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악이 차면 새로운 기운과 희망이 생긴다
∷ 인터뷰 │ 이해학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공동대표 2010년 야스쿠니반대 도쿄 촛불행동 목회자, 빈민운동가, 범민족대회 집행위원장,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공동대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통일맞이 이사. 그 이력들이 말해 주듯이 늘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의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사람, 이해학 목사를 만났다. 성남에서 주민교회를 개척하여 오랫동안 활동하였는데 그 계기를 물었다. 원래 이 목사는 민주시민들의 의료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성남에 첫 발을 디뎠다. 1971년 위수령이 발동되어 한신대에서 제적을 당했고 박형규 목사가 위원장으로 있던 한국 특수지역 선교위원회에서 그를 성남으로 파송하였다. 그런데 정보기관의 사찰이 그의 활동을 가로막았고 군사독재의 감시와 탄압으로 병원 부지를 구할 수도 없었다. 그는 합법 공간인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 성남에서 지역운동의 핵심적인 터전이 된 주민교회이다. 이 목사는 순복음신학대에 입학을 하여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흥사단 공개강좌에서 함석헌 선생의 역사신학과 장준하 선생의 민족주의를 접하여 큰 영향을 받았다. “역사의 토대 위에서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미신이고 그 결과는 우상화로 가게 된다. 그래서 참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고 만들어진 신앙, 조작된 신앙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역사적 관점에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에 큰 감명을 받아 이 목사는 보수적인 순복음신학대를 뒤로 하고 한신대로 옮기게 된다. 이 목사는 ‘주민이 주인이 되고 주민이 민주화, 통일의 일꾼으로 자라야 한다’는 의미에서 ‘주민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열었다. 종교가 힘 있는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침략을 위한 길 닦기
∷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6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하자 일본은 거류민 보호명목으로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어 그해 7월 23일 경복궁에 난입해 ‘국왕생포작전’을 벌였다. 왕궁 점령 이틀 후 일본은 아산만의 청군함대를 기습 공격해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에 적극 개입하였다.(제1차‧2차 갑오개혁) 그러나 1895년 5월 삼국간섭으로 인해 요동반도를 반환하면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민씨 일족은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 등을 기용해 일본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 일본은 1895년 7월경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고 친러 정책을 펴는 명성황후를 제거하고자 ‘여우사냥’ 작전을 획책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 낭인들을 지휘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체를 불태웠다. 그리고 고종을 위협해 유길준,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수립,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로 인한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자 미우라와 가담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히로시마 감옥에 가두고 재판했으나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하였다. 우리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정부대개혁도朝鮮政府大改革之圖」(69.2㎝×34.5㎝)는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갑오개혁을 소재로 한 니시키에錦絵다. 니시키에란 근대 일본의 목판화로 무로마치시대 말기부터 에도시대 초기에 걸쳐 그려진 우키요에浮世繪라는 풍속화를 근간으로 한 것이며 이것이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는 컬러판 니시키에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미인화를 주로 그렸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풍경화나 일본과 중국의 역사상의 인물을
정의와 공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작은 밑돌이 되었으면 – 이두황 단죄비 제막 후기
김재호 전북지부장 기나긴 여름의 끝자락에 묵은 체증을 내려 보냈다. 몇 달 간을 전주의 기린봉 자락을 오르내리며 보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전북 진안 부귀면에 윤치호 단죄비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데자뷰처럼 4년 후인 2016년 8월13일 같은 날 이두황 단죄비를 세웠다. 윤치호 가 한말의 사상가로 사회진화론과 오리엔탈리즘으로 무장한 제국주의 논리에 맥없이 무너지며 민족개조론으로 일제의 침략에 무장해제되어 친일의 길을 걸었다면 이두황은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일제 주구로서 선봉대 역할을 자임하며 온 산하에 피를 뿌린 전형적인 실천적 매국노였다. 기린토월(驥麟吐月), 전주 사람들은 전주 완산의 8경중 제1경을 그렇게 불렀다. 기린봉에 떠오르는 달이 그만큼 아름다워 그렇게 부른 것이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친일파의 땅을 밟지 않고 달맞이를 하기는 불가능하다. 몇 년전 이두황의 묘를 답사하면서 땅의 소유권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들어 기린봉 자락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1만 여평이 넘는 땅이 아직도 친일파 이두황의 직계 후손들에게 소유권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두황이 죽은 지 정확히 100년이 지났다. 그리고 전주의 사대문과 조선왕조의 발상지의 위패가 있는 경기전을 지척에 바라보며 100년의 세월이 저리도 불경스럽게 누워있다. 백년만의 단죄(斷罪), 오랜 세월 친일과 식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한국사회에서 역사의식의 부재를 통감하며 단죄비를 세웠다. 전주시에 첫 공문을 보내기 시작한 후 3년 만에 전주시에서도 화답을 보내왔다. 시유지 제공 및 점용허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편의를 제공하였다. 전주시 추경예산에
열전 친일파·7 조선귀족편, 을사오적의 후손들, 친일과 항일로 갈라서다(2)
이용창 편찬실장·책임연구원 (지난호에서 이어짐) 박제순의 자작 작위를 이어받은 박부양은 조선귀족이면서 드물게 군수, 중추원 서기관 등의 관직을 지냈고 이런 저런 사업도 벌리면서 좋지 않은 행실로 언론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박부양은 1923년 3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무렵까지 조선총독부에서 지방세조사에 관한 사무촉탁으로 일하면서 한성은행의 대주주이자 운송업과 자전거 판매업에도 투자했다. <1931년판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에 따르면, 1929년 3월 설립된 자동차 매매 전문 합자회사 한양자동차상회(사장·대표 이성우)의 사원으로 전체 자본금 1만 2000원 중 1,000원의 지분을 보유했다. 또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주식회사 한성은행의 대주주로 이름을 올려 회사 전체 주식 12만 주 중,880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박부양은 ‘청년귀족’으로 적지 않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으며 당시에는 그야말로 상층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자동차와 자동자전차(오토바이-필자 주)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각종 스포츠 단체의 임원으로도 활동했다. 1925년 7월에 농구협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자작 박부양’이 회장을 맡았고, 그해 4월에 개최된 제6회 축구대회 위원으로 소개된 ‘박부양’도 동일인으로 보인다. 박부양은 부친 박제순이 매국의 대가로 축적한 재력을 물려받아 풍족한 삶을 누렸지만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었고 품행마저 불량해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20살 전후에는 자동차·오토바이를 몰다가 사고를 친 일로 신문지상에도 여러 차례 오르내렸다. <동아일보> 1925.12.17. 5면 <매일신보> 1925.12.16. 2면 ‘말썽 많기로 유명한 청년 자작’이 “습작과 유산상속을 받아 요리점 출입, 자동차, 자동자행거(오토바이-필자 주) 타기, 기생 첩 두기로 날을 보내” 관할 동대문경찰서 보안계가 골치를 앓을 정도였다. 당시 조선귀족들은 주로 “금전과
카리브해의 조선인들(2) – 임천택과 헤로니모 임, 이민과 혁명
김선호 선임연구원 쿠바혁명 1953년 7월 26일, 피델과 라울을 포함한 165명의 청년들이 쿠바 제2의 도시인 산티아고에 자리 잡은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 이들은 병영과 방송을 장악해 전국적인 봉기의 도화선을 만들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습격사건은 실패하였고, 피델과 라울은 체포되어 산티아고감옥에 갇혔다.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은 무모했지만, 쿠바혁명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습격사건을 계기로 쿠바 전역에서 7·26운동으로 불리는 무력투쟁노선이 전면에부각되었다. 헤로니모는 곧바로 이 운동에 합류했다. 피델은 2년간 수감생활을 하고 1955년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그해 멕시코로 망명했다. 1955년 7월 피델은 멕시코에서 이후 자신의 인생과 쿠바혁명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의학과를 졸업한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였다. 후에 체 게바라(Che Guevara)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는 이 청년은 과테말라에서 의사로 활동하다, 미국 CIA가 후원하는 반공세력이 과테말라혁명정부를 전복하자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피델과 체는 1956년까지 2년 동안 멕시코에서 게릴라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압제를 피해 멕시코로 망명한 중남미 사회주 의자들을 모아 800명의 혁명군을 창설했다. 피델이 멕시코에서 혁명군을 창설할 때, 헤로니모는 아바나에 있었다. 7·26운동에 합류한 그에게는 수도 아바나의 지하투쟁이 맡겨졌다. 그는 도시에서 비밀리에 혁명세력을 규합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지하투쟁을 전개했다. 지하활동 중 가장 큰 위기는 1952년 결혼 직후에 있었다. 바티스타 정부의 경찰과 정보 요원들이 헤로니모의 집을 급습했다. 그러나 바로 전날 우연히 집에 있던 중요 문건과 무기를 옮겨 체포를 모면했다. 헤로니모가 지하투쟁을 지속하던 1956년, 피델과
[기고] 훈장 취재는 독립운동과 민주이념을 찾아가는 여정
박중석 뉴스타파 기자 한때 ‘OO으로 보는 역사’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특정한 주제나 소재를 프리즘 삼아 그 사회와 역사를 반추해보는 것입니다. 훈장은 국가와 민족에 헌신한 이에게 바치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그렇다면 훈장을 통한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떨까요?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전체 서훈 72만 건의 데이터를 다루면서 집중했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이런 고민이 깊어지면서 이후 세분화된 질문으로 나아갔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재임 12년 동안, 자신과 부통령 이시영 이외엔 김구와 안중근, 윤봉길 등 국내 독립운동가들에게 일체 건국훈장을 수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정희는 독립운동가에게도 건국훈장을 수여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친일파에게도 각종 훈포장을 무더기로 수여했는데, 그 의도는 뭘까? 민주주의를 총칼로 짓밟은 전두환 등 신군부의 훈장 잔치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이명박은 상훈 내부 규정을 무시하면서까지 5개월짜리 장관 경질자에게 훈장을 수여한 까닭은 뭘까? 그리고 궁극적인 질문은 “대한민국 훈장의 역사는 독립운동과 민주이념 등 헌법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는가”였습니다. 지난 4개월 동안 진행된 뉴스타파의 훈장 취재는 이런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확인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때론 고통스러웠습니다. 전체 서훈 데이터는 72만 건이었습니다. A4 용지로 출력할 경우 2만 5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그런데 이 중 1950년대 서훈자의 경우, 주민번호 등 인적사항이 제대로 기재돼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동명이인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전체 상훈을 관리하는 정부도 정확한 서훈 명단을
연구소가 맡고 있는 연대기구들
∷ 사진으로 보는 연구소 소사 · 16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서대문형무소 유네스코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시민모임,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역사정의실천연대,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포럼 진실과 정의,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위에 나열한 10개 단체들의 공통점은 뭘까요? 정답은 바로 현재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연대기구 또는 단체들입니다.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일제강점기강제동원진상규명시민연대,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범국민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시민연대처럼 과거에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았다가 그 소임을 마치고 해산된 연대기구까지 합하면 아마도 스무개가 넘을 것 같습니다. 위 단체들의 이름을 찬찬히 살펴보면 하나같이 묵직함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연대기구 형태가 아니라 독자적인 사무실, 재원, 인력들을 투입해 그 일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겁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중요한 기구들을 연구소가 도맡아서 사무국을 운영하고 있는지 궁금증이 생기실 겁니다. 그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 같이 중요한 일들을 맡아 문제를 지속적으로 해결할 인력과 재원이 부족한 탓이며, 더 따지고 보면 역대 정권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의도적이든 무지해서든 등한시해 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라가 해야 할 일을 시민들이 하고 있는 셈이죠. 이런 와중에서 ‘그나마’ 연구소가 이 일들을 지속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뢰와 기대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구소로 많은 일들이 수렴되는 듯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2009년 <친일인명사전> 편찬 이후 두드러집니다. 아무래도 간난신고를 겪으면서도 사전 발간을 완수한 것을 평가해 주시는 모양입니다. 능력을 인정받고 신뢰를 얻는 것은 당연히 기쁜 일지만 연구소는 일복이 사정없이 터진 것입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가 2006년 8월 10일부터 18일까지 진행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오늘날의 독립운동 사령부 이준열사기념관을 만드는 것이 내 마지막 소원
∷ 인터뷰 │ 이양재 전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정리 :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낙원동 찻집에서 오랜만에 이양재 선생을 만났다. 인사동에서는 유명한 컬렉터이기도 한 이양재 선생은 근대시기 고서 등을 연구소 특별전시에 출품해 주신 계기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사회가 급격히 수구화하면서 살림살이마저 팍팍해졌던 이명박 정부 초기 서울살이를 아예 접고 거처를 제주도로 옮겨간 지 8년째이다. 10년을 넘게 만나온 분이지만 이양재 선생이 인사동에서 유명한 컬렉터라는 사실이 떠올라 먼저 그의 직업부터 물었다. 선생님은 원래 어떤 일을 해 오셨습니까? 20대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매진하기 보다는 엎치락뒤치락 많은 활동을 해왔습니다. 애서가클럽, 고전문화진흥회, 한국고서동호회와 같은 단체의 발기인이나 임원 등을 역임했어요. 여행사 등 이런 저런 사업도 했지만 장사에는 소질이 없어 사업은 대부분 적자였죠. 좋은 옛 자료들을 부지런히 수집한 덕에 최근 10여 년간은 박물관에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많이 납품하기도 했고요. 한국-일본-중국의 경매시장을 연결해 박물관 등에 자료를 제공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고미술품에 조예가 깊은 전문 컬렉터로 알고 있었는데요? 원래 고미술품보다는 고서에 관심이 많아, 고서에 나오는 옛 그림이나 판화를 보면서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회화사, 서지학, 판화사를 다룬 글을 쓰다 보니 발표한 글만도 100편이 넘습니다. <오원 장승업의 삶과 예술>, <안견연구> 등 저서도 3권 냈습니다. 이러다보니 조금 이름이 알려진 것 같아요. 보통 우리 같은 컬렉터들을 골동품이나 모으는 수집가들이라 보수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친일파는 한국판 전범
∷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해방이 되자 제일의 민족적 과제가 친일파 숙정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친일파 재등용은 이러한 민심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수립되자 친일파에 대한 단죄는 다시 전면화하게 된다. 1948년 9월 22일,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하였다. 이어 친일파 기소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를 구성하여 친일파 체포에 나섰다. 국민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며 반민특위에 친일파의 행적을 증언하거나 제보했다. 언론들의 취재 경쟁도 치열했는데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자료 하나를 소개한다.특별재판부 재판정으로 들어가는 친일파의 모습이 실린 1949년 4월 4일자 <주간서울> 1면이 바로 그것이다. <주간서울>은 1948년 1월 창간되어 6·25전쟁 직전인 1950년 5월까지 간행된 해방이후 최초의 종합시사주간지이다. 1949년 3월 28일부터 반민족행위자특별재판이 개정하자 <주간서울>은 “한국판 <뉴른베르그> 피고들 궤변과 방청석의 공기”라는 제목으로 이 재판의 의의와 분위기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먼저 친일파 처단의 목소리는 해방과 동시에 일어났지만 미군정의 소극적인 태도로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낸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일파 처단은 해방민족으로서의 절대 요청’으로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상정(1948년 8월 17일)되고 정식 공포(1948년 9월 22일)되어 법적 근거가 마련된 사실에 안도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어 1949년 1월 8일 친일파 박흥식의 수감을 시작으로 반민특위의 실질적 행동이 개시되어 3월 28일부터 개정된 8명의 피의자에 대한 반민족행위자특별재판에 대해 ‘도로 찾은 민족정기가 겨우 소생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고 평가하며 특급 친일파인 피의자들의 사진을 전면에
100년 전, 경복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 식민통치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벌인 난장판, ‘조선물산공진회’
[식민지 비망록 5] 이순우 책임연구원 2015년은 무엇보다 광복 70주년을 기리는 뜻이 가장 클 것이고, 여기에 한일수교 50주년과 을미사변 120년을 되새기는 의미도 적지 않다. 그외에 이목을 크게 끌지는 못했지만, 올해가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린 지 100년이라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행사의 정식명칭은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이다. 총독정치가 시작된 지 다섯 번째가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선의 온갖 물산을 진열 전시하는 행사인 셈이었다. 이 대규모 행사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간이나 벌어졌다. 조선총독부 출범 기념일이 10월 1일이었으므로, 이를 전후한 때에 맞춰 행사 일정이 결정되었다. 조선물산공진회장 전경도에는 근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 몇 군데만을 남겨놓고 온통 박람회 전시공간으로 돌변한 경복궁 일대의 훼손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매일신보』 1915.9.3.) 그런데 식민통치 5년간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열린 박람회 공간은 하필이면 경복궁이었다. 총독부는 행사를 빌미로 근정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 몇 군데만 겨우 남기고 무수한 건물들을 헐어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에는 공진회가 벌어졌던 바로 그 자리에서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을 위한 지진제(地鎭祭)를 거행하였다. 경복궁을 공진회장으로 선정한 저의가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박람회라는 널리 알려진 표현을 제쳐두고, 공진회라는 조금은 생소한 이름으로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공진회는 ‘경진대회(競進大會)’의 성격을 띠는 전시행사이다. 이렇게 행사명을 부친 데는 그냥 흘려듣기 곤란한 뜻이 담겨 있었다. …… 그런데 그 후에 박람회라고 부르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