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서로군정서·의열단 결성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열려
[초점] 연구소가 사무국으로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주최로 서로군정서·의열단 결성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6월 13일 오후 3시 연구소 5층 강의실에서 열렸다.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이 사회를 맡아 진행한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서로군정서와 의열단에 관련된 세 가지 주제가 다뤄졌다. 첫 번째로 박환 수원대 교수가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라는 제목으로 발제하였다. 박환교수는 919년 3·1운동 이후 서간도에 세워진 군정부(총재 이상룡)가 서로군정서로 개편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서로군정서의 주도세력과 무장활동 내용을 살피며 아울러 서로군정서의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역할을 면밀히 고찰하였다. 두 번째로 김영범 대구대학교 교수가 ‘조선혁명선언과 의열단’에 대해 발제하였다. 김영범 교수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의뢰를 받아 신채호가 1923년 1월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이 항일선언문 중 내용으로나 문장으로나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이를 통해 명료한 현실인식과 예리한 통찰을 담아내며 조선혁명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파하고, 민족혁명이면서 사회혁명이고 주체로 보면 민중혁명인 조선혁명의 비전을 제시했다고 하였다. 아울러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실천과 그 성과, 의열단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세 번째 발제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의열단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비교 검토’였다. 의열단과 관련한 수많은 논저가 있지만 외국 사례와의 비교는 이 연구가 최초라는 점에서 꽤나 신선한 연구라 할 수 있다. 김삼웅 관장은 의열단의 주요 목표가 일제 타도였던 것에 비해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타도 대상은 독일 괴뢰정부인 페탱의 비시정권이었다고 하며 활동기간도 의열단이 27년, 레지스탕스가 4년으로 상당한 차이가 난다고 하였다. 아울러 양자의 구성원과 참여인원, 활동양상을 비교
제12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 개최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주관하는 제12회 강만길연구지원금 수여식이 5월 24일 금요일 오후 6시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211호에서 각계 인사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강만길연구지원금은 신진 학자들의 도전적 탐구정신을 격려하고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2007년 제정되었다. 수여식은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의 수령자 발표, 지원금 수여, 허은 고려대 교수, 이이화 선생의 축사, 수령자 소감연설 순으로 진행됐다. 이번 심사대상은 2017년 8월과 2018년 2월에 수여된 15편의 한국근현대사 관련 박사학위논문으로 3월 8일 예비심사를 거쳐 4월 26일 심사위원회에서 이정은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의 「박정희 정권 시기 대자본의 외자도입과 금융기관 진출 연구(1960-1973년)」가 최종 선정되었다. 심사위원장인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를 비롯하여 지수걸 공주대 교수,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가 심사위원으로, 강혜경 숙명여대 교수, 김수자 이화여대 교수, 김종준 청주교대 교수, 최재성 청암대 재일코리안연구소 교수가 예비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수령자인 이정은 박사의 「박정희 정권 시기 대자본의 외자도입과 금융기관 진출 연구(1960-1973년)」는 외자도입을 추구하는 한국 대자본 및 한국 정부, 외자를 제공하는 외국 대자본 및 외국 정부, 4개의 주체가 맺는 다차원적인 관계망을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외자도 입을 매개하는 중개업자들의 역할을 규명하였으며, 이들 주체들의 관계가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 중심적 국제외교 및 국제경제 질서의 작동 속에서 맺어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지금 현재의 실상을 발생시킨 과거의 문제들을 역사학적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한 것도 의미 있는 성과라 할 수
근현대사기념관 독립민주시민학교 ‘무너미에 깃든 3·1독립정신’ 시민강좌 진행
[초점] 근현대사기념관은 2019년 교육사업으로 독립민주시민학교 ‘무너미에 깃든 3·1독립정신’이라는 주제로 시민강좌를 개설하였다. ‘무너미’란 물이 넘쳐 흐른다는 수유(水踰)의 옛 이름으로 강북구에 모셔져 있는 3·1운동 관련 독립운동가들의 항일투쟁 역정(歷程)을 살펴보고 순국선열·애국지사 묘역을 순례함으로써 고귀한 정신을 되새기고 역사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강좌는 참여층 확대를 위하여 평일강좌(5/14~6/5)와 주말강좌(6/8~6/29)를 각각 개설하였고, 민족문제연구소와 강북구의 홍보에 힘입어 강의 공간의 협소함에도 불구하고 매회 다양한 시민들과 역사를 주제로 소통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강좌로 한상권 근현대사기념관장(덕성여대 명예교수)이 <3·1운동과 여성독립운동가 차미리사>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여성독립운동가 차미리사의 생애와 민족교육운동, 3·1운동 정신을 이은 덕성여자대학교(근화여자실업학교)의 설립 배경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였다. 2회 <여운형의 신한청년당 결성과 3·1운동>은 변은진 전주대학교 연구교수, 3회 <민족대표 손병희와 천도교의 3·1운동>은 정용서 동은의학박물관 학예실장, 4회 <파리장서운동과 심산 김창숙>은 홍윤정 심산김창숙기념관 학예실장이 각각 강의하였다. 그 외에도 이시영, 신익희 선생에 대한 강의가 진행되었는데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정신에 대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강의였다. 또한 6월 9일 <2·8독립선언-3·1운동의 서막> 강의는 강북구 홍보담당과에서 강의 현장의 모습을 촬영하고 조한성 강사와 일반시민 2명의 인터뷰를 진행하여 근현대사기념관과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를 홍보해주었다. 현재 평일강좌는 마무리되어 강좌에 빠지지 않고 높은 출석률을 보여준 11명의 참여자에게 수료증과 기념품이 전달되었다. 주말강좌도 3회 <3·1운동의 시작-의암 손병희>까지 진행되었으며, 앞으로 심산 김창숙, 몽양여운형 등 세 번에 걸친 강의와 초대(初代)길 답사를 통하여
만초천 물길이 남겨놓은 흔적, 갈월동 굴다리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갈월)에서 갈월동 지하차도를 지나 효창공원 방향으로 길을 걷다보면 해마다 봄꽃향기 그윽한 이팝나무 가로수길을 저절로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이 길은 특이하게도 200미터 남짓 일방통행로가 이어지다가 중간지점에서 숙명여대 쪽에서 내려오는 도로와 합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가지 교통지도를 살펴본즉 와이(Y) 모양으로 펼쳐진 두 갈래 일방통행도로 가운데 ‘원효로 지구대 청파치안센터’가 있는 방향으로 빠지는 길이 직선 형태로 배치된 걸로 보면, 이쪽이 원래부터 있던 옛길이고 숙대입구역 쪽으로 난 것이 뒤늦게 새로 난 길인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몇 가지 신문자료를 찾아보니 <경향신문> 1976년 8월 7일자에 수록된 「숙대 앞 도로확장공사기공식」 제하의 기사가 눈에 띈다. 용산구 관내 주민의 오랜 숙원사업인 청파동~숙명여대앞 도로 확장 기공식이 5일 상오 10시 용산구청에서 관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보상비 2억 원과 공사비 5천만 원을 투입, 오는 10월말 완공할 이 공사는 노폭 3미터를 15미터로 확장하는데 총연장 600미터 중 숙명여대 쪽 200미터는 현재의 도로를 확장만 하고 나머지 400미터는 동쪽으로 비스듬히 신설한다. 이 기사에는 확장구역이 200미터, 신설구역이 400미터라고 작성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그리고 신설된 도로가 놓인 방향은 장차 용산고등학교 쪽과 일직선 형태로 관통시키려는 도시계획선에 맞춰 설정되었으며, 실제로 경부선 철길로 양분되어 있던 두 지점은 한참 더지나 1993년 1월 28일에 이르러 2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갈월동 지하차도’가 개통되면서 비로소 완전히 연결되었다. 그런데 이곳 ‘갈월동 지하차도’에서 불과
“애국자를 길러내라”는 숙부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한평생 실천한 안맥결 총경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2] “애국자를 길러내라”는 숙부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한평생 실천한 안맥결 총경 박광종 선임연구원 1919년 평양 시위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는 기독교의 장로교와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별도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3월 1일 오후 1시 장로교는 장대현교회 앞마당인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감리교는 광성학교 근처 남산현교회에서, 천도교는 설암리교구당에서 고종의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개최하고 이어서 평양경찰서를 향해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각 시위대는 3시경 평양경찰서 앞에서 모두 합류하였는데 시위행렬과 인근 시민을 모두 합쳐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가와 혈성가를 고창했으며 이후 서문과 평양역으로 나뉘어 이동하였다. 저녁 7시에 일본군대가 평양경찰서 앞의 군중을 강제로 해산하고 평양시내 곳곳에 군경을 파견해 시위대를 저지,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8시경 숭실대학과 숭실중학 밴드부가 숭실대학 교정에 모여 행진곡을 연주하며 시위대를 앞세우고 시내를 행진하던 중 일본 군경에게 저지당하기도 했다. 평양의 시민과 학생들은 일본군의 저지를 뚫고 밤늦도록 시내각지를 누비며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평양의 만세운동 시위는 그해 5월까지 지속되었는데, 시위횟수가 12회나 되고 참가자 수는 3만여 명에 달했다. 3월 만세 시위 때는 숭의여학교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송죽회(松竹會)의 창단 멤버인 박현숙은 평양 남산현교회(감리교)의 유사(有司)를 맡고 있었는데 남산현교회 신홍식 목사의 요청을 받고 3·1거사계획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숭의여학교 3학년 후배들로 이루어진 송죽회 회원들-권기옥, 김순복, 김옥석, 최순덕, 박정인, 한선부 등-을 동원하여 2월 20일경 숭의여학교 기숙사에서 태극기
몽이네 예나눔은 하고 싶은 것을 즐겁게 배우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곳
[인터뷰] 몽이네 예나눔은 하고 싶은 것을 즐겁게 배우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곳 몽이네 예나눔 대표 신동현 작가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김선아 학예실 5월 16일 독립운동가 초상화 전시물 철수를 위해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을 찾은 몽이네 예나눔 대표인 신동현 작가를 만나 인터뷰를 나누었다. 지난 3월부터 4월까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몽이네 예나눔 회원들의 독립운동가 초상화를 전시한 바 있다. 또한 몽이네 예나눔에서 직접 제작한 기념노트와 수제브로치를 기증해주어 박물관에서 이것을 판매, 후원금으로 사용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문 : 원래는 고향이 여수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고향은 어디인가요? 답 : 네. 원래 고향은 서울이구요. 지금 웹툰 작가인 남편 양영순 씨도 어렸을 때 서울에 올라와서 살았어요. 저희 부부가 여수에 내려온 지는 딱 10년 됐어요. 남편과는 미술학원에서 만났죠. 문 : 그 전엔 어떤 그림을 그렸었나요? 답 : 저는 일러스트레이터 쪽이었어요, 날고 싶은 자작나무라는 편지지 회사를 다녔구요. 삽화, 웹툰 등을 했어요. 원래 팬시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죠. 편지지, 일기장, 소품 등을 만드는 것을 좋아해요. 한 5~6년 정도 회사를 다녔구요. 이후에는 프리랜서로 활동했어요. 문 : 결정적으로 여수에 가야겠다 하는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요? 답 : 아버님이 원래 여수 분이세요. 서울에 와서 사시다가 갑자기 여수에 내려가겠다고 하셨어요. 두 분이 사시기엔 너무 넓은 집이라 저와 남편이 함께 내려갔어요. 아버님, 어머님 댁에 들어가게 된 거죠. 아이도 5살밖에
민족문제연구소 중국 광동지부 창립
[초점] 4월 15일 오후 5시 중국 둥관시 동성국제호텔 3층 회의장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중국광동지부 창립총회가 열렸다. 박호균 회원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창립총회에서는 오랫동안 중국에서 사업가로 활동한 김유 회원이 초대 지부장을, 박호균 회원이 사무국장을 맡았다. 창립총회에서 임헌영 소장은 ‘3·1혁명과 촛불혁명’을 주제로 특강을 했으며, 방학진 기획실장이 연구소의 활동과 식민지역사박물관 등을 소개했다. 광동지부는 미국의 워싱톤, 뉴욕, LA와 일본 도쿄에 이어 해외 지부로는 5번째 중국 지부로는 첫 번째로 설립되었다. 앞으로 광동지부는 강연회 및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등을 통해 우리 교민들과 함께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창립총회에 앞서 임헌영 소장과 김유 지부장 등은 광저우 기의열사능원, 아편전쟁박물관, 광저우 한국총영사관 등을 방문했다. 광동지부는 5월 9일 광저우한국학교, 심천국제학교, 동관한림학교를 방문해 〈친일인명사전〉을 각 1질씩 기증했다. • 방학진 기획실장
기증자료
4월 24일 ㈜한양노동조합(위원장 김병인)조합원 9명이 연구소를 방문하여 노동조합관련 자료(사진, 문서 등) 7상자를 기증했다. 이번 자료기증은 지난 3월 자료를 기증한 김충한 씨가 본인이 몸담고 있는 ㈜한양노동조합의 자료가 가장 가치있는 장소에 기증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루어졌다. 4월 25일 일본의 ‘히로시마 강제연행을 조사하는 모임広島の強制連行を調査する会’에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바로 그날의 일본 분위기를 알 수 있는 1910년 8월 29일, 30일자 『大阪每日新聞』 등 총 13점을 기증했다. 4월 26일 기타무라 메구미 씨가 경성상공회의소에서 발간한 <朝鮮主要會社表>(1943년 1월) 1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그 현장’ 강좌 개설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은 서울시 2019년 민간연계 시민대학 운영 사업자로 선정되어 5월 10일 서울자유시민대학을 개설했다. 강좌의 주제는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그 현장’으로 민족문제연구소 내·외부의 전문 연구자와 활동가들에 의해 진행된다. 이번 강좌는 서울특별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성숙한 시민 양성을 위한 민·관 협력 네트워크 구축과 다양한 특화 프로그램 및 우수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발굴하고자 하는 의도와 연구소의 시민역사교육의 대중화, 식민지역사박물관의 홍보가 잘 맞아떨어진 기획이다. 강좌는 매주 목요일에는 강의 9회, 토요일에는 2회 답사로 구성된다. 서울시의 재정지원을 받아 진행되 기에 서울 시민이면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 시민들의 참여 열기가 높아 개강 전에 정원 40명이 모두 찼다. 1회차 강의에서 한철호 동국대교수는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10년까지 일제가 한국을 침략·병탄했던 과정과 이에 대한 한국의 다양한 대응을 소개하며, 국치를 단순히 과거의 치욕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발전을 위한 소중한 밑거름으로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2회차 강의에서 이형식 고려대 교수는 다른 식민지와 비교해 볼 때 조선총독은 입법, 행정, 사법에 걸쳐 거대하고 전제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식민지 지배정책사 및 대륙침략정책을 이해하는 데에는 조선총독을 정점으로 한 지배구조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강좌는 9회에 걸쳐 일본군대의 조선인 집단학살, 경찰, 경제수탈과 강제동원 등 식민지시기 일제 통치의 실상과 해방과 독립을 향한 투쟁을 살펴볼 예정이다. 또한 수탈과 저항의 현장에 대한 답사와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증언도 진행한다. 그리고 박물관의 역사교육, 전시
식민지역사박물관,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기획전 개최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5월 8일 어버이날에 특별한 어버이를 기리는 전시회를 개막했다. 3‧1운동 100주년 두 번째 기획전으로 마련한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는 일제 침략전쟁에 끌려가 희생당한 강제동원피해자와 유족들의 통한의 삶을 담은 전시회이다. 개막식은 박물관 1층 돌모루 홀에서 열렸다. 이날 개막식에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소속 강제동원피해자 유족들과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박경목 관장,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남상구 소장과 용산구청‧청파동 주민센터, 민주인권기념관 관계자 등 50여 명이 참석해 강제동원 희생자들을 함께 추모했다. 개막식은 특별영상으로 시작해 임헌영 소장의 인사말과 이희자 보추협 대표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특별히 일본에서 참석한 야노 히데키 씨는 1995년부터 한국의 강제동원피해자와 함께 투쟁해 왔던 과정을 소개하며 하나 둘 고인이 되신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유족의 이름을 호명해 참석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이번 전시회는 2011년 연구소와 보추협이 한일시민단체의 후원을 모아 천안 망향의 동산에서 개최한 일제하 강제동원 희생자 합동추모제를 다시 재현했다. 추모제는 친족들의 애도 속에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타지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강제동원 피해자분들을 기리는 합동장례식이었다. 그때 사용했던 목상여를 9년 만에 다시 꺼내어 전시장 한 가운데로 옮겨 놓았다. 돌아가신 이의 시신도 유골도 혼도 없는 빈 상여지만 남은 이들의 애끓는 그리움과 추모의 마음이 담긴 상여이다. 상여 주위 “끌려간 사람들, 남겨진 이야기”에서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20명의 사연이 전시되었다. 강제동원의 피해가 당사자에 그치지 않고 남은 가족의 삶마저 파괴하고, 자식들의 미래조차 집어삼키는 폭력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끌려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