 2019년 11월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역사다큐 <백년전쟁>을 방영한 시민방송(RTV)에 대해 방송통신위원회가 내린 제재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시민방송(RTV)은 2013년 1~3월 <백년전쟁>을 방송하여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관계자 징계 및 경고, 이 사실에 대한 고지방송’의 제재를 받았다. 이유는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사자 명예존중에 관한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백년전쟁>이 공개된 후 벌어진 박근혜 정권에 의한 일련의 정치 공세의 유탄을 맞은 것이다. 시민방송은 방통위의 제재에 불복, 행정소송을 시작했다. 2014년 1심, 2015년 2심에서 시민방송은 패소했다. 행정소송을 다루는 판사가 다큐 내용의 명예훼손 여부까지 판단했고, 게다가 공식 문서인 판결문에 5.16 군사쿠데타를 ‘5.16 혁명’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판사의 정치적 입장, 역사의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점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했다. 시민방송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오래 걸렸다. 몇 해를 그냥 넘기다가 2019년 1월에야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하겠다고 나서더니 이번에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이 잘못이라고 결정했다. 대법원은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 매체, 채널, 프로그램별 특성을 고려하여 심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민방송을 KBS나 MBC와 같은 대형 미디어와 같은 기준으로 심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시민방송은 퍼블릭액세스(Public Access) 채널이다. 시민이 만든 프로그램을 방송하여, 시민이 수동적인 미디어 소비자가 아닌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주체로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대법원은 시청자가 제작한 방송프로그램의 객관성, 공정성, 균형성을 심사할 때는 대형 미디어가 제작한 프로그램에 비해 심사기준을 완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광주·인천의 독립운동 상징 광주일고, 인천창영초 친일작곡가 교가를 바꾸다

2019년 12월 20일 918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원지인 광주일고는 11월 19일 오전 교내 강당에서 친일작곡가 이흥렬이 만든 교가(1953년 제작)를 대신할 새 교가 발표회를 열었다. 경과보고에 이어 교내 합창단과 동문 관현악단의 연주로 열리는 발표회에는 동창회 임원과 학생, 학부모, 교직원 등이 참석했다. 새 교가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한 김종률 씨와 교내 공모를 통해 선정된 재학생 4명이 공동으로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김종률 씨는 이 학교 졸업생이다. 이승오 교장은 인사말에서 “우리 학생들이 주옥같고 의미심장한 가사를 빚어냈고, 김종률 작곡가가 힘찬 기백과 진취성을 담아 새 교가를 창작하였다. 새 교가를 부르며 새로운 100년 광주일고의 비상을 기약하자. ”고 말했다. 광주서중일고총동창회 김상곤 회장은 축사에서 “우리 후배들은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현대사의 불행을 단호히 배격하고, 새 교가를 만드는 모든 과정에 혼연일체가 되어, 마침내 흠결 없고 자랑스러운 교가를 부르게 되었다. 일고 공동체 99년 역사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고 치하했다. 인천에서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난 곳으로도 알려진 창영초등학교는 11월 25일 학교 체육관에서 ‘친일 잔재 청산 새로운 교가 선포식’을 진행했다. 창영초등학교가 주최하고 창영초등학교 전교어린이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교직원·학생·학부모·동문회 등 240여 명이 참석했다. 창영초교는 지난 3월 교가를 개정하기 위해 교사·학부모·동문회·육군사관학교·학생대표 등 9명으로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했다. 이후 4월부터 설문조사 등으로 학교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했으며, 10월 31일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교가의 작곡만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창영초교는 ‘그리운 금강산’을 만든 33회 졸업생 최영섭 작곡가를 섭외해 새로운 교가

근현대사기념관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시민강좌 진행

2019년 12월 20일 793

[초점] 근현대사기념관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시민강좌 진행 근현대사기념관은 한국영화 100년을 기념하여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이란 주제로 하반기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강좌는 2019년 11월 16일부터 12월 8일까지 매주 토, 일 오전 10시에 진행되었고, 강북구와 민족문제연구소의 적극적인 홍보로 강의마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일제 강점기에 나운규와 카프는 어떻게 영화로 저항했는가?’를 시작으로 친일영화, 해방의 혼란기 영화인들, 현대 한국영화의 모습까지 다양한 주제로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강성률(광운대학교 교수), 정영권(동국대학교 강사), 변재란(순천향대학교 교수) 등 전문성을 갖춘 강사들이 시민들에게 친숙한 영화를 주제로 강의하였다. 이번 강좌(총 8회)에서도 출석률이 높은 11명의 수강생들에게 수료증과 기념품(도서)을 전달하였다. 강좌 종료 후 강사와 수강생들이 함께 식사를 하며 <한국영화에 대한 8개의 질문> 강의 전반과 현재 영화에 대한 의견들을 교환하는 시간도 가졌다. 근현대사기념관은 2020년에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계획하여 강북구민들과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일반시민에게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 근현대사기념관 홍정희 학예연구원

한 뼘의 땅도 남김없이 철저히 파악하라 –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자료

2019년 12월 20일 3566

[소장자료 톺아보기 10] 한 뼘의 땅도 남김없이 철저히 파악하라 –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자료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공시 제9호, 54.2×38.8, 1915.8.10 고사告辭, 38.8×26.4, 1916.10   일제가 식민지 경영의 재정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벌인 첫 과제인 토지조사사업은 강제병합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 12월 통감부 설치 이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한국의 토지제도와 토지소유관습 등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시작했다. 1910년 1월 그 결과물인 <한국토지조사계획서>를 대한제국 탁지부에 제출했다. 이 계획서는 토지조사국 설립과 토지조사 계획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1910년 3월 14일 「토지조사국관제」(한국칙령 23호)가 공포되고 토지조사국이 설치되었다. 명의만 대한제국 기구였지 실제는 일제가 주도한 기구였다. 토지조사국에는 총재, 부총재, 부장, 서기관, 사무관, 기사, 주사, 기수 등을 두었으며 총재는 탁지부대신이 맡았다. 또 대구·평양·전주·함흥 4곳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1910년 8월 「토지조사법」을 제정하였다. 사업 실행을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될 무렵 강제병합이 일어나면서 토지조사사업은 자연스럽게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임시토지조사국은 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30일 공포된 「조선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관제」(칙령 361호, 10월 1일 시행)에 따라 설치되었다. 이후 임시토지조사국은 1918년 사업이 종료될 때까지 토지의 조사·측량 등 토지조사사업과 관련한 일체의 사무를 총괄했다.(임시토지조사국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통감부·조선총독부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의 핵심은 토지소유권과 경계를 조사하여 등기제도를 위한 장부를 제작하고 땅값을 조사하여 토지세를 부과하며 지형을 조사하여 전국 지형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각 지역별로 토지조사가 완료되면 이를 확인할 수 있게 공시한다. 연구소가

반역을 중단하라

2019년 12월 20일 757

[회원마당] 반역을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철폐 촉구   동학농민 민중해방혁명 125년 기미3·1독립혁명 100년 8·15민족해방 광복 7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못난 짓 하고 잘난 체하던 배신자를 찬양하고 기리는 나라 이것은 시대의 반역이다 부끄럽다! 강도에게 강탈당한 나라 나라잃은 백성 자유를 빼앗기고 미래를 뺏겼으니 희망도 빼앗기고 강제로 끌려가 목숨까지 빼앗겼다 힘없어 못 끌려간 노약자들 뼛골 빠지게 지은 농사 소출은 빼앗기고 주리를 틀렸다 2천만 민중은 죄다 노예되고 3천리 강토는 통째로 감옥통 아-아! 어찌 잊으랴 압박과 설움 피울음 우는 동포 냉정하게 외면하고 개처럼 기어가며 일신은 영달했다 인도를 배신했던 이기의 달인 서정주 광복은 됐지만 일제부역 사죄않고 양심도 없었는지 반성도 없었다 침략자 앞잡이 반민족 대역죄인 처벌은 못할망정 찬양이 웬말이냐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반역 중단하라 서정주 문학제 지금 당장 철폐하라 2019.11.2. 여럿이 함께 손잡고 ‘평화의 길’ 김판수

통칭호(通稱號), 침략군대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암호명 조선주둔 일본군은 어떠한 통칭호를 사용했을까?

2019년 11월 28일 2201

식민지역사박물관의 2층 진열공간에는 구겨지고 빛바랜 한 장의 일장기(日章旗)가 전시유물로 걸려 있다. 가운데 히노마루(日の丸, 붉은 원) 안에는 기(祈)라고 하였고, 호신용 부적과 같은 의미로 네 귀퉁이에 한 글자씩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쓴 이 일장기에는 ‘지나사변출동경력(支那事變出動經歷)’이라고하여 참전일지와 같은 내역이 순서대로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이 깃발의 주인인 보병군조(步兵軍曹 : 지금의 중사에 해당하는 계급) 후지모토 쇼조(藤元正三)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터지자 1937년 8월초에 일본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죠시(宮崎縣 都城市 : 제23연대 부대주둔지)를 출발하여 부산과 안동현, 산해관, 북평 등지를 거치고 마침내 그해 12월초 남경(南京)을 공략하고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죽 나열되어 있다. 그 이후 시기에는 1938년 말에 이르기까지 그가 경비 또는 전투에 참여했던 각종 작전지역에 관한 내역들이 길게 이어진다. 그런데 이 깃발의 가장자리에는 그의 소속이 특이하게도 ‘稻葉部隊(舊谷部隊) 佐野部隊(岡本「鎭」部隊) 松崎隊(河喜多隊) 肥後隊’라 고 표시되어 있다. 알기 쉽게 몇 사단, 몇 연대, 몇 대대 …… 이런 식으로 소속편제의 고유명칭을 직접 표시하지 않고 지휘관의 명자(名字, 성)만 따서 무슨무슨 부대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까닭일까? 이는 전쟁상황에서 적(敵)에게 자신들의 부대에 관한 세부사항이 노출되지 않도록 방첩(防諜) 차원에서 고안된 방편이라고 알려진다. 대개는 성만 따오는 것이 원칙이지만, 동일한 성을 가진 지휘관이 복수로 존재한다면 그 다음의 이름을 더 넣어 이를 구분하기도 한다. 가령 위에서 ‘岡本「鎭」’이라고 한 것은 오카모토 연대장이 두 사람이었던 탓에, 원래의 이름 오카모토 시즈오미(岡本鎭臣)에서 한 글자를 더 취하여 이를 표시한 경우에 해당한다.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