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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경술국치 114년 기억 행사
[보도자료] [다운로드] [자료집] [다운로드] 경술국치 114년 기억 행사 1910년 8월 29일은 일제의 한국 병탄이 이루어진 경술국치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국내는 물론 중국 연해주 미주 일본 등지의 해외동포 사회에서도 망국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해마다 국치일 추념식을 거행하였다. 국내에서는 곳곳에 ‘국치일을 잊지 말자’는 격문이 나붙었으며, 감옥의 독립투사들은 집단 단식으로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해외의 동포들은 대대적인 항일행사를 열고 이날 하루 단식으로 독립의 결의를 다졌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국치일을 추념하는 국가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다만 달력에 ‘국치일’이 표시되는 정도였다. 부끄러운 역사인 ‘국치’를 기억하기보다 순국선열을 추도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일을 잊지 않아야 훗날의 가르침이 된다’(前事不忘 後事之師)는 의미에서 을사늑약 체결지인 중명전 복원 추진(2004년), 강제병합조약 체결지인 남산 옛 통감관저 터에 표석 건립(2010년), 국치일에 조기 게양 조례 제정 추진(2013년), 국치 관련 항일음악 발굴(2017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2018년) 등의 사업을 진행해 왔다. 경술국치 114년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는 8월 29일(목) 오후 2시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서울 중구 예장동 옛 통감관저 터에서 ‘경술국치 114년 기억 행사’를 개최한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시민 등 약 100여 명이 참여하는 이날 기억 행사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의 기념사에 이어 윤석열 정부의 ‘친일 7대 죄악’ 발표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 각 정당 의원들이 국치일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취지의 발언을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 독립영웅 치우기 △ 친일·친독재 우상화 △ 강제동원 정부 해법과
민족사랑 202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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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정권의 역사 쿠데타, 국민 역린 건드렸다” 전 독립기념관장의 일갈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은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혹평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자 역사학자인 그는 윤석열 정부와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강하게 비판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은 큰 상처를 입었고 역사학자들은 기막혀한다.”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68)이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두고 한 평가다. 그는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다. 지청천 장군은 쌍성보 전투 등 만주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한 인물이다. 해방된 뒤에는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무임소장관,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 지청천 장군의 딸이자 이준식 전 관장의 모친인 지복영 선생 또한 광복군으로 활동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이준식 전 관장은 일제강점기 농민운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사학자이기도 하다. 지청천 장군의 후손이 무장투쟁이 아닌 대중운동을 전공한 까닭을 묻자 “어머니나 외할아버지의 역사를 연구하면 편견이 들어갈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준식 전 관장이 독립기념관장 임기를 마친 때는 2021년 1월이다. “퇴임하며 나의 공적 활동이 끝나고 역사와 관련된 활동도 일단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 상황은 예상과 달리 흘러갔다. 정치세력이 끝난 줄 알았던 역사 논쟁을 일으켰다. 이른바 ‘뉴라이트’ 인사들을 요직에 앉혔다. 지난해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 때 이 전 관장은 정부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역사학자이자 독립유공자 후손, 전 독립기념관장으로서 낸 목소리였다. 이 전 관장은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에 대해서는 “얼토당토않은 일”이라며 혀를 찼다. 광복절을 이틀 앞두고 이준식 전 관장을 만났다.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에 대해
[새책소개] 『친일파의 재산』
『핀일파의 재산』 소개 <다운로드> 나라를 팔아먹은 대한제국 왕족과 친일 엘리트의 민낯, ‘수지맞는 장사’였던 친일 행위로 그들을 과연 얼마나 벌었을까? 최악의 친일파 30인의 죄상과 그들이 불린 재산을 분석하며 ‘우리들의 일그러진 근대사’를 다시 읽는다! – ‘매국의 아이콘’ 이완용은 경성 최고의 ‘현금왕’이었다? – 군부대신 이근택은 30만 원의 기밀비를 받고 궁궐의 모든 기밀을 빼돌렸다? – 고종 황제의 형님 이재면은 은사공채를 이완용보다 무려 5배나 많이 받았다? – ‘정미칠적’ 송병준은 1925년에 홋카이도에 560만 평 이상의 땅을 소유했다? – 외부대신 이지용은 나라를 팔아 10만 원을 받고 도박판에서 하룻밤에 11만 원을 던졌다? ‘친일파’. 태어난 지 100년도 넘은 이 단어는 익숙하지만 언제 들어도 불편하다. 정확한 학술적 개념까지도 필요없이, 상식적으로 친일파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대중을 피 빨아먹고 살았던 부역자들’을 통틀어 부르는 말인데, 그들은 왜 친일을 했을까? ‘친일파’들은 ‘부득이하게 친일을 했다’고 변명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새빨간 거짓말인지를 『친일파의 재산』은 낱낱이 알려준다. 친일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얼마나 이익을 얻었을까?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 『친일파의 재산』은 대표적인 친일파 30명의 ‘친일 재산’과 ‘친일 연대기’를 사료와 당시의 신문기사, 증언과 회고록 등을 토대로 알려주는 동시에 당시 평범한 이들의 평균 소득이나 월급을 비교 제시하면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근현대사’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대한제국, 얼마면 돼?’ 생각해보면 ‘친일파’라
[오마이뉴스] 몇 번이고 탄핵받고도 남을 만한 친일 방송인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혜구 만당 이혜구는 한국음악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01세로 사망한 지 사망 5년 뒤인 2015년에 <한국음악연구> 제58집에 수록된 신대철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논문 ‘만당 이혜구(1909~2010)의 음악사학’은 “선생님은 고대로부터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유물이나 악보 및 기록이 있는 모든 갈래의 음악과 그 주변 상황을 바른 우리 음악사학 정립을 위한 연구 대상으로 하였다”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이러한 모든 연구 성과 중에서 3회에 걸친 <악학궤범>의 역주와 정간보를 비롯한 여러 옛 악보집에 담긴 음악 실체와 그 해독 방법에 관한 연구 결과들은 특별히 이 방면의 우리 음악사학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한국국악학회가 발행하는 위 학술지의 2020년 제68집에 실린 이용식 전남대 교수의 논문 ‘이혜구 만당학 성립의 시대적 배경과 개인적 경험에 관한 논구’는 “만당 이혜구는 한국음악학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라고 한 뒤 “만당의 음악학 즉 만당학은 근대 한국음악학의 커다란 줄기를 형성했다”라며 “만당학은 많은 제자들에 의해 현재까지도 한국음악학의 가장 강력하고 유용한 연구방법론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평한다. 이혜구가 받는 이같은 학문적 존경과 배치되는 것은 그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는 점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혜구 편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이 절정에 달했을 때 30대 방송인인 이혜구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려준다. “1939년 9월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부장 대리를 지냈고, 1941년 11월 제2방송부 편성과장을 지냈다. 1943년 6월 경성방송국은 제1, 제2방송부 제도를 폐지하고 편성과와 제1, 제2보도과를 신설하는
[한겨레] 법원 “일본제철, 강제동원 유족에 배상”…1심 뒤집고 책임 인정
소멸시효 시작점 대법 판례 따라 법원이 전범기업인 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잇따라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1심은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판단을 달리 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7-1부(재판장 김연화)는 22일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 주식회사)에 강제 동원돼 일하다 숨진 민아무개씨의 유족 5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본제철은 유족들에게 8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민씨는 1942년 2월9일 일본제철 가마이시 제철소에 끌려가 강제노역에 동원됐다가 그해 7월14일 도망 나왔다. 원고인 자녀들은 1989년 숨진 민씨를 대신해 2019년 4월 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의 쟁점은 유족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소멸시효의 시작점을 언제로 볼 것인지였다. 민법은 피해자가 손해 혹은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안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으면 청구권이 소멸한다고 정한다. 앞서 강제노역 피해자 4명은 일본제철을 상대로 2005년 국내 법원에 소송을 냈고, 2심 패소 뒤 2012년 5월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돼 2018년 10월 재상고심에서 최종 승소했다. 유족들은 이 사건이 확정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소멸시효의 시작점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일본제철은 대법원이 피해자 승소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한 2012년을 손해배상청구권 발생 시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일본제철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이날 1심의 소멸시효 만료 주장을 뒤집고 승소 판결했다. 이날 같은 법원의 민사항소6-2부(재판장 지상목)도 강제노역 피해자 정아무개씨의 자녀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본제철은 1억원을
[오마이뉴스] ‘육영수 다큐’에 속지 말자, 이 영화의 불쾌한 노림수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실을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정치와 역사는 따로 떼어놓고 바라볼 수 없다. 극단적으로 양분된 현대 정치판에서 과거의 역사를 점거하는 일은 직접적이고 실재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현실 정치세력이 이승만으로부터 박정희, 김영삼과 김대중, 다시 노무현에 이르는 지도자를 계승한다 주장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실체가 있는 계승이든, 허울뿐인 구호든 간에 현실정치 가운데서 효력을 발한단 점만큼은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많은 정치인이 일면식도 없는 옛 인물의 무덤을, 생가를, 관련된 온갖 유적까지를 방문하는 일은 없었을 테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호감도 평가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오르는 유력한 인물이다. 노무현을 제외하고는 그와 비슷한 지지를 받는 인물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조사업체와 방식을 가리지 않고 지난 십수 년 간 그는 매 조사마다 선호도 1, 2위를 다퉈왔다. 4.19 혁명을 군홧발로 짓밟고 일어나 18년 간 집권한 독재자란 평가에도 꺾일 줄 모르는 호감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좋든 싫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산업화, 그 성취의 상징적 존재가 박정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확고한 정치적 자산을 가졌으니 그 유산을 차지하기 위한 노력도 끊이지 않는다. 경제발전과 성취에 따르는 낭만, 독재와 민주화탄압 사이엔 무시할 수 없는 격차가 있기에 그 유산을 계승할 수 있는 이도 정해져 있다.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와 진보를 주창하는 이가 박정희의 유산을 계승할 수는 없다. 반면
[기고] 역사의 퇴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역사의 퇴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글쓴이 : 정 근 식 (서울대 명예교수) 지난 광복절에 나는 미군 전략폭격사령부 조사단의 앤더슨 소장이 마지막 조선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끼(阿部信行)를 심문했던 조서를 읽었다. 1945년 12월 11일 도쿄의 아베 집에서 열린 이 심문에서, 그는 자신이 총독으로 재임했던 해방 직전의 1년을 회고하면서 “한국내의 상위계층에서는 일본인과 한국인 간에 의견불화가 거의 없었”지만, “하위계층에서는 한국인과 일본인 간에 끊임없는 다툼이 있었”고, 헌병이나 군을 동원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더 많은 쌀을 선적하고 더 많은 노동자를 공급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미래를 전망했다. “아마 한국민의 10%는 한국이 일본과 협조하고, 아시아의 발전에 협력해야 한다고 믿거나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한국민의 10%는 한국이 일본과 완전히 단절하고 독립적 위치를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광복회장뿐이겠는가? 배신감과 분노가 3년 전 윤석열 검찰총장이 그 직을 사임하고 공개적인 정치행보를 시작했을 때 그가 처음 찾은 곳은 우당 이회영 기념관 개관행사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한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그는 우당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옆자리에 앉았고, 독립운동과 임시정부라는 상징적 자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보수정당의 대통령후보가 되고 나아가 대통령선거의 승리를 위하여 도덕적 윤리적 정당성이 필요했을 때, 그는 이 원장의 후광을 지속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자마자 이 원장에게 그동안의 은혜에 감사를 표했고, 인수위원회에 관한 조언까지 들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연합뉴스] 천안서 6·25 당시 부역 혐의 희생 추정 매장지 유해 발굴
(천안=연합뉴스) 유의주 기자 = 충남 천안에서 6·25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를 받고 체포돼 20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학살 매장지 유해 발굴이 시작된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역위원회 천안지회, 민주단체연대회의는 19일 천안시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일부터 직산읍 군동리 산 9의 1 일대에서 개토제를 시작으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시굴)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천안 지역에서 처음 진행하는 유해 발굴은 천안시와 공동으로 진행한다. 이곳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를 받고 체포돼 200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천안 지역은 한국전쟁기 보도연맹사건으로 신청된 사건은 없고, 부역 혐의 희생 사건으로 신청된 사건 7건이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결의문에서 “70년 넘는 세월 동안 국가 폭력에 암매장돼 차가운 땅속에서 통곡하고 있는 희생자들과 통한의 세월을 감내해 온 유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진상규명으로 명예 회복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안과 인접한 아산 지역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로 학살당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어린이 80여구를 포함해 208명의 유해가 수습됐다. 유의주 기자 yej@yna.co.kr <2024-08-19> 연합뉴스 ☞기사원문: 천안서 6·25 당시 부역 혐의 희생 추정 매장지 유해 발굴 ※관련기사 ☞서울신문: 충남 천안서 한국전쟁기 부역 혐의 희생자 유해발굴…“200명 추정”
[미디어오늘] 김형석 “일본군·만주군 장교 친일파 매도는 국군 정통성 부정”
2년 전 백선엽 두둔 친일 장교 옹호 글 작성 드러나 “안익태 만주군가 지휘 친일파면 손기정은 반역자냐”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친일반민족행위자 백선엽 장군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2년 전 “일본군과 만주국군 장교 출신 장교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건 국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드러났다. 또 안익태 선생의 친일행적을 비판한 고 김원웅 전 광복회장을 향해 안 선생이 만주군가를 지휘했다고 친일파면 일장기를 단 손기정도 친일파냐는 주장을 편 것으로 나타났다. 미디어오늘이 14일 김형석 관장의 과거 블로그 글을 살펴본 결과, 김 관장은 지난 2022년 7월12일 <백선엽의 역사적 공과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백선엽 장군의 간도특설대 복무 시절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근거가 없다며 위와 같이 주장했다. 김 관장은 “백선엽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의 괴뢰정권이던 만주국군이 된 백선엽은 자연스럽게 ‘친일의 길’을 걷게 되었다”며 “그가 만주국군에 자원입대한 것이나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것을 자랑스럽게 기술한 역사인식은 오늘의 시선에서 보면 ‘친일’ 행위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그럴지라도 역사적 사실은 정확하게 인식하고 바르게 기록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그가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선정된 것은 만주국군 장교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경력 탓이었지,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하고 동족을 살해한 때문은 아니었다”고 썼다. 그러면서 “한국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다가오고 북핵문제로 인해 한반도에 긴장이 최고로 고조된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전쟁터에서 스스로 희생한 일본군·만주국군 출신 장교들을 모조리 친일파로 매도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