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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비운의 여장군 김명시

2017년 2월 22일 10430

환호 속에 귀국한 여류 혁명가 이역만리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투사로서 장군 칭호를 받은 이들이 드물지는 않다. 그런데 그중 이채롭게도 ‘여장군’ 칭호를 얻은 이가 있으니 바로 해방 당시 38세 한창 나이였던 여장부 김명시(金命時)이다. 김명시는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 혐의로 7년간 복역한 뒤 1939년 중국으로 건너가 해방 직전까지 무정 장군 직속하의 조선의용군에 소속되어 최전방에서 여성 부대원을 이끌고 선전선동과 초모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12월 중순 서울에 개선한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현황을 설명하고 “조선사람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다 통일전선에 참가하여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며 자주독립을 위한 좌우 협력을 강조하였다. 이 기자회견 내용은 <중앙신문><독립신보><동아일보>와샌프란시스코에서간행되던 <국민보>에까지 실려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여장군 김명시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었다. 특히 우익신문이던 <동아일보>가 김명시를 조선의‘잔다르크’로까지 치켜세운것은 당시 그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는지 가늠케 한다. <독립신보>1946년11월21일자에는「여류혁명가를찾아서⑦ 20년간투쟁생활,태중(胎中)에도 감옥살이, 김명시 여사편」이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다. 유영준(劉英俊), 정칠성(丁七星), 박진홍(朴鎭洪), 유금봉(劉金鳳), 허하백(許河伯), 조원숙(趙元淑)에 이어서 여류혁명가로서 7번째로 인터뷰한 것이다. 약간 길지만 김명시의 항일 이력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모두 옮겨 싣는다.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이 대담해 보였다. “투쟁하신 이야기를 좀 들을까요”하고 물으니 “열아홉 살 때부터 오늘까지 21년간의 나의 투쟁이란 나 혼자로선 눈물겨운 적도 있습니다마는 결국 돌아보면 아무 얻은 것 하나 없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친일’ 이란 명칭을 바꿔야 하지 않나 생각되네요.

2017년 3월 27일 2524

이것이 궁금하다 1   문) ‘친일’ 이란 명칭을 바꿔야 하지 않나생각되네요. 친할 친(親), 날 일(日). 한자 문화권에서 문자만 보면 심각성을 전혀 가늠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본의 옳은 문화를 소비하는 입장에서 친구 같은 일본의 모습에서 극우 잔당의 역사를 분리 명칭화 해야 한다고 봅니다. 친일파, 친일 잔당, 등 왜 간신과 같은 역적과 같은 사람들을 ‘친할 친’을 써야 하는지 납득이 되질 않네요. 좀 더 강력하고 한자문화권에서 알 수 있도록 명칭을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친일~친일~ 듣는 일본에선 ‘왜 우릴 좋아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는지’라고 생각이 들듯합니다.   답) ‘친일’ ‘친일파’라는 용어가 그 자체로 역사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기도 하고 타당한 측면이 있는 지적입니다.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자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는 친일파 외에도 매국노 반민족행위자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일제부역자 등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매국노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처럼 일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국권을 일제에 넘기는 데 협조한 무리들을 의미하며 주로 한말의 고관대작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강제병합 이후 이들 중 다수는 일제가 수여하는 조선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습니다. 반민족행위자나 민족반역자는 해방공간과 정부수립 이후 많이 사용되었으며 민족주의적 시각이 투영된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반민특위를 대표적 사례로 들수 있습니다. 부일협력자 일제부역자 등은 행위와 대상을 함께 담은 용어로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표현에 가깝습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일협력자란 용어를 선호하 는 경향이 있지만 생계형 부역자나 소극적 협력자들까지 범주에 들어갈

몽양여운형기념관 사태에 관하여

2017년 2월 22일 2850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광화문에 100만 촛불 열기로 뜨겁던 12월 초순, 몽양기념관의 장원석 학예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양평군청이 몽양기념관 민간위탁운영자 모집 공고를 냈다는 것이다. 양평군청으로부터 2016년 한해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재계약 약속을 받았다고 들은 터라 재계약은 문제없을 거라고 안심하고 있었을 때였다. 몽양기념사업회가 지역주민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고 방문객수가 적다는 동네주민 다섯 명의 탄원서가 그동안 재계약하겠다는 약속을 파기한 이유였다. 불편한 접근성에도 매년 꾸준히 방문객이 늘고 있는데 갑자기 접수된 탄원서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했다. 몽양역사아카데미 회원들은 몽양의 뜻을 계승하며 꾸준히 몽양선양사업을 하고 있는 몽양기념사업회가 몽양기념관을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양평군청 앞에서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평군청은 신뢰를 저버리고 끝내 2016년 12월 29일 새로운 민간 위탁 운영자로 상명대학교 서울산학협력단과 신원1리 새마을회를 선정했다. 상명대 서울산학협력단과 신원1리 새마을회는 몽양 여운형 선생은 물론 독립운동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단체이다. 더구나 두 단체는 몽양 여운형 선생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과 관련된 곳이다. 상명대학교는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배상명이 설립한 학교이고, 새마을회는 만주군 중위 출신의 독재자 박정희가 남긴 유산이다. 이런 단체들에게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몽양 여운형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는 사업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몽양 여운형 선생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에서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것을 시작으로 우리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웠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좌우합작활동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다.

촛불혁명을 이끄는 위대한 시민의 힘을 보다

2017년 2월 22일 1359

2016년 10월 19일에 시작된 시민들의 촛불혁명이 100일을 넘겨 계속되고 있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천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한겨울의 추위를 함께 이겨냈다. 아직 승리를 단언하기에는 이르지만 시민들의 촛불은 결국 박근혜와 최순실이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김기춘과 조윤선을 구치소로 보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 너무나 힘들어 했던 시민들이 광장에서 함께 촛불을 든 시민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힘을 받고 위안을 얻는 아름다운 경험을 나누고 있다. 우리 연구소도 매주 토요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저지하기 위한 서명 운동을 벌이고 애드벌룬으로 만든 평화의 소녀상을 앞세우고 촛불혁명의 대열에 함께 하고 있다. 전국의 회원들이 민족문제연구소 깃발 아래 함께 싸우고 있을 것이다. 대전지부 박희인 회원은 대전 촛불집회의 사회자로 맹활약을 하며 촛불혁명을 이끌고 있는 위대한 시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박희인 회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국 각 지역에서 촛불혁명에 함께 하고 있는 회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인터뷰는 이메일을 통해 이루어졌다 문 : 지금까지 해온 활동을 중심으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 현재는 대전지역 60개 단체로 구성된 남·북·해외 3자 연대 조직인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전본부’ 집행위원장과 (사)우리겨레하나되기대전충남운동본부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1999년부터 대전지역에서 시민사회 활동을 시작하였으니 2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1999년에 미군의 노근리 학살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면서 노근리뿐만 아니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미군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대전충남본부 사무국장을 5년여 간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 소개

2017년 2월 22일 1323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하며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감성과 문화적 차이도 있지만 아직 민중가요의 실용성이 남아 있음을 이번 촛불집회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민중가요 가운데 하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란 제목으로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박근혜 정부와 보수세력의 금지곡이나 다름없는 이 노래의 영화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모하게 강행했다. 전투 속에서 불러지던 노래가 전투 속에서 살아남아야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미국 국가 ‘성조가’나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그리고 대한민국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공통점은 적군과 군대와 독재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구하기 위해 불렀던 애국의 노래였다. ‘이것도 나라냐?’는 촛불정국에서 회자되었던 통렬한 비탄의 국민 카피였다. 그것은 명백히 국민이 국가를 부정한 사건이었다. 국가는 원시부족부락만도 못한 집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의 총체적 모순은 곳곳에서 곪아터졌지만 그때마다 야매 봉합술로 덮어버리고 묻어버리며 입을 막았던 탓이다. 이 모든 현상은 대한민국이 진정한 반성과 과거청산의 참회 없이 출발했다는 데 기인한 것이다.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에 대해 주기적으로 상기하고 있다. 그들이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그 아픔을 잊지 않도록 상기하는 중요한 정책으로 영화를 선택했다.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쉰들러 리스트’ ‘안네의 일기’ 같은 영화들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고,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며 다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영화로 만들어 역사 바로

연구소, 명예훼손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

2017년 2월 23일 1987

대법원 제1부(재판장 이기택)는 지난 1월 25일, 우리 연구소가 박정희혈서조작설을 유포한 강용석 변호사, 정미홍 전 KBS아나운서, 일베회원 강모 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서 피고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각각 500만 원, 300만 원, 3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하라는 항소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소송을 시작한 2014년 7월 17일로부터 2년 7개월 만에 최종판결이 난 것이다. 연구소는 소문으로만 떠돌던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혈서의 사실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하여,<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기 직전인 2009년 10월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의 「혈서 군관지원」이란 기사를 찾아내 이를 사전에 수록한 바 있다. 그러나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 제기한 <친일인명사전> 게재금지 및 배포금지 가처분신청이 “이유없다”고 기각되었음에도 이후 의도적인 혈서조작설 유포가 계속되었다. 이에연구소는 “날조스토리가 등장”, “들통난 혈서기사조작” 따위로 공공연하게 허위사실을 전파한 강용석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앞서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들은 원고가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기사를 꾸며내었다는 취지로 ‘원고가 조작한 것’, ‘원고가 허위로 꾸며낸 사기극’ 내지 ‘원고가 날조한 이야기’라는 표현행위를 한 것이고, 이는 단지 원고에 대한 비난의 의견을 표명한 것을 넘어서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영역에 관한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연구소는 이번 대법원 판결이 허위사실 유포와 근거 없는 음해가 근절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번 소송에서 승소한 데는 우리 쪽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지향의 이상희, 김묘희 변호사의 역할이 컸다. 두 번째 승소는 보수단체인 나라사랑바른학부모실천모임 대표 방모 씨를

최지한 회원이 교과서를 비롯한 현대사 관련 자료를 기증해

2017년 2월 22일 950

지난 1월 2일, 최지한 회원(경남서부지부)이 2012년에 이어 해방 후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이번에 기증한 자료는 <우리는 착한6학년>(1956), <다른 나라의 생활>(1956)등 교과서류와 <한영군용단어와 숙어의 발음책> 등 해방 이후 발행한 것으로 보이는 도서와 문서류다.   심정섭 지도위원 제50차 자료기증, 도서류 총 15점 보내와 지난 12월 29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50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 다. 이번 기증 자료는 <구례군지>(2005),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1982), <보성문화>(2015) 등 총 15권의 도서다.   지난 1월 5일, 박도 회원이 <韓國痛史>(1993) 등 총 5권의 도서를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회원들이 보내온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들

2017년 2월 22일 1157

사진으로 보는 연구소 소사·21 ‘김영란법’ 시행으로 선물 주고받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 관련 업계가 울상이라고 합니다. 당장 피해가 적지 않은 화훼, 축산업계 등에 대한 대책이 절실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동안 ‘선물’을 가장한 뇌물이 그렇게 많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듭니다. 여하튼 선물 받고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겠지요. 이번 호에서는 연구소로 전달되는 선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한때 시민사회단체와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연대는 입금입니다.’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연구소처럼 대부분의 운영 경비를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하는 단체들로서는 100%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정하고 불의한 현실에 대해 비분강개만 하고 만다면 그것은 술 한 잔 마시고 이불 뒤집어쓰고 “대한독립만세” 몇 번 외치다 골아 떨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연구소 입장에서는 매일 한두 분이라도 회원이 되어 주시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기쁘고 보람 있는 순간은 바로 회원들이 보내주시는 선물을 받을 때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회원님들이 보내주시는 선물은 곧 칭찬과 격려이기 때문입니다. 연구소 설립 초기에도 선물이 간간히 오기는 했지만 택배가 일상화되고 오마이뉴스와 공동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민모금을 벌였던 2004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답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종류는 주로 쉽게 상하지 않을 먹을거리들이 대부분으로 김, 현미과자, 꿀, 고구마, 오징어, 감귤, 배, 포도, 사과, 곶감, 김치, 유자차, 과메기, 찹쌀떡, 한과, 매실 원액, 동충하초, 된장, 고추장, 순무 등 전국의 특산물을

유관순 열사의 스승 박인덕, 항일·친일·친미를 넘나들다

2017년 1월 23일 8302

2016년 12월 28일 교육부는 국민들의 무수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한국사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을 내놓았다. 앞서 자신들이 검정 통과시켰던 기존 한국사 교과서를 ‘좌편향’이라 매도하고,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며 수십 억의 홍보비를 들여 대대적인 홍보도 진행했다. 7편의 홍보 영상 중 두 편의 영상 주인공은 유관순 열사이다. 그 첫 영상에서는 기존 교과서에 유관순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초・중등 교과서에는 모두 있다는 비판을 받자,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없다는 내용으로 바꿔 두 번째 영상을 발표했다. 이 영상의 도입부는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다”라고 어느 역사학자가 주장했다는 글로 시작한다. 즉 유관순을 친일파가 영웅으로 만들었기에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집필자들이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초・중등학교에서 이미 다 배운 유관순에 대해 고등학교에서는 세세히 다루지 않고 오히려 3・1운동에 대해 심화학습을 진행하는 것이 교육과정상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위 홍보영상에서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란 주장만은 사실이다. 해방 직후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유관순을 대중적으로 알린 데에는 친일파이자 유관순의 스승인 박인덕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친일파 중 유일하게 체포와 투옥 박인덕(朴仁德 1897~1980, 창씨명 永河仁德)은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다닐 때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유관순을 비롯한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때 박인덕은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5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투옥 당시 유관순을 감옥에서 만났고, 해방 직후 이 사실을 이화여자중학교 교장인 신봉조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1978년

이승만 독재의 서막 – 부산정치파동

2017년 1월 23일 5315

대통령 vs 국회 : 두 개의 자유당 1950년 5.30 총선으로 구성된 국회는 이승만에게도,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에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총선의 결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과 무소속 국회의원들이 대거 당선되어 다수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도파의 주요 지도자들이 납북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지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원내단체 신정동지회를 중심으로 70명 정도의 국회의원을 우호적인 세력으로 확보했지만 1951년 초 세상에 드러난 국민방위군사건, 2월의 거창양민학살사건 등 계속된 실정(失政)으로 그마저도 지키기 힘들어졌다. 1951년 5월 이시영 부통령이 국민방위군사건의 미흡한 대처를 비판하며 사임하자 국회는 민국당의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민국당 소속 부통령의 출현은 이승만의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승만은 거대 여당의 조직과 대통령직선제 개헌으로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먼저주력한 것은 거대 여당의 조직이었다. 이를 통해 원내 지형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시키고 1952년에 있을 정부통령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당은 원내와 원외에서 동시에 추진되었다. 원외 신당은 이범석의 족청 계열과 국민회 계열 등이 주도했다. 원외 세력은 이승만이 원하는 대로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당을 만든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그러나 원내의 신당 추진은 이승만의 의도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원내의 신당 추진은 신정동지회와 공화구락부가 통합해 만든 공화민정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공화민정회에서 신당의 조직을 주도한 세력은 소수의 공화구락부 계열이었다. 신정동지회 계열은 다수이긴 했지만 국민방위군사건에 연루되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공화구락부 계열은 신당을 이승만 지지정당으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고, 대통령 중심제보다는 내각책임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