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시대를 넘어 함께한 동지의 길
[임종국상 수상소감] 시대를 넘어 함께한 동지의 길 노관우 특별상 수상자 노동은 교수의 아들 먼저 이런 뜻깊은 상을 받게 되어 아들인 저를 비롯한 온 가족들과 아버지의 제자 분들의 기쁜 마음을 담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임종국 선생님이 남겨주신 소중한 발자취와 아버지께서 평생 근현대음악을 연구하시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고 알려 오시고자 했던 걸음걸음이 그 모양은 달라도 한 방향으로 나아가셨다고 직감합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함께 손을 맞잡고 걸어오셨음을 느낍니다. 또한 일본의 경제도발에 대한 작금의 국민적 분노 속에서 그동안은 없었던 특별상을 받게 되니 더욱 각별한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임종국상을 수상하신 다고 하니 많은 분들에게 그 타이밍이 절묘하다며 특별한 축하를 많이 받았습니다. 쌀쌀했던 날들을 촛불집회로 뜨겁게 녹여대던 3년 전 11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병상에서 뉴스를 보시며 하시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촛불을 보시면서 제게 ‘촛불집회에는 가봤느냐’며 당신도 몸만 괜찮으면 가보고 싶다고 아쉬워하시던 얼굴과 목소리가 더욱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이런 뜻깊은 상을 직접 받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아버지를 대신하는 자리가 늘 조심스럽고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아버지께서는 <민족음악현단계> <민족음악론> 등을 저술하시는 한편으로 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시며 민족음악연구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오셨고, <노동은의 음악상자> 시리즈, <한국근대음악사> <한국음악론> 등을 통해 애국가문제, 친일음악, 뽕짝 등 우리 근대음악사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알리시는데 늘 앞장서셨습니다. 임종 직전까지도 오랜 기간 작업하셨던 <항일음악 330곡집>의
생을 바쳐 기록한 1만2천 장의 카드… 우리는 그에게 빚을 졌다 – 임종국 선생 30주기, 그 뜻에 가닿으려면
[회원마당] 생을 바쳐 기록한 1만2천 장의 카드…우리는 그에게 빚을 졌다 – 임종국 선생 30주기, 그 뜻에 가닿으려면 최우현 서울북부지부 회원 우리는 먼저 떠난 고인(故人)들을 기리고 추모한다. 떠난 이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의 생애를 회고해보는 것이다. 가끔씩은 고인이 떠난 시점을 기점으로 시간사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1주기, 10주기, 30주기… 이처럼 말이다. 이런 경우 그만큼 고인이 관철한 삶이 강렬했거나, 사상과 행적을 기념할 필요가 높았다고 판단해볼 수 있다. 지난 11월 9일 천안 일원에서 열린 ‘임종국 선생’의 30주기에 특별한 추모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임종국 선생은 친일문제 연구에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통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했으며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다시피 골몰하여 후대 연구의 기반을 조성했다. 우리가 흔히 ‘친일파’로 알고 또 지칭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기록이 그가 작성한 1만 2천 장에 달하는 ‘친일인명카드’ 속에 담겼고, 후일 이는 〈친일인명사전〉의 뿌리가 됐다. 〈친일문학론〉(1966), 〈일제 침략과 친일파〉(1983), 〈일제하의 사상탄압〉(1985) 등 실증에 입각한 저서들도 남겼다. 특히 올해가 〈반일종족주의〉, 류석춘 교수 논란 등 친일 논란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임종국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되짚어보는 일은 더욱 의미가 있다. 이날 추모를 위해 모인 시민들의 행렬은 선생이 영면한 천안공원묘원과 필사의 연구를 이어나간 요산재(樂山齋)등 공간의 발자취를 따라 이어졌다. 임종국 선생은 생애 마지막
기증자료
▪ 10월 1일 나가쓰 에쓰코(永津悦子) 씨가 자신이 쓴 <식민지 생활의 기억 : 농가에서 태어나 자란 최명란 씨의 반생(半生)>(2019)을 기증했다. 일본 고려박물관 내 조선여성사 연구회 회원을 지낸 최명란 씨가 식민지 농촌에서 겪은, 특히 농촌 여성의 삶을 5년 동안 대담을 나눠 저술했다. 최명란 씨는 1927년 경남 창녕군에서 태어났고, 1946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사키에 살고 있다. 저자는 2014년 고려박물관 기획전시 <한결같이 산 조선·한국인의 여성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책 주인공인 최명란 씨를 만났다. 이 전시에 연구소가 다수의 사진 자료 등을 제공 협력한 바 있다. 나가쓰 에쓰코 씨는 보답의 뜻으로 이 책을 기증했다. 그 밖에 도서 안내 관련 팸플릿 6점도 기증했다. ▪ 10월 10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의 유족들과 오랫동안 교류해 온 사노 미치오(佐野通夫) 호센대학교 교수가 도서 636권, 수평사(水平社) 관련 자료 2점을 기증했다. 주로 교육사 및 재일조선인 관련 도서이다. <재일조선인의 기본적 인권>(1977), <재일조선인>(1979),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의 권리>(1996), <재일조선인과 일본사회>(1999) 등이 있다. 자료 가운데 수평사 강령 및 선언문 1점, 전국수평사창립대회 문서 1점은 신분 차별에 맞서 해방운동을 이끈 수평사(1922년 3월 일본에서 결성된 단체)에 대해 알 수 있는 귀중한 문서이다. ▪ 10월 19일 적기(赤旗)편집국 편집위원회에서 신문 ????적기???? 4부를 기증했다. 시리즈 <식민지지배 역사와 현실> 두 번째 편에서는 “억압 36년, 일본은 조선에서 무엇을 했는가?”라는 주제로 헌병경찰제, 문화통치기 친일파 양성책, 황민화정책, 강제동원 등 일제의 통치흐름을 다루었다. <식민지지배 역사와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행사
[초점]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행사 11월 9일 임종국 선생 30주기를 맞아 천안에서 회원들과 시민, 충남지역 학생들이 모여 임종국 선생 추모행사가 진행되었다. 선생의 흉상이 세워진 천안 신부공원 답사를 시작으로 천안공원묘원에서 추모식을 거행하고, 선생이 마지막 여생을 보낸 요산재에서 안내 이정표를 세우는 행사를 거행했으며 저녁 6시 천안중앙고등학교에서 ‘임종국 선생 30주기 추모의 밤’ 행사를 끝으로 전체 일정을 마쳤다. 이번 추모행사는 민족문제연구소·임종국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충남지부·천안지회·아산지회·천안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 충남교육청과 충남역사교사모임이 후원하였다. 본부에서는 박수현 사무처장, 방학진 기획실장, 임무성 교육위원, 박광종, 이순우, 권시용, 조한성 선임연 구원, 손기순, 신다희, 국세현, 류감석, 김무성이 참여했고, 지부에서는 이민우 운영위원장, 권희용 충남지부장, 최기섭 천안지회장, 박해룡 대전지부장, 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 이용길 천안역사문화연구회장을 비롯한 회원 40명이 참가하였다. 천안공원묘원에서의 추모식에서는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참석해 추모사를 하고, 이민우 운영위원장을 필두로 전 회원이 참배하며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기렸다. 임종국 선생 유족 대표로 선생의 여동생 임경화 여사와 사위인 조원희 님이 참석하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추모의 밤 행사에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김지철 충남교육감, 윤일규 국회의원, 홍성표 아산시의원이 참석했다. 또 충남역사답사에 참여한 충남지역 고등학생 100여 명이 참석해 임종국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이 행사에는 고 노동은 교수의 아들 노관우 씨가 중심이 된 밴드가 판소리 심청가와 〈항일음악 330곡집〉에 수록된 ‘새야새야파랑새야’ , ‘대한혼가’, ‘광복군 아리랑’을 불러 추모의 뜻을 더했다. •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특별전 개막
[초점]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 특별전 개막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 10주년을 맞아 “기억을 둘러싼 투쟁-친일인명사전 발간 그후 10년”을 개막했다. 2019년 식민지역사박물관의 네 번째 기획전이다. 임종국 선생 서거 30주기와 맞물려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가 시민들과 함께 싸워 온 친일청산운동의 발자취를 전시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회는 크게 6부로 구성되었다. 1부 ‘시민의 힘으로 만든 과거청산의 기록, 친일인명사전’은 사전 발간까지의 경과와 국가 차원의 친일청산을 이끌어낸 의미를 되짚었다. 2부 ‘상식과 정의가 된 친일청산’에서는 친일파의 서훈 취소, 국립묘지 친일파 묘 이장 추진 등 국가에 책임을 묻는 질문과 친일파 기념사업‧기념물 중단을 위한 시민들의 역사운동이 전국에서 어떻게 펼 쳐져 왔는지를 살폈다. 3부 ‘친일파는 살아있다’는 친일파의 변명, 이어지고 있는 망언과 궤변의 계보와 참회록을 비교해서 읽을 수 있도록 꾸몄다. 그 가운데 일제 고등경찰의 고문기술의 계보자, 일본군의 의병학살로부터 비롯된 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계보도 함께 살폈다. 4부 ‘시민 박기서는 왜 살인범이 되었나’에서는 1990년대 전반 프랑스와 한국 사회에 뜨거운 논란을 던졌 던 ‘나치협력자 르네 부스케 살해사건’과 ‘백범 암살범 안두희 살해사건’을 다루었다. 사법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에서 시민이 살해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청산의 고통스런 역사를 되짚었다. 5부 ‘친일청산의 파수꾼들’에 서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우리 사회에서 친일청산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4명의 주인공의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다. 6부 ‘친일청산, 시민의 손으로 기록한다’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후원회원들과
제13회 임종국상 시상식
[초점] 제13회 임종국상 시상식 제13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10월 31일 오후 7시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회원 및 각계 인사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시상식은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의 기념사를 시작으로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축사, 임종국 선생의 일대기 영상 상영, 이민우 연구소 운영위원장의 기념사업회 경과보고, 윤경로 심사위원장의 선정경위 설명, 시상과 수상자들의 수상연설,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 순서로 진행됐다. 올해 수상자 후보 공모에는 학술·문화 부문 10건, 사회·언론 부문 6건, 특별상 2건 등 18건이 올라왔으며 10월 7일 열린 심사위원회 본심에서 열띤 토론 과정을 거쳐 학술부문에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를, 언론부문에는 KBS 탐사보도부 ‘밀정’ 제작팀을, 특별상에 고 노동은 교수를 제13회 임종국상 수상자로 최종 선정했다. 학술부문 수상자인 정영환 메이지가쿠인대학 교수는 일본군‘위안부’를 비롯한 강제동원피해자와 재일조선인 차별 문제 등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동원 책임을 추적하여 주목할 만한 성과들을 내놓은 연구자이자 한일 과거사 청산의 현장에서 맹렬히 활동해온 실천적 지식인이다. 2016년에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날카롭게 비판한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을 저술함으로써 한일양국의 역사수정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수상 저서인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일본은 물론 한국으로 부터도 외면당하였던 재일조선인의 생존 과정을 치밀하게 논구한 역작이다. 이 책은 그 자신 조선적(朝鮮籍) 동포 3세이기도 한 경계인으로서 저자가 ‘재일’의 정체성을 깊이 고뇌하고 싸워온 투쟁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방대한 사료를 섭렵하고 분석한
누구를 위한 식민지 ‘개발’인가 한일학술회의 열려
[초점] 누구를 위한 식민지 ‘개발’인가 한일학술회의 열려 〈누구를 위한 식민지 ‘개발’인가-경남 진영 무라이 농장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연구소가 주최하는 한일학술회의가 10월 25, 26 양일에 걸쳐 열렸다. 25일에는 강금원기념 봉하연수원에서 한일 학자들의 연구발표와 토론이, 26일에는 구무라이농장 현장 답사가 진행되었다. 학술회의에서 허수열 충남대 교수는 「일제강점기 ‘농장개발’의 실상과 허구」, 우츠미 아이코 일본평화학회 전 회장은 「무라이 기치베(村井吉兵衛)의 농장개발 과정 검증-기록 서한을 중심으로」, 김민철 연구소 연구위원은 「일제의 촌락지배와 유형」을 발표하였다. 이영채 일본 게센 여학원대학 교수의 사회로 진행한 토론에는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 박근호 시즈오 카대학 교수, 권향숙 죠지대학 교수가 함께 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생가인 봉하마을 근처의 구 진영역 일대는 일본의 신흥재벌무라이 기치베가 1910년대 대규모 농장을 조성했던 지역이다. 우츠미 아이코 선생은 신흥재벌 무라이 기치베가 농장 조성 당시 작성해 온 대량의 친필서한을 분석하여 이 농장의 형성과정을 분석 발표했다. 허수열 교수는 대산면 일대의 일본인 농장의 개발이 산미증식계획, 경제 대공황과 궤를 같이하여 조선총독부의 각종 지원을 받는 것을 지적하며 과연 누구를 위한 개 발인가를 되묻고 있다. 김민철 연구위원은 일제의 강행적인 증산적 개발이 집요하게 되풀이된 오랜 세월의 노력한 결과가 촌락지배의 여러 유형을 낳았다고 보았다. 일제의 행정력과 자본력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촌락과 행정력의 침투 정도가 낮아 촌락의 자치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곳으로 나누었다. 특히 이 자리에는 일제 식민지배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민족문제연구소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4 개시
[초점] 민족문제연구소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4 개시 10월 22일 민족문제연구소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4가 시작되었다. 이번 시즌은 ‘식민지의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독립운동가부터 친일파, 재조일본인, 선교사, 평범한 보통사람들을 다룰 예정이다. 다양한 이들의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시즌4는 첫 방송으로 뉴라이트의 저서 <반일종족주의>를 파헤치는 특집을 마련했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 김승은 학예실장,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 김민철 경희대 교수 등이 출연해 일본 극우세력의 혐한 논리를 직수입해 신친일파의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뉴라이트의 정체를 낱낱이 파헤친다. 뉴라이트들이 왜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지, 그들이 이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메인 코너인 ‘식민지의 사람들’은 대표적인 지식인 친일파 이광수와 최남선의 삶을 추적하는 것으로 이번 시즌을 시작할 예정이다.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이광수와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이 왜 1급 친일파가 되고 말았는지 그들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사랑을 좇아 친일파가 되었다는 이광수의 속설이나 아들도 부끄러워했다는 친일파 최남선의 숨겨진 사연의 진실도 소개할 예정이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4는 2020년 6월까지 계속된다. 방송은 매주 화요일 팟빵, 팟티, 유튜브, 아이튠즈에 업로드된다. • 조한성 출판팀장
몸은 조선인, 정신은 일본인이었던 박중양의 기록, <술회述懷>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파인 박중양(朴重陽·朴忠重陽, 1874~1959)이 해방 후인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회고록, <술회述懷>다. 일제강점기 자신의 회고담과 시국에 대한 감상 등을 335쪽에 걸쳐 작성하였는데 주로 일제의 식민통치를 찬양하고 친일행위가 구국의 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박중양은 경북 달성 출신으로 1897년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 보통중학과 수학하고 도쿄 경시청의 경찰제도 연구생으로 들어가 경찰사무와 감옥제도를 연구했다. 귀국 후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고등통역관으로 일본군에 종군하여 활동하였고 이에 협력한 공을 인정받아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후 수많은 관직을 거치면서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훈장을 받았다. • 박중양이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과 주요 직위 특히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회유강연을 하였고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 독립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면서 3・1운동의 의미를 폄하했다. 심지어 3.1운동의 확산을 저지할 구체적 방안으로 대구자제단을 조직하여 단장을 맡아 “소요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진압 활동을 지휘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조선통치 25주년을 기념해 편찬된 ????조선공로자명감????에서 “이토 이하 총독부 대관으로부터 역량·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급에서 박중양”이라는 평가와 함께 기념표창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1945년 4월 일본이 귀족원령을 개정하여 귀족원 의원 7명을 조선인으로 칙선할 때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은 일본 황족과 ‘천황’이 직접 선임하는 칙선 및 일정액 이상
철도순직자조혼비, 조선철도 1천리 돌파가 남긴 기념물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주도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편찬한 <신자전(新字典) >(1915)의 말미를 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뜻이 완전히 색달라졌거나 새로 창안되어 일본 등지에서 흘러들어온 여러 한자어들을 따로 묶어 수록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달러(dollar)를 불(弗)로 쓴다거나 센트(cent)를 선(仙)으로 표기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또한 서양식 미터법의 도입에 따라 미터(m)는 미(米)로, 그램(g)은 와(瓦) 또는 극(克)으로, 리터(ℓ)는 입(立)으로 사용하는 방식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흥미로운 것은 가령 천(粁)과 같은 글자인데, 미터(米)가 천(千)개 모여 있는 모양이므로 이는 곧 ‘킬로미터’를 뜻한다. 마찬가지로 천(瓩)이라는 글자 역시 그램(瓦)이 천(千)개이므로 ‘킬로그램’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야드 파운드법에 따른 한자어에도 재미있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는 촌(寸, 치)이나 척(尺, 자)과 같은 재래식 단위표기의 개념을 결합 활용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는데, 예를들어 촌(吋)은 인치(inch)이며, 척(呎)은 피트(feet)이며, 마(碼)는 야드(yard)이며, 리(哩)는 마일(mile)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전적으로 영국(英國)에서 건너온 단위이므로 대개 촌(吋)은 영촌(英寸)이라 하고, 척(呎)과 리(哩)는 각각 영척(英尺)과 영리(英里)라고 적어도 상관이 없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야드 파운드법에 따른 한자식 표기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영역의 하나가 바로 철도 관련 분야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철도라고 하면 종주국이라고 하는 영국의 영향이 월등히 큰 측면이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유달리 미터법보다는 야드 파운드법이 선호되는 경향이 우세했다. 따라서 정거장 사이의 거리라든가 철도선로의 총연장은 몇 킬로미터가 아니라 몇 마일로 기재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