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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2019년 1월 24일 1399

[신년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함세웅 이사장   2019년 새해를 맞으면서 지난 한 해 우리 연구소 설립 목적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고 격려해주신 은인 회원들과 구성원 모든 분들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드립니다. 올해는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남북 정상은 지난 100년을 기억하고 평화와 통일의 문을 여는 새로운 100년을 남북 8천만 겨레가 함께하자는 취지로 남북공동행사를 약속했습니다. 남북공동행사의 성공을 위해 지난 역사에 대한 해석과 그 안에 남아있는 차이를 우리는 함께 극복해야 합니다. 100주년 남북공동행사는 평화공존과 일치를 위한 약속과 다짐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00여 년간 우리 민족공동체는 일제의 침략과 그 후유증인 이념과 정파 때문에 갈등과 분열 속에서 서로 헐뜯고 살았습니다. 100주년 남북공동행사가 이 모든 상처를 온전히 치유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 3년 동안 서로 비판하고 심지어 경멸하며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부끄럽고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남북 분단과 증오였습니다. 이에 친일 매국노와 반공 분단 권력이 손잡고 독버섯이 되어 인권과 민주주의를 짓밟았습니다. 올해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선조들이 품었던 그 ‘새로운 민족국가’에 대한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합니다. 3·1혁명 100주년 남북공동행사가 바로 구체적 표징입니다. 해방 정국 3년, 곧 미군정 시기가 미국이 지배했던 식민지였다는 분명한 역사 인식을 지녀야 합니다. 이 인식이 미국을 넘어 남북이 함께 손잡고 확인해야 할

새야새야 파랑새야(녹두장군 겨울맞이)

2019년 1월 25일 1178

[회원마당] 새야새야 파랑새야(녹두장군 겨울맞이) 김판수 전북지부 회원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가을 끝자락에 초겨울이 겹쳐 거친 바람이 싸남을 내어 에워싼 느티나무 왁살스레 흔들어서 곱게 물든 나뭇잎 휘휘 훑어다가 장군님 무릎앞에 수북수북 쌓았네요 장군님! 녹두장군님 앉아서 할일 없으시니 낙엽이나 치우세요 사람들아 내가 할일 없어 앉아있나? 나는 시방 복장이 터져 죽겠네 세상 돌아가는 꼴이 124년전 갑오년과 뭣이 다른가? 제폭구민! 제폭구민! 목숨걸고 싸웠더니 강자독점 승승장구 평등세상 가망없고 승자독식 갑질행패 노예세상 지옥일세 삐뚤어진 판사가 검사에게 조사받고 짜고치던 대법원장 사법농단 창피하다 척양척왜! 척양척왜! 대창들고 덤볐더니 강토는 쪼개놓고 핏줄은 찢어놨네 대화하자 구슬리며 어르면서 할똥말똥 핵폭탄 치워주면 햄버거 주겠다며 감질나게 줄똥 말똥 기관총 침략전범 참회는 못할망정 이즈모 뜯어고쳐 항공모함 가당찮다 아서라! 이 낙엽 치우지 마라 갑오년 기관총에 따다다다 다다다…… 추풍낙엽으로 이름없이 스러져간 농민의병 무주고혼 무더기로 쌓였구나 지켜내라 의열의 얼 잊지마라 종속굴욕 흔들리지 말아라! 평등 자유 정의 인권 든든하게 설 때까지 후천개벽 사인여천 밝은세상 올 때까지 자주 자력 자립 자존 외세개입 물리치고 배놓아라 감놓아라 외세간섭 뿌리쳐라 2018. 11. 7. 입동 여럿이 함께 손잡고 ‘평화의 길’ 김판수 두손모음

학살, 원폭, 강제동원 관련 국제학술회의가 연구소 주관 하에 열려

2019년 1월 24일 923

12월 21일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주최하고 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주관한 국제학술회의가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를 말한다-조사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덕성여대에서 열렸다. 이번 국제학술회의는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 등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일어난 인적 피해 문제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국가와 시민사회 차원에서 달성한 진상규명 현황과 성과를 정리하고, 향후 심화되고 발전된 진상규명을 위해서 어떠한 노력과 방법, 자료 발굴 등이 필요한지를 함께 모색하고자 마련되었다.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에서는 학살, 원폭, 강제동원 피해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김승은 책임연구원이 ‘한반도 내 인명피해 조사 현황과 과제’를 주제로, 성균관대 박사과정의 김강산 씨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해 발표하였으며, 재한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모임의 이치바 준코 대표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를 주제로 발표하였다. 강제동원을 주제로 한 발표는 김민철 책임연구원, 히구치 유이치 전 고려박물관 관장, 고바야시 도모코 유골봉환종교인시민연락회의 공동대표가 맡아 한국과 일본에서의 강제동원 피해조사의 현황에 관해 각각 발표하였다. 이어서 조시현 연구위원의 사회로 종합토론이 진행되었는데, 류준범(국사편찬위원회), 이상의(인천대), 히다 유이치(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고바야시 히사토모(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량대륭(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씨 등이 한국, 일본, 자이니치의 입장에서 연구 성과와 활동 등에 대한 소개를 비롯하여 깊이 있는 토론을 주고받았다. 이번 회의는 한국과 일본에서 이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현장에서 연구와 실천을 거듭해 온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열띤 논의를 통해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함께 모색한 뜻 깊은 자리였다. 또한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을 둘러싸고

친일반역자 백선엽의 송덕비를 어떻게 할까?

2019년 1월 2일 2217

[회원마당 ] 친일반역자 백선엽의 송덕비를 어떻게 할까? 임승관 전남동부지부장     몇 해 전 한 언론사에서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후손들의 삶을 비교 분석한 기사를 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60%를 넘었고 봉급생활자는 겨우 10%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분들은 다행이라고 할까? 대부분 독립운동가가 일본군과의 전투 중 숨지거나 사형당했고, 그나마 후손이라도 남겨 그 이후 삶이 추적 가능한 분들이 이 정도다. 반면 친일파 후손의 삶은 그와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일제로부터 돈, 토지를 하사받은 친일파의 후손들 대부분은 사회 각계로 진출해 기득권을 누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부와 가난이 후대에 대물림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후손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었다. 순천은 어떨까?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자료를 보니 순천 출신의 독립운동가는 63명(추정),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친일파는 6명이다. 친일파 6명 중 해방 이후의 행적까지 기록된 3명을 확인하니 3선 국회의원, 조계종 총무원장, 고려대 교수 등 탄탄한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삶은 살펴보진 못했으나 위 언론사의 자료와 별반 다를 것 없을 것이다. 내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남동부지부에서는 독립을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 가난과 싸워야 했던 왜곡의 현대사를 바로 세우고, 역사 앞에서 이름 없이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사업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회원이 순천에 백선엽의 송덕비가 있다고 제보해 왔다. 일본군에 자발적으로

‘미도리가오카’ 신흥 주택지로 변신한 친일귀족 민병석의 별장터

2019년 1월 2일 3291

식민지 비망록 42 ‘미도리가오카’ 신흥 주택지로 변신한 친일귀족 민병석의 별장터 – 메가타 재정고문의 관사는 왜 청파동 연화봉 언덕에 자리했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난여름 92세의 나이로 숨진 김종필(金鍾泌, 1926~2018)의 죽음은 잠시 기억 속에 잠겨있던 이른바 ‘삼김시대(三金時代)’에 관한 회상을 불러 일으켰다. 김대중(金大中, 1924~2009)과 김영삼(金泳三, 1927~2015), 그리고 김종필, 이들 세 사람은 굳이 이름 석 자를 적지 않더라도 각각 DJ, YS, JP라는 애칭만으로 통용되기도 했고, 그들의 위상은 동교동(東橋洞)이니 상도동(上道洞)이니 청구동(靑丘洞)이니 하는 동네 이름조차도 자신들의 대명사로 치부될 정도였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말이 난 김에 이들이 살았던 동네의 지명유래가 궁금하여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더니 나름 흥미로운 내용들이 포착된다. 먼저 동교동은 예로부터 서울도성에서 양화진나루로 가는 대로에 걸쳐 있던 세교(細橋, 잔다리)가 있던 마을이라는 뜻에서 생겨난 지명이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당시 경성부 연희면 일대가 고양군(高陽郡)으로 편입되면서 종전의 세교리 일계(一契)와 세교리 이계(二契)가 각각 서세교리(西細橋里)와 동세교리(東細橋里)로 바뀌었고, 다시 1936년 4월 1일에 이곳이 경성부로 재편입되는 과정에서 서교정(西橋町)과 동교정(東橋町)으로 명칭이 축약되었다가 해방 이후 오늘날의 서교동과 동교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다음으로 상도동에 대해서는 1911년 4월 27일에 경기도 고시 제9호에 의해 시흥군 동면 상도리와 성도화리(成道化里)를 합쳐 새로운 ‘상도리’로 설정한 내용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앞서 <1872년 지방도(규장각 소장자료)>에 포함된 「시흥현 지도(始興縣 地圖)」에 ‘상도리’ 라는 표시가 이미 들어 있는 점에

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2019년 1월 2일 1965

유청렬 편집자 주 ―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신천지』 1947년 8월호에 실린, 유청렬(柳淸烈)의 「옥중의 계명성」이다. 필자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직접 만났거나 전해들은 권태산, 엄순봉, 정태식, 이재유, 안창호, 허응철, 여운형 등 7인 혁명가의 옥중 일화를 다루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혁명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기개와 실천활동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필자 유청렬에 대해서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신천지』 1946년 10월호에 그가 쓴 「倭政 淸津 刑務所 滅亡記」라는 글이 있다. “8월 15일 감옥문이 열려 민중과 격리되었던 우리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자유로운 천지로 나올 때 다시는 이 땅에서 일제시대 모양으로 정치범을 위하여서는 감옥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던” 인민들이 그러한 당연한 희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전에 배(倍)한 다수 정치범이 투옥되고 있는 오늘날의 기구한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것은 ????신천지????(1946년 11월)에 게재된 오기영(吳基永) 선생의 「민족의 비원(悲願)」에 솔직히 대변한 바 있다. 민족적 양심이 있는 동포들이 동 선생과 더불어 그윽히 간탄(艱歎)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여기에 일제시대에 옥중에서 고투(苦鬪)하던 수많은 혁명가들 중에서 특히 인연이 있는 면면들과 그 밖에 자연적으로 알게 된 몇몇 지사들의 죄없는 죄인으로서의 옥중생활을 소개함으로써 독자 제현(諸賢)과 같이 동정을 나누려 한다. 여기에 적으려는 것은 나의 과거의 환경이 지배하던 한도 내에서만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보편적이 아닌 것이며 또 그 중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도 있고 또

<내일을 여는 역사> 2018년 겨울호(통권 73호)

2019년 1월 2일 1068

[책소개] <내일을 여는 역사> 2018년 겨울호(통권 73호) 내일을 여는 역사 재단 | 민족문제연구소   • 조한성 출판팀장 2018년 겨울호(통권 73호)가 나왔다. 이번 호에도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 <통일에세이>에서는 지난 20여 년간의 남북 보건의료의 협조과정을 회고하면서 ‘코리아 건강공동체’를 지향하는 보건의료 통일방안을 살펴봤다. <쟁점으로 보는 역사>에서는 두 개의 글을 통해 최근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사법농단을 다뤘다. 하나는 신일철주금 소송과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청구과 관련한 재판거래에 대해 분석하는 글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폭력에 대한 책임문제와 사법농단을 비판하는 글이다. <지금 우리는?>에서는 먼저 국정 역사교과서의 서사책략과 역사조작에 대해서 날카롭게 메스를 가했다. 또 하나는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이란 무엇이고 이를 정책적으로 도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다룬다. 두 글 모두 전문가의 공력이 느껴지는 글이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인물로 보는 역사>에서는 식민지 지식인으로 전혀 다른 두 길을 걸었던 차미리사와 김활란을 살펴보았고, 반독재민주화에 공헌한 인물로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받친 조영래 변호사를 재조명했다. <전태일평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왔는지 알고 싶다면, 조영래 변호사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이 글을 읽으면 된다. <내일을 여는 책>에서는 고전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레닌의 <제국주의>를 재조명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재음미하는 글인 만큼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사료의 재발견>에서는 오지영의 <동학사>를 통해 척왜창의(斥倭倡義)의 의미가 민족적 대연합을 제시하고자 했던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민주당 정권의 ‘민족일보’ 탄압

2019년 1월 2일 1310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 편집부 : 임헌영 소장이 경향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2017년 10월 12일부터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을 연재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광복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언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노동,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 필화사건을 다룬다. 이중 일부를 ????민족사랑????에 전재한다. 4월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당, 혁명정신으로 탄생한 언론에 ‘철퇴’ 1961년 8월 11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변론 공판 모습.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피고인석 왼쪽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4월혁명의 왕자는 제2공화국 집권민주당이었다. 그런데 이 왕자는 4월혁명의 공주격인 참 언론 ‘민족일보’를 학대했다. 서로 앙숙이던 이 4월혁명의 오누이는 5·16쿠데타에 의해 둘 다 참살당해 버렸다. 한국 현대정치사의 비극이 탄생된 것이다. 제2공화국은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순리로는 장면부통령(4월 23일 사임)이 27일 이승만 퇴진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른 후 개헌했어야 됐건만 덜컥 개헌을 서둘렀다. 그러자 고정훈은 “오욕 국회를 해산하지 않고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등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수년 안으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언(남재희, <진보열전>, 메디치, 2016)했고, 그건 적중했다. 허정 과도내각은 “허세를 버리고 실질적 반공태세 강화”와 미국의 반공 교두보로서 일본을 적극 협력자로 만드는 전제조건인 대일외교 개선책 등을 시정방침으로 들면서 혁명정신을 탈색시켰다. 장면 내각(1960.8.23)도 여기서 오십보백보였다. 이승만·허정의 정치이념 그대로였던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혁명 여망을 실현할 의향도 투지도 없었다. 정치적 갈등을

임종국 선생 29주기 추모 답사기

2019년 1월 2일 1337

[회원마당] 임종국 선생 29주기 추모 답사기 임무성 교육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천안지회·아산지회가 주최하고 충청남도 교육청이 후원하는 임종국선생 29주기 추모 답사가 11월 11일에 진행되었다. 답사 여정은 천안삼거리 공원→요산재(임종국선생 서재, 살림터)→천안공원묘원(무학지구 철쭉 4-1)→신부공원(임종국선생 조형물) 순이었다. 뿌연 미세먼지를 뚫고 천안삼거리공원 주차장에 참가자들이 집결하였다. 본부에서는 방학진 기획실장, 강대운이 참가하였고, 지부 참석자들은 이민우 운영위원장 부부, 권희용 충남지부장, 최기섭 천안지회장, 홍남화 아산지회장, 최요식 세종지부장을 비롯하여 35명가량이었다. 수많은 차로 빽빽한 천안삼거리 공원 주차장 한가운데 눈에 확 띠는 낡은 화물차에 스티커로 붙여진 ‘친일청산’ 구호가 반갑게 답사 일행을 맞아주었다. 천안 사람들에겐 이미 명물이 된 트럭이라 한다. 주차장 한켠엔 충남도교육청에서 지원한 대형버스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임종국선생이 살던 요산재는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 탓에 회원들 승용차에 분승하여 출발하였다. 천샛골 낚시터를 지나 몇 굽이 산길을 오르니 가파른 산자락 아래 추모객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는 듯한 선생님 서재로 쓰시던 집이 나타난다. 1980년 식구가 다 같이 이사와 산 곳으로 가옥, 창고, 과수원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도 대중교통으론 왕래가 쉽지 않은 곳으로 선생님 살아 생전엔 천안삼거리 공원에서 한 2km를 걸어 들어와야 했던 곳이다. 요산재(樂山齋)란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쉽게 알 수 있겠다. 선생은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집필에 전념하며, 밤농사 등으로 생계도 해결하려 하셨던 것이다. 농사 중엔 밤농사가 그래도 손이 덜 가는 편이라 한다. 지금은 선생이 기거하고 글 쓰시던 건물은 새롭게 개축되어

‘대한민국 만세’의 힙합 버전 D.VIVE 아시나요? 힙합 공연팀 이지 크루의 박원상 대표

2019년 1월 2일 1278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 정리 국세현 기획실   12월 5일 2018 항일음악회에서 힙합퍼포먼스를 선보인 이지 크루(EZ crew) 박원상 대표(37)가 인터뷰를 위해 연구소를 찾았다. 이지 크루는 이번 항일음악회 ‘독립군 아리랑, 다시 부르는 희망의 노래’에서 더 히스토리(The History)라는 제목으로 색다른 힙합 퍼포먼스를 펼쳐 보여 젊은 관객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문 : D.VIVE는 무슨 뜻이고 어떻게 생겨난 말인가요? 답 : D.VIVE는 사전에 없는 말이에요. 대한민국의 D와 만세의 VIVE를 결합한 말인데 제가 만든 신조어예요. 처음에는 사실 D.VIVE라는 이름만 만들어 놓은 상태였어요. 근데 D를 놓고 보니 까 대한민국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대한민국 만세가 되는 거 예요. D는 댄스의 첫 글자이기도 하니까 댄스 만세도 되잖아요. 같이 하는 동료들과 어 렵지 않게 D.VIVE를 대한민국 만세라고 정했어요. 저희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 거지요. 시작은 그랬어요 문 : 민족문제연구소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요? 답 : D.VIVE가 새겨진 옷을 만들었는데 그 판매수익금을 좋은 일에 쓰고 싶었어요. 마침 8·15 광복절도 다가오는데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기부하는 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죠. 근데 이상하죠? ‘대한민국 만세’라는 말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궁금해졌어요. 우리나라는 도대체 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을까? 궁금하긴 한데 학창시절에 그런 걸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더라구요. 정확하게 가르쳐준 선생님들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혼자 책도 읽고 검색도 하며 찾아봤죠. 여기저기 전화해서 물어 봤어요. 하지만 다들 맨숭맨숭하게 그런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