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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그리고 윤석열 정부 굴욕외교의 민낯

2024년 11월 5일 203

[돌려보기]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그리고 윤석열 정부 굴욕외교의 민낯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2024년 7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World Heritage Committee)는 일본 니가타(新潟)현에 있는 사도(佐渡)광산(공식 명칭은 ‘佐渡島の金山’ 사도섬의 금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에 대해 ‘에도(江戸)시대에 전통 수공업으로 도달한 최고의 금 생산 시스템’이라며 세계유산의 가치를 내세웠지만, 그곳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진 아픔의 땅이기도 하다. 1940년 2월부터 논산, 부여, 공주, 연기, 청양, 청주, 익산, 정읍, 울진, 진도, 장흥, 담양, 나주, 울진 등지에서 1,500명이 넘는 식민지 조선인들이 사도광산으로 강제동원되어 일본의 침략전쟁에 필요한 구리를 채굴하는 강제노동을 당했다. 등재 결정 직후 한국 정부는 “사도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일본, 전체 역사 및 한국인 노동자 관련 전시물 기 설치 및 추도식 약속”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통해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ICOMOS) 의 권고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일본이 성실히 이행할 것과 이를 위한 선제적 조치를 취할 것을 전제로 등재 결정에 동의하였다.”라고 밝혔다. 이는 마치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의 ‘조선인 강제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기록하기로 약속한 것처럼 착각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이는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는 ICOMOS의 권고와 우리 입장을 토대로 정부가 지난 수개월 간 일본 정부와 가진 진지한 협상의 결과물”이라며 자신들의 외교적 성과로 내세웠다. 일본 정부는 2015년 ‘군함도’로 잘 알려진 ‘메이지(明治)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제철·철강, 조선, 석탄산업’(이하 메이지 산업유산)의 세계유산

우가키 총독의 글씨로 판명 난 ‘황색종 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1936년)’

2024년 11월 4일 198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2] 우가키 총독의 글씨로 판명 난 ‘황색종 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1936년)’ 일본 천황이 애용했던 헌상담배 ‘충미엽(忠米葉)’의 전래 내력 이순우 특임연구원 작고한 테라우치 총독 때부터 조선 소산의 연초를 근제하여 가끔 천폐에 헌상하여 왔으며 거번 사이토 총독이 동상시에도 조선산의 연초로 양절연초를 근제하여 천폐에 헌상하였거니와 이번에는 특히 천황폐하께옵서 조선 소산의 연초는 향미가 극히 우량하다 하시와 또 제조하여 들이라는 황송한 처분이 계옵셔 사이토 총독은 즉시 총독부 전매과에 부탁하여 양절금구연초 3천 본을 근제하라 하였으므로 그간 계원들은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3천 본의 연초를 삼가히 만들어서 5일 9시 50분 제1번 열거로 이등실의 자리 한 편을 치우고 총독부 속 코타니 나오조(小谷直造) 씨가 받들어 가지고 궁내성을 향하여 동상하였는데 코타니 씨의 말들 듣건대, “천황폐하께옵서 어애용하시는 연초는 거위 조선 소산을 어애용하시는 줄로 배찰하는 터인데 이와 같이 천폐에 헌상연초는 충주군(忠州郡) 소산이 많았었는데 이번에는 역시 충주 소산의 제일품 가는 연초와 또는 토이기(土耳其) 소산의 연초 종자를 이종배양하는 태전(太田, 대전) 부근에서 소산되는 양연으로 3천 본의 연초를 근제하여 가지고 궁내성으로 출발하는 길인데, 여하간 조선양연으로 제일 영광을 많이 입기는 충주 소산의 일품양연이라”고 말하더라. 이것은 『매일신보』 1920년 3월 7일자에 수록된 「사이토 총독(齋藤總督)이 천폐(天陛, 천황폐하)에 헌상(獻上)하는 양절금구연초(兩切金口煙草), 3천 본(本)을 봉지(捧持)하고 동상(東上)한 총독부 속(屬) 코타니 나오조(小谷直造) 씨」 제하의 기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양절금구연초’는 양끝을 자른

일본의 일상 속 우경화와 역사수정주의(1)

2024년 11월 1일 319

[연구소 글방 16] 일본의 일상 속 우경화와 역사수정주의(1) – 일본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 김덕영 책임연구원 1.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수정주의 일본의 우경화는 겉과 속이 다른 모순된 형태로 발전해 왔다. 정치 외교적으로는 북한과 중국 위협론의 확대 재생산을 통해 친미, 반중, 반북을 기반으로 한 외교노선을 유지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식민지 시기 과거사 문제의 부정과 역사교과서 왜곡, ‘혐한’ 정서의 조성 등으로 끊임없는 정치적 갈등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도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해법으로 대규모 군비 증강과 이를 위한 평화헌법의 개헌을 주장한다. 즉, 일본 우익의 소망인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와 군사국가화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주변국과 정치적 갈등을 계속 유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중일은 역동적인 경제적 교류와 협력을 하고 있다. 이른바 아시아 패러독스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2019년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했는데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에 대한 보복조치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반도체 장비의 수출을 규제한 것이다. 정치적 갈등을 경제적 갈등으로까지 확장한 이 조치는 한국에 거의 피해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 반도체 장비의 점유율 하락이라는 결과만 남긴채 2023년 해제됐다. 그리고 수출규제는 일본 내부에서도 일본정부의 오판으로 비판을 받았다. 일본이 노골적으로 우경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2000년대 이후 강경 우익 혹은 극우 성향의 인물들이 자민당을 장악하면서부터라고 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노골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국립묘지의 영예성 확립을 위한 시민사회와 국회의 노력

2024년 11월 1일 277

[기고] 국립묘지의 영예성 확립을 위한 시민사회와 국회의 노력 방학진 기획실장 1. 국립묘지의 시작 1945년 11월 환국한 백범 김구는 1946년 안중근 의사 허묘를 포함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 묘역을, 1948년에는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등 임정요인 묘역을 효창원에 조성했다. 식민지해방투쟁을 벌인 나라가 독립을 맞이하고 당연히 가장 먼저 했어야 할 과업이었다. “나는 즉시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박렬(朴烈) 동지에게 부탁하여 조국 광복에 몸을 바쳐 무도한 왜적에게 각각 학살을 당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열사의 유골을 환국시키게 하고 국내에서 장례 준비를 진행하였다. (중략) 장례에 임하여 봉장위원회(奉葬委員會) 책임자들이 장지를 널리 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내가 직접 잡아놓은 용산 효창원 안에 매장하였다. 그것은 서울 역사 이래 처음 보는 장례식이었다. (중략) (임시로 영구를 모신-필자 주) 태고사로부터 효창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중략) 옛날 국왕 인산(因山) 때 이상으로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다.”(『백범일지』에서) 그러나 백범 자신이 1949년 암살당하여 효창원에 묻힌 이후 효창원은 반이승만의 성지가 되면서 시민들은 경찰의 감시를 피해 몰래 ‘도둑 참배’를 해야만 했다. 이러한 ‘참배와 감시’의 역사는 광주 망월동묘지에서도 재현되어, 전두환 정권은 5·18 추모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차없이 탄압을 가했다. 이승만 정권은 독립운동가를 모신 효창원을 금단의 영역으로 묶어둔 것에 그치지 않고 1956년과 1959년 두차례나 선열들의 묘소를 강제 이장하려 했다. 효창공원선열묘소보존회를 조직해 강제 이장을 앞장서 막아낸 이는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이었다. 통곡 효창원 효창원에 쓰라린 바람 일고

이육사, 광야에서 자유를 노래하다

2024년 10월 30일 190

[초점] 이육사, 광야에서 자유를 노래하다 올해 성북구와 성북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재단법인 역사와 책임이 주관하는 ‘슬기로운 독립투어’가 네 차례에 걸쳐 진행 중이다. 10월 12일과 13일, 안동을 방문하는 ‘이육사, 광야에서 자유를 노래하다’ 답사가 열렸다. 이미 지난 7월과 8월에는 신익희와 조소앙을 주제로 두 차례의 답사가 진행된 바 있다. 12일 오전 9시, 답사 참가자들은 월곡역에서 출발하여 안동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이동하였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2007년 ‘안동독립기념관’으로 개관했으나, 2017년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올해, 뉴라이트 출신 기념관장이 임명된 후 ‘경상북도호국보훈재단’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희석하려는 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도착 후 기념관 강의실에서 방학진 기획실장의 강연이 약 40분간 진행되었고, 이어 기념관 전시를 관람했다. 1894년 갑오의병부터 국채보상운동, 신흥무관학교, 6·10 만세운동, 의열투쟁 등 경북 지역 독립운동의 유물들을 둘러보았다.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에 ‘호국보훈’이라는 명칭을 부여해 왜곡하려는 시도가 아쉽고, 현 정권의 역사 왜곡 시도가 엿보여 아쉬웠다. 이후 독립운동가 김동삼의 생가인 의성김씨 종택을 둘러보고 임청각으로 이동했다. 임청각은 안동 고성이씨의 종택으로, 500년 이상 된 고택이다. 이 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으로, 보물 182호이자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군자정이라는 대청에는 퇴계 이황의 글씨로 된 ‘임청각’ 현판이 걸려 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기도 하다. 답사 참가자들은 독립운동가의 정신과 고택의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임청각에서의 1박에 큰 만족감을 표했다. 다음날, 참가자들은 임청각을 떠나 이육사문학관으로 이동해 이육사의

강원도·수도권 후원회원 수련회

2024년 10월 30일 148

[초점] 강원도·수도권 후원회원 수련회 영남권과 충청권에 이어 강원도·수도권 지역 후원회원을 대상으로 한 2024년 민족문제연구소 수련회가 10월 5일과 6일 이틀간 강촌유스호스텔에서 열렸다. 64명의 회원, 회원의 지인들이 참석하였고 먼 길 마다않고 달려온 부산, 제천 회원들도 함께했다. 의암류인석기념관과 윤희순 의병장 생가터를 돌아보며 첫날 사전답사를 진행, 저녁 식사 후 수련회 본행사를 가졌다. 정세 강론에 해당하는 함세웅 이사장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강원 고성군수인 함명준 회원의 힘찬 인사가 이어졌고 춘천 대학생연합동아리 날갯짓 청년들의 율동과 이혜선 바이올리니스트 공연도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배가 운동이 지금 시점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2024년 회원현황보고를 토대로 하여 방학진 기획실장이 강조하였다. 책상별 7~8명씩 둘러앉아 지부장들의 진행으로 펼쳐진 이야기 마당에서는 회원가입 동기뿐 아니라 우리의 할일 등 폭넓고 깊은 이야기들이 오갔는데 강원지역 회원들은 지부건설준비위원회를 띄우자는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박진우 수원지부장이 진행한 이야기마당에 이어 문화마당을 진행했다. 한명철, 김수환 부부 회원의 노래, 회원들이 준비한 율동, 철원 농민회 활동을 하고 있는 김용빈 회원의 발언 등이 있었다. 둘째날은 이범익 단죄비와 평화의 소녀상을 답사했다. 간도특설대를 제안한 친일파 이범익 단죄비 안내는 춘천역사문화연구소 오동철 선생님이 해주셨고 평화의 소녀상 작가 김서경, 김운성 회원과 춘천 지역에서 활동하는 김주묵 회원이 소녀상 건립 과정과 의미를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답사 후 아침 식사를 끝으로 강원·수도권 회원수련회를 마쳤다. 이어서 11월 2~3일에는 호남권 수련회가 여수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 국세현 기획실 회원사업부팀장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장을 위한 국회 토론회 열려

2024년 10월 30일 136

[초점]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장을 위한 국회 토론회 열려 우리 연구소와 김용만 의원실 등이 9월 26일 국회의원회관 제9간담회실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이장을 위한 국회 토론회’를 개최했다. 김용만 의원은 자신의 1호 법안으로 일명 ‘친일파 이장법’을 발의했는데 이번에 관련 토론회가 열린 것이다. 가장 먼저 발표에 나선 방학진 기획실장은 ‘국립묘지의 영예성 확립을 위한 시민사회와 국회의 노력’이라는 발표를 통해 우리나라 국립묘지의 시작이 독립운동가를 위한 공간이 아닌 군인을 위한 묘지로 시작된 태생적 한계를 지적했다. 또한 우리나라 현행 법률을 통틀어 ‘영예성’이라는 개념이 유일하게 등장하는 법률이 「국립묘지법」임을 상기하면서 국가에 대한 희생과 공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반국가, 반사회적 행위가 있다면 국립묘지 자체의 존엄과 국립묘지에 안장된 국가유공자를 추모하는 일반 국민들의 입장을 고려할 때 안장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 ‘영예성’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발표는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장의 법적 쟁점’으로 장완익 변호사가 맡았다. 장 변호사는 김용만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률개정안들은 진정소급입법으로 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한 위헌이라는 것이 헌법재판소 입장이지만 ‘친일재산귀속법’ 제3조 제1항 본문처럼 진정소급입법의 예외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세 번째 발표는 하상복 목표대 교수가 ‘국립묘지와 애국: 프랑스의 역사적 사례를 중심으로’였다. 하 교수는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의 국립묘지 격인 빵떼옹의 사례를 통해 혁명의 이념은 구체제의 이념과 섞일 수 없는 것이었고, 반동의 이념과 혁명의 이념은 서로 타협될 수 없는 것이라는 프랑스인들의 인식을

사도광산 ‘반도 노무자 명부’ 공개 요청 서명운동 후기

2024년 10월 30일 157

[초점] 사도광산 ‘반도 노무자 명부’ 공개 요청 서명운동 후기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대일 굴욕 외교 실상이 명확히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사도광산 노동자 추도식 개최를 약속했다며 이르면 9월에 추도식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추도식을 개최하겠다고 하는 정부는 누가 어디서 어떻게 희생당했는지 해방을 맞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어떻게 돌아왔고 그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제대로 알고 있지도, 알려고 노력하고 있지도 않다. 사도광산 강제동원 피해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가 니가타현립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반도 노무자 명부’가 바로 그것이다. 이 명부는 니가타현 지역 역사 편찬 과정에서 미쓰비시가 니가타현립문서관에 제공한 자료이다. 이 명부가 강제동원 피해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임에도 니가타현과 사도광산 측은 “원본의 행방을 알 수 없으므로 공개할 수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수차례 요구하였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8월 중순부터 9월 초까지 ‘반도 노무자 명부’ 공개를 요청하라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앞에는 사도광산 강제동원 문제를 알려내는 패널을 설치하여 박물관을 찾는 시민들이 이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9월에는 이틀 동안 연구소 인근에서 직접 시민들을 만나 서명을 받았다. 9월 12일. 2,404명의 서명을 모아 외교부에 전달하였지만 돌아온 답변은 ‘업무에 잘 참고하겠다’는 단 한 줄의 형식적인 내용뿐이었다. 언제, 어디에,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1)

2024년 10월 30일 241

[소장자료 톺아보기 63] 시정기념일과 시정기념엽서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엽서 시리즈(1) 1910년 8월 22일 일제에 의해 ‘한국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 발효되면서 대한제국은 식민지 조선이 되었다. 그해 9월 30일 공포된 「조선총독부관제」에 의해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으로 기능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10월 1일을 시정기념일(始政紀念日)이라 명명하고 국가기념일의 하나로 삼았다. 하지만 일제가 실제로 기념축하행사를 벌인 것은 병합기념일인 8월 29일이었다. 이날 경성신사 등 전국 각지에서 기념식과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고 은행 등은 임시휴업일로 지정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15년에 이르러서 시정기념일이 공식화되고, 이날을 총독부와 소속관서의 휴무일로 지정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린 취지는 조선총독부 고시(告示) 제151호(1915.6.26) 「시정기념일의 건」에서 잘 드러난다. 명치 43년(1910년) 10월 1일은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더불어 신정(新政)을 개시했던 날이다. 병합조약의 체결 및 그 실시에 있어서 추호(秋毫)의 분요(紛擾)를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정의 방침 및 계획에 따라 전부 원활히 제반의 정무(政務)를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성명(聖名)의 위덕(威德)과 시운(時運)의 추세에서 기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총독부 개시 이래 자(玆)에 5주년 질서의 회복, 제도의 정리는 물론 식산흥업(殖産興業)에 관한 백반(百般)의 시설 경영도 또한 점차 그 서(緖)에 들었으며, 홍택(洪澤)의 점윤(漸潤)하는 바 상하만상 각기 안도하고 치평(治平)의 경(慶)에 욕(浴)하여 조선통치의 기초는 이미 확립되어 시정의 방침은 오래도록 넘쳐나는 것이 될 것인즉, 이제 자금(自今) 매년 10월 1일로써 ‘시정기념일’로 정하여 영구히 이러한 성사(盛事)를 명심하고 일층 여정노력(勵精努力)하여 제국의

삼청동 세균검사실 시절에 총독부 경무국장의 글씨로 새긴 비석

2024년 10월 11일 285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1] 저 멀리 청주 오송으로 옮겨진 ‘동물공양지비(1929년)’의 조성 경위 삼청동 세균검사실 시절에 총독부 경무국장의 글씨로 새긴 비석 이순우 특임연구원 절차적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선거의 개표 결과가 나올 때마다 유달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곤 하는 하나의 공간이 있다. 이른바 ‘정권인수위원회’의 사무실 용도로 곧잘 사용되는 ‘한국금융연수원(삼청동 28-1번지)’이 바로 그곳이다. 그러고 보니 일찍이 1987년 노태우 당선인 시절에는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가, 그 이후 2007년 이명박 당선인과 2013년 박근혜 당선인에 이어 2022년 윤석열 당선인 시절에도 각각 이곳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잇달아 터를 잡은 적이 있었다. 이 구역 안에는 벽돌로 구성된 ‘번사창(飜沙廠, 1884년 6월 준공)’이라는 이름의 특이한 근대문화유산 한 채가 잔존하는데, 이것은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의 계청(啓請)에 따라 1883년 5월 23일에 설치된 기기국(機器局; 중국 천진에서 들여온 기계와 기술로 근대식 군기 제조와 수리 및 수매를 담당하던 관아)에 속한 기구의 하나였다. 옛 선혜청 북창(宣惠廳 北倉) 자리에 들어선 기기국 안에는 번사창과 더불어 기기창(機器廠), 목양창(木樣廠), 숙철창(熟鐵廠), 동모창(銅冒廠), 고방(庫房) 등의 시설이 함께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세월을 죽 거슬러 올라가면 이 자리는 무척이나 역사적 유래가 깊은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찍이 이곳에는 5군영(五軍營)의 하나인 총융청(總戎廳)과 수어청(守禦廳)의 본영(本營)이 한때나마 자리했던 곳이며, 영조 24년(1748년) 이후로는 선혜청 북창(宣惠廳 北倉)이 터를 잡은 장소였다. 이곳 바로 앞 삼청동천(三淸洞川)에 걸쳐 있는 다리의 이름이 ‘북창교(北倉橋)’인 것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