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신흥무관학교는 스스로 독립하려는 독립군을 돕는다
[답사기] 신흥무관학교는 스스로 독립하려는 독립군을 돕는다 김수빈 2019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단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다(7.26) 집을 나서기 10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던 나의 첫 답사,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꿈속에서 헤맨다면 모를까, 그곳을 내가 직접 밟게 된다니 꿈속에서도 꿈처럼 느껴 질 것 같은 현실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답사한다는 소식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신청서를 낸 것은 이번에 휴학하면서 나 스스로와 한 다짐 때문이었다. ‘힘들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독립운동가의 삶을 들려주자. 내가 방황하고 좌절했을 때 독립운동가의 삶을 알아가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듯이,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운동가를 심어 준다면 그들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결심을 한 나도 사실은 책이나 유물로밖에 독립운동가들을 접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답사가 더욱 간절했다. 독립운동 중 무장투쟁 노선을 택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분들이 걸었던 길을 직접 밟아본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개무량하였다. 답사지에서 설명해주는 내용을 내가 알아듣지 못할까봐 합격한 날부터 출발하기 직전까지 신흥무관학교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고 내 나름대로 답사 일정동안 스스로 수행할 미션들을 정해놓았다. 신흥무관학교 옛터에서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부를 것, 백두산 천지에서는 백기완 선생님 사진과 책을 들고 사진 찍을 것, 내가 준비해 간 질문들을 방학진 국장님께 꼭 여쭐 것 등등… 사소하지만 나름의 미션을 정하면서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가 국군의 뿌리로 인정받은 지 2년도
피눈물로 씁니다. 증조할아버지 김경천 장군님께
할아버지, 증손녀 올가예요. 겨우 한 줄 썼는데, 눈물부터 나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시베리아 코틀러스 강제수용소. 평생을 대한의 독립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위해 애쓰신 할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 추운 곳에 가둬놓고 언 땅을 파게 했을까요. 2012년 KBS 역사스페셜 다큐를 만들 때, 제가 그곳에 갔어요. 문서에는 거기 병원 근처에 할아버지 무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아니었어요. 솔제니친도 갇혀 있었다는 그 수용소에는 무덤이란 건 처음부터 없었대요. 강제노역과 영양실조로 쓰러진 수용자들이 눈을 감으면, 포크레인 같은 기계로 땅을 파서 시신을 던져 넣고 흙으로 덮어버렸대요.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깊이 묻지도 않아서 조금만 땅을 헤쳐도 유골이 산더미처럼 드러났대요. 그래서 옛날부터 그 동네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뼈를 가지고 놀았다고 그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이리나라는 할머니가 증언해 주셨어요. 할아버지의 조국에 갔어요. 국립현충원이란 곳에도 갔어요. 독립운동하신 분들을 모신 국가묘지래요. 거기에도 할아버지는 안 계셨어요. 제가 직원분들에게 애원했어요. 제발 우리 할아버지 유해를 찾아서 이곳에 모셔달라고요. 그냥 안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빈말이라도 노력해보겠다고 답해줬으면 덜 야속했을 텐데…. 그 수용소에는 일본인들도 많이 갇혔대요. 자기 조상이 거기 묻혀있다고, 후손들이 유전자 검사라도 해서 유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대요. 일본 정부는 알았다고 약속하고, 열심히 유해를 가려내 자기 나라로 가져갔대요. 서울 가기 전에 뉴스에서 봤어요. 벌써 몇 년 전에 폴란드도 그렇게 했고, 그리스도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그렇게 못해요? 저더러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장군 77주년 추모식 거행, 중국 흑룡강성 경안현 대라진 현지에서
[회원마당]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장군 77주년 추모식 거행, 중국 흑룡강성 경안현 대라진 현지에서 전병택 구미지회장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許亨植, 1909~1942)이 경호원 왕조경과 진운상을 데리고 소부대 현지지도를 다니던 중, 1942년 8월 3일 흑룡강성 경안현 청송령 소릉하 계곡에서 일제 관동군과 괴뢰국인 만주군에 의해 추격을 받아 교전중 33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1915년 음력 3월 장군이 6살 때 가문 전체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면서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를 떠난 지 27년 만이다. 한편 허형식 장군보다 8살 어린,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출신 박정희(1917~1979)는 이 무렵 25살로 일본군이 세운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하여 나중 일본군 장교가 된다. 박정희는 왜왕에게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며 제국주의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 허형식 장군이 전사한 지 77년 만에 추모식을 거행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왼쪽부터 오상원 장명순 문명숙 김병길 김도화 신문식 전병택 장기태 임재덕 손성진 임영태. 3·1운동 100년을 맞아 식민과 분단, 독재와 이념의 장벽으로 가려진 대표적인 남한 출신 독립운동가 허형식 장군(경북 구미 출신. 13도 연합 의병 총대장 왕산 허위의 종질이자 이육사의 외당숙) 전적지 등 북만주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여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 정상에 올라 한반도의 평화 번영 통일을 기원하고자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주최하고 소통과혁신연구소가 주관한 역사평화기행의 핵심인 허형식 장군의 77주년 초모식을 중국 현지에서
연구소가 발굴한 <대정8년 보안법 사건> 번역 출간
[초점] 연구소가 발굴한 <대정8년 보안법 사건> 번역 출간 연구소는 2010년 3·1절을 앞두고 일본 도쿄에서 입수한 <대정 8년 보안법 사건>를 공개하고 보도자료를 낸 바 있다. 이 문서를 작성한 이시카와 노부시게 검사는 1919년 함흥지방법원에서 근무하며 3·1운동 참가자들의 탄압과 처벌에 관여한 인물이다. 1908년 12월 통감부 검사에 임용돼 1919년 말 조선총독부 검사로 퇴임하기까지 의병운동과 3·1운동 탄압에 앞장섰다. 이 문서는 이시카와 검사가 3·1운동 참가자를 조사하고 기소 준비를 위해 작성한 희귀 자료다. 일제의 3·1운동에 대한 대응과 탄압 양상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자료로서 학계로부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는 이번 광복절에 <대정 8년 보안법 사건>을 탈초, 번역해 <함흥지방법원 이시카와 검사의 3·1운동 관련자 조사자료 ⅠⅡ>를 발간했다. 1권에는 일본어 원자료 번역문과 탈초문을 함께 실어 일반인의 이해를 도왔고, 2권에는 원자료를 대조 확인할 수 있도록 영인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은 이시카와 검사의 조사자료의 해제작업을 맡아 수개월의 공동 연구 끝에 45쪽 분량의 해제를 집필하여 1권에 실었다. 특히 이 문서에는 3·1운동 참가자 950여 명의 실명이 등장한다. 이 인물들의 판결문 등 일제가 남긴 행형자료를 추가로 조사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음에도 아직 주목받지 못한 181명이 발굴되었다. 연구소는 새롭게 확인된 인 물들에 대해서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추천할 계획이다. 한편 연구소는 10월 4일(금),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도쿄에서 함흥으로 :
민문연 발전을 기원하며
[회원마당] 편집자주 ― 신호근 부산지부 회원이 8월초 편지와 함께 얼굴마사지기 100개를 연구소로 보내주었다. 사연인즉 <민족사랑> 7월호에 실린 결산서에 400만원 적자가 난 것을 보고 회비를 증액했다고 한다. 신 회원의 연구소에 대한 관심과 성원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부산회원 신호근입니다. 저는 평생 과학기술자로 살고 있습니다. 항상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몇일 전 소식지에 있는 결산서를 보고 운영 적자가 발생된 것을 알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십수년 전, 고향 형님, 선배들과 같이하는 자리에서 당시 친일재산환수 문제로 설왕설래하던 중 제가 민문연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 즉시 “야가!! 빨개이 아이가 니는, 니 혼자 저기 가서 먹어라”고 하여 충격받고, 이후 어디에서도 민문연 회원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참고로, 저는 부산에서 선조부터 20대 이상을 거주하고 있습니다.) 외삼촌이 해방 직후 철도청 근무하였는데 학교 동문들 모임에 찬조하였다는 이유로, 보도 연맹희생자가 되었던 것을 오래전부터 알게 되었고 다른 외삼촌들은 적색분자 연좌죄로 공무원 취직도 안 되고, 군 생활에서도 보직 차별을 겪었다고 들어서 역사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고향 형님들 만나면 정치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이분들이 정재계 활동하시다보니 이런 얘기는 피하는 입장인데, 최근 변화가 있더군요.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옛말이 있듯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달라지듯이 용기를 내어서 연락드리고 기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심스럽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민문연 창립과 함께 초기 활동하신 분들의 초심과 같이 운영하여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많은 회원분들이 생각은 있으나, 저와
뭉치면 산다
[기고] 뭉치면 산다 강인수 편집자주 – 지난 7월 하순에 일제강점기 형평사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강상호 지사의 아드님인 강인수 선생(대구 거주)이 북미교섭과 일본의 경제보복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못마땅해하는 야당과 보수언론의 행태에 대해 크게 우려하는 우국시를 보내왔다. 대통령이 6. 25 민족상잔을 겪은 우리 민족이 또 다시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절대로 안 된다고 유럽으로 아세아로 아메리카로 온 세계로 동분서주 평화를 애걸복걸 절규하고 다니는데 왜 대통령을 좌파독재자라고 사정없이 몰아세울까 우리 동포가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오순도순 잘 살자 하는 것이 어찌 좌파독재가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가 일제강점에서 해방한지 벌써 일 갑자년(甲子年)이 쑥 넘어섰는데도 일본은 아직도 과거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다시 군국 제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 우리나라가 망하라고 경제보복으로 재침을 시작하였으니 아! 힘을 합하여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국민이 국론통일로 단결하여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데 왜 우리 대통령이 아무 일도 못하게 무능한 대통령이니……. 온갖 막말을 주저 없이 내뱉으며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반대하는 것일까 대통령이 좌파독재자라면 대통령이 우리의 국적(國敵)이란 말인가 분하게도 일본 정치인이 무례(無禮)하게 감히 우리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내정간섭을 하고 일부 우리 언론인마저 대(對)일본 기사에서 한국인이 무슨 낯짝으로 일본을 대할 것인가라며 맞장구를 치고 어느 야 정당(政黨)도 일제강점기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대한 우리 사법부의 판결이 잘못된 것처럼 아베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무조건 항복하고 용서를 빌라
기증자료
• 8월 7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73번째로 자료를 기증했다. <哲學硏究>(1926), <國史槪說>(1933), <새마을>(1985) 등이다. • 7월 15일 무궁화모임(むくげの會)에서 <무궁화 통신> 등 도서 42권을 기증했다. • 7월 19일 임헌영 소장의 친우로 한국문학 연구자이자 사회운동가인 아이자와 가쿠(愛澤革) 씨가 <재일총합지 항로> 1호 ~ 4호 4권을 기증했다. • 거제지역 시민운동가 류금렬 선생이 7월 26일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건립운동 백서’를 보내주었다. • 7월 29일 김정만 회원(서울북부지부)이 <대한민국 5000년사>(1991) 7권을 기증했다. • 7월 30일 이재명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이 연극, 영화 관련 도서를 기증했다. • 7월 30일 미시마 아유미(三嶋あゆみ) 씨가 편지엽서와 도쿄의 하라미술관 도록 <자연국가>를 기증했다. • 8월 18일 하시다 사나에(橋田早苗)씨가 ‘비키니 바다 그림연극을 만드는 모임 ビキニの海の紙しばいを 作る会’에서 제작한 비키니 섬 그림 1세트(총 16점)와 신문 스크랩 1점을 기증했다. • 8월 18일 ‘한국병합100년도카이행동실행위원회 韓國倂合100年東海行動實行委員會’에서 3.1독립운동 100년 스터디 보고집 등 도서 2권을 기증했다. • 8월 19일 김정희 씨가 가와사키시(川崎市) 후레아이관(ふれあい館)에서 제작한 재일조선인 1세 할머니들이 인생의 추억을 바탕으로 손수 만든 낱말카드를 기증했다. • 8월 19일 지난 3월에 이어 ‘적기편집국편집위원회 赤旗編集局編集委員会’에서 <韓國, 朝鮮植民地支配と日本の戰爭>(2019) 2권을 기증했다. • 8월 20일 박중현 씨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초창기 활동 기록 영상을 담은 8mm 테이프와 사진 등을 기증했다. • 8월 21일 가스야 켄이치(糟谷憲一) 씨가 <함께 배우는 인간의 역사>(2017), <중학역사교과서>(2016) 2권을 기증했다. • 8월 28일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관람 온 김건주 씨가 십전, 일원,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 독립운동가 후손과 함께 하는 경술국치 추념식 ‘국치일을 아십니까’ 개최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 독립운동가 후손과 함께 하는 경술국치 추념식 ‘국치일을 아십니까’ 개최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개관 1주년인 8월 29일 경술국치 109주년을 맞아 국치 추념식 ‘국치일을 아십니까’를 개최했다. 이날 추념식에는 독립운동가 후손(이항증, 차영조, 장병화, 김수옥, 김세걸)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소속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과 임헌영 소장, 권위상 부위원장,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연구소 상근자 등 80여 명이 참석했다. 추념식은 현악 4중주팀 ‘공감’의 클래식 연주로 시작되었다. 임헌영 소장의 개졌고, 권위상 부위원장이 직접 지은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기림시를 낭송했다. 이어서 소프라노 권설희의 선창으로 ‘국치일의 노래’, ‘국치가’, ‘국치추념가’를 함께 불렀다. 마지막으로현악 4중주팀 ‘공감’이 한국의 대표적 민요 아리랑을 연주했다. 이어 방학진 실장이 찬 죽 먹기의 의미를 소개한 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손수떠준 죽을 함께 나누었다. 이번 추념식에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국치일을 어떻게 추념해 왔는가에 대한 패널 전시가 열렸다. 전시 패널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일제 강제병합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순절로 항거할 뿐 아니라 일본군·헌병과 교전을 벌인 의병항쟁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료를 통해 국내외 우리 동포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매년 국치일을 추념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전국 곳곳에 ‘국치일을 잊지 말자’는 격문이 붙었으며, 시장은 철시를 감행했고, 감옥의 독립투사들은 집단 단식으로,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해외 동포들은 국치 추념 행사를 열고 이날 하루 단식으로 독립의 결의를 다졌다.
8월 15일 ‘민족문학연구회’ 창립식 열려
[초점] 8월 15일 ‘민족문학연구회’ 창립식 열려 8월 15일 오후 3시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민족문학연구회의 창립식이 열렸다. 민족문학연구회는 작가회의 소속 문인들을 중심으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민족문학에 활력을 더하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 산하 연구회로 창립되었다. 민족문학연구회는 한국근현대 민족문학에 대한 조사・연구와 자료발굴, 일제강점기의 항일・친일문학 비교 연구, 분단시대의 남·북·해외 민족문학 조사・연구, 통일시대를 예비하는 창작활동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특히 민족문학연구회는 문학계의 일제잔재와 친일문인 기념사업 철폐운동을 전개해 역사정의 실현에 기여한다는 목표를 삼았다. 창립식에 앞서 오후 2시에 열린 민족문학연구회의 창립총회에서 민족문학연구회 창립준비위원회 위원장이던 맹문재 교수가 연구회 회장으로, 권위상 부위원장이 사무국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맹문재 회장의 진행으로 회칙과 앞으로 운영방안, 임원 선임이 진행되었다. 오후 3시에 창립식이 시작되었다. 창립식엔 민족문제연구소의 임헌영 소장과 조세열 상임이사, 박수현 사무처장, 방학진 기획실장이 참석했고, 80여명의 문인들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권위상 사무국장이 국민의례와 묵념을 진행하고, 맹문재 회장의 내빈소개, 연구회 경과보고, 창립 기념사, 임헌영 소장의 축사 순으로 이어졌다. 임헌영 소장은 “역사적으로 문인들은 시대를 이끄는 역할을 했으며, 현재 시국에서 민족문학의 가치는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앞으로 연구회에 속한 문인들이 그 가치를 지켜나가기를 당부했다. 이어서 창립선언문 낭독으로 민족문학연구회의 창립을 힘차게 선언했다. 이후 독립운동가 기림시집 <독립운동의 접두사>에 실린 시낭송이 이어졌다. 독립운동가의 삶을 조명한 시를 지은 시인들이 직접 낭송을 하니 더욱 비장하게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다가왔다. 숙연하게 5편의 시를 읊은 후에 만세삼창을
광복 74주년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대회와 국제평화행진 열려
[초점] 광복 74주년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대회와 국제평화행진 열려 지난 8월 15일 서울광장에서는 ‘광복 74주년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대회’가 열렸다. 태풍의 영향으로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열린 대회에서 전국에서 모인 시민들과 일본에서 온 재일동포, 일본인 등 2천여 참가자들은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 촉구를 한 목소리로 외쳤다. 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는 임헌영 소장의 대회사에 이어 이희자 보추협대표와 야노 히데키 일본 강제동원공동행동 사무국장, 오다가와 요사카즈 일본 전국노동조합총연합 의장과 김명환 민주노총위원장 등이 대법원 판결의 조속한 이행, 아베 정권과 피고 기업의 사죄와 배상, 한일시민연대를 통한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호소했다. 또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가 무대에 올라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시민대회에 이어 두 분 피해자를 선두로 참가자들은 일본 대사관 앞까지 평화행진을 벌였다. 역사의 증인들이 시민들과 함께 일본정부와 피고 기업을 향해 외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함성은 장대비를 뚫고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