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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안내] ‘100페스티벌 2013’ 근현대사100년을 만나다

2013년 5월 22일 1045

▲ 보도자료 body,table,td,input,select,textarea{font-family : verdana,굴림;font-size :9pt;line-height : 140%;}img{border : 0;}A:link {text-decoration:none; color:black;}A:visited {text-decoration:none; color:black;}A:hover { text-decoration:none; color:#3E8FFC;}P{margin-top:2px;margin-bottom:2px;}

줄잇는 구독신청에 감사드립니다

2008년 7월 7일 1003

민족문제연구소가 경향신문과 함께 ‘일제강점기 민중생활역사관 건립 희망릴레이’를 시작한 이래 약 20여 분의 회원, 시민 여러분께서 경향신문 구독을 신청해주셨습니다.   경향신문과 함께 하는 ‘희망릴레이’는 말그대로 우리 모두의 미래에 대한 희망, 올곧은 언론 북돋우기를 위한 우리의 희망이 한데 어우러져 바람직한 미래상과 사회상을 이끌어내자는 데 그 참 뜻이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경향신문의 이러한 뜻에 기꺼이 동참해주시고 전화, 이메일, 게시판 등을 통해 신문 구독을 신청해주신 모든 분들께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경향신문은 ‘희망릴레이’를 통해 좀더 많은 분들의 뜻을 모으고 민중생활역사관 건립에 보탬이 될 보다 튼튼한 토대를 만들기 위해 더욱더 혼신의 힘을 다해 뛰고 또 뛰겠습니다.   신문 구독을 신청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백년전쟁”관련 기자회견 자료집 : 쟁점1 미국 박사학위 취득과 관련해

2013년 5월 9일 2899

 쟁점1 미국 박사학위 취득과 관련해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백년전쟁>은 이승만의 박사학위 취득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악의적으로 묘사했다. 이승만의 박사학위가 엉터리인 것처럼 묘사하는데 이승만박사의 논문은 프린스턴대학에서 출판되었고, 저명한 학자가 여러 번 인용할 만큼 가치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불법적이지는 않지만 불과 5년 5개월 단기간에 미국 유수의 대학 석·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의아해 한 부분으로, <백년전쟁>은 이 대목을 이승만에 대한 미국 개신교계의 전폭적 지원과 자신의 집요한 노력이 결합한 것으로 설명했다. 목적을 향한 놀라운 집념이 학위 취득과정에서도 확인된다는 의미였다. 논문 내용은 다루지 않았으므로 논문의 수준은 다큐와 무관한 지적이다.   <백년전쟁>은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일약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부각되고 미주 한인 또는 미국인들에게 강력한 인물로 인식될 수 있었던 가장 주요한 요인이 최초로 미국(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실에 있다고 보고 이를 주목했다. 지금까지도 기성세대 다수가 이승만을 ‘이박사’라 지칭할 정도로 미국박사라는 이미지는 그의 신화를 떠받드는 한 축이었다. 이 때문에 백년전쟁은 이승만 신화의 출발점이 된 박사학위 취득 과정을 분석하게 되었다. 이승만 측은 1) 미국은 박사학위를 따려는 사람에게 석사과정에 대한 강제가 거의 없음에도 <백년전쟁>이 석사학위도 없이 박사학위에 도전한 이승만을 마치 불법적으로 취득한 것처럼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2)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은 프린스턴에서 상업 출판되었으며, 60년이 지나서도 세계적 석학이 인용했던 훌륭한

후원 계좌 안내

2008년 7월 3일 751

홈페이지가 정상화되기 전까지 연구소를 후원해주시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계좌를 이용하는 방법이 유일합니다.   연구소를 성원해주시는 많은 분들의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 후원해주실 계좌   국민은행: 010901-04-036092(예금주: (사)민족문제연구소) 농협: 031-01-436086(예금주: (사)민족문제연구소)

“백년전쟁”관련 기자회견 자료집 : 쟁점2 이승만이 일제의 고문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문제

2013년 5월 9일 1969

 쟁점2 이승만이 일제의 고문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문제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이승만은 미국 명문대학 박사학위 취득자이자 젊은 혁명가로서 이미 존경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미화하기 위해 일제의 고문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그런 적도 없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이승만이 불굴의 독립운동가로서 미주 한인에게 강한 인상을 준 요인 가운데 하나가 당시 한인사회에 떠돌았던 ‘일제에 의한 감옥 후유증’이었으며, 이승만 또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 당시 이승만을 만났던 다수 미주 한인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된다.   이승만 측은 이승만이 대한제국 시기 감옥에 갇혀 손가락 살점이 뜯기고 뼈가 드러나는 고문을 당하고 7개월 동안 목에 칼을 쓴 채 지내기도 했기 때문에, 손을 불거나 안면 근육을 떠는 후유증을 앓았다고 한다. 또 이승만은 미국 명문대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의 개혁을 위해 투쟁한 젊은 혁명가로서 하와이 한인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구태여 자신을 미화하기 위해 일본감옥에 있었다고 거짓말로 포장할 이유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백년전쟁>은 ‘미국박사’와 함께 이승만 신화를 떠받드는 또 하나의 근거가 그가 일제에 의해 고문 투옥 당한 불굴의 독립투사라는 이미지에 있다고 보았다. 지금도 1) 이승만의 감옥 생활을 일제에 의한 투옥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으며, 2) 실제 이승만 스스로 ‘일본 감옥에서 고문을 받아 손이 시리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미필적 고의’든 아니든

[만평] 촛불 배후

2008년 7월 1일 763

  고경일 회원(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부 교수)이 시사만평을 기고해주었다. 고 교수는 야스쿠니 문제를 주제로 풍자만화를 그리고 있는데, 앞으로 매월 만평을 기고해 줄 예정이다.

“백년전쟁”관련 기자회견 자료집 : 쟁점3 친일로 오해할만한 이승만의 대일관

2013년 5월 9일 1753

 쟁점3 친일로 오해할만한 이승만의 대일관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호놀룰루 스타블러틴지의 기사 내용은 이승만이 ‘일본 국가에 대한 반대를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뜻이 아니라 ‘일본인에 대한 인종 혹은 민족적 증오를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백년전쟁>은 신문기사의 부분적 인용과 악의적 편집을 했다. 또 워싱턴포스트 기사(1912.11.18)에서 이승만의 인터뷰 중 : ‘지난 3년동안’을 <백년전쟁>에서는 ‘한일합방 이후’라고 해석했는데 틀렸다. 이는 기독교 및 YMCA에 의한 자조자립운동의 전성시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호놀룰루 스타블러틴지의 기사는 이전 ‘이승만이 반일교육자다’라는 보도에 대한 이승만의 반박 기사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 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일본 신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하지 말기 바란다”(호놀룰루 스타블러틴)라는 내용이다. 이 신문은 기사 제목을 “Dr.Rhee denies that korean school teaching ‘anti-japanese’”로 뽑았다. 워싱턴포스트지 이승만 인터뷰 내용은 “3년도 지나기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이다. 당연히 한일 강제병합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이며, 이어 “전차 레일이 깔리고, 도시마다 전기 불빛이 들어오고, 공장과 백화점이 곳곳에 생기고 있다”는 그의 발언은 미국 개신교의 지원에 따른 조선의 발전상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요컨대 1910년대 우호적 미일관계 아래 이승만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함으로써 ‘친일파’로 오해받을 수 있는 위험한 발언도 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일 뿐이다.   사실 이승만의 ‘대일관’이나 일본에 대한

민족사랑 6월호 PDF보기

2008년 6월 30일 815

“백년전쟁”관련 기자회견 자료집 : 쟁점4 하와이 교민사회의 갈등과 일본군함 ‘이즈모호사건’

2013년 5월 9일 2553

 쟁점4 하와이 교민사회의 갈등과 일본군함 ‘이즈모호사건’ ▲ 생명의 길, 이승만포럼 등의 주장 → 1918년 하와이 법정에서 이승만이 박용만에 대해 ‘일본군함 이즈모호가 입항하면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운 위험한 인물’이라고 밀고하는 증언을 한 적이 없다. ▲ 민족문제연구소 반론 → 당시의 주요 사료인 <신한민보>와 <(국민회)공고서>, ‘재미한인사’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재미오십년사>(김원용)에도 나오는사실이다. 이후에도 이승만이 다른독립운동가를 공산주의자등으로 모함했다는 기록이나 증언, 연구도 있다.   하와이 교민사회에서 국민회 재정문제를 둘러싼 이승만세력과 반이승만세력의 법정 분쟁이 계속되던 1918년 2월 27일, 이승만은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 행동을 하며, 일본 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사이에 중대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판사님. 저들을 조처해 주십시오!” <백년전쟁>은 이러한 내용을 피해 당사자인 박용만의 1918년 3월 19일 ?시국소감?과 <신한민보>(1918.6.27)등 당시 사료에서 인용하여 적시했다. 정말 끔직한 발언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길> 등은 1) 이승만은 법정 증인이 아니라 고발인 신분으로 출석하여 발언했으며, 2) 박용만의 국민군단이 해체된 것은 일본대사관의 항의와 그에 따른 미국정부의 압박에 따른 것이며, 3) 이승만을 반대하는 박용만, 김원용의 일방적 주장이라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1915~1936년간 하와이 법정자료? 또한 박용만과 김원용의 주장만을 반영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박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제공하는 사료에 대한 일방적 폄하에 지나지

해킹으로 인해 임시홈페이지를 운영중입니다

2008년 6월 30일 1274

5월20일부터 22일까지홈페이지에 대한 지속적인 해킹시도가 있었습니다.다행히 서버운영구조상 웹컨텐츠에 대한 직접적 피해는 방지할 수 있었지만그래도 만의 하나 어떤 작은 피해라도 생겨서는 안된다는 판단으로운영중인 서버를 폐쇄하고 긴급작업에 착수, 임시 홈페이지를 열게 되었습니다.민족문제연구소는 현재 새 홈페이지를 구축중이며다음달 중 더욱 안정되고 보안이 강화된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연구소 홈페이지를 방문해주시는 분들과 회원여러분들께 뜻하지 않은 해킹 사태로 홈페이지 이용에 불편을 드리고 있는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새 홈페이지가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까지많이 불편하시겠지만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고 기다려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홈페이지 이용에 불편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