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사진첩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금강산 수난사
사진첩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금강산 수난사 친일귀족 민영휘 일가의 만폭동 바위글씨 여러 해 전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 관한 자료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그의 전기에서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한 장의 사진을 마주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다소 거만한 포즈를 취한 총독과 총독 부인이 등의자(藤椅子)로 만든 순여(筍輿, 대나무가마)에 나눠 타고 금강산 탐방에 오른 모습이 나란히 포착되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들의 비대한 몸집을 어깨와 팔뚝으로 지탱하며 서 있는 짚신 차림의 왜소한 조선인 가마꾼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애처로운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권세를 지닌 누구에게는 신선놀음과 같은 별천지의 세상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숨이 턱턱 막히는 험난한 계곡과 비탈면이 끝없이 이어진 고생길을 뜻하는 곳, 금강산(金剛山)은 바로 그러한 공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금강산 관광에 나선 사이토 총독과 총독 부인 예로부터 금강산은 무수한 금강예찬(金剛禮讚)을 쏟아내게 만들 정도로 계절마다 그 모습이 달라지는 절경으로 소문난 곳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관한 한 그 풍경에만 주목한다면 금강의 속살을 제대로 살펴보기가 그만큼 더 어렵게 되고 만다. 금강산을 세계적인 명산으로 떠들썩하게 부각시키고 이를 적극 홍보하려 했던 주체가 바로 조선총독부였다는 점은 새삼 강조하지 않더라도, 금강산의 수난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 또한 식민통치기와 고스란히 겹치니까 말이다.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신작로와 철도가 개설되고 탐승회(探勝會)라는 이름의 여행단이나 아니면 개인단위의 탐방객들로 대규모 인파들이 골짜기마다 밀려들게 되자 이곳에 생업의 기반을 마련한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다. 주로 음식점,
일제의 대륙침략과 조선인 강제동원의 연결 창구,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일제의 대륙침략과 조선인 강제동원의 연결 창구,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현해의 여왕’ 금강환(金剛丸)과 흥안환(興安丸) 홍보엽서, 1937년 지금부터 딱 11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1905년 1월 1일은 서울 영등포의 분기점에서 시작되어 저 멀리 부산 초량으로 이어지는 경부철도의 전 구간에 대한 운수영업이 개시된 날이다. 하필이면 러일전쟁의 와중에 일본군대에 의한 여순함락(旅順陷落)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이뤄진 경부선의 개통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는 <대한매일신보> 1904년 12월 20일자에 수록된 「한국에 일본세력」이란 제하의 기사 한 토막을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경부철도가 내년 1월 1일에 개회식을 행할 터인데 서울에서 부산에 가는 수레는 올라간다 하고 부산에서 서울에 오는 수레는 내려간다 한다는데 그것은 동경을 중심으로 삼는 연고라 하고 차세는 일본 돈으로 받게 하고 철로변에 지명은 다 일본말로 부르게한다 하며 일삭 전에 경인철로회사에서 일본시간을 쓰기로 작정하였으니 그 전보다 삼십 오 분이 잃게 되었는데 외국 사람들에게 이 말을 미리 통기하지 아니하여서 차 타러나아갔다가 낭패한 자도 있고 다른 불편한 일이 많이 있었다더라. 여길 보면 땅만 한국 땅이었지 철도운영의 주체는 말할 것도 없고 기차의 운행시각도 일본의 표준시에 맞춰 제멋대로 변경하는 등 이미 시간에 대한 주권조차 빼앗긴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부산을 향하는 기차를 일컬어 공공연하게 자기들 식으로 ‘올라간다’고 표현했다는 대목 역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일상용어로 정착되는 ‘동상(東上, 동경으로 가는 것)’이니 ‘귀선(歸鮮, 조선으로
남경대학살의 피비린내로 얼룩진 ‘무운장구’ 일장기
남경대학살의 피비린내로 얼룩진 ‘무운장구’ 일장기 침략전쟁의 경로를 적어놓은 지나사변 출동경력표, 1937~1938년 무자비하고 호전적인 일본군대의 잔학성을 얘기할 때마다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역사 사 건 하나가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이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으로 촉발된 중일전쟁(中日戰爭)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그해 12월에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南京)이 점령되었다. 이때 그들의 전쟁놀이감이 되어 전쟁포로뿐만이 아니라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한 무수한 중국인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재앙수준의 참변을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이라 말한다. 종전 직후 극동국제군사법정(極東國際軍事法廷)에서 조사된 내역에 따르면, 일본군에 살해당한 중국인들의 숫자가 무려 27만 7천 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 바 있다. 이 끔찍한 만행에 책임을 물어 남경점령 당시 일본군의 최고책임자였던 중지나방면군사령관(中支那方面軍司令官) 마츠이 이와네 대장(松井石根 大將)은 나중에 B급 전범으로 체포・처형되었다. 남경대학살의 책임 규명과 관련하여 사형판결을 받은 일본군 지휘관이 한 사람 더 있었는데, 중일전쟁 당시 일본육군 보병 제6사단장을 지낸 타니 히사오 중장(谷壽夫 中將)이 바로 그다. 흥미롭게도 이 이름은 우리 연구소의 소장유물인 한 장의 빛바랜 일장기(日章旗) 속에서 만날 수 있다. 가운데 히노마루(日の丸, 붉은 원) 안에는 기(祈)라고 쓰고, 호신용 부적과 같은 의미로 네 귀퉁이에 한 글자씩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쓴 이 일장기의 소장자는 보병군조(步兵軍曹; 지금의 중사에 해당하는 계급) 후지모토 쇼조(藤元正三)이다. 그리고 그의 소속은 ‘稻葉部隊(舊谷部隊) 佐野部隊(岡本「鎭」部隊) 松崎隊(河喜多隊) 肥後隊’라고 표시되어 있다. 알기 쉽게 몇 사단, 몇 연대, 몇 대대 …… 이런 식으로 소속편제를 직접 표시하지 않고 지휘관의 명자(名字, 성)만 따서 무슨무슨 부대라고 부르는 것은 전쟁
군국주의에 짓밟힌 조선인 여학생들의 꿈 –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 졸업앨범, 1944년
군국주의에 짓밟힌 조선인 여학생들의 꿈 –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 졸업앨범, 1944년 이번 달에 소개할 소장자료는 부산에 있는 경남여자고등학교의 전신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釜山港公立高等女學校) 졸업앨범이다. 표지에는 ‘추상(追想), 2604’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 나타난 숫자는 ‘황기2604년(皇紀;초대 천황이 즉위한 기원전 660년을 기점으로 계산)’을 일컫는 것으로 서기로 바꾸면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에 해당한다. 이 학교는 원래 1927년 4월에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부산여고보’로 줄임)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으나, 1938년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개정에 따라 고등여학교로 편제되었다. 그 전까지는 국어(國語), 즉 일본어를 상용(常用)하느냐 아니냐의 구분에 따라 조선인은 보통학교(6년), 고등보통학교(5년), 여자고등보통학교(5년 또는 4년)에 다녔으나, 제3차 교육령에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명분으로 내세워 일본인과 조선인 구분 없이 일본인 학교처럼 모두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로 이름을 바꿔달도록 했다. 따라서 이름을 고등여학교로 바꾸자니 이미 부산에는 일본인 학교였던 부산고등여학교가 있었으므로 이를 피하다보니 ‘부산항고등여학교’라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명칭이 탄생한 것이다. 가령 서울에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가 경성제일중학교가 아닌 ‘경기중학교’로, 경성제이공립고등보통학교가 ‘경복중학교’로,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가 경성고등여학교가 아닌 ‘경기고등여학교’로 각각 엉뚱한 이름을 갖게 된 연유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었다. 표지를 넘겨 본문으로 들어가면 첫머리에 봉안전(奉安殿)과 대마전(大麻殿, 대마봉사전) 사진이 먼저 눈에 띈다. 봉안전은 교육칙어나 ‘천황’의 ‘어진영(御眞影, 사진)’을 받들어 모시도록 했던 공간이며, 대마전은 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발급하는 부적인 대마를 보관하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의 학교라면 대개 이런 시설물을 갖춰놓고 학생들에게 일상적인 참배를 강요하곤 했다. 사진 아래에 팔굉일우(八紘一宇 ; 온 세상이 하나의 집이라는 뜻)라고 새긴 비석의 모습도 보이는데, 이것은 황기 2600년을 맞이하여 강원신궁건국봉사대(橿原神宮建國奉仕隊)에
경성신사의 이토 시비 탁본 – 침략 원흉이 남긴 ‘녹천정(綠泉亭)’ 칠언절구
경성신사의 이토 시비 탁본 – 침략 원흉이 남긴 ‘녹천정(綠泉亭)’ 칠언절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통감에서 물러나 추밀원 의장으로 영전한 것은 1909년 6월 14일이었다. 그의 자리는 1907년 10월 이래로 부통감(副統監)으로 있던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가 물려받았다. 통감교체에 따른 사무인계와 고별인사를 위해 일본에 있던 이토가 서울로 들어온 것은 그 다음 달인 7월 5일인데, 며칠 후 덕수궁 함녕전에서는 태황제의 자리로 물러난 고종황제가 베푸는 송별연이 열리게 되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고종황 제가 인(人), 신(新), 춘(春)의 석 자를 운(韻)으로 내려 시를 지어볼 것을 권하자 송별잔치는 느닷없이 시회(詩會)로 바뀌었다. 그 결과 이토와 이완용, 소네 등이 가세하여 다음과 같은 합작시가 탄생하였다. 甘雨初來霑萬人 단비가 처음 내려 만 사람을 적셔주니 [이토 히로부미 ; 춘묘(春畝)] 咸寧殿上露華新 함녕전 위에 이슬빛이 새롭구나 [모리 타이라이 ; 괴남(槐南)] 扶桑槿域何論態 부상과 근역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 [소네 아라스케 ; 서호(西湖)] 兩地一家天下春 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 [이완용 ; 일당(一堂)] 위의 구절에 나오는 부상(扶桑, 후소)은 일본을 가리키는 말이고, 근역(槿域)은 알다시피 한국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겉으로는 한일간 선린우호의 뜻을 내세우고 있는 듯하지만, “두 나라가 하나”라는 구절을 버젓이 읊조린다는 것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토가 한국 땅에서 물러나면서 남긴 시문으로는 이 합작시말고도 제법 유명한 칠언절구(七言絶句)가 하나 더 있었다. 이름 하여 ‘녹천정(綠泉亭)의 자작시’가 그것이었다. 南山脚下綠泉亭 남산 발 아래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
시민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 연구소는 3만여 점에 이르는 근현대사 실물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식민지시기 문헌과 유물 보유에 있어 국내외를 통틀어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간 단속적으로 게재되던 소장자료소개를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자료”라는 이름으로 연재하기로 한다. 이번 기획의 목적은 희귀자료를 중심으로 해설을 실어 회원들이 근현대사의 구체적 실상을 생생하게 접하도록 하고 더불어 시민역사관 건립과 자료기증의 필요성을 널리 알려나가는 데 있다. – 엮은이 하늘에서 본 일제강점기 용산 일대 전경 – 식민지배와 대륙침략의 교두보 첫번째로 소개하는 자료는 <사단대항연습기념사진첩>(1930)에 들어있는 ‘경성 및 용산 전경’이라는 제목의 항공사진이다. 최근 연구소로 용산에 관련된 자료 문의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용산미군기지 반환에 따른 공원화계획이 추진되고 있어 이 지역의 공간 변천사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자료는 2013년 서울시에서 개최한 ‘용산공원’ 사진전에 출품되었고, 이어 올해 전쟁기념관에서도 전시하고 있는 등 여러 기관에서 대여요청이 이어질 만큼 주목을 받고있는 자료의 하나이다. 사단대항연습(師團對抗演習)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상주했던 2개 사단 규모의 일본군이 처음으로 전병력을 총동원하여 경기도 남부 일대에서 벌인 대규모 군사훈련을 말한다. 1930년 10월 9일부터 5일간에 걸쳐 진행된 이 사단대항연습에는 제19사단과 제20사단은 물론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전차대와 전신대 등을 더하여 3만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참가하였다. 마지막 날인 10월 13일에는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용산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거행하여 그들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꽃 배달을 통한 독립운동 – <착한콜> 정한섭 대표(부산지부 회원)
우리는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꽃을 보낸다. 급한 서류나 물건을 보내고 받을 때 퀵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하고 늦은 밤 안전을 위하여 종종 대리운전을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소비를 할 때 내가 지불한 금액의 일정 금액이 자동으로 좋은 단체에 기부된다면 어떨까? 평소에 마음은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후원하지 못했던 마음에 위안이 될 듯하다. 이른바 ‘착한 소비’다. ‘기부금 확산을 위한 착한 소비, 마음까지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모토로 150여 개 단체에 기부하고 있는 〈착한콜〉의 정한섭 대표와 연구소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스마트폰 앱, 웹사이트, 전화를 통해 꽃배달, 퀵서비스, 대리운전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착한콜〉은 이용금액의 5%를 고객이 원하는 단체를 직접 지정하여 기부할 수 있고 고객이 지정 하지 않는 경우에는 〈착한콜〉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기부한다. 〈착한콜〉은 연구소와 2017년 1월에 협약을 맺었으며 작년 한 해 동안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약 960만 원을 기부했다. ‘촛불혁명’이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과 함께 ‘세계 3대 혁명’이라고 생각한다는 여대생 쌍둥이 아빠, 정한섭 회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문 : 연구소에 회원가입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답 : 대학시절 역사연구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부 문화에 관심이 생겨서 직접 기부를 시작했고 결국 사업도 하고 기부문화 확산에도 기여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창업 초기에 일부 이용객이 연구소에 기부해 달라고 해서 처음에는 2~3만 원을 기부했는데 연구소로부터 “고맙다”는 전화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제5차 아산 유해발굴을 지원하며
4년 전 낯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산시 조 아무개 시의원의 소개로 전화하게 됐다며 자신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아산 유족회장이라고 밝힌 뒤 유해발굴의 어려움을 말하며 아산지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내용을 알기에 도와드리겠다고는 했지만 정작 아산지회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민간인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툼’을 공동체에서 상영한 것,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충남 합동추모제에 참석한 것, 홍성유해발굴에 몇 번 참석, 한국전쟁기 아산지역 학살지를 유족과 증언해 주실 분을 모셔다 다시 확인하고 증언들을 추가로 수집한 것 등이 전부다. 그러던 중 아산지역 유해발굴에 필요한 조례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성, 진주에 이어서 마침내 이곳 아산에 지자체로는 처음으로 시의 예산을 지원 받아 배방읍 폐금광 학살지를 발굴하기로 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발굴공동조사단으로부터 유해발굴계획을 듣고 아산대책위를 별도로 구성하고 우리 연구소 아산지회가 적극 지원하기로 하고 유해발굴작업에 들어갔다. 2017년 11월 16일 많은 시민들이 함께하는 가운데 제를 올린 뒤 시굴의 첫 삽을 떴다. 첫 삽을 뜬 이곳은 그때 당시 어린 나이지만 학살현장을 직접 목격한 자리라고 증언하는 곳이기에 당연히 유해가 나오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느 평범한 노인의 무덤이었다. 당시를 증언해주시던 분들은 그때 너무 어렸고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을 틀렸을지 모른다는 말씀이 전부였다 뭔가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모두가 불안해하며 여기저기 산을 파고 뒤지다가 3일을 모두 보내고 말았다.
망국의 수난 그 피해자 안점순님 이승을 떠나시다
망국의 수난 그 피해자 안점순님 이승을 떠나시다 북상한다는 벚꽃은 오는 길이 더디지만 그래도 개나리는 노랑 치맛자락으로 기찻길 치렁치렁 치장하였네 아직은 이른 봄날 3월 30일 서둘러 떠나시는 님 붙잡지 못하는 우리 서러운 봄날입니다. 언젠가는 헤어짐이 필연이라지만 끝까지 풀지 못한 매듭이 있어 떠나고 보냄은 너무 아쉬운 작별입니다. “가해자 전범국 일본은 나에게 잘못했다 말하라” 이승을 지키는 우리가 님을 기억하고 풀겠습니다. 편하게 가시고 편안하게 쉬세요. 일본제국 침략전쟁범죄 일본군 강제연행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피해자 안점순, 나라 없는 백성이라 납치와 강제연행, 감금과 폭행으로 목숨보다 소중한 정절을 짓밟히어 여성의 순결을 상실하고 인간의 존엄까지 박살났네 망국의 수난사를 온몸에다 새기고 천신만고 찾아오니 그리던 살붙이도 손사래치고 정다운 이웃들도 외면했네 전사는 죽어도 훈장이라도 남지만 살아 돌아온 ‘위안부’는 손가락질 따돌림이라 끌려가고 짓밟히고 버려지고 외면해도 죽지 못해 사는 질긴 목숨은 웬수보다 더 미운 네 팔자였네 아―! 누가 나보다 더 서러운 사람 있겠는가! 그토록 힘든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내신 안점순 님의 숭고한 삶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리는 일은 이승을 지키는 우리들이 할 일입니다. 정직한 과거청산 정의로운 역사화해를 위하여 한일양국은 뗄 수 없는 가까운 이웃이다. 한일양국의 선린우호는 서로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일본제국이 멀지 않은 과거에 불의한 침략전쟁을 벌여 이웃나라에 고통을 주었던 전범국가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범국 일본은 피침략국이 당한 수난과 고통, 상처와
2018년 04월 기증자료
심정섭 지도위원 제64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100점 보내와 4월 3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4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박OO의 교육공무원자격증, 이수증, 이력서, 호적부 등 개인 생활사를 알 수 있는 자료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기증 잇달아 기타무라 메구미 씨, 제6차 일본 교류관계의 소장자료 전달 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교류단체와 개인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3월 6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 대참해 실황엽서, 조선총독부철도국에서 발행한 조선의 이야기, 윤봉길 총살의 기사가 실린 『호치신문』(1932.12.20) 등 총 52점이다. 재일동포의 삶이 묻어 있는 자료 다량 기증 • 3월 20일 재일교포 박정화 씨가 소장자료를 기증하였는데, 4월 9일 직접 연구소를 방문하여 자료를 보며 재일동포로 살아온 삶의 흔적을 설명하였다. 박정화 씨는 1938년 충남 영동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후쿠시마 조반(常磐)탄광으로 강제징용되면서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기증자료는 후쿠시마 생활 당시 학교 관련 문서와 앨범 등 재일동포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 3월 20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해 다카하시 카즈히코 씨가 청일전쟁 다색판화 2점, 「일본만세(日本萬歲) 백찬백소(百撰百笑)」(청일전쟁기 풍자화선집) 1점 등 총 3점을 기증했다. • 3월 20일 즈시 미노루 씨가 긴조 미노루(오키나와의 평화운동가) 씨의 작품 ‘나한(羅漢)’(1994)과 오우라 노부유키(일본 미술가) 씨가 쇼와천황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제작한 14부작 판화 ‘원근을 품고’(1982~85년) 중 한 작품 등 총 2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