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기증자료
심정섭 지도위원 제69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02점 보내와 9월 5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9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박OO이 1950~60년대에 문교부, 전라남도지사 등에서 받은 발령·호봉 통지서, 위촉장, 이력서 등이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김재호 회원, 우편저금통장 4점 기증 • 9월 6일 김재호 회원이 강제동원으로 후쿠오카에 끌려간 큰아버지 김도원 씨의 우편저금통장 4점을 기증했다. 김도원 씨는 1940년 일본 후쿠오카현 탄광으로 끌려가 1944년 2월 15일 작업 도중 탄광 이 무너져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서 사망했다. • 9월 12일 이성재(경기동부지부) 회원이 <일본지리풍속대계> 등 도서 3점을 기증했다. • 9월 27일 최사묵(서울강남서초지부) 회원이 조선총독부 철거 잔해 1점을 기증했다. 최사묵회원은 1905년 을사늑약에 울분, 1906년 충남 당진 소난지도에서 의병활동을 하여 200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의병대장 최구현 선생의 손자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기증 잇달아 • 9월 10일 이치노헤 쇼코 씨가 <國旗>, <進駐軍が寫したフクオカ戰後寫眞集>(1983) 도서 2점 을 기증했다. • 9월 14일 즈시 미노루 씨가 신사 관련 자료 총 103점을 기증했다. 2년마다 발행되는 야스쿠니 신사화보 <靖國>와 특히 「誉之家」(명예의 집) 기념문패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기에 출정한 병사가 전사 하면 유족의 집 문패 옆에 나란히 부착하는데 이 기념문패를 부착한 집은 ‘명예의집’으로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 9월 27일 재일교포 박정화 씨가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조선화보>, <평화통일> 등 총 4박스를 포장해서 보내주셨다. 귀중한
프랑스 내셔널 아카이브 초청전 ‘콜라보라시옹’ 광주에서 열려
프랑스 내셔널 아카이브가 2014년 해방 70년을 맞아 기획한 〈라 콜라보라시옹, 비시 파리베를린 1940~1945〉 특별전이 10월 11일 광주에서 개막되었다. 연구소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주최하고 내일을여는역사재단·식민지역사박물관이 후원하여 민주항쟁의 상징인 광주에서 열리게 된 이번 전시는 연구소가 2016년 서울시청 전시를 통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 전시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프랑스는 해방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전쟁협력자와 전쟁범죄자를 추적하여 단죄하는 역사청산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다. 특히 이번 초청전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완벽한 진상규명을 위해 새롭게 힘을 모으고 있는 광주에서 열리는 의미는 무엇보다 크다. 이를 반영하여 전시의 마지막 부분은 ‘2018 파리-광주, 끝나지 않은 과거청산’을 주제로 구성되었는데, 프랑스의 과거청산작업을 통해 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 시효와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개막식에는 프랑스 내셔널아카이브 니콜라 우즐로 부관장,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나의갑 관장 및 5.18민주화운동 관계자, 연구소 함세웅 이사장, 김순흥 광주지부장 및 지부회원들과 언론 관계자들이 자리를 가득 메워 이번 전시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2016년 서울시청 전시 개막식에도 참여한 바 있는 프랑스 내셔널아카이브의 니콜라 우즐로 부관장은 바쁜 일정에도 광주를 찾아 이번 전시에 큰 성원을 보내주었다. 우즐로 부관장은 개막식에 이어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누구나가 역사적 진실을 알아야 하며, 국가가 모든 기록을 숨김없이 공개하는 것이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문단의 적폐,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세미나 개최
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위원장 유용주)는 10월 6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1층 예인홀에서 ‘문단의 적폐,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의 부제가 ‘조선일보 동인문학상 편’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일보사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을 반대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1부에서는 이경자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의 인사말이 있었고 임헌영 소장이 ‘히가시 후미히토(김동인의 창씨명)의 5막 희극’이란 제목으로 기조발제를 하였다. 임헌영 소장은 김동인의 친일행적과 사상계가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한 문단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고 “나는 이때(1967.6. 장준하가 국회의원 출마로 사상계에서 손뗌) 동인문학상은 끝났어야 한다고 본다. 친일언론과 친일문인의 만남은 어떤 공로에도 불구하고 국민 절대다수가 반감을 갖는다”며 1987년부터 조선일보가 이어받은 동인문학상은 철폐되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김자흔, 유순예, 송경동 시인이 항일시를 낭독하였다. 2부 세미나에서 맹문재 안양대 교수의 사회로 이명원 경희대 교수가 ‘김동인의 대일협력과 동인문학상 문제’를, 오창은 중앙대 교수가 ‘김동인 문학의 문학사적 평가에 대한 성찰’을, 최강민 우석대 교수가 ‘좀비 동인문학상을 폐지하라’를 발제하였고 2001년 동인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거부했던 소설가 공선옥 씨의 회고담이 이어졌다. 이명원 교수는 “김동인의 친일행위는 적극적 자발성을 큰 특징으로 한다”며 “글쓰기와 행적 양면에서 적극적으로 대일협력에 앞장선 김동인이 해방 뒤에는 그와 관련해 허황된 자기변호로 일관했지만, 이는 명백한 사실의 왜곡과 자기변호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동인문학상에 대해 “폐지가 가장 명료한 해법”이라며, “문인들이 친일문인 문학상의 심사나 수상을 거부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조선의용대 80주년 기념 학술회의 열어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는 10월 10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에서 약 70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의용대 창설 8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열었다. 민족혁명당과 약산 김원봉 주도로 결성된 조선의용대는, 한국인 무장부대가 국제 정규전에 독자적 부대 단위로 직접 참전 및 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어 광복군의 조직과 전투력 증대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날 학술회의는 윤경로 상임대표의사회로 제1발표는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선임연구위원이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을, 제2발표는 김삼웅 전독립기념관장이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을, 제3발표는 최필숙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부소장이 ‘의열단과 조선의용대 그리고 밀양’을 각각 발제했다. 토론에는 조한성 연구소 선임연구원, 조철행 독립기념관 연구원, 조형열 연세대 연구교수가 참여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의열단의 중심 세력들이 조선의용대로 진화·발전하는 과정, 조선의용대의 북상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그리고 조선의용군으로의 분화, 조선의용대와 밀양 출신 인사들 간의 관계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다만 조선의용대가 남북 분단이라는 제약 때문에 한국무장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참석자들은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날 학술회의 자료집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누리집(www.sh100th.org)에서 다운받아 볼 수 있다. • 방학진 기획실장
‘반민특위 설립 70주년 기념 특별기획 – 반민특위의 좌절과 부활’ 서울자유시민대학 강좌 개설
민족문제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이 기획하고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주관하는 2018년 하반기 서울자유시민대학 강좌가 9월 12일부터 11월 28일까지 총 10주 동안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덕성여자대학교 대강의동 104호에서 진행 중이다. 이번 강좌는 반민특위 설립 70주년을 기념하여 ‘반민특위의 좌절과 부활’이라는 주제로 개설되었다. 서울평생교육포털을 통해 사전에 강좌를 신청한 수강생은 30여 명이었으나, 현장에서 추가 접수가 이어져 세 차례의 강좌가 진행되는 동안 매 회 실 수강 인원은 30명을 웃돌았다. 강의는 전체 10강을 1, 2부로 나누어 1부에서 친일파 청산의 좌절과 그 영향을 역사적 맥락에서 다루고, 2부에서 친일청산운동의 전개와 의의를 중심으로 현재 역사정의를 실천하려는 사회적 움직임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첫 번째 강좌는 김민철 책임연구원(경희대 후마니타스 대학 교수)이 ‘해방공간의 친일파 인식’을 주제로 진행했다. 두 번째 강좌는 〈반민특위 연구〉를 저술한 이강수 국가기록원 수집기획팀장이 반민특위의 활동과 해체과정을 상세히 다루었다. 특히 반민특위가 피의자를 조사하기 위해 관계기관에 자료를 요청했으나 침수, 분명치 않음, 군법상 등 이유로 자료를 내지 않은 정황을 소개하며 정부 차원에서의 자료제출을 거부했던 실례를 언급했다. 세 번째 강좌는 2013년 EBS에서 반민특위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큐프라임-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의 제작이 중단된 데 사표를 제출하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 재직 중인 김진혁 PD가 맡았다. 반민특위의 좌절이 현재 사회의 역사정의를 어떻게 지연시켰는지 본인의 경험에 비춰 생생한 강연을 진행했다. 이후 강좌는 박수현 연구실장이 ‘독재정권과 친일세력의 구조화’를, 이용창
왜 우리는 아직도 친일문학을 규탄하는가
특집 | 친일문학과 항일문학 임헌영 문학평론가・민족문제연구소장 이 글은 2018년 8월 15일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문단의 적폐 친일문인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 학술회의에서 격려사로 발표된 글이다. 1. 피천득의 친일파 비판 피천득은 수필 <춘원>에서 이렇게 썼다. “그(춘원)는 산을 좋아하였다. 여생을 산에서 보내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아깝게도 크나큰 과오를 범하였었다. 1937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더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을까.” 그는 이런 말도 남겼다. 세상 떠난 사람한테 이런 말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지만 서 아무개 같은 사람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봐 줄 수가 없어요. 일제뿐만 아니라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랬어요. 작가는 인격이나 인품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또 문학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물건은 다 버려도 자기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인품이 좋지 않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피천득의 말. 정정호 엮음,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샘터, 2014, 253-254) 여기서 서 아무개는 미당이다.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산문을 썼던 피천득이 왜 이런 가혹한 발언이나 글을 썼을까. 지금까지 친일문학인에 대하여 이처럼 혹독하게 비판한 문학인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아마 친일문학의 본질을 피천득은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2. 만세도 못 불렀던 민족 1945년 8월 10일 밤, 중국 섬서성 주석(陕西省 主席)이자 국민당 중앙감찰위원이었던 쭈샤오저우(祝紹周)의 시안(西安) 저택에서 만찬을 끝낸 백범은 객실에서 수박을 먹으며 담화하던중 전화소리가 울렸다. 주석은 놀라듯 전화실로 급히
북일수교를 전망하며 남북공동기억센터(가칭) 설립을 제안한다
김민철 책임연구원 4·27 판문점선언 이후 한반도에는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그동안 38선을 경계로 한층 고조되었던 군사적·정치적 갈등을 진정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동북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변화의 바람이다. 현란할 정도로 전개되고 있는 남, 북, 미, 중 간의 외교전의 흐름을 볼 때, 이 변화는 되돌릴 수 없는 양상을 띠게 될 것 같다. 물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 아시아에서 평화체제가 확립될 때까지는 숱한 우여곡절과 일시적 후퇴도 겪게 될 것이지만, 한번 시작된 흐름은 계속 유지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머지않아 북과 일본도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이 추진될 것이다. 다가올 북일수교를 전망할 때 수교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문제가 다시 제기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지난 2002년 북과 일본은 이른바 평양선언에서 이 문제에 대한 큰 해결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평양선언문 2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측은 과거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조선 인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의 뜻을 표명했다. 쌍방은 일본측이 조선측에 대하여 국교 정상화 후 쌍방이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기간에 걸쳐 무상자금 협력, 저이자 장기차관 제공 및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의 경제협력을 실시하며 또한 민간경제 활동을 지원하는 견지에서 일본 국제협력은행 등에 의한 융자, 신용대부 등이 실시되는 것이 이 선언의 정신에 부합된다는 기본 인식 밑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발기인에 참여합니다
안녕하세요. 서울 상봉역 부근에 위치한 오래된 학교인 중화초등학교 6학년 5반 담임교사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1학기에 근현대사 역사를 배우는데요, 아이들이 일제강점기 역사에 매우 관심을 가지기에 나름 깊이 있는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저 또한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아서 사회시간을 엄청 늘려가며 여러 가지 활동을 했는데요. 제가 후원하고 있는 곳이라고 하며 식민지역사박물관과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더니, 아이들도 후원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아직 신규 교사라서요, 혹시나 학부모님들이 싫어하실까, 제가 독자적으로 아이들에게 모금을 해도 될까 걱정되었지만, 학부모님들께 가정통신문을 보내 자유롭게 모금하려 한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아이들이 이름과 금액을 적지 않고 교실 뒤쪽의 모금함에 자유롭게 후원하였습니다. 혹시 돈이 필요해서 다시 가져가고 싶은 친구는 모금함에서 넣은 금액을 꺼내가도 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100원짜리를 넣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며칠 동안 계속 돈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왜 돈을 계속 가져 오냐고 물으니, “엄마가 좋은 일 하는 것 같다고 돈 더 내래요.” “삼촌도 참여하고 싶다고 대신 모금해 달래요.” “지난번 위안부 영상을 보고 돈을 더 내고 싶어졌어요.” “과자 안 사먹고 기부할래요.” 등 소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관이 형성됩니다. 그것은 평생동안 잘 변하지 않지요. 그렇기에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현장에서 역사는 ‘암기과목’으로 생각되고 학생들도 싫어하는 과목입니다. 살아있는 역사를 배우면 참 재미있는 과목인데 말이지요. 역사박물관에서 여러 교육활동들을 많이 만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연말에 아이들과
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이 풍진 세상(風塵世上) – 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
[자료소개]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소개하는 글은 <신천지>권2호(1947년2월) ‘거리의정보실’ 코너에 실린 고원섭(高元燮)의「이풍진세상(風塵世上)-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발췌)이다. 이 글은 해방된 지 2년 후인 1947년초 박흥식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다시 발호하고 모리배들이 서민들을 등치는 현실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현행 한글맞춤법에 따라 일부 철자를 수정했고, 검게 칠해진 인명은 각주를 달아 이름을 밝혔다. 필자인 고원섭은 일제 말기 친일잡지 <조광> 에국제정세를 비롯한 정치·사회분야의 글을 실어 일제의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강조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해방 후 <신천지>, <개벽>등의 잡지에 글을발표했으며,1949년에는 <반민자죄상기(反民者罪狀記)>를 저술했다. 요즘 해방이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생각할수록 머리만 어지럽다. 그래 “동해물과 백두산”을 부르고 태극기를 간혹 내걸고 하니 이것이 해방이란 말인가! 모두가 서글프기만 하다. 데시근(시들하거나 미적지근한) 해방 바람에 세상은 서글프고 달밤 술 취한 행인이 오줌을 누다가도 덧없이 울음이 터지게끔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딱한 일이요 기막힌 일이요 서글픈 일뿐이다. “일제 때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가슴이 멘다고 탄식하는 우국지사, 그래도 세상을 올바로 내다보는 우국지사가, 묻노니 이 땅에 얼마나 있는가! 일제시대의 연장인 듯 모든 친일파들이 활갯짓을 하며 호령하고 이 반면에 해방 후 오늘날도 여전히 애국투사는 거리에서 지하에서 기한(飢寒)에 떨며 방황하고 설익는 해방으로 뼈가 저리도록 고마운 덕을 보는 자들이 있으니 은행 창고를 제 집 창고 쓰듯 하며 외국인을 끼고 법망을 코웃음 치는 모리배들이요, 하나는 천하가 다 아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자유해방이다! 8·15 직후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