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식민지 비망록 45 ] 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용산 전원국 터는 어떻게 인쇄국을 거쳐 체신이원양성소로 변했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난 2005년에 사적 제157호인 ‘圜丘壇’의 올바른 소리값이 무엇이냐를 두고 크게 논란이 불거진 적이 있었다. 이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숱한 반대의견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보>2005년 11월 16일자를 통해 이것의 독음(讀音)을 ‘환구단’으로 한다는 최종 고시를 냈다. 고종황제의 즉위 관련 내용이 게재된 <독립신문> 1897년 10월 12일자의 기사에 ‘환구단’으로 표기한 사례를 존중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 결정은 여러 모로 그냥 따르기가 어렵다. 우선 해당 일자에 ‘환구단’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오히려 이보다 닷새 앞선 <독립신문> 1897년 10월 7일자에는 ‘원구’라고 표기한 구절이 두 차례나 나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처럼 하나의 신문 내에서도 서로 다른 표기가 혼재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까닭에 <독립신문>의 특정일자 기록 자체가 절대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1915년에 신문관에서 펴낸 <신자전(新字典)>에는 圜의 두 가지 음가 ‘환’과 ‘원’ 가운데 圜丘는 ‘원구’로 발음하는 것으로 명기하고 있다. 주한영국임시총영사를 지낸 윌킨슨(W. H. Wilkinson)이 갑오개혁 당시 제도개혁의 내역을 담아 펴낸 <한국정부(The Corean Government)> (1897)라는 책에는 ‘典圜局’을 ‘전원국’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표시해놓은 내용이 분명히 남아 있다. 익히 알려진 바 대로 ‘圜’이라는 글자는 ‘환’과 ‘원’이라는 두 가지 음가를 동시에 갖는 경우에 속하므로, 어떤 경우에 ‘환’이 되거나 ‘원’이 되는지를 잘 분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매일신보 첫 보도에 나타난 서울 지역 3·1만세시위의 현장
<매일신보> 첫 보도에 나타난 서울 지역 3·1만세시위의 현장 • 이순우 책임연구원 ① 경성 종로통 :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촉발시킨 탑골공원(파고다공원)의 전경이다. 추가적인 집회를 막기 위해 일본 군인들이 이곳을 장악한 직후 모든 출입구는 폐쇄되고 말았다. ② 덕수궁 대한문 앞 : 이곳은 고종 국장 행렬의 출발점인 동시에 공간 자체가 광장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만세시위군중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교차지점이 되기도 했다. 왼쪽에 있는 것이 대한문이고,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 경성일보사(매일신보사, 지금의 서울시청 자리)이다. ③ 경성우편국 앞 : 종로에서 남대문정거장으로 나가거나 덕수궁 대한문 쪽에서 본정통(혼마치)로 이동할 때 교차지점이 되는 경성우편국 앞 광장의 전경이다. 왼쪽에 보이는 조선은행도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선은전(鮮銀前, 센긴마에)’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되기도 했던 공간이다. ④ 남대문정거장 앞 : 경부철도 남대문정거장의 전면 모습이다. 이 자리는 다시 수 만 명이 참여한 3월 5일 제2차 만세시위의 집결지였을 뿐만 아니라 불과 반년 후인 1919년 9월 2일 사이토 신임 총독이 부임하던 날 다시 강우규 의거의 현장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⑤ 조선보병대 앞 : 광화문 앞 옛 삼군부 터(지금의 정부서울청사 자리)에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가 있었고, 그 아래로 헌병대 숙사(宿舍)와 경성제2헌병분대가 나란히 터를 잡고 있었다. ⑥ 미국총영사관 : 독립선언서를 미국총영사관(정동 10번지)에 전달하고 덕수궁 담장길을 따라 되돌아나오는 만세시위행렬의 모습이다. 독립선언의 취지를 전달하고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만세시위 참여자들은 서울 주재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 3월 5일 서울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과 학생지도부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30]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하겠다 – 3월 5일 서울 시위를 주도한 강기덕과 학생지도부 조한성 선임연구원 학생대표 강기덕과 김원벽, 3월 5일 인력거를 타고 만세 시위를 지휘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919년 1월의 어느 날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관수동에 있는 중국요리집 대관원에 모였다.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인 박희도가 주선한 모임이었다. 청년회 회원을 모집하는 데 전문학교 학생들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이 자리에는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의 김형기, 경성전수학교의 윤자영,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주종의 등 전문학교 학생들과 보성법률상업학교 졸업생인 주익, 연희전문학교 출신의 배화여학교 교사 윤화정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날 모임에서 시국에 관한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고 하니 이때야말로 조선이 독립을 할 적기가 아닌가. 평화의 정착을 위해 민족자결주의가 주창되었다고 하니 약소국도 독립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생긴 것이 아닌가. 당장 독립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과 좀 더 사태를 관망해야 한다는 의견이 격렬히 이어졌다. 결론이 나진 않았다. 모임의 본래 목적이 여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희도는 그동안 전문학교 학생들이 서로 소원하여 만나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가자고 덕담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이날의 모임은 모두의 가슴에 묵직한 돌덩어리를 남겼다. 며칠 후 강기덕이 김원벽을 찾아왔다. 김형기도 왔다. 그들은 함께 독립운동을 하자고 했다. 다수의 학생들이 뜻을 모으고 있으니 함께 하자고 했다. 결국 김원벽은 그들과
말의 민주화가 되어야 생각의 민주화가 되고, 생활 속에서 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어
[회원인터뷰] 말의 민주화가 되어야 생각의 민주화가 되고, 생활 속에서 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어 어린이문화 발전과 우리헌법읽기운동에 힘쓰고 있는 이주영 어린이문화연대 대표 인터뷰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문 :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답 : 제가 위하고 간, 두 군데에 암이 발병해서 2011년 명예퇴직을 했어요. 치료를 3년 정도 했죠. 처음에는 수술을 못할 정도였어요. 특히 간이 안 좋았는데 암세포가 여러 군데 분포해 있었어요. 다행히 표적 치료제가 있어서 그걸 먹었더니 암세포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저한테 딱 맞는 약이었던 거예요. 이렇게 잘 맞는 경우는 3~4% 정도라고 하더군요. 의사도 처음 봤다고 했어요. 그래서 수술하고 완치되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거죠. 문 : 지금은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답 : 어린이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어린이 관련 교육, 문화, 예술 단체들이 모여서 서로 정보를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어린이문화연대라는 모임입니다. 퇴직 후 약 10년째 대표를 맡고 있어요. 또 3년 전부터는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이라는 모임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온국민이 헌법을 읽고 헌법대로 운영하는 나라를 만들자는 운동입니다. <손바닥 헌법책>을 만들어서 한 권에 5500원씩 후원금을 받아서 배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뜻대로 1919년 3·1혁명을 대한민국 독립선언기념일로 하자는 뜻을 알리기 위해 3년 째 대한민국 생일잔치를 하고, <독립선언서 말꽃 모음>과 <대한민국 생일은 언제일까요?> 라는 책도 냈습니다. 문 : 어린이문학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요? 답 : 제가 처음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기미년 김구 선생 조선탈출비화
[자료소개] 경향신문사는 해방 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3·1절을 하루 앞둔 1947년 2월 28일자에 3·1운동 특집기사를 내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김구 선생의 기미년 조선탈출과 관련한 비화다. 당시 43세의 김구 선생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황해도 안악에서 신의주를 지나 중국 안동현에서 이륭양행의 상선에 승선, 우여곡절 끝에 상해로 탈출하였다. 김구 선생을 취재하여 탈출비화를 소개한 기자가 누군지 기사에 언급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편집부 경향신문 1947년 2월 28일자, <기미년 김구선생 조선탈출비화> 비록 어떠한 이유를 내세운다 할지라도 민족의 슬픔을 한 몸에 지니고, 일생동안 조선과 더불어 짓밟히며 지나온 이에 대한 간절한 경애의 정을 차마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기미년 3월 초승 조선 천지가 비통한 민족의 함성으로 뒤덮이었을 때 날카로운 왜정 관헌의 눈을 피하여 조국해방의 크나큰 뜻을 품고 표연히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한 한 사람의 지사가 있었으니 그는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한 김구 선생이었다. 겨레들 사이에 혹시 선생의 이야기를 할 때 선생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의 일은 누구나 흔히 알고 있으되 망명을 하던 때 조선 탈출의 기막힌 고초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때마침 해방 이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기념일을 당하여 선생에게서 직접 들은 바로써 아직 공표되지 않은 한 토막 비화를 감히 세상에 소개한다. 탈출 기회 규시(窺視) 기미년 2월 하순 아직도 남은 추위가
직접민주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자!!!
직접민주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자!!! 정해랑 3·1서울민회 부의장 짓밟혀 본 사람은 알지 빼앗겨 본 사람은 알지 짓밟은 자 빼앗은 자가 스스로 물러나고 알아서 빼앗은 것을 되돌려 주는 일은 없다는 것을 그 슬픔, 그 분노, 그 치욕 속에서도 언젠가 일어서고 언젠가 되찾기 위해 하루하루를 참아내 가면서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짓밟혀 본 사람 빼앗겨 본 사람이 처음으로 잡아본 무기 민주주의! 바다 건너 저 코쟁이 나라에서 왔다고 아니 정신 나간 인간들의 말처럼 섬나라 쪽발이들한테서 왔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의 조상 흰옷 입은 사람들이 일찍이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꿈꾸어 왔으니 그게 바로 민주주의 아니고 무엇이랴 1919년 3월 1일 정오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불타오른 혁명의 열기 그것을 이어받아 설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우리 조상들은 100년 전부터 민주공화국을 꿈꾸었으며 선포하였노라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 모든 권력이 백성에게서 나오는 나라 우리의 대표를 우리가 뽑을 수 있는 나라 그러나 일본제국주의를 물러나게 하고도 반쪽이 난 우리의 나라 민주주의는 손발이 묶이고 재갈이 물리고 일본 순사들을 거느리고 아메리카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다시 나타난 민족의 배신자들 우리의 민주주의는 대표나 간신히 뽑을 그나마도 온갖 부정, 협잡에 물든 선거로만 이야기되었지 4월의 함성, 5월의 몸부림, 6월의 외침이 이어지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잡혀가고, 행방불명되고 마침내 촛불혁명으로 되찾은 우리의 민주주의 그러나 고작 우리의 대표를 뽑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회원마당] 임시정부 답사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더듬어(1) 조선동 예원학교 국어교사, 청년백범 대표 S#1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이 맺어졌다. 이른바 ‘경술국치(庚戌國恥)’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대 전란을 겪은 이후, 조선왕조는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일부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가 득세하면서, 일부 권력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 백성을 위하는 정치가 아니라 일부 권력층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정치가 이루어졌다. 백성들은 권문세가의 이익을 위해 맞아죽고, 굶어죽었다. 일부 백성들은 스스로 민적(民籍)을 파내고 산으로 들어가 산적이 되었다. 이미 나라는 썩어 들어갔다. 신분제를 기반으로 한 왕조는 금이 가고 있었다.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과 양심을 팔아먹은 조선의 관료들이다. 세계사 어디에도 외부의 힘만으로 멸망한 국가는 없다. 이미 내부에서 썩어 들어가던 국가가 외부의 작은 충격도 견디지 못하고 멸망할 뿐이다. 한일합병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연구소 시민역사강좌 ‘백년 전 촛불, 독립을 외치다’ 개설
• 임무성 교육위원 3·1혁명 100주년 기념 특별강좌와 답사가 연구소 교육장 5층에서 3월 2일(토) 오후 3시에 시작되었다. 이번 강좌와 답사는 매주 토요일 4회(3강좌+1답사)에 걸쳐 진행되었다. 1회차 강좌 〈만세열전 – 그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는 조한성 선임연구원이, 2회차 강좌 〈“가만히 있으라”– 삼일혁명과 친일세력〉은 박수현 사무처장이, 3회차 강좌 〈3·1혁명100년, 다시 혁명을 이야기하 다〉는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이 각각 담당하였다. 4회차 답사는 〈100년 전 그날, 만세의 현장 – 종로, 북촌 일대〉로 권시용 선임연구원이 진행하였다. 강좌참가자에게는 조한성 선임연구원의 역저 ????만세열전????이 저자의 사인을 담아 증정되었다. 이번 강좌에서는 무명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3·1혁명의 숨은 주인공들의 이야기, 일제와 손잡고 만세시위를 막고 독립불능론, 내선일체론 등을 내세웠던 친일파의 망동,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을 만든 3·1혁명의 의미 등을 살펴보았다. 답사는 3·1혁명 만세시위의 현장이었던 보신각, 경성재판소터, 보성사터, 천도교 중앙총부터, 승동교회 등을 탐방하였다. 연구소 이전 후 소내 교육장에선 처음 갖는 시민역사강좌(유료)임에도 회원과 일반참가자 20여 명이 참여하였다. 특히 가족 단위로 강좌를 수강한 경우가 눈에 띠었는데, 어느 회원은 부인과 두 아들 등 가족 모두가 참여하여 주말을 뜻깊게 보내는 단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구소·박물관 회원뿐 아니라 일반 참가자들도 이번 강좌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연구소 활동에 격려를 보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차후 시민역사강좌와 답사를 정례화하여 시민들의 역사의식 함양에 기여하고 아울러 연구소와 박물관 홍보에도 활용하고자 한다.
3·1혁명 100주년 기념행사 ‘함께하자 독립운동!’ 개최
• 학예실 김슬기 3월 1일,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함께하자 독립운동!’이 라는 이름의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박물관에는 3·1혁명 100주년을 뜻깊게 기념하고자 하는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뤄 개관 이래 하루 최대 인원인 500여 명이 방문했다. 개막 전부터 박물관 입구 앞에는 이 행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인파로 줄을 서는 광경이 펼쳐졌다. 기념행사는 독립선언서를 읽고, 포토존에서 사진촬영을 하며, 신문조서를 작성하는 등의 8가지 단계로 진행되었다. 관람객들은 준비된 태극기와 촛불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직접 만세시위에 참여한 학생이 되어 순사의 신문에 응해 신문조서를 쓰는 등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편 1층에 마련된 기획전시실에서는 3·1혁명의 주역뿐 아니라 변절자와 탄압자를 다룬 ‘1919, 가만히 있으라? – 3·1혁명의 주역과 탄압자들’ 특별전이 진행되었다. 연구소가 소장한 독립선언서 원본과 최구현 의병장의 무관 급제 교지, 친일파 홍준표와 민원식의 족자 등이 전시되었다. 또한 100년 전 그날 만세의 현장, 3·1만세운동의 주역들, 3·1혁명의 변절자와 탄압자들이라는 4개의 패널을 만들어 관람객들로 하여금 3·1혁명의 현재적 의미를 재조명하도록 하였다. 특히 여수 청소년 예술가 모임 ‘몽이네 예나눔’에서 그린 독립운동가들의 초상화 전시가 더해져 관람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19, 가만히 있으라? – 3・1혁명의 주역과 탄압자들’ 특별전과 독립운동가들의 초상화 전 시는 3월 1일부터 4월 7일까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이어진다.
청일전쟁 때 일본군 개선식은 왜 용산 벌판에서 벌어졌을까? 과장된 전공(戰功)이 곳곳에 만들어낸 그들의 전승 기념물들
식민지 비망록 44 청일전쟁 때 일본군 개선식은 왜 용산 벌판에서 벌어졌을까? – 과장된 전공(戰功)이 곳곳에 만들어낸 그들의 전승 기념물들 이순우 책임연구원 1894년(갑오년) 여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감당하지 못한 조선국 정부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맞서 일본도 10년 전 갑신정변의 여파로 맺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동시 개입을 적극 시도하면서 끝내 이러한 군사충돌은 바로 이 땅에서 청일전쟁이 촉발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해 6월 8일 청국군은 아산만(牙山灣, 마산포와 백석포)을 통해 상륙하여 아산과 성환 일대에 주둔했고, 일본군은 이보다 하루 늦게 인천항을 거쳐 서울에 들어온 뒤 선발부대인 오시마 혼성여단(大島混成旅團)이 만리창(萬里倉, 효창동 199번지 지점)에 본부를 마련하고 예하 주력부대는 효창원 계곡과 아현리 주변에 포진하였다. <일청전쟁사진첩> (1895)에 수록된 효창원 만리창 지역의 일본군 숙영지 전경이다. 이때 오시마 병력이 한강을 건너 남하하여 청국군의 방어진을 향해 진군함에 따라 7월 29일 새벽 성환의 북쪽 안성도(安城渡, 안성나루;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중리)에서 두 외국 군대 사이에 첫 육상 전투가 벌어졌다. 불과 이틀 사이에 일본군은 청국군의 아산 본영까지 점령하고막대한 전리품을 수습하여 서울로 귀환하였고, 다수의 사상자를 낸 청국군은 홍주 방면으로 패주하였다가 강원도 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방식으로 행군하여 8월 하순에 평양(平壤)에 대기하고 있던 자신들의 군영으로 간신히 합류하였다. 1894년 7월 29일 청국군과 일본군의 첫 전투가 벌어진 안성나루의 모습이다. 이 자리에는 나중에 안성교(安城橋)라는 다리가 설치되었다.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 <조선지풍광>, 1922) 이른바 ‘성환역(成歡役)’으로 표기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