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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랑

촛불혁명을 이끄는 위대한 시민의 힘을 보다

2017년 2월 22일 1420

2016년 10월 19일에 시작된 시민들의 촛불혁명이 100일을 넘겨 계속되고 있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천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한겨울의 추위를 함께 이겨냈다. 아직 승리를 단언하기에는 이르지만 시민들의 촛불은 결국 박근혜와 최순실이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김기춘과 조윤선을 구치소로 보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 너무나 힘들어 했던 시민들이 광장에서 함께 촛불을 든 시민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힘을 받고 위안을 얻는 아름다운 경험을 나누고 있다. 우리 연구소도 매주 토요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저지하기 위한 서명 운동을 벌이고 애드벌룬으로 만든 평화의 소녀상을 앞세우고 촛불혁명의 대열에 함께 하고 있다. 전국의 회원들이 민족문제연구소 깃발 아래 함께 싸우고 있을 것이다. 대전지부 박희인 회원은 대전 촛불집회의 사회자로 맹활약을 하며 촛불혁명을 이끌고 있는 위대한 시민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박희인 회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국 각 지역에서 촛불혁명에 함께 하고 있는 회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인터뷰는 이메일을 통해 이루어졌다 문 : 지금까지 해온 활동을 중심으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 현재는 대전지역 60개 단체로 구성된 남·북·해외 3자 연대 조직인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전본부’ 집행위원장과 (사)우리겨레하나되기대전충남운동본부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1999년부터 대전지역에서 시민사회 활동을 시작하였으니 2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1999년에 미군의 노근리 학살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면서 노근리뿐만 아니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미군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대전충남본부 사무국장을 5년여 간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 소개

2017년 2월 22일 1392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하며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감성과 문화적 차이도 있지만 아직 민중가요의 실용성이 남아 있음을 이번 촛불집회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민중가요 가운데 하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란 제목으로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박근혜 정부와 보수세력의 금지곡이나 다름없는 이 노래의 영화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모하게 강행했다. 전투 속에서 불러지던 노래가 전투 속에서 살아남아야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미국 국가 ‘성조가’나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그리고 대한민국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공통점은 적군과 군대와 독재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구하기 위해 불렀던 애국의 노래였다. ‘이것도 나라냐?’는 촛불정국에서 회자되었던 통렬한 비탄의 국민 카피였다. 그것은 명백히 국민이 국가를 부정한 사건이었다. 국가는 원시부족부락만도 못한 집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의 총체적 모순은 곳곳에서 곪아터졌지만 그때마다 야매 봉합술로 덮어버리고 묻어버리며 입을 막았던 탓이다. 이 모든 현상은 대한민국이 진정한 반성과 과거청산의 참회 없이 출발했다는 데 기인한 것이다.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에 대해 주기적으로 상기하고 있다. 그들이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그 아픔을 잊지 않도록 상기하는 중요한 정책으로 영화를 선택했다.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쉰들러 리스트’ ‘안네의 일기’ 같은 영화들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고,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며 다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영화로 만들어 역사 바로

연구소, 명예훼손 소송에서 잇따라 승소

2017년 2월 23일 2050

대법원 제1부(재판장 이기택)는 지난 1월 25일, 우리 연구소가 박정희혈서조작설을 유포한 강용석 변호사, 정미홍 전 KBS아나운서, 일베회원 강모 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서 피고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각각 500만 원, 300만 원, 3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하라는 항소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소송을 시작한 2014년 7월 17일로부터 2년 7개월 만에 최종판결이 난 것이다. 연구소는 소문으로만 떠돌던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혈서의 사실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하여,<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기 직전인 2009년 10월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의 「혈서 군관지원」이란 기사를 찾아내 이를 사전에 수록한 바 있다. 그러나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이 제기한 <친일인명사전> 게재금지 및 배포금지 가처분신청이 “이유없다”고 기각되었음에도 이후 의도적인 혈서조작설 유포가 계속되었다. 이에연구소는 “날조스토리가 등장”, “들통난 혈서기사조작” 따위로 공공연하게 허위사실을 전파한 강용석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앞서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들은 원고가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기사를 꾸며내었다는 취지로 ‘원고가 조작한 것’, ‘원고가 허위로 꾸며낸 사기극’ 내지 ‘원고가 날조한 이야기’라는 표현행위를 한 것이고, 이는 단지 원고에 대한 비난의 의견을 표명한 것을 넘어서 객관적으로 입증이 가능한 영역에 관한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연구소는 이번 대법원 판결이 허위사실 유포와 근거 없는 음해가 근절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번 소송에서 승소한 데는 우리 쪽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지향의 이상희, 김묘희 변호사의 역할이 컸다. 두 번째 승소는 보수단체인 나라사랑바른학부모실천모임 대표 방모 씨를

최지한 회원이 교과서를 비롯한 현대사 관련 자료를 기증해

2017년 2월 22일 989

지난 1월 2일, 최지한 회원(경남서부지부)이 2012년에 이어 해방 후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다. 이번에 기증한 자료는 <우리는 착한6학년>(1956), <다른 나라의 생활>(1956)등 교과서류와 <한영군용단어와 숙어의 발음책> 등 해방 이후 발행한 것으로 보이는 도서와 문서류다.   심정섭 지도위원 제50차 자료기증, 도서류 총 15점 보내와 지난 12월 29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50번째로 자료를 정리해 보내왔 다. 이번 기증 자료는 <구례군지>(2005),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1982), <보성문화>(2015) 등 총 15권의 도서다.   지난 1월 5일, 박도 회원이 <韓國痛史>(1993) 등 총 5권의 도서를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회원들이 보내온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들

2017년 2월 22일 1197

사진으로 보는 연구소 소사·21 ‘김영란법’ 시행으로 선물 주고받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 관련 업계가 울상이라고 합니다. 당장 피해가 적지 않은 화훼, 축산업계 등에 대한 대책이 절실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동안 ‘선물’을 가장한 뇌물이 그렇게 많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듭니다. 여하튼 선물 받고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겠지요. 이번 호에서는 연구소로 전달되는 선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한때 시민사회단체와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연대는 입금입니다.’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연구소처럼 대부분의 운영 경비를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하는 단체들로서는 100%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정하고 불의한 현실에 대해 비분강개만 하고 만다면 그것은 술 한 잔 마시고 이불 뒤집어쓰고 “대한독립만세” 몇 번 외치다 골아 떨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연구소 입장에서는 매일 한두 분이라도 회원이 되어 주시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기쁘고 보람 있는 순간은 바로 회원들이 보내주시는 선물을 받을 때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회원님들이 보내주시는 선물은 곧 칭찬과 격려이기 때문입니다. 연구소 설립 초기에도 선물이 간간히 오기는 했지만 택배가 일상화되고 오마이뉴스와 공동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민모금을 벌였던 2004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답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종류는 주로 쉽게 상하지 않을 먹을거리들이 대부분으로 김, 현미과자, 꿀, 고구마, 오징어, 감귤, 배, 포도, 사과, 곶감, 김치, 유자차, 과메기, 찹쌀떡, 한과, 매실 원액, 동충하초, 된장, 고추장, 순무 등 전국의 특산물을

유관순 열사의 스승 박인덕, 항일·친일·친미를 넘나들다

2017년 1월 23일 8631

2016년 12월 28일 교육부는 국민들의 무수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한국사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을 내놓았다. 앞서 자신들이 검정 통과시켰던 기존 한국사 교과서를 ‘좌편향’이라 매도하고,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며 수십 억의 홍보비를 들여 대대적인 홍보도 진행했다. 7편의 홍보 영상 중 두 편의 영상 주인공은 유관순 열사이다. 그 첫 영상에서는 기존 교과서에 유관순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초・중등 교과서에는 모두 있다는 비판을 받자,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없다는 내용으로 바꿔 두 번째 영상을 발표했다. 이 영상의 도입부는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다”라고 어느 역사학자가 주장했다는 글로 시작한다. 즉 유관순을 친일파가 영웅으로 만들었기에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집필자들이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초・중등학교에서 이미 다 배운 유관순에 대해 고등학교에서는 세세히 다루지 않고 오히려 3・1운동에 대해 심화학습을 진행하는 것이 교육과정상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위 홍보영상에서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란 주장만은 사실이다. 해방 직후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유관순을 대중적으로 알린 데에는 친일파이자 유관순의 스승인 박인덕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성 친일파 중 유일하게 체포와 투옥 박인덕(朴仁德 1897~1980, 창씨명 永河仁德)은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다닐 때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유관순을 비롯한 이화학당의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때 박인덕은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5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투옥 당시 유관순을 감옥에서 만났고, 해방 직후 이 사실을 이화여자중학교 교장인 신봉조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1978년

이승만 독재의 서막 – 부산정치파동

2017년 1월 23일 5994

대통령 vs 국회 : 두 개의 자유당 1950년 5.30 총선으로 구성된 국회는 이승만에게도,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에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총선의 결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과 무소속 국회의원들이 대거 당선되어 다수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도파의 주요 지도자들이 납북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지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원내단체 신정동지회를 중심으로 70명 정도의 국회의원을 우호적인 세력으로 확보했지만 1951년 초 세상에 드러난 국민방위군사건, 2월의 거창양민학살사건 등 계속된 실정(失政)으로 그마저도 지키기 힘들어졌다. 1951년 5월 이시영 부통령이 국민방위군사건의 미흡한 대처를 비판하며 사임하자 국회는 민국당의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민국당 소속 부통령의 출현은 이승만의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승만은 거대 여당의 조직과 대통령직선제 개헌으로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먼저주력한 것은 거대 여당의 조직이었다. 이를 통해 원내 지형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시키고 1952년에 있을 정부통령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당은 원내와 원외에서 동시에 추진되었다. 원외 신당은 이범석의 족청 계열과 국민회 계열 등이 주도했다. 원외 세력은 이승만이 원하는 대로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당을 만든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그러나 원내의 신당 추진은 이승만의 의도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원내의 신당 추진은 신정동지회와 공화구락부가 통합해 만든 공화민정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공화민정회에서 신당의 조직을 주도한 세력은 소수의 공화구락부 계열이었다. 신정동지회 계열은 다수이긴 했지만 국민방위군사건에 연루되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공화구락부 계열은 신당을 이승만 지지정당으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고, 대통령 중심제보다는 내각책임제를

[인터뷰]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과 독립운동에 대한 소회

2017년 1월 23일 1761

문 : 본인 소개와 더불어 민족문제연구소와 인연을 맺게 된계기는? 답 : 나는 1945년 해방둥이다. 해방 전 해 나의 아버지는 중학생이었다. 할아버지는 외아들이 대동아전쟁 학병으로 끌려갈까 도쿄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한 아들을 곧장 결혼시켜 그 이듬해 내가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출생부터 우리 현대사와 맞물렸다. 나는 중학교까지 고향 구미에서 자랐다. 대학교 졸업 후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전방 소총소대장으로 병역을 마친 뒤 곧장 국어교사가 됐다. 2004년 정년을 5년 남긴 채 조기퇴직한 뒤 지금은 강원도 원주에서 시민기자 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의 인연은 연구소 전신인 반민족문제연구소부터 시작된다. 당시 김봉우 선생이 소장이었는데, 연구소 소식을 언론으로 가끔 접하면서 인연을 갖고 싶었다. 2002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된 후 당시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님을 인터뷰하게 되면서 인연을 갖게되었다. 좀 쑥스러운 얘기지만, 나는 2004년 6월에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발간하여 눈빛출판사에서 인세를 받은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민족정기 선양을 위해 수고하는 연구소 가족들에게 밥을 한 끼 사고 싶어 이곳을 처음 찾게 되었다. 오늘 10여 년 만에 다시 찾아왔는데 옛 모습 그대로다. 연구소 옆에는 그새 교회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는데. 재벌들은 무슨 단체에는 돈을 수십억씩 퍼붓고, 한 승마 선수에게도 수십억 원짜리 말도 그저 사주면서 우리 민족정기를 지켜나가는 연구소는 마냥 외면한다니 고 권중희 선생이 안두희에게 대침을 찔러 응징했듯이 나도 그들을 혼내주고

[기고] 민족문제연구소의 품에서 펼쳐 온 보추협 활동 13년을 되돌아보며

2017년 1월 23일 2151

안녕하세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여러분.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 대표 이희자입니다. 2017년정유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다 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13년 전을 떠올리며 회원분들께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활동가도 지식인도 아닌 저는 일제의 강제동원에 아버지를 빼앗긴 유족입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흔적을 하나하나 찾다보니 그것이 저절로 운동이 되었고, 29년간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활동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기록 여섯 건을 찾았습니다. 모두 일제가 작성했고, 거기에는 징용 나가실 때 우리 집 주소가 그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1944년 강화군 송해면을 떠나 용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전쟁터로 끌려가셨고, 그때 저는 겨우 돌을 갓 지난 나이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해방을 코앞에 둔 1945년 6월 11일 중국 광서성 전현 181 병원에서 전병사(戰病死)하셨습니다. 저는 관련 기록이 2급 비밀문서로 분류되어 있어서 2003년에야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1959년 4월 일본이 아버지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시켰다는 기가 막힌 사실도 2003년 야스쿠니 신사에서 확인했습니다. 아버지의 기록을 하나하나 찾으면서 도대체 왜 일본은 이 사실들을 가족에게 알려주지 않았는지 화가 났습니다. 만약 내가 스스로 나서서 찾지 않았다면 아버지 죽음에 관한 기록은 가족들도 모른 채 역사 속에 묻혀 버렸을 것입니다.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고 아직도 분통이 터집니다. 보추협의 설립과 활동 아버지 기록을 찾은 계기로 저는 다른 강제동원 피해자분들과 유족들과 함께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를 설립했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사실을 찾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5·16쿠데타 발상지’ 문래공원 박정희 흉상 철거 비사

2017년 1월 23일 3905

국회의 박근혜 탄핵소추 의결을 5일 앞둔 지난해 12월 4일, 영등포구 문래동 근린공원의 박정희 흉상에 붉은색 스프레이가 뿌려지고 코 부분 등이 망치로 훼손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일주일 후 영등포경찰서는 흉상 훼손 당사자로 최모 씨(32·조형미술작가)를 특수손괴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기자들은 가장 먼저 ‘동종 전과 용의자’에게 전화로 사건을 친절히 설명하고 난 후, ‘혹시 이번에도 네가 한 짓 아니냐?’ 혹은 ‘이런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동종 전과 용의자는 바로 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입니다. 감시카메라의 보호까지 받고 있는 문래공원 박정희 흉상이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다시금 수난시대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번 달에는 박정희 흉상 수난사의 압권인 2000년 11월 5일 박정희 흉상 철거의 숨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DJP연합정부를 내세운 김대중 후보는 1998년 대선을 앞두고 ‘TK의 대부’라 불리는 신현확을 만나 대통령에 당선되면 동서화합 차원에서 박정희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결과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공동여당인 새천년민주당, 자민련은 물론 야당인 한나라당까지 모두 건립에 찬성합니다. 이에 대해 270여 시민사회단체들은 2000년 9월 28일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를 결성하였고,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아 반대운동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재야 출신 국회의원들조차 박정희기념관 반대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민연대가 구사할 수 있는 전술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박정희기념관 반대 여론 환기를 위해서 뭔가가 필요하다고 다들 생각하던 차에 방학진 당시 조직국장이 박정희 흉상 철거를 제안합니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