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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대한민주공화국 시작 101년 독립선언

2019년 4월 30일 1143

[회원마당] 대한민주공화국 시작 101년 독립선언 김판수 회원     우리의 간절한 소망은 ‘밝은 세상 함께 사는 독립의 나라’ 우리는 간섭받지 않고 종속되지 않고 굴종하지 않으며 자주 자율 자립 당당한 나라 지켜가면서 우리와 우리 모든 이웃이 불의를 치우고 정의로운 세상에서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가 존경받고 사는 세상 만들어 가야 한다. 우리는 지난날 자주역량의 부족으로 한반도에서 한겨레가 한말 한글 한역사를 지니고 아기자기 모듬살이 살았던 유구한 역사를 지켜내지 못하고 침략자의 농간에 굴복당한 치욕이 있다. 선린의 신의를 깨고 강도로 돌변한 간악한 침략야욕 막지 못한 굴욕역사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된다. 침략군의 발아래 짓밟힌 강토는 거대한 감옥이었고 나라 잃은 겨레는 노예가 되었는데 비참한 조국과 겨레의 고통을 외면하고 침략자의 앞잡이 주구가 되어 민족을 배신한 부역자가 있었다. 반민족 매국친일 부역자는 해방 후에도 참회없이 죄과를 감추고 버젓하고 잘 살고 반드시 했어야 할 심판도 없었다. 친일부역 매국죄는 말소할 수도 없고 소멸되지 않으며 반성과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 100년이 지났어도 아직 늦지 않았다. 부역자를 가려내어 엄정하게 심판하여 굴절된 역사 똑바로 잡아서 기미 3·1독립혁명 이제라도 완성해야 완전한 해방 완전한 독립 달성할 수 있다. 분명한 심판과 진정한 참회가 용서화해의 길이고 온겨레 모듬살이 함께 사는 평화의 길이다. 100년 전 독립선언 오늘도 또렷하고 이 땅의 온겨레 깨어서 뭉쳐야 독립나라 세우고 독립나라 지킨다. 2019.4.11. 상해 대한임시정부

기증자료

2019년 4월 29일 1029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기증 잇달아 3월 2일 즈시 미노루 씨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제작된 징병자료인 「조선동포남자호적 및 기류 일제조사」(朝鮮同胞男子 戶籍及寄留 一齊調査) 문서 1점을 기증했다. 3월 3일 오쿠무라 리쓰코 씨가 1988년에 작성된 「지문전사거부·외국인등록법불복종 공동선언」(指紋轉寫拒否·外國人登錄法不服從共同宣言) 문서 1점을 기증했다. 3월 6일 시모지마 요스시케 씨가 ????유골의 전후????(遺骨の戰後) 등 조선인 유골 관련 책자 등 5점을 기증했다. 성정강 회원(도쿄지회) 자료 기증 3월 22일 성정강 회원이 가나가와 조선중고급학교준공, 가나가와 조선중고급학교창립30돌기념 기념품 2점을 기증했다. 이와 함께 조영숙 회원이 「재일동포 2세 노후문제와 3,4세 정체성 확보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제언」 등 의견서를 기증했다.   심정섭 지도위원 제72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2점 보내와 3월 26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72번째로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자료는 일제강점기 간찰과 청주 관련 상표다. 또한 회고집 <우공이산>(저자 심정섭)도 함께 보내왔다.     3월 1일 적기편집국편집위원회(赤旗編集局編集委員会) 관계자들이 연구소에 방문해서 도서 <전쟁의 진실 戰爭の眞實> 1권과 3.1운동 관련 자료 복사본을 기증했다. 3월 18일 아다치 요코 씨가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 1권과 사진집 <戰後はまだ>(전후는 아직) 1권을 기증했다. 3월 18일 가스야 켄이치 씨가 <조선사>(朝鮮史) 선사~조선왕조 1권, 근현대 1권을 기증했다.   3월 19일 김충한 씨가 연구소에 방문해서 토지 기록물인 민유삼림(산야) 약도 등 총 13점을 기증했다. 3월 20일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에서 ‘강제동원진상규명에 관한 뉴스레터’를 기증했다. 3월 25일 화곡본동마을역사연구회 어대식 씨가 <매천야록> 등 도서 5권을 기증했다.

2019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대회 개최

2019년 4월 29일 1335

3월 23일 연구소 회원대회가 15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숙명여대 순헌관 중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감독기관인 서울시교육청의 요구로 기존 정기총회가 회원대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날 대회에서는 2018년 사업 및 결산보고, 2019년 사업 및 예산보고가 있었으며,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정관 개정에 대한 의견 수렴 절차도 진행되었다. 또한 홍경표, 이지훈, 정용진 회원이 대전과 광주지역 일제잔재청산에 앞장선 공로로 공로패를 받았다. 지부 모범회원상은 이지현(충남), 임희정(서울서부), 정지현(서울중부), 주하주(광주), 김영수(전북), 하현주(경기동북), 전현탁(부천), 김영진(대전), 김홍수(고양파주), 심경수(안산시흥), 조수연(전남동부), 이강혁(인천), 박규철(경기북부), 이현배(서울동부), 김종국(경기동부) 회원 등에게 돌아갔다. • 편집부

집단처형 장면마저 풍속사진엽서로 제작 배포한 일본인들의 고약한 상술

2019년 4월 29일 5063

[소장자료 톺아보기•3]   집단처형 장면마저 풍속사진엽서로 제작 배포한 일본인들의 고약한 상술   ‘한국풍속’ 교죄처분(絞罪處分)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집단처형 사진엽서이다. 오른쪽 아래에 ‘1909.8.8’로 표시된 소인이 남아 있어서 제작연대를 가늠할 수 있다. 연구소 소장자료 ‘조선풍속’ 교죄(絞罪)라는 제목을 달고 반복 유통된 집단처형 사진엽서이다. ‘조선’이라는 표현은 이 엽서가 경술국치 이후의 시기에 제작된 것임을 말해준다. 연구소 소장자료   1994년에 펴낸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이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참고도판은 집단처형지에서 포착된 또 다른 사진자료가 남아있을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사진아래에 남아있는 ‘글씨 흔적’은 이 사진의 정체를 밝혀줄 새로운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국가보훈처   여느 사람들이라면 똑바로 응시하기도 힘든 처참한 광경을 담아낸 두 장의 사진엽서가 여기에 있다. 열 명 남짓한 죄수들이 집단적으로 교수대에 걸려 최후를 맞이한 모습이 자못 섬뜩하면서도 애처로운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여러 개의 지게들이 주변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교수형 집행을 위해 발판용 도구로 사용한 것인 듯하다. 이들 엽서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아래쪽에 각각 ‘한국풍속’과 ‘조선풍속’이라고 시리즈명칭을 다르게 달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한국’이냐 ‘조선’이냐 하는 표현은 해당엽서의 제작시점이 1910년 경술국치의 이전인지 이후인지를 구분하는 잣대가 된다. 실제로 ‘한국풍속’으로 표시된 엽서에는 ‘SEOUL, COREA, 1909년 8월 8일자’의 통신일부인(通信日附印)이 붙어있는 것이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도저히 풍속이라는 범주에 넣기 어려운 집단처형장면까지 거듭 사진엽서로 제작하여 버젓이 유통시키는

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2019년 3월 29일 5553

[식민지 비망록 45 ] 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용산 전원국 터는 어떻게 인쇄국을 거쳐 체신이원양성소로 변했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난 2005년에 사적 제157호인 ‘圜丘壇’의 올바른 소리값이 무엇이냐를 두고 크게 논란이 불거진 적이 있었다. 이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숱한 반대의견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보>2005년 11월 16일자를 통해 이것의 독음(讀音)을 ‘환구단’으로 한다는 최종 고시를 냈다. 고종황제의 즉위 관련 내용이 게재된 <독립신문> 1897년 10월 12일자의 기사에 ‘환구단’으로 표기한 사례를 존중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 결정은 여러 모로 그냥 따르기가 어렵다. 우선 해당 일자에 ‘환구단’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오히려 이보다 닷새 앞선 <독립신문> 1897년 10월 7일자에는 ‘원구’라고 표기한 구절이 두 차례나 나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처럼 하나의 신문 내에서도 서로 다른 표기가 혼재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까닭에 <독립신문>의 특정일자 기록 자체가 절대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1915년에 신문관에서 펴낸 <신자전(新字典)>에는 圜의 두 가지 음가 ‘환’과 ‘원’ 가운데 圜丘는 ‘원구’로 발음하는 것으로 명기하고 있다.   주한영국임시총영사를 지낸 윌킨슨(W. H. Wilkinson)이 갑오개혁 당시 제도개혁의 내역을 담아 펴낸 <한국정부(The Corean Government)> (1897)라는 책에는 ‘典圜局’을 ‘전원국’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표시해놓은 내용이 분명히 남아 있다. 익히 알려진 바 대로 ‘圜’이라는 글자는 ‘환’과 ‘원’이라는 두 가지 음가를 동시에 갖는 경우에 속하므로, 어떤 경우에 ‘환’이 되거나 ‘원’이 되는지를 잘 분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매일신보 첫 보도에 나타난 서울 지역 3·1만세시위의 현장

2019년 3월 29일 1836

<매일신보> 첫 보도에 나타난 서울 지역 3·1만세시위의 현장   • 이순우 책임연구원     ① 경성 종로통 :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촉발시킨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의 전경이다. 추가적인 집회를 막기 위해 일본 군인들이 이곳을 장악한 직후 모든 출입구는 폐쇄되고 말았다. ② 덕수궁 대한문 앞 : 이곳은 고종 국장 행렬의 출발점인 동시에 공간 자체가 광장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만세시위군중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교차지점이 되기도 했다. 왼쪽에 있는 것이 대한문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경성일보사(매일신보사,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이다. ③ 경성우편국 앞 : 종로에서 남대문정거장으로 나가거나 덕수궁 대한문 쪽에서 본정통(혼마치)로 이동할 때 교차지점이 되는 경성우편국 앞 광장의 전경이다. 왼쪽에 보이는 조선은행도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선은전(鮮銀前, 센긴마에)’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되기도 했던 공간이다. ④ 남대문정거장 앞 : 경부철도 남대문정거장의 전면 모습이다. 이 자리는 다시 수 만 명이 참여한 3월 5일 제2차 만세시위의 집결지였을 뿐만 아니라 불과 반년 후인 1919년 9월 2일 사이토 신임 총독이 부임하던 날 다시 강우규 의거의 현장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⑤ 조선보병대 앞 : 광화문 앞 옛 삼군부 터(지금의 정부서울청사 자리)에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가 있었고, 그 아래로 헌병대 숙사(宿舍)와 경성제2헌병분대가 나란히 터를 잡고 있었다. ⑥ 미국총영사관 : 독립선언서를 미국총영사관(정동 10번지)에 전달하고 덕수궁 담장길을 따라 되돌아나오는 만세시위행렬의 모습이다. 독립선언의 취지를 전달하고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만세시위 참여자들은 서울 주재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 3월 5일 서울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과 학생지도부

2019년 3월 29일 2020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0]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 3월 5일 서울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과 학생지도부 조한성 선임연구원 학생대표 강기덕과 김원벽, 3월 5일 인력거를 타고 만세 시위를 지휘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19년 1월의 어느 날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관수동에 있는 중국요리집 대관원에 모였다.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인 박희도가 주선한 모임이었다. 청년회 회원을 모집하는 데 전문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이 자리에는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김형기, 경성전수학교의 윤자영,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주종의 등 전문학교 학생들과 보성법률상업학교 졸업생인 주익, 연희전문학교 출신의 배화여학교 교사 윤화정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날 모임에서 시국에 관한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고 하니 이때야말로 조선이 독립을 할 적기가 아닌가. 평화의 정착을 위해 민족자결주의가 주창되었다고 하니 약소국도 독립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생긴 것이 아닌가. 당장 독립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과 좀 더 사태를 관망해야 한다는 의견이 격렬히 이어졌다. 결론이 나진 않았다. 모임의 본래 목적이 여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희도는 그동안 전문학교 학생들이 서로 소원하여 만나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가자고 덕담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이날의 모임은 모두의 가슴에 묵직한 돌덩어리를 남겼다. 며칠 후 강기덕이 김원벽을 찾아왔다. 김형기도 왔다. 그들은 함께 독립운동을 하자고 했다. 다수의 학생들이 뜻을 모으고 있으니 함께 하자고 했다. 결국 김원벽은 그들과

말의 민주화가 되어야 생각의 민주화가 되고, 생활 속에서 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어

2019년 3월 29일 1626

[회원인터뷰] 말의 민주화가 되어야 생각의 민주화가 되고, 생활 속에서 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어 어린이문화 발전과 우리헌법읽기운동에 힘쓰고 있는 이주영 어린이문화연대 대표 인터뷰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문 :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답 : 제가 위하고 간, 두 군데에 암이 발병해서 2011년 명예퇴직을 했어요. 치료를 3년 정도 했죠. 처음에는 수술을 못할 정도였어요. 특히 간이 안 좋았는데 암세포가 여러 군데 분포해 있었어요. 다행히 표적 치료제가 있어서 그걸 먹었더니 암세포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저한테 딱 맞는 약이었던 거예요. 이렇게 잘 맞는 경우는 3~4% 정도라고 하더군요. 의사도 처음 봤다고 했어요. 그래서 수술하고 완치되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거죠. 문 : 지금은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답 : 어린이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어린이 관련 교육, 문화, 예술 단체들이 모여서 서로 정보를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어린이문화연대라는 모임입니다. 퇴직 후 약 10년째 대표를 맡고 있어요. 또 3년 전부터는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이라는 모임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온국민이 헌법을 읽고 헌법대로 운영하는 나라를 만들자는 운동입니다. <손바닥 헌법책>을 만들어서 한 권에 5500원씩 후원금을 받아서 배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뜻대로 1919년 3·1혁명을 대한민국 독립선언기념일로 하자는 뜻을 알리기 위해 3년 째 대한민국 생일잔치를 하고, <독립선언서 말꽃 모음>과 <대한민국 생일은 언제일까요?> 라는 책도 냈습니다. 문 : 어린이문학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요? 답 : 제가 처음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기미년 김구 선생 조선탈출비화

2019년 3월 29일 1284

[자료소개] 경향신문사는 해방 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3·1절을 하루 앞둔 1947년 2월 28일자에 3·1운동 특집기사를 내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김구 선생의 기미년 조선탈출과 관련한 비화다. 당시 43세의 김구 선생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황해도 안악에서 신의주를 지나 중국 안동현에서 이륭양행의 상선에 승선, 우여곡절 끝에 상해로 탈출하였다. 김구 선생을 취재하여 탈출비화를 소개한 기자가 누군지 기사에 언급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편집부 경향신문 1947년 2월 28일자, <기미년 김구선생 조선탈출비화>   비록 어떠한 이유를 내세운다 할지라도 민족의 슬픔을 한 몸에 지니고, 일생동안 조선과 더불어 짓밟히며 지나온 이에 대한 간절한 경애의 정을 차마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기미년 3월 초승 조선 천지가 비통한 민족의 함성으로 뒤덮이었을 때 날카로운 왜정 관헌의 눈을 피하여 조국해방의 크나큰 뜻을 품고 표연히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한 한 사람의 지사가 있었으니 그는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한 김구 선생이었다. 겨레들 사이에 혹시 선생의 이야기를 할 때 선생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의 일은 누구나 흔히 알고 있으되 망명을 하던 때 조선 탈출의 기막힌 고초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때마침 해방 이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기념일을 당하여 선생에게서 직접 들은 바로써 아직 공표되지 않은 한 토막 비화를 감히 세상에 소개한다. 탈출 기회 규시(窺視) 기미년 2월 하순 아직도 남은 추위가

직접민주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자!!!

2019년 3월 29일 867

직접민주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자!!! 정해랑 3·1서울민회 부의장   짓밟혀 본 사람은 알지 빼앗겨 본 사람은 알지 짓밟은 자 빼앗은 자가 스스로 물러나고 알아서 빼앗은 것을 되돌려 주는 일은 없다는 것을 그 슬픔, 그 분노, 그 치욕 속에서도 언젠가 일어서고 언젠가 되찾기 위해 하루하루를 참아내 가면서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짓밟혀 본 사람 빼앗겨 본 사람이 처음으로 잡아본 무기 민주주의! 바다 건너 저 코쟁이 나라에서 왔다고 아니 정신 나간 인간들의 말처럼 섬나라 쪽발이들한테서 왔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의 조상 흰옷 입은 사람들이 일찍이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꿈꾸어 왔으니 그게 바로 민주주의 아니고 무엇이랴 1919년 3월 1일 정오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불타오른 혁명의 열기 그것을 이어받아 설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우리 조상들은 100년 전부터 민주공화국을 꿈꾸었으며 선포하였노라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 모든 권력이 백성에게서 나오는 나라 우리의 대표를 우리가 뽑을 수 있는 나라 그러나 일본제국주의를 물러나게 하고도 반쪽이 난 우리의 나라 민주주의는 손발이 묶이고 재갈이 물리고 일본 순사들을 거느리고 아메리카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다시 나타난 민족의 배신자들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표나 간신히 뽑을 그나마도 온갖 부정, 협잡에 물든 선거로만 이야기되었지 4월의 함성, 5월의 몸부림, 6월의 외침이 이어지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잡혀가고, 행방불명되고 마침내 촛불혁명으로 되찾은 우리의 민주주의 그러나 고작 우리의 대표를 뽑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