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박정희 합성사진 관련 명예훼손 피고 방자경 형사재판 방청기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10월 12일, 서울북부지방법원 301호 법정 문이 열렸다. 긴장된 마음으로 방청석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방자경 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분이죠?” 그러면서 자기가 쓴 것이라며 책 2권을 내밀었다. 임헌영 소장님께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의도를 알 수 없고 어이도 없었지만, 이 소송이 시작된 2016년부터 재판 때마다 매번 봐온 사이니 그 정도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었다. 별말 없이 책을 받아서 옆에 놓을 때쯤 판사가 법정으로 들어왔다. 방자경 씨를 고소했던 2016년, 경찰조사를 받던 방자경 씨는 자신이 잘못했다며 전화로 사과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수년간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그리고 각종 태극기 집회에서 연구소를 종북, 간첩, 빨갱이로 비방하고 박정희 합성사진을 조작한 범죄자로 낙인찍은 사람이 고작 ‘사과 전화’ 한 통으로 끝내겠다니. 그런 방식의 사과는 받을 수 없었다. 연구소는 거부의 뜻을 명확히 전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방자경 씨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정절차도 있었지만 방자경 씨는 그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다. 민사재판 때부터 방자경 씨 옆에 항상 함께 있던 그 사람, 서석구 변호사가 보이지 않았다. 동년배의 여성 한 명만 동석해 있었다. 재판이 시작되고 방자경 씨가 피고석으로 나갔다. 사실 필자는 이 재판부에 불만이 많았다.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피고측의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재판부의 태도에 패소를 예상하기도 했었다. 피고가 나오지 않으면 기다려주고 선고를 연기해서 방어권을 최대한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춘 해설, 청소년도 할 수 있어요!
이지윤 근현대사기념관 도슨트 3기, 중산고 1학년 나의 꿈은 우리 역사를 알리고 지키는 것이다. 그 꿈에 한걸음 나아가기 위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에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청소년도슨트를 모집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2018년 무더운 여름 청소년도슨트가 되기 위한 수업이 시작되었다. 프로그램이 시작하는 첫 번째 날은 개인 사정으로 수업에 참석하지 못해서 아주 아쉬웠다. 두 번째 날은 어느 중학교 선생님께서 3.1운동부터 촛불혁명까지의 우리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학교 수업에서 듣던 내용도 있었고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있었다. 세 번째 날에는 도슨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고 네 번째 날에는 아직 개관 전이었던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견학해 일제강점기의 역사에 대해 배웠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는 근현대사기념관의 도슨트가 되기 위해 전시물들을 숙지하고 직접 원고를 써서 해설을 해보았다. 나는 광복 후부터 4.19혁명까지의 파트를 맡게 되었고 조금 긴장도 되었지만 조장으로써 조원들과 함께 해설을 무사히 끝마쳤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알고 갈 수 있는 기회가 되는데 작은 역할을 한 것 같아 굉장히 뿌듯했다. 그리고 최인담 학예사께서 엄청나게 칭찬해주셔서 자신감이 생겼다. 3주간의 프로그램이 끝나고 2018년 8월 15일부터 정기적인 청소년도슨트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총 4번의 정기해설을 하였고 야외해설과 광복 후 또는 6.25전쟁 이후 에 대해 설명했다. 광복 후의 파트만 3번을 하였는데 다음번에는 독립군
기억과 망각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기록과 꾸준한 관심이다 – 콜라보라시옹 전시회 관람기
정용진 광주지부 회원 5·18민중항쟁의 도시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2018 프랑스 내셔널 아카이브(국립기록보존소) 초청전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1940~1945’이 열리고 있다. ‘콜라보라시옹’ 관람을 위해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들어서며, 문득 재작년에 아들(정재찬)과 나눴던 얘기가 떠올랐다. 당시는 서울시민청 시민갤러리에서 ‘콜라보라시옹’ 첫 전시회가 열리고 있을 때다. 둘째 아들 재찬이에게 콜라보(콜라보레이션)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재찬이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얼굴이 환해지며 대답한다. 아빠… 그거 무슨 말인지 생각났어, 콜라보는 가수들이 팀을 만들어 서로 도와주는거야. 맞지?… TV방송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자주 듣던 말이 생각났나 보다.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콜라보레이션 흔히 콜라보라고 하는 것은 국악과 양악의 만남, 미술가와 무용가의 만남 등 제각기 다른 장르가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뤄 새로움을 추구하고 결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1940~1945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전시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기의 프랑스에서 나치에 협력했던 콜라보라시옹, 즉 나치부역자들을 고발하는 전시회다. 전시 제목의 ‘콜라보라시옹’은 오늘날 협업 또는 공동작업이라는 좋은 의미로 널리 쓰이지만, 나치 독일점령기의 프랑스에서 ‘대독협력’을 뜻하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뒤 들어선 비시정부의 페탱 원수가 독·불 사이의 국가간 협력이란 뜻으로 사용한 이래, 독일점령기의 나치 부역행위를 일컫는 역사적 용어가 되었다. 이 전시는 ‘콜라보라시옹의 주역들’ – 비시 파리 베를린, ‘공공의 적’, ‘경찰 조직의 콜라보라시옹’, ‘문화예술계와 언론계의 나치 부역’, ‘경제계의 나치 부역과
동해바다 독도수호의 작은 불씨가 되고자 강치상을 세우다 – 강치상을 기증한 청심국제중고등학교 학생들
인터뷰 – 자료실 김슬기 10월 21일, 식민지역사박물관 한켠에서는 독도 지킴이를 자처하는 학생들이 강치상을 기증하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청심국제중고등학교 동아리 해밀의 학생들이었다. 11월 11일 일요일에 박물관에서 이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기숙사에 사는지라 집에 올라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일 텐데도 졸린 기색 하나 없이 이른 아침부터 박물관에 찾아와 주었다. 이 자리에는 강치상을 제작한 김성래 작가도 함께하였다. “독도에 사는 강치를 기억함으로써 역사의 영속성을 알리고, 국력을 키우는 작은 불씨가 되고 싶어 강치상을 제작했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문 : 동아리 이름이 해밀이라고 했는데요. 어떤 뜻으로 지어졌나요? 답 : (한재원) 해밀은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저희도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처럼 사회적인 이슈들을 저희만의 해석과 시선으로 해결해서 갠 하늘과 같은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자 동아리 이름을 이렇게 짓게 되었어요. 2016년에 여기 있는 소윤이, 선배님(태영), 그리고 저를 포함한 7명이 창단 멤버로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문 : 해밀은 주로 어떤 활동들을 해왔나요? 답 : (문소윤) 지구촌 불평등 국가 아이들을 위해 전래동화 번역을 하고요. 방학 때는 캄보디아로 해외봉사, 매년 겨울에는 요양원 김장봉사를 해요. 또 저희 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가평 내의 지역아동센터에서 매주 목요일에 바이올린, 영어 등으로 재능기부도 하고, 놀이로 강치를 알리고, 강치벽화를 그리기도 했어요. (한재원) 가장 주요한 활동은 독도를 알리는 활동인데요. 독도에 가서 강치를 보고 배지 같은
기증자료
심정섭 지도위원 제70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01점 보내와 10월 4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70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고창, 보성, 구례 등에서 발행된 토지소유권보존등기신청서, 벌채허가서, 곡물판매대금 증서 등이다. • 10월 16일 네이버 오디오클립 <아빠 한국사여행 떠나요> 구독자 일동, 청소년 어린이책작가회의 회원 일동, 3.1운동 100주년 시민박물관 프로젝트 참가자 일동이 어린이 도서 200권을 기증했다. • 10월 18일 오세명 씨가 <대한협회회보> 등 도서 17권을 기증했다. • 10월 24일 박기서(경기부천지부) 회원이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전 육군 소위를 처단한 정의봉, 안중근 의사 어록, 김구 조형물 총 3점을 기증했다. • 10월 26일 한국원폭피해자들을 돕는 시민모임에서 원폭피해자 곽귀훈 씨의 자료를 기증했다. 군복무 시절 사진과 기록 영상물 등 총 9점(복제본)인데 1944년 징병 1기로 강제동원되어 서부 제2부대에서 찍은 초년병 시절 사진과 군대수첩,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원폭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재증명서 등이다. 최미경(충남지부) 최장원(서울서부지부) 회원, 의병대장 최구현 선생의 자료 기증 • 10월 15일, 독립유공자의 후손 최미경, 최장원 회원이 소장하고 있던 증조부 故 최구현 의병장의 유품을 연구소에 기증했다. 최구현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에 울분, 1906년 충남 당진소난지도에서 의병활동을 하여 200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의병대장이다. 기증 자료는 교지, 성적표(합격증), 화살 등 총 15점이다. 최구현 선생은 호가 유곡, 본관이 경주로 1866년 면천군 매염리(송산면 매곡리)에서 출생하여 1887년 과거(무과)에 급제 후 훈련원
110년 만에 고향 구미에서 처음 열린 왕산 허위 선생 추모식
12월 1일 창립 예정인 연구소 구미지회(준)는 10월 21일 구미시 임은동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옆 묘소에서 허위 선생(1855~1908)의 장손인 허경성 선생(92)을 비롯해 회원과 구미시민 등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순국 110주기 추모식을 열었다. 이번 추모식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110년 만에 구미시민들이 마련한 첫 추모제다. 대구에서 맏손자 허경성(92세) 선생 내외와 서울에서 후손 허벽(84세) 선생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석했다. 운강 이강년 의병장에 이어 경성감옥(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순국한 허위 선생 가문은 10여 명이 항일투쟁에 참여해 안중근, 석주 이상룡, 우당 이회영, 일송 김동삼 가문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5대 항일 가문으로 꼽힌다. 그동안 구미시는 역대 시장이 앞장서서 1천억 원이 넘는 혈세를 들여가면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추모제와 탄신제는 지냈지만 허위 선생의 추모제는 지내지 않았다. 이것이 연구소 구미지회(준) 회원들이 추모식을 발 벗고 준비한 이유다. 장세용 구미시장은 추모식이 열리기 전, 기념관을 찾아 허위선생 유족에게 감사의 말씀과 함께 세계 여러 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왕산 유족 가운데 고향에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분을 위한 주택 대책을 마련해 보라고 즉석에서 관계자에게 지시했다. 이날 추모식은 전병택 회원의 사회로 박도 회원(역사 저술가)이 허위와 허형식 장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구미 시민 김형숙 님이 이육사의 시 <광야>를 낭독했다. 박찬문 회원은 추모식 경과보고를 했고 장호철 회원은 허위 선생 행장을 소개했다. 장기태 회원의 눈물어린 추도사로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서울시는 1966년 왕산 선생이 진격한 길을 따라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2018 연구소 수련회 개최
10월 13·14 양일간 계룡산 자락에 위치한 마곡사 인근의 한국문화연수원에서 연구소 수련회를 개최하였다. 올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준비로 인해 수련회가 늦춰지게 되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150여 명의 회원들과 상근자가 참가한 가운데 결의와 우의를 다지는 뜻깊은 자리였다. 저녁식사 후 연수원 앞마당에서 진행된 공식 행사에서 먼저 함세웅 이사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고 임종국 선생의 누이 임경화 여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김정섭 공주시장 등이 축사를 하였다. ‘올해의 모범지부’ 영예는 부천시민역사강좌, 강화도 평화기행 등 시민과 함께하는 행사를 활발히 진행한 부천지부에 돌아갔다. 이어서 노래운동가 주하주 회원(광주지부)의 지도하에 8, 90년대 애창되었던 민중가요를 참석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열창하였다. 정준찬·최수련 부부 명창이 진행하는 우리가락 한마당에서 신명나는 판소리 가락에 어깨춤이 저절로 춰졌고 강강수월래를 부르며 서로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등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혹한(?)의 날씨로 인해 식당으로 들어가 뒤풀이 행사를 진행하였다. 늦은 시간까지 많은 회원들이 술과 다과를 함께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이튿날 숙소를 나와 전날 마곡사를 안내해준 지수걸 공주대 교수(연구소이사)를 따라 동학농민군의 숨결이 배인 공산성과 우금치 전적비를 답사했다. 지수걸 교수의 깊이 있는 해설로 새로운 역사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유적지를 보는 시야를 한결 더 넓힐 수 있었다. • 편집부
아직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촛불’ 2주년에 돌아보는 역사전쟁
조세열 상임이사 “이것이 나라냐?”고 분노하며 시민들이 촛불을 든 지 벌써 2년이 됐다. 그간 정권교체도 이루어졌고 평화정착과 통일에 대한 전망도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촛불민심이 요구한 ‘적폐청산’과 ‘국가재조’라는 혁명적 과제는 현실정치와 경제논리에 발목이 잡혀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잠시 자숙하는 시늉을 하던 수구세력은 자신감을 되찾은 듯 촛불항쟁의 정신을 외면하고 거침없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들은 분단 70년이 넘어 찾아온 민족의 명운이 걸린 절호의 기회를 한갓 정치적 득실을 따져 사사건건 제동을 건다. 숱한 개혁 입법도 제대로 논의조차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두 차례 보수정권에서 고질화한 관료사회의 퇴행도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다. 이제 일각에서 조직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고함을 강변하며 현 정권의 퇴진까지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통설이 실감나는 요즈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지부진한 현 상황을 남의 탓만으로 돌리며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더 늦기 전에 문제의 근원을 찾아 효과적인 대처를 해야 할 것이다. 현 정권은 촛불민심의 선택과 위임을 받아 출범했다는 점에서 도덕적 권위를 지니는 동시에, 그 요구에 응답하고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피할 수 없는 책무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함께 외쳤던 주장이 무엇이었던가를 곱씹어 봐야 한다. 돌이켜보면 사실 거창한 명제가 아니었다. 촛불집회에서는 박근혜 하야–퇴진–탄핵-구속 촉구로 이어지는 각 단계별로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었지만, 이를 관통하는 구호는 ‘기본권의 보장’에 다름
용산역, 침략군대가 ‘출정’과 ‘귀환’을 반복했던 공간 – 군용철도 경의선과 경원선의 분기점이 용산에서 형성된 까닭은?
식민지 비망록 40 이순우 책임연구원 「경성급용산」 지도자료에 표시된 왕십리의 원래 위치. 이 지도를 통해 왕십리 마을은 서울도성 광희문과 왕십리정거장의 중간쯤에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철도여행안내>, 1915) 서울 성동구에 있는 왕십리역전광장 한쪽에는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흉상과 더불어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그의 시 <왕십리(往十里)>를 새긴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비를 볼 때마다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과연 이곳이 김소월이 말하는 왕십리가 맞는가 하는 사항이다. 그가 월간종합잡지 <신천지(新天地)> 제9호에 이 시를 발표한 것이 1923년 8월이었다. 이 점 에 착안하여 그 시절과 가장 근접한 ‘경성부 관련’ 지도자료를 살펴보면, 왕십리역 앞쪽에는 ‘행당리’로 표기된 작은 마을이 있었을 뿐이고 정작 ‘왕십리’는 이곳과 뚝 떨어져 지금의 왕십리 뉴타운 지역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여기에서 보듯이 흔히 사람들은 왕십리라고 하면 ‘오리지날’ 왕십리의 위치에 대해서는 잘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왕십리역이거나 왕십리네거리 언저리를 먼저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위치 혼동은 모름지기 ‘왕십리역’ 그 자체에서 비롯된 일인 듯하다. 이 역은 1911년 10월 15일 일제에 의해 경원선(京元線, 용산~의정부 구간)의 운수영업이 처음 개시될 때 뚝도정거장(纛島停車場)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가 이내 1914년 4월 11일에 왕십리정거장(往十里停車場)으로 개칭되었다. 단순히 기차역의 소재지로 본다면 ‘행당역’ 정도로 명명되는 것이 맞았을 테지만 지명도가 약한 탓에 공연히 중랑천 건너편에 있는 ‘뚝섬’을 가져다 ‘뚝도역’이라고도
가족과 함께 본 식민지역사박물관
박찬희 <구석구석 박물관1> 지은이 자꾸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혼자 가도 좋지만 같이 가면 더 좋을 텐데. “얼마 전에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 생겼는데, 같이 갈래?” 다른 때는 박물관에 가자고 하면 두어 번쯤 밀고 당기는 실랑이를 벌이는데, 웬일인지 이번은 다르다. 딸아이가 박물관을 본 후에는 자기가 가고 싶은 데 가자며 흔쾌히 대답했다. 같이 박물관을 간다는데 그 정도쯤이야. “그런데 거기 뭐하는 데야?” “옛날에 우리나라가 일본한테 지배를 당한 적이 있어. 그때 역사를 잊지 말자고 만든 곳이야.” 아내와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지인들과 박물관을 새롭게 보는 활동을 하는 덕분에 개관하기 전 미리 박물관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그사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또 아내와 딸은 어떻게 박물관을 볼지 무척 궁금했다. 요즘 우리 가족이 박물관을 관람하는 방법은 이렇다. 나와 딸아이가 같이 다닌다. 대장 역할은 딸아이가 맡고 나는 딸아이를 졸졸 따라다닌다. 반면 아내는 따로 다니며 보고 싶은 대로 본다. 박물관에서 발걸음을 멈춘 곳은 박물관 입구였다. 그곳은 일반적인 박물관과 다르다. 입구를 따라 늘어선 벽에는 후원한 사람과 단체의 이름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이 벽 자체가 무엇보다 강렬한 박물관의 역사였다. 후원자들은 자기 이름을 찾아보면서 얼마나 뿌듯해 할까. 1층은 관람자를 맞이하는 공간이다. 의자와 책상이 놓인 널찍한 곳으로, 나중에는 기획전시 실로 사용할 계획이란다. 딸과 같이 둘러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초석을 놓은 임종국 선생님의 글 앞에서 섰다. 이런 글은 실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