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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남영동(南營洞)이라는 고약한 지명을 남기고 사라진 용산연병장

2017년 7월 28일 4588

13일 용산연병장의 본사 주최 자전거경주회장은 오전부터 남녀노소가 답지하여 수십 대의 전차는 서로 연하여 운전을 하나 오히려 올라탈 여가 없어 도보 혹은 인력거로 나오는 사람이 남대문에서 연병장까지 발자취를 서로 연함으로 운동장 부근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다지 넓은 대경주장 주위에는 송곳 세울 틈도 없이 사람이 열 겹, 스무 겹씩 둘렀고 산비탈 언덕 아래에도 사람으로 가리워 오후 2시경에는 십만 인 이상으로 계수할 지경이라. …… 그 다음에는 전조선 제일류(第一流)의 대경주를 개시하였는데 선수는 내지인(內地人) 네 명, 조선인 엄복동 황수복의 두 명이라. 용맹 활발한 여러 선수는 평생의 용맹을 다하여 명예 있는 일등을 다투는데 활동사진은 기념으로 사진을 백이며 십만 관객이 박수 응원하는 가운데 엄복동과 황수복은 항상 다른 선수보다 앞서서 나가다가 다른 선수와 좇아옴을 보고 더욱 용맹을 내여 넓은 경주장을 겨우 이십이 분에 스무 번을 돌아 우리가 애독자 제군과 기다리고 바라던 전조선대경주회의 명예 있는 일등은 마침내 엄복동에게 떨어지고 황수복도 삼등을 점령하여(하략) 이 기사는 <매일신보> 1913년 4월 15일자에 수록된 것으로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구전가요의 구절로 유명한 자전거대왕 엄복동(嚴福童, 1892~1952)이 처음 자신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공동주최한 ‘전조선자전거대경주회(全朝鮮自轉車大競走會)’는 인천, 경성, 부산, 평양의 네 곳에서 3주간에 걸쳐 연속 경기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엄복동이 자전거를 탄 장소가 ‘용산연병장(龍山練兵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타무라 메구미씨, 제3차 일본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 전달

2017년 7월 28일 1376

기타무라 메구미씨, 제3차 일본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 전달 일본에서 수화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무라 메구미 회원이 교류하고 있는 청각장애우들의 소장자료를 전달받아 5월 29일 연구소에 기증했다. 이번에전달한 기증자료는 도서, 엽서, 박물류이고 기타무라 메구미씨도 <日鮮同祖論>(1943) 등 소장 도서 2권을 기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메구미 씨는 역사관 홍보용 사탕을 제작하여 일본인을 상대로 홍보활동을 펼치고 있다.   심정섭 지도위원 자료기증(54, 55차) 도서류, 문서류 총 100점 보내와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은 4월 26일과 5월 23일 각각 54번째와 55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조선총독부체신국에서 발행한 보험증서, 보험료영수장와 해방 후에 발행된 생활통 지표, 저축예금통장 등 문서류와 도서들이다. 특히 1938년에 비안(比安)공립 심상소학교에서 발행한 「학교가정통신부」에는 학업성적과 학교 출석상황 및 신체검진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학생들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독립운동가인가, 변절자인가

2017년 7월 28일 6419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애국지사와 순국선열을 기리는 독립유공자 선정에 필수적인 자료는 매우 많다. 특히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포상을 위해 후손들의 신청을 받거나 자체 조사로 발굴할 때 독립운동 행적의 근거로 삼는 주요 문헌 중 이 글의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는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통칭’ 문일민의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그리고 ‘통칭’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를 꼽을 수 있다. 이 중 김승학과 관련한 <한국독립사>의 발간에는 우여곡절이 있어서 현재까지 1965년 9월 초판발행본(독립문화사), 1970년 6월 상·하 두 권의 증보발행본(독립문화사), 1983년 3월 단행본으로 합친 증보발행본(독립동지회) 총 3종의 『한국독립사』가 존재한다. 다만 김승학(1881∼1964)은 『한국독립사』발간을 준비하던 1964년 12월 별세해 초판본(발행인 김국보)과 상·하권 증보본 발행 당시에는 편저자(증보편집 겸 발행인 김국보)로, 세번째 증보본은 김승학·김국보 공편저자로 발간되었다. 김국보가 1983년 증보발행본의 「발간사」에 밝혔듯이, 희산 김승학은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참여 시기부터 독립운동의 역사를 남기겠다는 뜻을 품었으며 해방 후 귀국해 40여 년에 걸친 자신의 독립운동 외에도 오랫동안 수집·보관한 자료를 토대로 문일민(1894∼1968)을 발행인으로 <한국독립운동사>를 발간했다(위에서 ‘통칭’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고 국가보훈처나 관련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문일민의 <한국독립운동사>,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계획했던 것과 다른 점이 있어서 김승학 자신이 다시 집필하던 중 별세했고 유지를 이어 유족들이 김국보 등과 함께 작업해 1965년 초판본이 발간될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의 경우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는 1970년 발간된 상·하 두 권의 증보본(독립문화사)을 활용하고 있다. 뜬금없이

[기고] 연극 〈국부〉와 박정희 우상타파

2017년 7월 28일 1599

6월 10일부터 18일까지 박정희 신화를 소재로 한 연극 〈국부〉가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2017 시즌 프로그램으로 공연되었다. 연극 〈노란봉투〉의 전일철이 연출한 공동창작 작품으로 같은 소재로 작년에 올려진 〈해야된다〉의 후속작인 셈이다(극단 돌파구). 〈해야된다〉는 “하면 된다”는 박정희 시절 구호를 비튼 것으로 최근 검열과 블랙리스트사태에 대한 연극인들의 답변인 ‘권리장전2016_검열각하’ 프로젝트(6월~10월 대학로 연우소극장)의 참여작이기도 하다. 이 연작들은 작년 구미시가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기획한 28억짜리 뮤지컬이 계기가 되었다. 이 기획은 논란 끝에 취소되었고 이제 역설적으로 전일철의 〈국부〉가 무대를 채운 것이다. 연극 〈국부〉의 포스터에는 북한 출신 작가 선무(線無, 휴전선은 없다)의 〈청소〉가 사용되었다. 하녀가 줄지어 걸린 액자들을 열심히 닦는 것처럼 무대 가득 액자의 틀이 설치되었다. 이 프레임 위를 배우들이 종횡하며 걸터앉기도 하면서 박정희로 상징되는 우상을 둘러싼 만화경이 펼쳐진다. 연극은 크게 3장으로 구성되는데 제1장에서 박정희를 경험한 사람들 그러나 찬양 일변도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간단한 박정희의 이력서를 들려준다. 그 다음엔 모세의 출애굽기를 ‘신화’의 모티브로 삼고 종장 ‘초인’에서 박정희 피살의 술판을 극화하고 있다. 나는 용케 6월 14일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는데 전날 공연에서는 해프닝도 있었던 모양이다. 나이든 관객들이 대거(?) 오시는 바람에 공연관계자들을 긴장시키더니 급기야 공연 중에 퇴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고 한다. 박정희 찬양을 기대하고 온 분들은 아닌 듯하고 이게 찬양이지 뭐냐 하며 항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연극 〈국부〉는

[인터뷰] 정도를 벗어난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제자리 찾기 원해

2017년 7월 28일 3341

우리 연구소는 헤이그 특사 110주년을 맞아 이준 열사의 집터 위치가 ‘안국동 152 및 153번지’였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하고 종로구청을 통해 표석신설 신청서를 제출한 결과, 지난 3월에 서울시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의 심의를 거쳐 표석설치 결정을 통보받았다. 이 자리가 1907년 헤이그특사의 출발지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준의 아내 이일정이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상회를 개설하여 운영했던 곳이라는 공간적 의미가 모두 고려된 결정이었다. 이준 열사 순국 110주년이 되는 7월 14일 해당 표석의 설치 제막식이 거행될 예정인데, 이에 앞서 이준 열사의 유족 대표인 조근송(趙根松) 이준열사기념사업회 명예회장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문 :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근송 선생님은 이준 열사의 외증손이신데, 가계에 관한 개괄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답 : 이준 할아버님은 어렸을 때 아버님과 할아버님 두 분 모두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셨는데, 외롭게 크신 분이기 때문에 정이 많고 또 혼자이시기 때문에 깐깐한 면도 계셨다 그래요. 저의 증조부 조시범(趙時範)과 이준 할아버지는 같은 서당에 다니던 학동이었습니다.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에서 일찍 장가를 들어 태어난 분이 따님 한 분과 아드님 한 분인데, 맏딸이 저의 할머님 이송선(李松鮮)이예요. 그 할머니 이름의 ‘송’자를 따서 제 이름에 붙였다고해요. 아들 이름이 이종승(李鍾乘)인데 이용(李鏞)으로도 부르죠. 그리고 서울에서 또 한 부인을 얻었는데 이분이 이일정(李一貞) 여사입니다. 이분 슬하에 이종숙(李鍾肅)이라는 따님한 분을 두었습니다. 어릴 때 사직동에 계셨는데 맨날 놀러도 가고 용돈도 얻고 그랬습니다. 이분들은 눈이

연구소와 얽힌 기념우표 이야기

2017년 7월 28일 1289

SNS가 사람들 간에 절대적인 소통 수단으로 자리 잡으면서 우표는 그만큼 대중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표 수집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수집가들에게는 새로운 우표 발행이 큰 관심거리다. 특히 특별한 날이나 역사적 사건을 오랫동안 기념하고 싶을 때 가장 떠오르는 것이 바로 우표 발행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난데없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으로 논란이 일었다. 박근혜 정권 때인 2016년 5월 결정된 사안이었고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기에 연구소의 대응도 늦었지만 다행히 발행 결정을 취소시키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번 달에는 우표와 관련된 연구소의 몇 가지 활동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2007년 3월 15일 우정사업본부는 서울대학교병원의 요청으로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우표’ 160만 장을 발행했다. 당시 서울대병원 측은 1907년 설립된 대한의원이 현재 서울대병원의 전신이라고 하면서 서울대병원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였고 기념사업의 하나로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을 신청했던 것이다. 1907년 대한제국 당시 일제의 통감부는 광제원, 의학교와 그 부속병원, 대한적십자사병원 등 세 병원을 통합해 대한의원을 설립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을 거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일조했다. 이 같은 사실을 지적하며 연구소와 의학사 연구자들은 “대한의원은 일제 통감부가 한국인 회유책의 일환으로 설립한 것으로 일제 식민통치를 미화할 소지가 있”기에 기념사업 재고를 요청했다. 한국정부의 전신이 통감부나 조선총독부가 아니듯이 국립 서울대병원의 전신이 통감부가 설립을 주도한 대한의원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연구소는 우표

이 조약은 강제로 체결된 불법조약이다!

2017년 7월 28일 2705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1907년 4월 20일 고종이 헤이그 특사에게 준 위임장이라고 알려진 문서이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는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으며, 나라의 자주 독립을 호소하며 자결하거나 친일 매국노의 처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고종은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국권회복의 염원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회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또한 프랑스・벨기에 주재공사 민영찬에게 이 문제를 협의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러일전쟁 이후 불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마르텔을 비밀리에 베이징에 파견하여 베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를 만나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네덜란드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대한제국은 12번째 초청국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만국평화회의에 외교권을 상실한 국가가 회의에 참가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한국 참가를 반대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이후에도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어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대한제국을 만국평화회의에 초청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대한제국을 초청하는 것을 포기했다. 한편 1905년 9월 고종의 밀사인 이용익이 러시아로 건너가 국내와 비밀접촉을 하면서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상동청년회와 연결되어 이동녕, 이시영, 안창호, 김구 등이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아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를 받아들여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명의 특사를 헤이그 평화회의에

스프레이 테러로 되돌아본 연구소 수난사

2017년 5월 26일 1848

일요일인 4월 23일 오전 1시경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성이 연구소 3층 사무실 출입문과 현판 등에 붉은색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고 달아났다. CCTV를 통해 확인해 보니 이 남성은 검은색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얼굴을 가린 채 약 2분간 스프레이를 뿌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서슴없이 스프레이를 뿌린 것을 보니 적어도 한차례 이상은 사전 답사를 한 것 같은 모습이다. 일명 ‘스프레이 테러’가 발생한 것인데 최초 발견자는 일요일 오후 사무실에 나온 한 상근자였다. 이튿날 경찰에 신고하고 동시에 언론에도 널리 알렸다. 언론이 크게 보도해준 덕분인지 관내 동대문경찰서는 신속히 수사에 들어갔다. ‘과학수사’ 조끼를 입은 감식반은 물론 동대문경찰서장도 직접 연구소를 방문해 범인 검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범인 검거는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번 달은 스프레이 테러를 계기로 그동안 연구소 겪었던 크고 작은 수난사를 잠시 되돌아보고자 한다. 연구소가 본격적으로 수구세력(뉴라이트, 어버이연합 등)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일 것이다. 연구소는 그해 7월 1일 <만화 박정희>를 출간하며 박정희의 친일과 독재 행각을 고발했고 이어서 8월 29일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을 발표하여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렇듯 박정희를 비롯한 주요 친일파들의 행적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 기정사실화하자 수구세력의 반격이 곧바로 이어졌다. 매일 사무실로 전화하여 옮기기도 어려울 정도의 욕설을 퍼붓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더 나아가 국민행동본부, 자유수호국민운동, 대한민국 HID청년동지회, 나라사랑어머니연합,

‘천황즉위’ 기념으로 지은 일본인 사찰에 갇힌 명성황후의 위패

2017년 5월 26일 4298

1882년 6월 10일(음력), 임오군란(壬午軍亂)의 와중에 성난 군인들이 창덕궁으로 밀려들자 왕비 민씨(명성황후)는 급히 궁궐 밖으로 도망친다. 홍재희(洪在羲, 홍계훈)가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간신히 죽음의 고비에서 벗어난 이들 일행이 몸을 숨긴 곳은 화개동(花開洞, 지금의 화동)에 있는 사어(司禦) 윤태준(尹泰駿)의 집이었다. 이곳에서 이틀을 머문 뒤에 벽동(碧洞, 지금의 사간동과 송현동 일대)에 있는 익찬(翊贊)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다시 피신하였다가 마침내 6월 15일 서울을 벗어나 저 멀리 여주와 장호원으로 이어지는 도피행로에 올랐다. 이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르고 1903년 무렵 명성황후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석의 건립이 한창 추진된 적이 있었다. 감모비각(感慕碑閣)라고 불렀던 이 비석의 건립 장소로 최종 선정된 곳은 바로 임오군란 때의 피난처로 인연이 있던 화개동 장원서(掌苑署) 터였다. 하지만 이 당시 모금운동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는지 비각은 그럭저럭 완공이 되었으나 비석에 글자를 새기는 일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한동안 잊힌 감모비의 존재가 다시 부각된 것은 1915년 가을의 일이었다. 이 당시 대정천황(大正天皇)의 어대전(御大典, 즉위식)이 11월 10일에 거행되었고, 이에 맞춘 기념행사의 하나로 선당(禪堂)의 건립이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매일신보』 1915년 11월 11일자에는 이에 관한 건립경위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경성묘심사별원(京城妙心寺別院)에서는 거(去) 10일 오전 10시부터 엄숙한 어대전축성기도회(御大典祝聖祈禱會)를 거행하였는데 우(右) 축도회 종료후 고토 노사(後藤老師; 後藤瑞巖)는 어대전기념사업으로 좌(左)의 취지서와 여(如)히 다년 황패(多年 荒敗)에 귀(歸)한조선불법(朝鮮佛法)의 부활을 도圖)하기 위하여 선당건립(禪堂建立)의 지망(志望)을 발표하였는데 내회(來會)한 음량회(蔭凉會) 회원 제씨는 기(其) 지의(旨意)를 익찬하여 시(是)의 기성(期成)에 취(就)하여

[시론] 5월, 혁명상미성공(革命尙未成功)

2017년 5월 26일 2201

우리 민족사에서 5월은 평화와 자유로 아늑한 푸른 계절의 여왕이 아닌, 살육과 탄압의 눈물로 얼룩진 울분의 달이었다. 5・16과 5・18의 긴 질곡 속에서 2017년 5월 9일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 생명이 약동하는 5월을 되찾게 해주었다. 실로 멀리로는 유구한 한민족의 자주정신의 승리요, 가까이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념의 구현이자 항일민족해방투쟁 선열들의 염원의 성취이자 민족통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순절하신 모든 영령들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아, 5월의 태양이여, 한껏 화사하게 빛날지어다. 돌이켜보면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0분,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낭랑한 목소리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라는 주문을 또박또박 읽던 그 순간부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5월 10일 오전 8시 10분,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의결할 때까지 두 달 동안 온 국민은 정치평론가로 표변했고 방방곡곡이 국회처럼 정치토론장이 되었다. 가족과 친인척, 동창과 고향친구, 직장 등 모든 인간관계가 살벌해질 정도로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가장 치열한 대립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공정하게 치러진 선거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다. 2016년 10월 24일, JTBC가 최순실 게이트를 공개한 이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이뤄낸 이 웅혼한 1700여 만 시민들의 촛불혁명은 1987년 6월 시민항쟁 이후의 대선 패배와는 달리 5월 민주선거혁명을 성공시켰다. 흔히들 자발적인 시민 개개인의 참여가 촛불혁명의 성공 요인이라고 편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오랜 기간에 걸친 시민운동단체들의 굳건한 투지와 응집력과 선구적인 향도가 다른 어떤 요소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잊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