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여는 글] 역사적폐 청산의 상징!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함께 해주십시오
이이화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위원장 안녕하십니까? 격변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적폐 청산을 위해 달려온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 저는 항상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회원 여러분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라는 무겁지만 행복한 소임을 제게 맡겨 주셨으니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팔십 평생 마지막 역사적 소명으로 생각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고대하며 하루하루 결의를 다집니다. 오늘도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일본은 아베 총리 집권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일본군‘위안부’와 독도 문제뿐 아니라 일제 침략사 전체를 왜곡하거나 삭제, 미화하고 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 잔재들이 다시 부활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오도하고 있는 꼴입니다. 주변국인 중국도 1990년대부터 이른바 ‘동북역사공정’을 내걸고 우리 고대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왜곡하는 억지를 부려왔습니다. 이는 단지 고대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남북통일 문제에도 중요한 논란거리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난 보수정권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고, 이를 국정교과서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치려는 역사도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촛불시민의 힘으로 불의한 권력을 청산했지만 우리에게는 친일의 잔재와 반민주적인 행태 등 뿌리 뽑아야 할 적폐가 여전히 많습니다. 오늘 친일청산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대중들에게 깊이 이해시킬 수 있을지 더 고민하고 더 실천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 실천의 일환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크고 좋은 박물관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국민성금으로 조성된 독립기념관에 가보면 수장고에 많은 자료들을 수집해 놓았습니다. 드넓은 야외 공간에 각종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이순우 책임연구원 흔히 용산(龍山)이라고 하면 용산역 앞이거나 미군기지 일대를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원래 용산은 마포 바로 상류에 위치한 포구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방(坊)’을 기준으로 살펴보더라도 ‘용산방’은 청파역, 공덕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1899년 12월 ‘용산행’ 전차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신용산(新龍山)’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경인철도 개통 당시 만초천 물길의 동쪽 지역에 ‘용산정거장’이 개설되면서 위치관념이 약간 변경된 탓도 없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용산 주변의 지리적 위상관계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러일전쟁 직후 일본군 병영지의 건설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이 당시 일제가 이른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년 2월 23일)’에 근거하여 서울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는데, 이곳은 원래 ‘둔지방(屯芝坊)’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용산군영지’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군영지는 곧 ‘용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한국주둔(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의 편제 변동 연혁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 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운동, 앞으로도 일본에서 함께 하겠습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하, 역사관) 건립을 일본에 알리고 함께 뜻을 모으기 위해 2015년 11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서승 리쓰메이칸대학 특임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장(당시), 히다 유이치 고베학생청년센터관장, 안자코 유카 리쓰메이칸대학 교수 등 동아시아 평화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애써온 전문가들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약 15명의 시민이 사무국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임 결성 직후 『함께만들자! 식민지역사박물관 in Seoul』이라는리플릿4만부를만들어 일본 전국각지에 배포했습니다. 평화운동, 호헌운동, 전후보상운동, 강제동원진상규명운동, 역사교육운동, 야스쿠니반대운동 등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펼쳐온 다양한 단체가 힘을 모아줬습니다. 회보를 발송할 때 리플릿을 함께 보내주기도 했고 회보를 통해 직접 역사관 홍보를 해준 단체도 있었습니다. 기사를 실어준 언론도 있었습니다. 『주간금요일』(시민의목소리를대변하는대중잡지), 『사회신보』(사회민주당기관지), 『신문우즈미비』(전쟁반대,인권사회구현을 내세우는월간신문), 『페민』(대중여성단체부인민주클럽기관지)등이역사관소개기사와우리가보낸기고를실어줬습니다. 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도쿄대공습·전재자료센터, 고려박물관, 마루키미술관, 사키마미술관 등 각지의 평화박물관에서는 관람자들에게 리플릿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이어온 우리의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시민, 단체, 언론, 평화박물관이 힘을 모아준 결과 전국 각지에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약 800명의 시민들과 10개 단체가 역사관 건립 기금을 보내왔으며 그 액수는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5,000만 원을 넘었습니다. 또 아오모리, 기후, 도쿄, 오카야마, 히로시마, 오사카, 미에, 나가사키, 구마모토, 오키나와 등지의 시민들이 일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 시민연대의 기록자료 기증에 참여해줬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운동이 전국 각지 다방면에서 찬동과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의 역사인식, 식민주의
세계의 역사전쟁과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
세계는 지금 역사전쟁 중 ‘사회는 없다.’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내건 구호다. ‘왜 당신 아버지의 노후를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말로 바꾸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복지국가를 지탱하던 이념과 사회 운영 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이 악명 높은 구호는 이후 급물살을 타고 전 세계를 휩쓸었다. 지금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공기업의 민영화, 구조조정, 규제 철폐 또는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금융시장 자유화, 복지 축소 등의 소란스런 주장들이 바로 이 구호에 담긴 세목들이다. 1950~60년대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불리던 시대는 1970년대가 되자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문제에 부딪혔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상승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나타났고 자본의 이윤율 저하는 심화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면서 이런 경제침체는 ‘자본의 거대한 재구성’과 ‘노동의 국제 분업(화)’를 수반한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세계적 위기’가 도래했다. 자본은 이제 그동안 노동계급에게 양보했던 이윤을 회수해 오는 전략을 세우고 과격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정부의 실패’라는 그럴듯한 이론을 앞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기라는 ‘신자유주의’의 대두는 우승열패와 적자생존이라는 정글 속으로 인간들을 몰아넣는 구호와 다름없었다. 위로부터의 계급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처는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했다. 1979년 대처는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영국사를 구제받지 못할 운명·억압·실패의 시기로 서술하여 우리의 국가 자존심을 좀먹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의 역사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절하 하는 교육을 받아 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시민운동의 산실을 찾아
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평화와 교육, 환경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전쟁과 평화를 생각하는 자료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평화박물관’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을 종자돈으로
도쿄지회 회원들, 재일동포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 있는 자료 다량 기증
도쿄지회 회원들, 재일동포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 있는 자료 다량 기증 위로부터, 우편으로 보내온 기증 자료들 / 최정부님의 민족학교 재학 때 사진들 / 조영숙 회원의 남편 작업복 도쿄지회(총무 조영숙) 회원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기증용 자료들을 다량 보내왔다. 기증자는 최정부, 조영숙, 남영자 세 분으로 모두 혈연관계이기도 하다. 기증 자료들 대부분은 사진이며, 그 외 외국인등록증명서, 상호부조증서, 작업복, 책자 등도 함께 보내왔다. 보내 준 사진이나 자료마다 일일이 조영숙 총무가 자세하게 설명을 적어놓아 기증 자료에 대한 해설만으로도 작은 책 한 권이 될 정도이다. 최정부 님(1941년생, 최리순 회원의 부친)은 원 호적지가 경북 의성으로 1947년 도쿄 오오타구 지역의 최초의 민족학교인 조선 카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일본의 민족교육 탄압으로 ‘도립조선인학교’를 거쳐 도쿄 조선 중,고급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바에서 건축설계사 취업에 도전했지만 민족차별, 취업차별로 좌절했다. 그 후 삼촌집에서 주물, 고철 수집 등의 일을 도우면서 22세 때 남춘자님과 결혼했고 청년연맹활동(오오타구 청년동맹 부위원장)도 열심히 했다. 2004년 한국 국적으로 변경했으며, 슬하의 2남 2녀는 물론 외손자 모두 조선학교를 졸업했거나 다니고 있을 정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하다. 따님인 최리순 회원을 통해 보내주신 자료는 해방 후 초기 민족학교 관련 사진들과 청년동맹 시기의 사진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해방 후 초기 도쿄지역의 재일동포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삿포로 동계올림픽 응원사진, 도쿄 청년본부 주최 역전마라톤 대회 사진, 총련 씨름대회 중앙대회 모습, 청년동맹 행사와 각종
친일파 부자, 박기순과 박영철
친일인명사전을 차근차근 들추다 보면 형제, 부자, 조손, 사촌 등 혈연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함께 실려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박기순과 박영철이 그런 경우다. 국가도 이들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전북 전주에서 미곡상으로 시작해서 조선을 대표하는 재벌로 성장하기까지, 그리고 친일파하면 떠오르는 ‘명성’을 얻기까지 이 부자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신도시 개발 특수를 누리다 박기순(朴基順, 1857~1935)의 장례식을 전하는 신문기사(<매일신보>1935.10.6)에의하면,그는 40세가 넘어서야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생전에 1만 5천여 석을 넘길 정도의 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가 79세에 사망했으니 그의 재산 형성 시점은 일본인들이 경제침탈을 본격화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박기순과 취향정(醉香亭). 취향정은 박기순이 1917년 자신의 환갑을 기념해 전주 덕진공원 내 연지에 세운 정자다. 박기순은 열두 살에 부친을 여의고 어느 상점의 사환 노릇을 하다가 미곡상으로 독립하였고, 전주평야의 미곡을 군산에서 인천으로 내다 팔아 큰 이득을 얻었다. 이를 기반으로 토지를 사들여 만석꾼의 이름을 얻었고, 당시 전라도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토지왕’이 되었다.(<삼천리>,1931)특히박기순은신도시‘이리’(지금의익산)개발과정에서막대한시세차익을얻었다. 오늘날의 강남 개발이나 수도권 신도시 개발의 벼락부자를 떠올리게 한다. 일찍이 일본 자본은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인 만경강 일대 호남평야에 주목했다. 강제병합 후 그들은 이 비옥한 평야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1920년대 이리역 주변 모습 지대에서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식민지 수탈경제를 구축해 갔다. 그 과정에서 군산과 전주를 사이에 둔 식민도시 이리가 개발되었다. 1914년 1월 호남선이 경성-대전-이리-나주-목포로
군함도의 진실 공방과 한국정부가 할 일
서경덕 교수가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영상을 홍보해 여론의 주목을 끌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가 유네스코산업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근대산업시설 중 한국인 등의 강제동원 관련 시설에 ‘역사의 전모’를 밝히라고 일본정부에게 권고한 사항을 이행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상에는 몇 가지 부정확한 사실이 담겨 있다. 영상에서는 군함도에 강제동원되어 죽은 한국인이 120명이라 한다. 그러나 1984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찾아낸 〈화장인허증하부신청서(火葬認許證下附申請書)〉 등 일명 ‘하시마자료’에 따르면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하시마에서 죽은 한국인은 123명이다. 여기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사망한 수가 64명이니 굳이 따지자면 강제동원 희생자는 50여 명이라 해야 맞다. 영상에 사용된 사진들도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누워서 탄을 캐는 장면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정확한 연도와 지역을 알 수 없다. 사진① 이 글은 2017년 7월 25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군함도의 진실 공방과 한국 정부가 할 일〉을 수정·보완한 글이다. 분량상 싣지 못한 내용을 추가하면서 기고 후에도 계속 유포되고 있는 잘못된 정보를 교정하기 위해서다. (사진①) 한겨레신문에 글을 썼을 때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 는 연도 미상의 후쿠오카탄광에서 일하던 일본인 광부라 했으나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유사한 사진으로 훈도시를 입고 누워서 탄을 캐는 사진도 있다. (사진②) 이 사진도 자주 한국인 강제동원피해자 사진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메이지시기 치쿠호탄광에서 탄을 캐는 일본인 광부의 모습이라 한다. 누워서 탄을 캐는 광부의 구도와
[식민지 비망록 23]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갔다. 보호순사(保護巡査)의 겹겹 파수(把守)와 철비전벽(鐵扉磚壁)의 견고한 엄호도 저승차사의 달겨듦 하나는 어찌 하지를 못하였으며 드러난 칼과 뵈지 않는 몽둥이가 우박같이 주집(注集)하는 중에서도 이내 꼼짝하지를 아니하던 그 달라진 동자(瞳子)도 염왕(閻王)의 패초(牌招) 앞에는 아주 공손하게 감겨지지 않지를 못하였구나. 이때이었다. 너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것이 이때이었다. 아무리 몸부림하고 앙탈하여도 꿀꺽 들이마시지 아니치 못할 것이 이날의 이 독배(毒杯)이다. …… 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이제부터 받을 일. 이것이 진실로 기막히지 아니하랴. 문서는 헛것을 하였지마는 그 괴로운 갚음은 영원한 진실임을 오늘 이 마당에서야 깨닫지 못하였으랴.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았지! 앙탈하던 이 책벌(責罰)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이것은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李完用)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1926년 2월13일자에 수록된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제하의 사설이다. 총독부 당국의 검열로 삭제처분을 받은 이 기사에는 그가 죽어서도 영원한 책벌을 받을 처지가 되었음을 질타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미 죽은 그에게서 그 무슨 뼈저린 반성과 후회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도 싶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매일신보> 1926년 2월 13일자에는 그의 죽음에 대한 단평기사에 총독부 기관지다운 대목이 등장한다. 죽음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성스러운 것이니 평시에 그에게 위해를 끼치고자 하던 이며 그의 태도를 오해하며 비난하던 사람이기로 어찌 사나이답게 그의 죽음을 조상할 한 줄기 눈물이 없겠는가? 제 아무리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죽음’이라
새로운 만남을 잇다 –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한 도쿄집회
지난 7월 4일 도쿄에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주최로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의 의의를 다시금 확인하고 향후 지속적인 활동을 다짐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번 집회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지가 용산으로 확정된 후 처음으로 갖는 집회로 연구소에서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대표,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강동민 자료팀장, 노기카오리 선임연구원 그리고 교육홍보실 오경아 영상팀원이 참여했다. 이날 집회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작은 행사로 준비되었지만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참가해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높은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의 인사말에 이어 이희자 대표가 참가자들에게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강동민 자료팀장이 그동안의 활동 경과와 건립지 개요, 향후 계획을 보고하자 참가자들은 감동과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마지막으로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이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와 과거사’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아 한일 시민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매개로 더욱 깊은 교류를 추진해나가자고 제안했다. 그동안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이 집회를 개최할 때마다 사회를 보는 이가 있다. 대학생 시절부터 이 활동에 참여해온 다나카 유키 씨다. 이날도 사회를 맡은 그는 “오늘 집회는 앞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일본에서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 개관 후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소감으로 집회를 마무리했다. 이미 모금 목표액 500만 엔(약 5,080만 원)을 달성했지만 이날을 계기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활동을 더욱 활성화하자는 것이 이 집회의 취지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날 집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