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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친일 음악인이 만든 교가, 광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교체 바람 일어

2019년 2월 22일 962

지난 1월 10일 광주지부가 오랫동안 추진해왔던 광주지역 친일잔재 조사결과보고회가 열린후, 친일잔재 조사 내용이 각종 미디어에 보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명의 친일 음악인이 만든 교가가 일선 학교에서 불리고 있음이 밝혀져 학생과 학부모, 동문 등의 거센 반발을 샀다. <광주지역 친일잔재 조사결과보고서>에 따르면 그 실태는 다음과 같다. ▲ 현제명 : 전남대, 숭일중·고 ▲ 김성태 : 광덕중·고 ▲ 이흥렬 : 광주일고 ▲ 김동진 : 호남대, 서영대, 동강대, 서강중·고, 금호중앙중·금호여고, 동신중·고, 동신여중·고 2월 13일 광주일고 측은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를 즉시 폐기하고 학교 동문인 김종률 씨에게 새 교가의 작곡을 맡기고, 학생을 대상으로 교가 가사도 공모해, 11월 3일까지 완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광주일고의 전신인 광주고등보통학교가 1929년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이었음에 비추어 친일 작곡가의 교가를 사용하는 것은 그 역사성에 배치된다고 지적되었으며 재학생, 교직원,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90% 이상 교체를 원하는 것으로 나왔다. 연구소 충남지부와 전교조 충남지부는 14일 공동성명을 내고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만든 교가를 충남 도내 학교도 상당수 사용하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충남도교육청은 친일 잔재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하루빨리 실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충남교육청은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교가를 바꾸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시민, 교육 단체가 참여하는 가칭 역사교육위원회를 구성해 올바른 역사교육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편집부

사법부 적폐 청산은 5공 과거사 청산부터 81해직법원직원의 명예회복을 촉구한다

2019년 2월 22일 923

5공 과거사 청산법제로 1989년 3월 29일 「1980년 해직공무원의 보상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시행되어 행정부 소속·국회 소속 해직 공무원이 모두 명예회복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유독 사법부 소속 81년 해직자는 보상법 제2조 제1항의 해직자가 아니라는 보상대상 제외 처분으로 이들은 명예회복도 못하고 5공 과거사 청산도 실현되지 않았다. 보상법 제2조 제1항은 본문과 단서로 나누어 본문은 80년 해직자를, 단서는 1981년 해직자를 대상으로 명백히 명문을 두고 있다. 법원행정처장은 보상법 제2조 제1항의 본문과 단서의 언급 없이 「제2조 제1항」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해직자가 아니라는 처분을 한 것이다. 이러한 명문을 간과한 채 「해직자」를 「해직자가 아니다」라는 처분은 사법정의에 역행되고 5공 과거사 청산마저 유린한 역사정의에도 역행된다. 더욱이 직장의 어버이로서 직장의 자식들 명예회복마저 가로막는 것은 인륜에도 반하는 반인륜, 비인도적 처사로 사회정의에도 역행되는 가혹한 학대행위라 하겠다. 여기에다 사법부의 담당 재판부는 위법 부당한 법원행정처장의 잘못된 처분을 바로 잡기는커녕 제 집안 감싸기에 급급한 속보이는 기각 판결로 사법정의는 간 곳이 없고 사법불신의 골이 깊어져 사법 적폐의 탄식이 늘어가고 있다. 작년 말 김명수 대법원장은 30년 만의 「해직자 청원」을 받아들여 재심 절차에 넘겼으나 지난 1월 31일 재심재판부마저 재심청구를 기각하여 통치권자의 적폐 청산 의지와 대법원장의 사법개혁 의지마저 조롱하는 듯한 느낌이다. 법원행정처장이 보상법 제2조 제1항 단서의 「81년 해직자 규정」을 간과하여 「해직자」를 「해직자가 아니라고」 한 처분은 마땅히 「판결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홍천군, 최승희 기념사업 중단

2019년 2월 22일 1430

홍천군은 2006년에 홍천 출신 무용가 최승희(1911~1969)에 대한 기념사업을 추진했지만 광복회 등 도내 보훈단체들의 반발과 2011년 군민 설문조사에서 반대여론(67.6%)이 높게 나옴에 따라 관련 사업을 중단한 바 있다. 지난해 6월 당선된 허필홍 홍천군수는 최승희의 고향인 남면 제곡리에 기념관 건립과 함께 최승희의 춤 세계를 재조명하는 남북 합동추모사업을 공 약으로 내세우면서까지 적극 검토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역의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최승희의 친일행적을 이유로 2011년과 마찬가지로 적극 반대에 나섰다. 이들은 군청 앞 집회를 비롯해 민주당 강원도당 방문, 언론 기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속적인 반대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홍천군은 지난해 12월 12일 ‘남북이 함께하는 최승희 춤 재조명 사업’을 추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의 공문을 반대운동에 앞장선 독립유공자유족회에 보냈다. 공문에는 “해당 사업을 검토한 결과 3·1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상황 등을 고려해해당 사업을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최승희는 1942년 2월 11일과 13일자 <매일신보>에 연재한 ‘나의 무용기, 동양무용 수립을 위해’에서 “자신의 창작 방향이 (중략) 일본 예술문화에 영원히 전해 갈 꽃이 되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라고 밝혔다. 최승희는 여러 차례 황군 위문 공연을 다니면서 7만 5천원의 공연수익금을 국방헌금, 황군위문금, 독일 상이군인 위문금, 조선문인협회 기부금, 군사후원연맹 후원금 등의 명목으로 헌납했다. 최승희는 광복 직전 중국에서 일본군 전선 위문공연을 하다 베이징에서 광복을 맞았지만 바로 귀국 못하고 1946년 5월에 인천으로

‘3·1운동과 한국인의 삶’ 좌담회 개최

2019년 2월 22일 865

1월 23일 ‘3·1운동과 한국인의 삶’ 좌담회가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의 주최로 연구소 5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가 사회를 맡았고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장과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이태훈 연세대 교수가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3·1운동의 성격과 전개 양상, 3·1운동 후의 식민지 조선의 변화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하였다. 참석자들은 이 운동이 전 지역, 전민족적, 전계층적으로 일어났을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학생 등 민중이 사회 전면에 나선 운동이었음을 강조했다.     김정인 교수는 “3·1운동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고, 스스로 조직한 운동”이라며 “학생 특히 여학생이 운동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장은 일제가 향촌의 유대와 공동체를 해체하여 수직구조로 재편한 것에 대항하여 3·1운동은 학교와 교회, 시장 등의 수평적 관계 속에서 자율적으로 일어난 것이며, 이는 한국문화의 자율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이날 50여 명의 회원과 일반 시민들이 장시간 경청하고 질의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열띤 호응을 보여주었다. • 편집부

이토 특파대사가 탄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진 한국인의 항거 장면

2019년 2월 22일 2713

일본인 화가가 그린 원태우 지사의 투석 장면이 묘사된 삽화 자료이다. 여기에는 그의 행위를 “우매한 농민이 술에 취해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 1905년 12월 8일자)   원태우 지사의 항거에 대한 삽화와 단신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1905년 12월 8일자)의 표지이다.   의거터 표석 자리에서 보이는 경부선 철길의 모습   안양 관악역 인접지(승강장 북단에서 250미터 지점)에 설치되어 있는 ‘원태우 지사 의거지’ 표석의 모습이다.   ‘을사조약’의 억지 체결을 강요한 후 5일째가 되는 1905년 11월 22일 아침,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特派大使 伊藤博文)는 짐짓 승자의 여유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인지 그의 숙소였던 대관정(大觀亭, 소공동 하세가와 사령관 관저)을 나서 수원 방면으로 한가로이 사냥을 떠났다. 이날 많은 사냥감을 포획한 채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오후 6시 30분에 열차가 안양역(安養驛)을 출발하여 속도를 올리던 차에 오래지 않아 돌멩이 하나가 차창 밖에서 날아들면서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이토 특파대사는 유리파편에 의해 그의 뺨에 세 곳, 왼쪽 눈 위에 한 곳, 왼쪽 귀 아래에 한 곳을 합쳐 도합 다섯 군데에 상처가 나면서 약간의 피를 흘렸으나 경미한 부상을 입는 것에 그쳤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직후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이토를 호위하던 헌병조장 1인과 헌병 2인이 즉각 하차하여 범인 체포에 나섰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후 9시 반에 이르러

평양남북협상의 인상

2019년 1월 24일 2174

[자료소개] 평양남북협상의 인상 최성복 조선일보 특파원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신천지 1948년 4·5월 합병호에 실린 최성복(崔成福) 기자의 「평양남북협상의 인상」이다. 최성복 기자는 4월 19일 김구 선생의 북행길을 동행하여 5월 6일 서울 귀환 때까지 남북협상의 긴박했던 순간들을 밀착 취재했다. 4월 23일 대표자 연석회의(최종일) 회의 장면, 25일 연석회의를 경축하는 군중대회, 황해제철소 참관, 김구 선생과의 단독 면담, 김일성 위원장의 남북협상 관련 기자회견, 5.1절군중기념대회 등 당시의 역사적인 주요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 편집자 최성복 특파원은,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간 사실을 동행 취재해 기사를 송고했다.(조선일보 1948. 4. 21일자 기사) 사진은 38선상의 김구 선생과 아들 김신(오른쪽), 비서 선우진(왼쪽)   평양 가는 도중 김구(金九) 씨가 4월 19일 오후 4시 반경에 홀연히 경교장을 떠나 자가용으로 여현(礪峴) 3·8선 경계선을 넘은 때는 벌써 그날 아침부터 평양에서는 남북 제(諸)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막 열리고 있었다. 기자가 아차 뒤졌구나하고 부랴부랴 김구 씨의 뒤를 따라 나선 것이 겨우 그 이튿날인 20일 저녁 황혼이 내리기 시작한 무렵에 어구인 같은 행로로 3·8선을 넘었던 것이다. 여현서 알아봤더니 김구 씨는 이미 자가용으로 평양에 들어섰으리라 했고 회의는 한창일 것이라고 들어 매우 초조하였다. 이번 협상은 왜 그런지 김구 씨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양 싶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씨의 꽁무니를 꼭 따르려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편으로 마음이 놓이는

행려병인 수용소였던 경성불교자제원의 공간 내력 – 러일전쟁 때 일본군 숙영지로 징발된 초자제조소가 있던 자리

2019년 1월 24일 2947

식민지 비망록 43 행려병인 수용소였던 경성불교자제원의 공간 내력 – 러일전쟁 때 일본군 숙영지로 징발된 초자제조소가 있던 자리   이순우 책임연구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에 나온 <관보> 1949년 3월 14일자의 광고란에는 다음과 같은 행려사망(行旅死亡)에 관한 내용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1. 본적: 미상 2. 주소: 미상 3. 성별: 여, 성명 나혜석, 연령 53세 4. 인상(人相): 신장 4척 5촌, 두발 장(長), 수족 정상, 입 코 눈 귀 정상, 체격 보통, 기타특징 무(無) 5. 착의(着衣): 고의(古衣) 6. 소지품: 무 7. 사인(死因): 병사 8. 사망장소: 시립자제원(市立慈濟院) 9. 사망년월일: 단기 4281년 12월 10일 하오 8시 30분 취급자 서울시 용산구청장 명완식(明玩植) 단기 4282년 1월 3일 나혜석의 행려사망 사실이 기록된 『관보』 1949년 3월 14일자의 해당 지면   관보의 말미에 겨우 수록된 행려 사망자의 내역까지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는 참으로 의문이지만, 여기에 언급된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 살아간 천재예술가라는 평가를 얻고 있는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바로 그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는 철저하게 여느 사람들의 망각 속에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나마 여기에 기재된 이름 석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죽음에 관한 이토록 희미한 기록마저 영영 잊힐 뻔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숨진 곳은 ‘시립자제원’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일제시기 의료구호기관이던 경성불교자제원(京城佛敎慈濟院, 원효로 1가 12번지)이었고, 해방 이후에 ‘서울시립

잊혀진 독립운동가 이화림 지사의 삶을 복원하여 알리고 있는 박경철 회원

2019년 1월 24일 5673

인터뷰 잊혀진 독립운동가 이화림 지사의 삶을 복원하여 알리고 있는 박경철 회원 인터뷰 조한성 출판팀장   독립운동가의 삶을 새롭게 발굴하고 알리는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절실한 작업이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들 가운데 대부분은 제대로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역사 속에 잊혀져버린 분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이 작업의 주체가 역사가냐 아니냐의 여부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잊혀진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중요할 뿐이다. 충남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는 박경철 회원은 농업·농촌·농민문제, 즉 3농문제 전문가이지만, 한인애국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에 참여해 큰 역할을 하셨던 이화림 지사의 회고록을 발굴하여 잊혀진 독립운동가의 삶을 복원하였다. 충남연구원에 찾아가 이화림 지사의 자서전 <정도征途>를 번역해 <이화림 회고록>으로 펴낸 박경철 회원을 만났다. 인터뷰에는 임무성 교육위원도 함께 했다. 문 : 어떻게 이화림 지사를 알게 되셨나요? 답 : 중국 베이징대학 유학 당시 한국유학생 연구생회 활동을 하면서 타이항산 역사탐방을 추진해서 4차례 정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 이화림 지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유학 가기 전부터 윤세주 열사나 조선의용군이 활동했던 옌안 지역은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BS 특집 다큐멘터리 10부작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를 본것이 그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연구생회에서 뜻이 잘 맞았던 후배 정원식과 함께 역사탐방을 추진했는데요. 당시 베이징대학에 방문학자로 와 있던 서울시립대학 염인호 교수의 소개로 윤세주 열사의 후손과 연락이 닿게 되었고, 그분을 통해 ‘석정윤세주열사기념사업회’와 연결되었습니다. 또 개인사업을 하시면서 기념사업회 일도 도와주시던 김영민

두 역사학자의 해후

2019년 1월 24일 1462

기고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상임이사 지난 2018년 12월 15일 내일을여는역사재단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대학원 언어사회연구과 한 국학연구센터가 공동으로 주최한 좌담 <역사연구의 과거 현재 미래>가 히토쓰바시대학에서 열렸습니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와 강덕상 전 히토쓰바시대학 교수가 참여했고, 송연옥 아오야마 가쿠인대학( 靑山學院大學) 명예교수가 사회를 맡았습니다. 좌담회 전날인 14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나의 인생과 역사학>을 주제로 강만길 교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강만길 교수는 자본주의맹아론 연구를 통해 일제시기 반식민사학의 변혁적 전통을 복원하고,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전망을 담아내지 못한 채 사용되던 ‘해방 후 시대’를 분단시대라 역사적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기 사회주의운동을 민족해방운동으로 복원하고,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을 분단시대 극복사학의 출발점으로 삼아 분단시대를 극복하고 통일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매진해 왔습니다. 또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의해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고, 통일문제 강연이 빌미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형무소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히토쓰바시대학 교정에는 이 대학 전신인 도쿄상과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의 동판이 있습니다. 후쿠다 도쿠조는 조선사회 정체후진성론을 입론한 일본 제국주의시대 경제사학자였는데, 조선사회는 19세기 후반 일본의 강요로 문호가 개방될 때까지 고대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중세사회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백남운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저술해 우리 역사에도 중세사회가 있었다고 논증했는데, 자신의 도쿄상과대학 선생인 후쿠다 도쿠조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던 것입니다. 14일의 강연에서 강만길 교수는 후쿠다 도쿠조와 백남운의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조선후기 자본주의 맹아를 연구하게 된 계기, 사회경제사에서 변혁운동사로 연구 지평을 넓혀가게 되는

김일동 작가가 전시품 ‘보상하라展’을 기증

2019년 1월 24일 1354

기증자료 • 12월 8일, 김일동 작가가 전시품 ‘보상하라展’을 기증했다. 독립운동가 5인(김구, 김좌진, 안중 근, 이봉창, 유관순)의 희생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한 팝아트로 작가의 작품해설은 다음과 같다. (작품 해설 : 독립운동가의 초상이 등장하고 그들이 헤드셋이나 이어폰을 착용하고 현대 문화 기본매체인 영상과 사운드를 취하고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을 위해 힘 들게 활약을 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들의 노고 끝에 이렇게 발전하게 되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현대 대중문화·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노고를 기리는 의미를 작품으로 표현해 보았다.) • 12월 7일, 야스쿠니재판지원회, 재일조선학교 차별과 배제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이화련 씨가 소장하고 있던 생활자료를 기증했다. 1934년(소화 9년)에 제작된 보자기로 ‘수복 강녕壽福康寧’이라고 쓰여 있다. • 12월 10일,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김재용 교수(원광대)가 故 임종국 선생의 서신을 기증했 다. 서신은 임종국 선생과 <친일문학론>을 일본어로 번역했던 오무라 교수가(2018년 7월 민 족사랑 참고) 주고받았던 것으로 <친일문학론>이 번역된 1976년 이전이 14점, 출판 이후가 30점, 총 44점이다. • 12월 14일, 수원지부 소속으로 25년째 연구소를 후원하고 있는 서용희 회원이 소장자료 4점 을 기증했다. 기증자료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법령관계 자료집으로 <모범조선호적기재례 전집>(1935), <조선호적예규>(1933) 등이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