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 시작
연구소가 제작하는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이하 역적 시즌2)가 12월 18일 시작했다. 촛불혁명 이후 역사적폐의 시대적 소명을 담아 제작된 시즌1은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지지를 받아 애플 팟캐스트에서 발표된, 2017년 새로 출시된 최다 다운로드 팟캐스트 20위 안에 드는 쾌거를 이뤘다. 시즌2는 매회 1, 2부로 구성된다. 1부는 역사적폐의 근원적인 뿌리를 되돌아보는 지난 100년의 한국 근현대사를 다룰 예정이다. 100년이란 긴 시대를 다루는 만큼 1년 동안 진행하는 장기프로젝트로 기획했고,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과 MC노가 호흡을 맞춘다. 박 실장은 역사 사실의 전달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이슈와 연결고리를 찾아 설명함으로써 시청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계획이다. 1~2월 방송에서는 19세기말 내우외환의 조선사회가 반봉건 반외세의 과제를 어떻게 풀어갔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2부는 연구소의 초기부터 현재까지 전개된 주요 활동을 전달하는 내용으로 방학진 기획실장과 연구소 회원인 김광진 전 국회의원이 공동으로 진행한다. 또한 매주 주제에 맞게 이야기 손님이 초대하는데 첫 회에는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 선생을 모시고 효창원과 역사적폐청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인 김정륙 선생, 석주 이상룡의 증손자인 이항증 선생 등을 모시고 반민특위와 임청각의 뒷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역적 시즌2는 많은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미디어협동조합인 국민TV와 공동으로 제작하여 기존 오디오방송뿐 아니라 영상방송으로 채널을 확장하였다. 오디오방송은 팟캐스트 전문채널인 팟빵과 아이튠즈를 통해서 들을 수 있으며
육사, 독립군·광복군에서 뿌리 찾기 시작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상임대표 윤경로)는 창립 때부터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를 신흥무관학교–한국광복군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2011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기념식을 육사에서 열기 위해 육사(당시 교장 이봉원 중장) 측에 공문을 보냈으나 협조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매년 기념식을 외부에서 열고 있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인 9월 29일 김완태 중장이 새로 육사 교장에 임명되자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는 육사 교장 면담을 신청하여 11월 9일 윤경로 상임대표를 비롯해 이항증·황원섭 공동대표, 이준식 기획위원장, 김재운 기획팀장, 김올가(김경천 장군 후손), 방학진 사무국장 등이 육사 교장과 보직자들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기념사업회 대표단은 육사가 1946년 5월 개교한 국방경비대사관학교를 모체로 내세우면서 독립군 역사 계승에 소극적이었음을 지적했다. 이에 김완태 교장은 흔쾌히 본인 임기 중에 반드시 육사의 정통성이 독립군에 있음을 명확히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후 12월 11일 육사 충무관 강당에서 ‘육군 역사 재조명을 위한 특별학술회의 –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가 열렸다. 그동안 관련 시민단체와 학계를 중심으로 군의 기원을 독립군·광복군에서 찾는 내용의 세미나 등을 개최했으나, 육사가 직접 이 같은 토론의 장을 마련한 것은 처음이다. 김완태 교장은 환영사에서 “현재 군이 일제강점기에 독립군과 광복군이 수행한 독립전쟁을 국군의 역사와 연계 및 편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육사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독립군과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신흥무관학교와 무장독립투쟁’ ‘독립군·광복군과 육군의 기원’ ‘육사의 효시에 대한 연구’
일본공사관원의 눈에 비친 근대 조선의 모습, 『조선국진경』
돈의문(敦義門)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꺾으면 오른쪽에 이태호(怡泰號)의 각색점(各色店)이 있고 남쪽으로 붙어서 러시아 건축사 사바친 씨의 우소(寓所)이며 이어서 법국이사관(法國理事官)의 공서(公署)가 된다. 왼쪽에 아라사와 미국 양국의 공사관이 있으며 또한 좌우로 미합중국 전도사 여러 사람의 거택, 부인병원(婦人病院), 여학교 및 육영공원(育英公院) 등이 이곳에 있는데, 모두 합중국 전도사의 감독에 관계된다. 독일상(獨逸商) 세창양행(世昌洋行)의 지점과 아울러 경성구락부(京城俱樂部)도 역시 이곳에 있다. 미공사관의 남린(南隣)은 총세무사서(總稅務司署)이며, 그 안쪽에 영국총영사관이 있다. 거기에 상림원(上林苑)의 뒤편 작은 언덕에서 시가를 내려 보면 조망이 아름답다. 독일제국영사관은 왕성(王城)의 동방 안동(安洞)에 있으며 우리 공관(일본공사관을 말함)의 정북면에 해당한다. 이것은 1891년에 발행된 『조선안내(朝鮮案內)』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제 막 서양인들로 넘쳐나기 시작한 정동 일대의 거리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각국 공사관의 위치는 물론이고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던 보구여관(普救女館)이나 근대식 공립학교의 효시로 일컫는 육영공원 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남긴 이는 일본공사관의 관원이던 하야시 부이치(林武一, 1858~1892)로, 이 책 말고도 『조선국진경(朝鮮國眞景)』이라는 사진첩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해군소주계(海軍少主計, 경리장교) 출신으로 1888년 7월 교제관시보(交際官試補)로 서임되는 동시에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에 발령받아 그해 8월부터 1891년 10월까지 서울에서 근무한 인물이었다. 그 후 3년 만기 근무의 대가로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가 1892년 1월에 재차 임시파견의 명을 받아 조선 각도의 순시를 마치고 돌아가던 차에 그가 승선한 이즈모마루(出雲丸)가 그해 4월 5일 전라남도 소안도 앞바다에서 좌초되는 바람에 사망했다. 이에 일찍이 사진기술을 익힌
포방터시장으로 남은 홍제외리 조선보병대 사격장의 흔적
서울 서쪽 무악재 고개 너머에 있는 홍제원(弘濟院)은 조선시대에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 진휼(賑恤)하는 곳인 동시에 서울을 오가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거나 전송할 때 주로 사용된 공간이었다. 지금의 홍제동은 의당 이 홍제원에서 파생된 지명이다. 옛 지명자료를 살펴봤더니 홍제천 곧 ‘모래내’를 사이에 두고 홍제원내동(弘濟院內洞)과 홍제원외동(弘濟院外洞)이 나란히 등장한다. 이 동네들은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뤄질 때 고양군 은평면에 속한 ‘홍제내리(弘濟內里)’와 ‘홍제외리(弘濟外里)’가 되는데, 이 가운데 홍제내리는 다시 1936년에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홍제외리의 홍제천 이남 구역과 합쳐 홍제정(弘濟町)으로 전환된다. 홍제외리의 경우에는 해방 이후 1949년 8월에 이르러 은평면 일대가 서울시로 일괄 편입됨에 따라 1950년 3월 15일에 ‘홍은동(弘恩洞, 홍제외리와 은평면의 앞 글자를 따서 조합한 지명)’으로 동명이 개정되었다. 원래 홍은동이라고 하면 하천변을 따라 황량한 산비탈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이곳에 집단이주촌이 건설되면서 동네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1930년대 중반 서울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토막민(土幕民, 움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대거 변두리 지역으로 이주시키면서 새로운 주거단지가 형성되었는데, 홍제외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동아일보>1936년 8월 2일자에 수록된 「밀려난토막민(土幕民)순방기(巡訪記)(2)이름은좋다 환희촌(歡喜村), 서부 홍제외리 새 두옥촌(斗屋村)」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변화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그려놓고 있다. (전략) 주택지로서는 인연이 먼 이 험한 돌산, 영양도 부족한 이 여윈 토막민들의 피땀을 얼마나 흘리게 하고 있는가? 국유림을 토막민 구제라는 미영 아래 불하한 경성부(京城府)는 그의 경영관리를 일개 사회사업단체에 일임한 채 오불상관.
[기고] 민족문제연구소 미주 3대 지부 결성 방문기
11월 9일(목) 워싱턴을 향해 지난 11월 9일 임헌영 소장님을 모시고 인천공항 오전 10시 15분발 워싱턴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미국의 워싱턴, 뉴욕, LA에 민족문제연구소 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8박 9일의 긴 출장에 오른 것입니다. 워싱턴까지는 무려 13시간 40분. 비행시간이 긴만큼 기대는 높아졌습니다.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IAD)에 도착하니 시차 때문에 여전히 9일 아침 9시 50분입니다(이후 일자 시간은 현지 기준). 주희영 회원과 박현숙 님(워싱턴문인회 회장)이 공항에 마중 나와 주셨습니다. 인사 후 바로 숙소로 향했습니다. 숙소는 워싱턴 교외인 알링톤(Arlington)의 가정집입니다. 이번 워싱턴 지부 결성에 핵심 역할을 해주신 윤흥로 민주평통 워싱턴지회장님 댁입니다. 이미 한국에서 뵈었던 터인데다가 유머도 있으신 분이라 내 집 같이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짐을 풀고 잠시 쉰 후 ‘설악가든’이라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점심식사를 겸해서 중앙일보 워싱턴지국, 한국일보 워싱턴지국, 기쁜소리방송 등 현지 한인 언론과 합동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앙일보 워싱턴지국 기자들은 한국 본사와 달리 진보적인 분들입니다. 출국하기 전 제가 보낸 원고도 그대로 실어주었습니다. 다만 양면 통광고로 이승만·박정희 유료광고가 같이 실린 건 유감이지만 말입니다. 소장님이 쓰신 원고도 한국일보 워싱턴판에 실렸고요. 이 글들이 실리자마자 워싱턴에 도착해 또 한 차례 심층인터뷰를 진행한 겁니다. 시작이 좋습니다. 윤흥로, 정석구, 주희영, 김미현 등 곧 조직될 워싱턴지부 핵심 회원들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은 주로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소개, 친일인명사전, 식민지역사박물관, 워싱턴지부 결성의 의미와 앞으로의 활동계획 등이었습니다. 소장님이
깜짝 놀랄 식목일의 기원-‘병합의 대업을 영구히 기리고자’ 제정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자료 8] 시민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 연구소는 3만여 점에 이르는 근현대사 실물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식민지시기 문헌과 유물 보유에 있어 국내외를 통틀어 시민역사관으로서는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간 단속적으로 게재되던 소장자료 소개를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자료”라는 이름으로 연재하기로 한다. – 엮은이 깜짝 놀랄 식목일의 기원-‘병합의 대업을 영구히 기리고자’ 제정 <애뉴얼 리포트>에 수록된 ‘기념식수일’ 홍보사진 우리에게 ‘4월은 잔인한 달’이면서도 한편 자랑스럽게 다가오는 이미지도 함께 지니다. 해마다 4월이라고 하면 소소하게는 만우절(萬愚節)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4월혁명, 제주 4.3항쟁, 상해임시정부수립은 물론 이제는 세월호 참사까지 포함하여 이를 기억하고 크게 기념해야 하는 날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공휴일로 지정된 날이 전혀 없는 달이 4월이다. 한때는 식목일(植木日)이 그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했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마저도 2006년 이래 공휴일에서 제외되어 버렸다. 그런데 ‘4월의 공휴일’ 식목일의 기원이 뜻밖이다. 일제강점기에 4월은 각급 학교의 신학기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지금처럼 3월에 학기가 시작되는 식으로 제도가 바뀐 것은 1962년이다. 그에 앞서 미군정기에 9월 신학기제도가 잠깐 채택된 때를 제외하고는 대한제국 시절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까지 줄곧 4월 1일이 1학기의 출발점이었다. 일제시기에는 개학과 더불어 이틀이 지나면 이른바 ‘신무천황제(神武天皇祭, 4월 3일)’라는 이름의 휴일이 이어졌다. 이날은 이를테면 일본 초대 천황의 제삿날로, 그의 즉위일은 기원절(紀元節, 2월 11일)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지금도 경축일로 기리고 있다. 일제패망기 얘기이지만, 1938년
최초의 신소설 <혈의누> 작가 이인직 (2)
계몽운동과 신소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인직은 일본육군성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제1군 사령부에 배속되며, 1905년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80원의 사금(賜金)을 받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이미 일본제국주의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그였기에 가능했던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가 러일전쟁의 성격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 위한 전쟁,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국 강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결정적 계기부터 기여했다는 것은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호의가 곧바로 직접적인 매국행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 등을 계기로 일제로부터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문학에 있어서도 계몽주의 문학이 전개됩니다. 한국의 계몽주의 문학은 갑오개혁 이후의 창가나 신소설 등을 말하는데 이인직이 쓴 <혈의누>가 신소설로는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계몽주의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어찌 보면 계몽운동이 일어나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차이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어 18세기를 풍미합니다. 계몽주의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단어인 ‘enlightenment, Aufklärung, lumières’에 볼 수 있듯이 서구의 계몽주의는 빛(light)과 관련된 말로 표현됩니다. 그 빛의 연원은 성경에서 출발합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가 그것입니다. 즉 빛은 그것이 생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카오스(chaos)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cosmos)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기증자료] 심정섭 지도위원 제60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10월 25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0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발행한 우편저금통장, 보험증서가 주를 이룬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을 통한 자료 기증 잇달아 10월 19일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의 히구치 유이치 공동대표가 연구소를 방문하여 1950~60년대 소책자와 『民族時報』등 총 18점을기증했다.아울러11월 14일 우편으로 소장자료 5박스를 기증했는데, 주로 일본의 과거사 청산운동과 인권운동에 관한 자료로 전단, 포스터, 뉴스레터, 전단지 자료 등이다. 기타무라 메구미 씨, 제5차 일본 교류관계의 소장자료 전달 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이번에도 교류단체와 개인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11월 20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1941년 태평양전쟁 등 관련 기사가 실린 일본의 주요 신문(나고야, 마이니치, 아사히, 서부마이니치 신문) 등 총 33점이다. 또한 지난 9월 26일에는 우편으로 소장자료 2점을 기증했다. 이준 열사의 외증손 조근송 선생이 1961년 재건운동본부 관련 자료 3점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추모글] 연구소 구원투수, 한상범 교수님
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상범 교수님이 지난 10월 15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교수님은 2001년 2월부터 2003년 9월까지 연구소 2대 소장을 지내셨으며 2002년 4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공식적인 대외활동은 거의 못하셨다. 그 이유는 갑자기 찾아온 병마 때문이었다.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의 주저함이 없으셨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본질을 꿰뚫어 설명하셨던 교수님, 실천하지 않고 현학적인 수사만 늘어놓는 지식 장사꾼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시던 교수님을 더 이상 뵙지 못함이 안타깝다. 연구소 소장님으로 2년 남짓 모셨던 인연으로 몇 가지 교수님과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1991년 창립부터 10년 동안 봉사해온 김봉우 초대 소장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갑자기 소장 직을 그만둔 후 후임 소장 물색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조문기 이사장님께서 신의 한 수처럼 모셔 온 분이 바로 한상범 동국대 법대 교수님이었다. 연구소로서는 천군만마요 야구로 치면 믿을만한 구원투수의 등판이었다. 왜냐하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법학계에서 한교수님만큼 친일청산의 중요성을 역설한 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한국법학계를지배한일본법학의유산>을 발표해 법학계의 일제잔재청산을 공개적으로 문제화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의 법문화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일제잔재 무엇이 문제인가>등 제목만보면연구소가 펴낸책 이라고해도 믿을정도로 한교수님은 친일청산문제에 남다른 관심과 대안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게다가 <박정희, 역사법정에세우다><전두환체제의 나팔수들>에서 볼수 있듯이 독재와 불의에 대해서는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분이었다. 그야말로 준비된 구원투수의 등장이 아닐 수 없었다. 연구소 소장 재임 시절
[추모사] ‘민족음악의 수호자’ 노동은 선생을 기리며
분단시대 민족음악의 스승이셨던 노동은 교수님! 선생님께서 2016년 12월 2일 국민적인 애도 속에 우리 곁을 떠나실 무렵,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은 촛불시민혁명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촛불은 마치 선생님께서 일생 동안 민족음악의 역사적 실현이란 과업을 이룩하고자 노심초사하시던 열망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민족적인 소망은 결실을 맺고 전기를 맞이하였으나, 선생님은 그 국민적인 승리의 합창을 듣지 못한 채 기어이 소천하시고 말았습니다. 민주화의 깃발 아래서 보다 자유롭고 넉넉하게 선생님께서 탐구해 오셨던 민족음악의 세계를 구축하실 수 있게 된 새로운 세상을 향유하시지 못한 채 떠나버린 선생님이시기에 저희들은 더더욱 안타깝습니다. 민족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혼신을 다하셨던 노동은 교수님이시여! 선생님은 일찍이 음악이란 “인간을 위한 인간의 조직화된 소리”라고 정의하여, 음악을 전문 음악인의 전유물에서 모든 인간이 함께 즐겨 듣고 감동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풀이해 주었습니다. “음악은 국경이 없다”며, 베토벤이 너무나도 좋아 그의 머리를 흉내 내려고 미장원엘 다녔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좋아하던 베토벤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예술을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하여 사용하겠다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내적인 만족감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보상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국경이 없이 모든 ‘고통 받는 인간들’을 위로하고자 음악활동을 했다는 베토벤의 예술적 투지는 바로 노동은 선생님의 예술적 투혼이기도 합니다. 국경이 없다는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굳이 민족음악을 강조하시며 일생을 민족음악의 구축에 심혈을 기울인 까닭은 바로 고통 받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