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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사학재단 최초로 전임 이사장들의 민간인 학살과 친일행적을 사죄한 황상익 성신학원 이사장

2019년 7월 25일 2564

[인터뷰] 사학재단 최초로 전임 이사장들의 민간인 학살과 친일행적을 사죄한 황상익 성신학원 이사장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7월 11일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최근 성신학원 이사장에서 퇴임한 황상익 서울대 명예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황상익 교수는 오랜 기간 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교수로 재직했고 대한의사학회, 한국과학사학회, 한국생명윤리학회 회장과 제1, 2대 전국교수노동조합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95년 연구소 회원으로 가입하여 지금껏 후원해왔고 2010년에는 연구소를 방문해 강제병합도록을 기증해 주었다. 문 : 성신학원 이사장으로서 그간 학원 정상화에 노력하시다가 이제 그 직을 내려놓았습니다. 소회를 말 씀해주십시오. 답 : 2017년 7월 교육부로부터 성신학원 임시이사로 부임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사학비리와 학내 분규로 성신여자대학교의 상황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어왔기 때문에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요. 9월말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임된 뒤 성신학원 구성원들의 생각과 소망을 듣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심화진 전 총장의 10년간 전횡으로 인해 성신학원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비정상적인 상황이었어요. 이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기 위해 이사회에서는 심 전 총장의 탄압에 맞서 성신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해온 김호성 교수를 총장으로 선임하여 그분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작년 7월 성신학원의 첫 직선제 총장으로 양보경 교수가 취임하여 학원 정상화의 길을 밟고 있습니다. 성신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한 2년 가까이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교수와 학생, 직원과 동문 등 성신학원의 모든 구성원들과 합심하여 노력한 결과 최소한의 성과는 거두었다고 자평합니다

2019년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수련회

2019년 7월 25일 740

 ▶경북 청소년수련원앞에서 회원단체사진 2019년 회원수련회가 6월 29일과 30일 양일간 경북 김천 경상북도청소년수련원에서 열렸다. 궂은 날씨에도 30여명의 상근자들과 전국에서 150여명의 회원들이 먼 길을 마다않고 참여해 주었다. 비 때문에 사전행사인 외부행사는 진행하지 못 했지만 먼저 도착한 회원들끼리 간단히 맥주를 마시며 교류의 시간을 가졌다. 식사를 한 후 저녁 7시에 이번 회원수련회를 준비한 구미지회 소개영상을 보며 공식 행사를 시작했다. 먼저 몸이 불편해 참석하지 못한 함세웅 이사장을 대신해 임헌영 소장이 구미지회가 생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 수련회를 연 열성적인 구미지회 회원들의 노고에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했다. 이어서 일당백 구미지회 회원 소개가 있었는데, 특히 박정희 탄생 99주년에 박정희 생가터에서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1인 시위에 나섰던 신윤정 회원의 영상을 보고 그 용기에 박수와 찬사를 함께 보냈다. 그리고 그동안 구미지회가 꾸준한 작업으로 알려온 왕산 허위 선생 일가 소개가 있었다. 이 자리엔 임청각에 살고있는 이상룡 선생님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이 안동에서, 왕산의 후손이자 일창 허발 애국지사의 손자인 허벽 선생이 서울에서, 시산 허필의 손자이며 허형식장군의 조카인 허창수 선생이 대구에서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뒤이어 일본식 지명 변경 활동으로 지역사회에서 많은 역할을 해온 전북지부에 ‘모범지부’시상을 하고, 축하무대로 광주지부에서 섭외한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의 공연과 구미지회에서 섭외한 창립 30년이 넘는 전통문화 예술단체인 구미놀이패 말뚝이의 축하공연이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이튿날 아침 9시에 단체기념촬영을 마친 후 왕산 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서울자유시민대학과 함께한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의 근현대사 강좌 결산

2019년 7월 23일 976

[초점] 서울자유시민대학과 함께한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의 근현대사 강좌 결산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교육장에서 5월 10일부터 진행해 온 ‘식민통치의 실상과 그 현장-일제강점기 역 사해설 교육 프로그램’이 2달간의 장정을 마치고 7월 13일에 수료식이 거행되었다. <강제병탄>(한철호), <조선총독>(이형식), <일본군>(서민교), <경찰>(장신), <경제수탈>(이송순), <강제동원>(노기 카오리), <민족해방운동>(조형열) 등의 강의와 <3・1운동-북촌・종로>(권시용), <오욕의 역사, 금단의 땅-용산>(이순우) 일대의 답사 그리고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이희자공동대표)의 증언, <박물관은 무엇을 이야기하나-식민지역사박물관>(김승은) 해설 등 일제 강점기 전반에 걸친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서울시민 평생학습 프로그램에 응모해 당선되어 서울시의 지원을 받고 진행한 강좌여서 교재와 간식 등이 무료로 지급되었다. 회원, 비회원 참여 인원이 50 여명이 넘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각 분야 전문분야 강사들의 수준 높은 강의와 해설, 증언은 수시로 청중의 박수와 엄지척을 이끌어냈다. 강의는 저녁시간에 진행되어 직장인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었고, 회차가 거듭돼도 꾸준하게 수강인원이 유지되어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수강생의 열공 분위기에 어떤 강의는 시간을 넘겨 오후 10시 무렵 끝나기도 했고, 질문자의 수준 높은 질문에 일일이 답하다보면 늘상 시간을 넘겼다. 전체 11회차 강좌 중에 8회차 이상 참석한 수강생들에게는 수료증이 발급되었고 9회차 이상 참석자들은 특별한 선물도 받았다. 성숙한 시민이 함께 성장하는 배움의 장으로써, 최고의 평생교육 콘텐츠를 제공하려는 ‘서울자유시민대학’과 일제 강점기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춰 성숙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건전한 시민의식을 형성하고, 역사정의 실현에 앞장서는 시민운동단체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의 만남은 시민사회의 새로운

백년전쟁 사자명예훼손소송, 항소심에서도 무죄 판결

2019년 7월 23일 1031

[초점] 백년전쟁 사자명예훼손소송, 항소심에서도 무죄 판결 2019년 6월 27일 서울고등법원(형사13부, 부장판사 구회근)은 다큐영화 <백년전쟁>에 대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씨가 제기한 사자(死者) 명예훼손소송에서 영화 제작진(감독 김지영, 피디 최진아)의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역사적 사실이라 실체적 진실을 알 수는 없지만 기록을 보면 그 자체로 명백하게 허위라고 볼 객관적 증거가 없다. 영화감독과 피디에게 명예훼손 의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은 2012년 11월 26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시사회를 통해 첫 선을 보였다. 이어 유튜브 등 인터넷을 통해 무료 공개됐고, 시민사회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연구소 후원회원도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하지만 연구소와 영화 제작진은 이승만 추종세력과 보수언론 등의 이른바 ‘좌파영상’ 공세와 그에 맞물린 박근혜 정권의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2013년 5월 이인수 씨의 고소는 그 과정에서 나왔다. 당시 청와대는 교육부에 ‘백년전쟁 대응방안’ 마련을 지시했고, 국정원은 전경련을 통해 이승만 찬양 영상 제작비를 지원했다. 김지영 감독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런 사실은 ‘촛불’을 통해 뒤늦게 드러났다. 검찰은 이 소송을 공안부에 배당해 국가안보나 공공의 안녕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다루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1심 재판은 2018년 8월 27일부터 28일 이틀에 걸쳐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꼬박 이틀 동안 재판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이승만이란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평가, 다큐영화의 성격과 지향점을 놓고 다투는 역사법정이었다. 8월 29일 새벽 2시, 백년전쟁에 무죄가 선고됐다. 마침

SBS 스페셜 ‘요한, 씨돌, 용현’ 편 방송

2019년 7월 22일 1601

[초점] <SBS 스페셜> ‘요한, 씨돌, 용현’ 편 방송   6월 9일과 16일 2부작으로 <SBS 스페셜> ‘요한, 씨돌, 용현’ 편이 방송됐다. 1953년생인 김용현 씨는 요한(세례명)으로 살다가 자연인이 되어서는 ‘씨돌’로 살았다. 그가 처음 방송에 소개된 것은 2012년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자연인 김씨돌’로 나오면서 부터이다. 하지만 이번 <SBS 스페셜>에서는 뜻밖의 그의 과거와 가슴 아픈 현재를 보여주었다. 과거의 그는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내세우지 않는 민주시민이었다. 6월 민주항쟁 때 그는 거리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그 과정에서 그는 87년 대선 부재자 투표에서 야당대표를 지지했다가 구타당해 숨진 정연관 상병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데 노력했다. 1995년에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와 구조를 돕기도 했다. 하지만, 사건이 해결되면 늘 홀연히 사라졌다. 1990년대 말에는 영월 동강댐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2013년엔 삼척 핵발전소 반대 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그의 흔적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프로그램을 제작한 이큰별 PD는 말한다. 게다가 그는 방송 출연료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돈도 전부 기부했고, 정선에서 손수 농사를 지은 수확물을 시민단체에 보내기도 했다. 김용현 씨는 자신의 시집 <오! 도라지꽃>도 연구소에 보내주었으며, 2005년 가을에는 무, 당근 그리고 노란 들꽃 한무더기와 함께 연구소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주었다. ※ 신한은행 100-033-687880 김씨돌후원회, 문의 : 리토피아 출판사 032-883-5356 • 방학진 기획실장

예외는 없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라 – 조선징용문답朝鮮徵用問答

2019년 7월 23일 2586

[소장자료 톺아보기 6] 예외는 없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라 조선징용문답朝鮮徵用問答   <조선징용문답>표지 와 <조선징용문답> 본장 상단에 일본어를, 하단에 조선어를 번역하여 구성하였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4년 2월 10일 매일신보사에서 발행한 <조선징용문답>으로 조선인의 징용에 대한 문답식 해설서다. 저자는 조선총독부 기사(技師) 미야 코이치(宮孝一)이고, 친일논리를 이론적으로 연구하여 일본정신의 구현과 내선일체의 생활화를 주장한 조선노무협회 촉탁 이영근(친일인명사전 수록자, 창씨명:上田龍男)이 번역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이후 곧바로 1939년 ‘ 국민징용령’을 공포했다. 이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였다. 본 책자는 이러한 ‘국민징용령’의 실시에 따라 발행된 것이다. <조선징용문답>에서는 먼저 학도선등(學徒先登)이라 하여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징용에 임하고 생산에 힘쓸 것을 다짐하는 글부터 시작한다. 다음 내용으로 징용의 정의, 실행이유, 징용대상자와 징용방식 그리고 징용된 자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징용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문답형식을 통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징용이라는 것이 대체 무슨 소리요.”라는 첫 질문에 대해, “천황폐하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며 국가의 명령에 따라서 나라에서 하라는 일을 하는 것이 징용의 근본이다”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징용은 징벌을 당하는 것이 아닌 전시에 국민이 다해야 될 중요한 의무이니 “즐겁게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명령에 예외는 없으며 징용에 관련된 법규를 어길 경우 엄벌에 처하며 이에 대한 근거로 국민징용령관계법령을 부록으로 제시했다. “가정의 사정에 따라 징용을 받기 원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 대한

용산 서룡사, 일진회의 배후인 일본인 승려 다케다의 활동근거지 을미사변의 대역죄인 이주회의 묘지가 이곳이 만들어진 까닭은?

2019년 6월 25일 2795

[식민지비망록 48] 용산 서룡사, 일진회의 배후인 일본인 승려 다케다의 활동근거지 을미사변의 대역죄인 이주회의 묘지가 이곳이 만들어진 까닭은? 이순우 책임연구원   비록 제도의 개혁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실행력을 갖고 하나의 관행으로 정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1895년 9월 9일에 이뤄진 태양력(太陽曆)의 도입 때도 그러했다. 이른바 ‘을미개혁’에 따라 개국 504년(1895년) 11월 16일(음력)의 다음날이 건양 원년(1896년) 1월 1일(양력)로 전환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1895년 11월 3일에는 종래에 음력으로 지내던 각전궁(各殿宮; 대군주, 왕태후, 왕태자, 왕태자비)의 탄신월일(誕辰月日)을 양력에 따라 개정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 김홍집 내각(金弘集 內閣)이 붕괴하고 이들의 불충(不忠)에 대한 국왕의 반감으로 이 조치는 미처 1년도 넘기지 못하고 1896년 8월 22일 다시 ‘음력’으로 환원되고 말았다. 그 이후의 기록을 살펴보았더니, 탄신경절(誕辰慶節)에 양력을 적용하는 방식을 부활한 것은 무려 12년 가량의 세월이 더 흐른 1908년 7월 22일의 일로 드러난다. <대한제국 관보> 1908년 7월 27일자에 수록된 ‘궁내부 포달(宮內府 布達) 제178호’에는 탄신경절과 기념경절의 월일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 시기의 탄신경절 및 기념경절 (1908년 7월 제정) 이보다 약간 앞서 <대한제국 관보> 1908년 7월 4일자에 공포된 각령(閣令) 제6호 ‘관청 집무시한 개정건’에 따르면, 탄신경절과 기념경절 가운데 황제의 생일인 건원절을 비롯하여 개국기원절, 즉위예식일, 계천기원절, 묘사서고일은 공휴일로도 지정된 바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국경일 중에서 다른 것들은 그럭저럭 그 뜻을

독립운동가 이관술, 그리고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2019년 6월 28일 3942

[기고] 독립운동가 이관술, 그리고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임성욱 한국외국어대학 박사   필자 임성욱   이관술을 아십니까?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2015년 개봉된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 역을 맡은 조승우의 이 대사 한 마디가 가져온 파장은 컸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만 언급되던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1958)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이를 계기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조명 및 서훈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난 6월 6일 현충일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좌우합작을 이뤄 광복군을 창설했음을 역설하고 “애국 앞에 보수와 진보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사회 통 합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용대 대장인 김원봉을 언급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계열에 몸을 담았다는 이유로 혹은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잊히고 저평가된 김원봉과 같은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한다는 것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던 민족해방운동의 역사를 온전히 회복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중에서 해방 직후에 김원봉보다도 더 인기가 많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울산 사람’ 이관술(李觀述, 1902~1950)이다. 이관술은 경성콤그룹 출신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서 일제 경찰의 검거, 고문, 투옥 등 가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 각지를 돌아 도피, 탈출, 위장, 피신 생활을 해 가며 일제에 맞서 끝까지 투쟁을 벌이다가 해방을 맞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이관술은 박헌영의 재건파 조선공산당의 핵심 인물로서 총무부장겸 재정부장으로 선출되는

세 차례의 노덕술 재판

2019년 6월 25일 5709

[열전친일파 21] 세 차례의 노덕술 재판 권시용 선임연구원   1. 반민특위에 체포되다 노덕술(1899~1968)은 도망자였다. 5개월이 넘도록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지만 행방은 묘연했다. 과연 경찰이 노덕술을 찾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형편이었다. 그는 고문치사사건의 피의자였다. 사건은 이랬다. 1948년 1월 27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을 저격한 혐의로 박성근이 잡혔다. 박성근은 중부경찰서에서 물을 먹이는 등 잔악한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경찰은 박성근이 조사를 받다 도주한 것처럼 가장하고, 사체를 자동차에 실어 1월 28일 새벽 2시경 한강 인도교와 철교 중간에 있는 얼음 구멍에 유기했다. 사건은 그렇게 묻히는 듯 했다. 6개월이 지나 사건이 드러났다. 1948년 7월 21일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 사찰과장 최운하, 수사과 부과장 김재곤, 사찰과 부과장 박사일 등 일련의 경찰 간부들이 경무부 수사과에서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7월 26일 경무부는 노덕술, 박사일, 김재곤, 김유하를 폭행, 능욕, 상해치사, 사체유기 등의 죄목으로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치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증거인 사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체가 없는 살인은 입증하기가 어렵다. 이 사건도 그랬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증인들은 기존 증언을 번복했다. 허위 진술했다는 것이다. 현장검증에선 국방경비대가 한강을 지키고 있어 시체를 유기할 수 없고, 더구나 날씨가 추워 얼음구멍도 없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게다가 박성근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시간에서 8시간이 지난 후에도 박성근을 감시했다는 증인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건의 실체를 흐리는 주장도 나왔다. 경무부와 수도청 사이의 알력에서 사건이 비롯되었다는, 요즘

조선병합을 담소로 해결한 능력자들, 헌병경찰 –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2019년 6월 25일 3460

[소장자료 톺아보기 5 ] 조선병합을 담소로 해결한 능력자들, 헌병경찰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사진첩 <병합기념 조선의 경무기관>. 무단통치를 실행한 식민지 조선의 경무기관 현황과 헌병경찰들의 일상을 담은 사진첩   식민지 조선 민중을 공포에 떨게 했던 무단통치의 핵심은 칼 찬 제복 차림의 헌병경찰이었다.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후 전국적으로 항일 의병투쟁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한국주차군헌병대로 편성되어 있던 헌병을 증강하기 위해 병력과 조선인 4천여 명을 헌병보조원으로 모집해 규모가 2배 이상 확대되었다. 주차군 헌병사령관이 경찰 수장인 경무총장을 겸하도록 하여 전체 헌병과 경찰을 통합 지휘, 의병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탄압할 수 있었다.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이 제도는 그대로 이어져 악명 높은 헌병경찰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지방의 각도에도 경무부와 경찰서가 설치되어 각도 헌병대장이 도 경무부장을 겸직했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뒤에도 헌병경찰제는 존속하여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조선총독이 절대권력자로 군림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경찰서장이나 헌병대장은 재판절차 없이 즉결처분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조선인들을 효과적으로 순응시키고, 항일독립운동을 가혹하고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해서였다.   경무총감부와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   용산경찰서 헌병경찰   황해도경찰부의 이른바 ‘폭도토벌대’   이들은 항일 의병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는데 1913년 조선주차군사령부가 간행한 <조선폭도토벌지>에 의하면 1906년부터 1911년까지 6년간 조선의병 1만 7천여 명을 학살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일제는 끔찍한 조선인 학살의 주역을 ‘조선병합의 공로자’로 기념하기 위해 사진첩을 발행한다. 그것이 바로 1911년 12월 30일 발행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