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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학술회의 ‘김단야와 그의 시대’ …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기대

2024년 7월 2일 193

[초점] 학술회의 ‘김단야와 그의 시대’ …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기대 우리 연구소가 후원한 6·10만세운동 98주년 기념 학술회의 ‘김단야와 그의 시대’가 6월 10일 오후 2시 국회도서관 지하 1층 소회의실에서 열렸다. 소전재단, 김용만 국회의원실이 주최하고 6·10만세운동유족회, 시민모임독립, 김단야기념사업회(준)가 주관한 이번 학술회의는 이동섭 소전재단 이사장과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축사로 시작됐다. 본격적인 발표는 ‘고려공산청년회와 김단야’(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6·10만세운동과 김단야’(박종린 한남대 교수), ‘12월 테제와 김단야’(임경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스탈린 숙청과 김단야’(윤상원 전북대 교수) 순으로 이어졌다. 이준식 전 관장은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조선혁명을 추구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김단야도 ‘3·1운동의 후예’로 개신교에서 사회주의로 인식전환”을 이뤘으며 “사회주의 혁명가로 전환한 시점은 광둥성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1920년 4월부터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에 가입한 1921년 3월 사이일 것으로 추정”했다. 박종린 교수는 “6·10만세운동의 준비는 순종이 죽자 권오설 중심의 고려공산청년회의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와 김단야 중심의 상해임시특별연락부가 함께 진행”했으며 “5월 초 김단야와 권오설은 국내의 모처에서 회동했다”고 보았다. 또한 “권오설 중앙과 상해임시특별연락부의 관계는 일방적 지도-피지도 관계가 아닌 상호관계”라고 파악했다. 임경석 명예교수는 “1928년 12월 10일에 코민테른 정치비서부가 채택한 조선문제결정서인 12월 테제를 국제당을 좌우하는 소련 볼셰비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이해하면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국제당의 논의과정에 참여하지 못했고 단지 소련의 지시에 맹종하는 꼭두각시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입장이 학계의 주류적 시작”이었다면서 “하지만 조선인 각 대표자들의 문서는 12월 테제 작성의 모본이 됐고 국제당 조선 담당관들은

식민지역사박물관 오늘을 걷는 답사 〈영화 ‘서울의 봄’ 현장을 가다〉

2024년 7월 2일 174

[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 오늘을 걷는 답사 〈영화 ‘서울의 봄’ 현장을 가다〉, 두 차례 답사 진행 식민지역사박물관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역사학자와 함께 걷는 쿠데타의 밤길”을 주제로 한 6월 8일 1차 답사에 노영기 조선대학교 교수가 인솔자로 나섰다. 시작 전부터 많은 비가 내렸지만 3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여 이번 답사에 대한 관심과 열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답사는 1980년 10월 26일 쿠데타의 시작이었던 궁정동 안가 터 무궁화동산에서 시작하였다. 현재 공사중이어서 아쉽지만 길가에서 노영기 교수의 해설을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12·12쿠데타 반란군 지휘부가 있었던 경복궁 태원전으로 향했다. 태원전은 경복궁 안에 있는 곳임에도 처음 와보았다는 참가자들이 많았다. 경복궁이 조선시대의 왕궁으로 시간이 멈춰진 곳이 아니라 현대사까지 역사의 흐름이 이어지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워했다. 옛 보안사령부였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답사를 마쳤다. 12·12쿠데타 세력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던 장소에서 답사 참가자 전원이 역사적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단체사진을 찍으며 마무리했다. 한편 답사 참가자 10명은 식민지역사박물관까지 관람하고, 답사 소감을 나누고 헤어졌다. 6월 15일에는 “마을 학자와 함께 걷는 현충원에 그 사람들”을 주제로 답사가 진행되었다. 안내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김학규 소장이 맡아주었다. 채명신 장군,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오랑 중령 등 12·12와 관련된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의 묘소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군사 반란군과 반란군을 진압했던 사람들이 한 곳에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참가자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의 현장을 마주하고 있다는 소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현충원 묘역

우리가 그날을 기억하는 강제동원 역사의 증인이 되자

2024년 7월 2일 165

[초점] 우리가 그날을 기억하는 강제동원 역사의 증인이 되자 –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 개막식 “그날을 기억해” 갤러리 토크 현장 보고 5월 24일 〈강제동원 피해자운동 기록사진전〉이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개최되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고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가 후원한 이번 기록사진전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20주년과 역사적인 2018년 ‘강제동원 대법원판결’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 사진전은 특별법 제정과 대법원판결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이 투쟁의 과정에서 직접 남긴 서투르지만 유일한 기록사진과 그 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을 통해 인권 회복과 역사 정의 실현을 위해 오랜 시간 온몸을 바쳐 투쟁한 피해자, 유족 그리고 활동가들의 눈물과 지난 투쟁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날을 기억해” 갤러리 토크에서는 기록사진 속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했다. 행사에는 피해자와 유족들 그리고 오랜 시간 피해자들과 함께한 한국과 일본의 활동가들이 자리했다. 주요 참석자로는 강제동원 소송 원고 당사자 김정주 님, 김명배 님(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 이희자 님(야스쿠니 무단합사철폐 소송), 일본제철 소송 원고 이춘식 님의 자녀, 미쓰비시 히로시마 소송 원고 고 정창희님의 유족, 강제동원소송 변호인(장완익), 일본 활동가 야노 히데키 님(강제동원문제 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이치바 준코님(히로시마 미쓰비시 소송), 나카가와 미유키님(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 나카타 미쓰노부 님(일본제철 소송), 야마모토 나오요시님(야스쿠니 무단합사 철폐 소송, 한일회담외교문서 정보공개청구 소송) 등이다. 갤러리

제임스 H. 헤어의 『러일전쟁의 사진 기록』(1905)

2024년 6월 28일 602

[소장자료 톺아보기 59] 제임스 H. 헤어의 『러일전쟁의 사진 기록』(1905) A photographic Record of the Risso-Japanese War 제임스 H. 헤어(James H. Hare)의 『러일전쟁의 사진 기록 A Photographic Record of the Russo-Japanese War』은 1905년 뉴욕의 P.F. Collier & Son 출판사에서 초간 되었고, 2013년에 재출간되었다. 러일전쟁의 전 과정을 250여 장의 사진에 담아낸 전쟁화보로서 사진 저널리즘 분야의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등과 모서리에 가죽을 사용한 고급 양장본이며 세로가로 27×40cm의 큰 판형으로 총 256쪽이다. 이 책은 14장으로 구성되며 각 장의 앞 부분에는 각 전투의 경과와 의미를 간략히 서술하고 이어서 관련 화보를 수록한다. 각 장 제목은 다음과 같다. 1.러일전쟁의 원인  2.첫번째 전투 3.러시아의 전쟁 준비          4.조선에서 일본인과 함께 5.러시아군의 전선으로 진군 6.압록강 전투와 일본의 진격 7.여순항 포위전 개시  8.요양(遼陽) 전투 직전의 개전 준비 9.요양 전투    10.전쟁의 기록자들 11.사하(沙河) 전투 12.여순항 함락 13.러시아 해군력의 종말 14.봉천 전투 여기에 수록된 사진화보는 제임스 헤어를 비롯해 Victor K. Bulla, Robert L. Dunn, James F. Archibald, Richard Barry, Ashmead Bartlett, James Ricalton 등 총 7명의 사진작가가 러시아와 일본으로 파견되어 양국 군대에 종군하여 직접 촬영한 것이다. 따라서 러일전쟁과 관련한 일본측 전쟁화보집과는 달리 제3자로서의 객관적 시각으로 전쟁 상황을 상세히 담아냈다는 점에서도 이 전쟁화보집이 갖는 의의가 남다르다. 또한 이 화보집이 전쟁의

민족사랑 2024년 6월호

2024년 6월 24일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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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回憶) ①

2024년 5월 31일 258

[자료소개]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回憶) ① 이번에 소개하는 자료는 조선민족혁명당의 선전 주간지 『앞길』에 실린 「혁명성지 순례: 간도 신흥학교 회억」이다. 이 글은 1937년 3월~5월 사이 제4호부터 제14호까지 총 11편이 연재되었으나 현재 4편의 결락본(4호, 8호, 9호, 12호)이 있어 여기서는 7편만 수록하였다. 일부 한자투는 현대어로 풀어 썼고 판독되지 않는 글자는 □로 표시하였다.―편집자 주 간도 신흥학교 회억-1,000여 명 조선건아가 복수의 검을 갈던 곳(2) 조국광복의 위대한 사업을 준비 실행함을 기약하며 혁명 청년과 군중을 양성 훈련한 책무를 자임한 지도인물인 그 선생네가 전 가족을 거느리고 새책원지(策源地)로 이주함은 얼핏 보고 잘못 생각하면 한 큰 실책이며 또는 피란을 겸하여 위함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없지 아니 하리라마는 그네들은 당시 사회 정도에 있어서 내외국의 정세에 매우 통달하고 신구 교체 시기의 제반 사회상의 장단점을 잘 이해하는 선각자들이었다. 구구한 자기 가족의 안전을 위하는 피란을 겸(兼)코지 함도 아니오, 또 그 자신의 행동에 허물됨이 없지 아니할 것도 잘 아는 바이었다. 그러나 그분네가 그와 같이 가족을 이끌고 □가 이주함은 두 가지의 큰 결심과 고충이 있는 것이었다. 첫째는 자기네가 조국광복의 대업을 성공하기 전에는 차라리 이성의 원혼이 될지언정 적의 굴레와 유린하에 있는 고토(故土)를 다시 밟지 않고자 함이며 둘째는 자기네의 다정하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 처자들로 얼마 동안이나마 적 일본의 노예됨을 차마 보지 못하겠는 까닭이었다. 이 얼마나 확고한 결심이며

단양역 앞으로 다시 옮겨진 ‘경경선 전통지지 기념비(1942년)’

2024년 5월 31일 359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8] 반도종관철도인 ‘중앙선’이 막바지에 ‘경경선’으로 이름이 바뀐 연유는? 단양역 앞으로 다시 옮겨진 ‘경경선 전통지지 기념비(1942년)’ 이순우 특임연구원 생각건대 본선(本線)은 반도중앙부(半島中央部)를 종관(縱貫)하여 자원개발(資源開發)에 기여(寄與)하고 또 부산경성간(釜山京城間)의 보조간선(補助幹線)으로서 경부본선(京釜本線)의 수송(????送)을 완화조절(緩和調節)하여써 대륙경로(大陸經路)를 증강(增强)할 뿐 아니라 반도(半島)의 철도망 완성(鐵道網 完成)을 촉진(促進)하고 나아가서는 대동아권내(大東亞圈內)에 있어서 조선(朝鮮)의 지위직능(地位職能)을 확립확충(確立擴充)케 하는 것으로 실(實)로 조선교통사상(朝鮮交通史上)에 일신기원(一新紀元)을 획(畫)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 본선(本線)의 사명(使命)이야말로 매우 중대(重大)하다. 이것은 1942년 4월 1일에 경북 안동역 구내에서 거행된 경경선(京慶線, 통칭 ‘중앙선’) 전통식(全通式)에서 미나미 총독(南總督)이 고사(告辭)를 통해 설파한 내용이다. 여기에는 이른바 ‘조선반도 제2의 종관선(縱貫線)’이라 일컫는 경경선을 개설하여 이를 경부선 철도의 보조 선로로 활용하고자 했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또한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에 걸친 내륙 오지(奧地) 쪽의 자원개발을 촉진함과 아울러 장차 내선만지간(內鮮滿支間; 일본, 조선, 만주, 북중국 사이)의 최단첩로(最短捷路)를 형성하는 조선 철도의 위상과 기능을 크게 강화한다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반도의 내륙을 종단(縱斷)하여 관통하는 철도를 부설하려던 구상은 일찍이 이른바 ‘총독정치’가 막 개시되던 1910년대 초반부터 구체화하던 것이었는데, 『매일신보』 1912년 8월 31일자에 수록된 「중앙선(中央線)의 계획(計劃)」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마산(馬山)을 기점(起點)으로 하고 대구(大邱)로부터 충주(忠州)를 경(經)하여 경성(京城)에 지(至)하는 도(道) 중앙선(中央線)은 기(旣)히 철도국(鐵道局)의 예정선(豫定線)인데 차등(此等) 부설(敷設)의 완급(緩急)은 대구(大邱)는 물론(勿論)이오 각지(各地)에 다대(多大)한 영향(影響)이 보급(普及)하고 조선계발상(朝鮮啓發上) 중요(重要)한 문제(問題)인 고(故)로 신일(晨日) 대구상업회의소연합회(大邱商業會議所聯合會)에 제의가결(提議可決)

장석천이 일제 당국의 심문에 대처하는 법

2024년 5월 30일 307

[연구소 글방 13] 장석천이 일제 당국의 심문에 대처하는 법 –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장석천의 심문 투쟁 조한성 출판팀장 1929년 11월 전남 광주에서 두 차례의 큰 학생시위가 벌어진 후의 일이다. 일제 공안 당국은 광주의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나갈까 봐 전전긍긍했다. 이들은 보도 검열을 통해 광주에서 벌어진 두 번째 시위에 대한 보도를 완전히 틀어막았다. 그 흔적이 당시 일간지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들은 이 후에도 강력한 보도 통제를 실시해 언론사들이 광주 시위 관련 기사를 싣는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동아일보』는 독자들의 요청에도 광주 시위 관련 보도를 할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전남 광주 사건에 대하여 독자 제씨로부터 지금 형편이 어찌 되어 있는가를 여러 번 물으시나, 이 사건은 경무 당국으로부터 신문을 게재하지 말라는 경고가 있으므로 당분간 부득이 보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동아일보』1929.11.16) 일제가 사건의 보도를 막자 조선 사회는 크게 동요했다. 애초에 광주의 시위가 조선인의 민족감정을 건드리면서 발생한 데다가,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조선인 학생만 과도하게 처벌해 분노를 산 상태였다. 그런데 사건 보도마저 틀어막자 “일본인 의용소방대가 학생들을 학살했다더라”, “나이 어린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폭행했다더라” 같은 온갖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조선 사회의 여론은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전국으로 퍼져나간 시위 1929년 12월 3일 새벽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시내 전문학교, 고등보통학교 등 각급 학교에

민족사랑 2024년 5월호

2024년 5월 29일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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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군의 홀로 회원, 함명준 군수

2024년 5월 29일 320

[인터뷰] 강원도 고성군의 홀로 회원, 함명준 군수 방학진 기획실장 우리 연구소가 33년 동안 이어지다 보니 10년, 20년은 물론 30년 가까이 후원해 주시는 회원분들이 많다. 우리나라 17개 광역단체와 226개 기초단체에 고르게 회원님들이 분포되어 있는데 전국적인 회원 분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 2,585, 경기 2,495, 광주 557, 부산 521, 인천 513, 충남 469, 경남343, 전남 324, 대구 321, 경북 313, 대전 312, 강원 264, 전북 253, 충북253, 울산 140, 제주 127, 해외 126명, 세종 94(2023년 말 기준) 그러나 회원이 226개 모든 기초단체에 있는 것은 아니며 단 한 명의 회원도 없는 지역도 더러 있다. 한 지역에 홀로 있는 회원은 더욱 소중하다. 그래서 10여 년 전에 ‘홀로 회원’들에게 전화로나마 인사도 드리며 절대 탈퇴하시면 안된다고 당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원도 고성군에는 우리 연구소 회원이 딱 한 명뿐이다. 그래서 그 회원의 이름은 잊지 않고 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2020년 강원도 고성군수 재보궐선거 당선자로 낯익은 이름을 보게 되었다. 함명준. 고성군에 유일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군수로 당선된 것이다. 우리 연구소 회원 중에는 국회의원, 시장, 군수 등 정치인이 없지 않지만 한 지역에 유일한 회원이 군수에 당선되다니 신기했다. 함명준 군수는 2004년 3월 22일 우리 연구소 회원에 가입하기 전 약 15년 동안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일했고 이후 짧게 건설업에 종사했다. 어떤 계기로 우리 연구소의 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