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야스쿠니 문제의 UN 인권기구 제소를 위한 국제회의 열려
지난 10월 24일 국회에서는 침략신사 야스쿠니의 문제를 보편적인 국제 인권의 시점에서 조명하는 국제회의가 열렸다. ‘국제인권의 시점에서 야스쿠니를 보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국제회의는 야스쿠니 문제를 UN 인권기구에 제소하기 위해 기획된 행사로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와 국회 강창일 의원이 주최하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연구소 공동주관으로 진행되었다. 강창일 의원, 이해학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공동대표, 기무라 요고(木村庸五) 아베수상야스쿠니참배위헌소송 변호단장의 개회사에 이어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을 제안하고 이끌어온 서승 리츠메이칸대학 교수가 ‘국제인권의 시각에서 야스쿠니를 본다’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였다. 이어서 한일 양국의 야스쿠니문제 전문가들이 주제발표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에다 아키라(前田朗) 도쿄조형대학 교수-‘금이 간 아름다운 나라, 이행기 정의의 관점에서 본 식민지주의’,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근현대연구실장-‘야스쿠니신사 문제의 국제화를 위한 제언’, 아사노 후미오(浅野文生) 야스쿠니합사철회소송변호단 변호사-‘국제인권의 시점에서 본 야스쿠니 소송’, 즈시 미노루(辻子実)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촛불행동 공동대표-‘야스쿠니반대운동의 현황과 과제, 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일본국헌법 개정과 야스쿠니’, 김영환 야스쿠니반대 공동행동한국위원회 사무국장-‘한국의 야스쿠니반대운동, 그 성과와 과제’ 등 모두 6명의 발표 뒤에 종합토론이 이루어졌다. 이번 회의에는 야스쿠니에 가족이 합사되어 있는 한국의 유족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연구자, 변호사, 활동가 등 80여 명이 참가하였다. 참가자들은 이번 회의를 통해 야스쿠니 문제를 UN 인권기구에 제소하기 위한 절차를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국제사회에 보다 설득력 있게 호소할 수있는 논리의 개발을 위해 관련 연구를 심화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야스쿠니에 부당하게 합사된 가족의 이름을 뺄 것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한 오사카・도쿄집회 일본 시민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뜻 모아 기금 전달
지난 10월 8일 오사카에서, 11일에는 도쿄에서 일본 시민들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를 공유하고 뜻을 모으기 위한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작년 11월에 결성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일본건립위)이 주관했다. 연구소에서는 이이화 건립위원장과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이희자 대표,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김승은 자료실장,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등이 참여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한 집회가 오사카 지역에서 열린 것은 처음이다. 리쓰메이칸대학 코리아연구센터장 가쓰무라 마코토 교수가 행사장 마련 등에 애써주었으며, 연휴 첫 날임에도 청중들이 100명을 넘었다. 먼저 나고야대학 야스카와 준노스케 명예교수가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의 민낯, 그가 아시아 멸시와 침략을 어떻게 선도했는지에 대해 강연했다. 이어 이이화 건립위원장이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와 그것이 어떻게 기억되어 왔는지 강연한데 이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를 역설했다. 강동민 자료팀장이 그동안 연구소가 어떻게 자료를 수집하고 전시 활동을 펼쳐왔는지 소개한 영상을 상영하고, 김승은 자료실장이 식민지역사박물관 구상과 건립 운동의 진행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식민지역사박물관의 역할 중 하나로 한일 연대의 역사를 미래 세대들에게 알린다는 점을 꼽았는데, 이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통해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투쟁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한일 시민들의 교류를 이어가고 싶다는 이희자 대표의 메시지와 맞물려 청중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일본건립위 서승 공동대표의 발언으로 오사카 집회는 마무리되었다. 도쿄에서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집회가 열렸다. 연휴를 피하기 위해 평일 저녁에 개최할 수 밖에 없어 참가자가 50여명에 머물렀지만 대부분 그동안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얼굴들이었다. 일본건립위 활동이 조금씩
돼지저금통에서 국가보상금까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성금 이어져
지난 8월 29일 국치일에 시작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시민의 힘으로!” 모금캠페인이 뜨거 운 반응을 얻고 있다. 전국 각지는 물론 해외로부터도 귀한 정성이 속속 답지하여 본격적인 모금 을 시작한 지 58일 만에 시민 331명이 참여하여 1억 원을 돌파했다.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힘을 모아주고 있는 이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개한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문환이·곽경택 부부는 10월 8일 결혼 5주년을 맞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응원하는 뜻으로 건립기금 365,000원을 보내왔다. 문환이·곽경택 부부는 매년 ‘결혼기념일 기념 365기부’를 통해 자신들의 결혼을 의미 있게 기념해 왔는데, 지금까지 쌍용차 해고노동자,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 강정마을, 세월호 유족들에게 기부를 해 왔다고 한다. 얼마 전 제주도를 덮친 태풍 ‘차바’로 피해를 입었음에도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발기인으로 참여해준 문환이·곽경택 부부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두 분이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지난 달 광명 한울림교회 청소년들의 성금 소식을 전한 바 있는데 청소년들의 모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진주에 살고 있는 김현수 학생은 저금통에 한푼 두푼 모은 용돈 14,900원을 식민지 역사박물관 건립기금으로 기부해 주었다. 김현수 학생은 지금도 계속해서 성금을 모으고 있다. 빠듯한 용돈을 아끼고 아껴서 보내 준 청소년들의 소중한 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모든 가족이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으로 참여한 회원도 있다. 제주도의 김영석 회원 가족(성유현, 김규현, 김수윤, 김수빈)과 전주의 류정협 회원 가족(윤미림, 류경균)은 가족 모두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운동에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가족들이 함께
[ 시론 ] 역사의 심판을 받겠는가
이이화 역사학자 / 시민역사관건립위원회 위원장 현대 한국은 온 세계의 모순을 걸머진 화약고가 되어 있다. 우리는 식민지 경험에 이어 분단구조 아래에서 독재정권을 겪으면서 빛나는 민주화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런데 보수반동 정권이 연달아 들어서서 모든 걸 뒤엎어 놓았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 갈등과 분열의 양상이 온 사회에 걸쳐 짙게 깔렸다. 무엇보다 인사정책을 보면, 고위 공직자를 불법으로 부동산 투기를 일삼고 요리조리 병역을 기피하고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채웠다. 게다가 무슨 은혜를 갚는다고 해 자신의 선거캠프에 있던 사람이나 곁에서 아첨하는 인사를 골라 요직에 앉혔다. 이는 바로 족벌주의나 환관정치로 추악한 권력의 남용이었다. 다음. 재벌에게 법인세 인하 등 온갖 특혜를 주고 노동자의 권익을 짓밟았으며 민주인사를 종북좌파로 몰아붙여 숨을 죽이게 만들었다. 남북대화는 파탄을 가져왔으며 사드 배치 문제로 인접국과 마찰을 빚고 있다. 일본과는 위안부 문제를 두고 단돈 10억엔을 받고 마무리 짓는 해괴한 일도 벌였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규명을 막고 고사하게 만들었고 시민단체의 활동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게다가 마침내 ‘박근혜 게이트’(최순실 게이트는 틀린 말)가 곪아서 터졌다. 양식이라고는 한 푼 없는 무식하고 사이비종교를 받드는 최순실이라는 간악한 여인이 대통령을 등에 업고 막후에서 국정을 농단하다 못해 기업인에게 강요해 비리재단을 만들고는 사유화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9세기 끝 무렵, 고종과 민비는 진령군이라는 무당에게 빠져 국고를 탕진하였고 진령군은 그 위세를 업고 온갖 이권을 차지하고 재물을
식민지배의 서막이 열리다 – 통감부개청 기념 엽서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보호국화한 일제는 침략정책의 지휘부인 통감부 개청을 서둘렀다. 「한국통감부개청기념」 엽서는 1906년 일제가 통감부를 새로 설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했다. 엽서는 근대 통신 수단의 하나이지만 일제가 발행한 관제엽서는 식민지 지배정책을 미화하고 근대화 업적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도쿄의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제작한 「한국통감부 개청 기념엽서」의 기본모양은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의 물결 속에 태극기의 4괘(건곤감리)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휘감고 돌아 태극문양을 감싸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특이한 점은 이 엽서가 정부기관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민간 백화점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통감부 개청 시기에 공식적으로 제작된 관제엽서는 그 종류가 몇 점 되지 않고 통감의 초상이 삽입되어 있지 않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하는 대신,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조인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로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다음 날 수옥헌(현 중명전)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일본 ‘천황’의 국서를 전달했다. 15일에 다시 하야시 공사와 함께 조약 초안을 제시하며 체결을 강요하고 각료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이를 종용했다. 17일 어전회의가 열리자 하세가와 한국주차군 사령관이 완전무장한 일본군을 앞세워 경운궁을 포위했고, 서울 일대에도 무장한 군대가 배치되었다. 수옥헌 내 회담장에도 착검한 헌병경찰들이 들어가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했다. 이토는 대한제국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연구소 인턴십, 배우고 성장했던 귀한 시간!
김한결 샨티학교 고등부 3학년 내가 다니는 샨티학교는 중고등 통합 대안학교이다. 경북 문경에 있는 작은 기숙사형 학교인 만큼 아이들끼리의 친밀감이 높다. 우리 학교의 자랑거리는 해외이동 학습인데 고등학교 3학년을 제외한 나머지 학년은 2학기 두달 동안 해외를 가서 보고 느끼는 학습을 한다. 고등학교 3학년은 해외이동 대신 필수과정이 있는데 사회생활과 직장체험을 하는 인턴십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자신이 원하는 분야의 단체나 직장을 스스로 찾고 섭외를 해서 3개월 정도 무급으로 예비 직장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워낙 근현대사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나는 인턴십을 생각할 때쯤 그런 방면으로 알아보고 있었고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런 방면에서 독보적인 단체였기 때문에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고3이 되는 겨울방학에 지인의 소개로 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했다. 첫 방문이었는데도 연구소분들은 참 편하게 대해주셨고, 책이나 자료가 많고 전시관도 있어 내가 배우기에는 참 좋을 곳이라고 생각을 했다. 학교에 복귀 후 학교 일정에 맞춰서 생활해야 했기 때문에 어떻게 연락을 할 방법이 없어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늦게나마 연락을 해봤는데 정말 다행히도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그 후 간단하게 국장님과의 인터뷰를 마친 후 인턴십 요청을 했고 이를 흔쾌히 받아주셨다. 나는 연구소 인턴십을 잘 해내고 싶어서 학교에서 틈만 나면 연구소가 발간한 책들을 읽었고 학교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기에 직접 연구소 근처에 원룸을 구했다. 인턴십 일정에 맞춰 생활목표를 짜는 등 준비를
독립투쟁의 성지 만주 연해주를 가다
∷ 회원마당 독립투쟁의 성지 만주 연해주를 가다 정용택 수원지부 회원·경기도교육청역사교육위원장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고 경기도교육청과 경기농협에서 후원한 서전서숙 개교 110주년을 기념하여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독립투쟁의 흔적을 찾는 학술답사에 참여하였다. 언론 등을 통해 낯익은 분들이었지만 사적인 만남은 없었던 김삼웅, 서중석, 윤경로, 임헌영 선생 그리고 여러 단체에서 온 17명이 일주일간 동고동락한 뜻 깊은 기회였다. 우리 일행이 다녔던 연해주와 중국 동북부의 지린과 헤이룽장은 한말 동포들이 먹고 살려고 그 땅에 숨어들어가기 전까지는 동물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한 그런 수풀이거나 황무지였다. 동포들이 들어가 억척스럽게 갈고 가꾸어서 사람이 겨우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갈 무렵 조선은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에 의하여 망해가고 있었다.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우국지사들은 지지리 못나고 억울하게 쫓겨 간 이들이 일군 땅에서 독립을 도모하였다. 이들이 없었으면 독립운동기지 건설도 없었으리라. 이들의 피눈물이 없었다면 신한촌도 북로군정서도 청산리 봉오동 전투도 없었으리라. 답사의 처음 3일간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연해주에서 진행되었다. 이상설, 최재형, 홍범도와 관련된 권업회, 신한촌의 흔적을 보았고 1937년 스탈린에 의하여 수십만명의 동포들이 죽음의 열차를 타야만 했던 라즈돌리노예역(驛)과 이상설 선생 유허비, 전로한족대표자회의가 열렸던 곳, 최재형의 집, 안중근을 비롯한 12인의 단지 동맹비를 돌아보았다. 다음 3일간은 중국의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서 진행되었다. 매일 수백km를 달려서 가고 또 갔다. 서전서숙이 있었던 용정, 왕청현 라자구의 사관양성소, 수분하 대전자지구, 밀산 서일 총재 유적지와 한흥동, 한국독립군과 관련된 동녕현성 등이었다. 이번 답사는 지난해까지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경제활동
∷ 회원마당 이 글은 지난 8월 서강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박미아 회원이 학위논문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경제활동 ; 1945~1950년 암시장을 중심으로>를 직접 요약한 것으로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엮은이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의 경제활동 박미아 서울서부지부 회원 오늘날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반도 출신의 동포들은 ‘재일동포’ ‘재일교포’ 등의 일반적 호칭 외에도 식민지기와 분단 역사를 반영한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이 정치를 함의를 지닌 채 사용되고 있고, 복잡하고 다양한 존재의 방식을 수렴하고자 하는 의도로 ‘자이니치(在日)’ ‘재일코리안’ 등이 보편적인 용어로 대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거주하기 시작해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정주하게 된 이들의 경제활동을 ‘암시장’이라는 특수공간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해방 이전부터 일본 사회에서 최말단의 직업에 종사하거나 강제연행으로 인해 전쟁산업에 종사했던 조선인들은 이러한 일본 경제의 중심축이 붕괴되면서 전면적인 실업상태를 맞이했다. 실업 문제는 일본인에게도 동일한 상황이었으나 조선인 대부분은 해방 이전부터 불안정한 직업을 전전하는 상태였으므로 실업과 해고의 비중은 더욱 높아진 것이다. 국가의 역량을 전쟁에 총동원했던 군수산업 중심의 경제구조가 패전으로 인해 괴멸되면서 암시장은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났던 특이한 장이었다. 일부 자산가 및 엘리트를 제외하면 조선인들 중에서 특별한 기술을 지니거나 교육을 받은 이들은 드물었다. 이들은 암시장에서 식량통제에 나선 경찰과 쌀 몇 말 때문에 사투를 벌였고, 밀조 막걸리를 비롯한 다양한 물자를 판매하면서 귀국과 정주의 전망
친일 노구의 최후 발악 – 중추원 참의 김윤정
∷ 열전 친일파·8 윤의사 의거 1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서울운동장에서는 김구 주석 중심으로 윤의사 의거 기념식이 열렸다. 신문에는 의거 당시 홍구공원 전경과 체포된 윤의사 사진, 의거를 소개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그런데 윤의사 의거를 다룬 지면 하단에는 또 한사람이 등장한다. 백발이 성성한 수염을 늘어뜨리고 동그란 뿔테 안경을 낀 노인의 사진. 김윤정(金潤晶, 1869~1949)이다. 친일의 망자(妄者), 등용을 애원 노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괘씸한 친일노구의 최후의 발악 – 시내 필운정 174의 1 김윤정(78)은 소위 한일합병 당시 화성돈(워싱턴) 주미대리공사로 있다 일본 주미공사 日置益(히오키마스)에게 조선공사관을 접수시킨 다음 출신교인 ‘껄레데트’ 대학총장의 소개로 이토 히로부미의 등용추천장을 얻어 조선에 돌아와 태인군수부터 인천부윤을 거쳐 충북지사,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여 종3위 훈2등의 꼬리표가 붙기까지 왜정에 바친 충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인데, 미군이 진주한 후 하지 중장에게 ‘자기는 친일파도 반역자도 아니니 등용해 달라’는 진정을 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다시 이승만 박사, 김구 총리, 김규식 박사에게 대리공사증서,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장 등에 영문번역을 첨부하여 같은 진정서를 제출했다가 역시 축출을 당하면서도 누차 오만하게도 전화로 회답을 독촉하는 등 면회를 강요하여 27일 제1관구 경찰청에 면회강요죄로 취조를 받게 되었다. 김윤정. 〈동아일보〉 1946년 4월 29일 석간 2면.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불과 8개월 남짓 시간이 흐른 때였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에 의한 군정이 시작되었고, 우리
‘두 개의 얼굴-밀정이냐, 독립투사냐?’ – 경기도 경찰부 경부 황옥의 진실
∷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20 영화 〈밀정〉. 황옥의 애매모호함을 지우고 독립운동의 판타지를 그렸다 한 부의 보고서 1919년 4월 29일 상해 주재 일본영사는 한 부의 보고서를 받았다. 상해의 조선인들을 정탐하기 위해 파견된 신임 관리가 작성한 것이었다. 자신을 ‘상해파견원’이라고 밝힌 그는 보고서에서 3·1운동 이후 조선인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고용된 조선인 정보원이 불령선인들의 협박으로 사직하면서 정보 수집에 곤란을 겪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두 명의 밀정을 조선인 사회에 잠입시켜 정보 수집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한 명은 자신이 데려온 밀정 한경순으로, 조선인 청년회에 잠입하여 조선인들의 민적을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완전히 독립운동 동지로 가장하고 상해임시정부 안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고 했다. ‘상해파견원’은 그가 과격론에 편승하여 교묘히 조선인들에게 채용되었다며 조만간 상당한 정보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밀정의 이름은 황옥이었다.최근 영화 〈밀정〉의 개봉으로 일제 식민지시기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달아오르고 있다. 작년 영화 〈암살〉의 성공으로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한다는 징크스는 깨지고 이제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졌다. 학창시절 외우기 힘든 온갖 단체들의 등장으로 고통을 주었던 독립운동의 역사가 생생한 영상언어로 치환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일회성이 아닌 새로운 현상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밀정〉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의열단의 제2차 대암살 파괴계획, 일명 ‘황옥경부사건’이다. 영화 〈암살〉은 가상의 사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