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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 “진짜 독립운동은 반제민족해방투쟁”

2022년 1월 26일 1109

[신년 인터뷰③]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진짜 독립운동 한 사람은 반제민족해방투쟁이어야 돼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통일뉴스]와의 신년 인터뷰 내내 ‘민족’을 강조하다가, 독립운동 대목에 들어가서는 특별히 ‘반제’를 붙이며 이같이 ‘독립운동은 반제민족해방투쟁(운동)’이어야 한다고 정의를 내렸다. 모든 나라의 독립운동이 처음에 한 건 반제국주의이기에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 혹은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반제’가 제일 먼저 들어가는데 우리나라는 독립운동 평가에서 반제가 떨어져 나가버려 “그냥 독립운동, 항일독립운동이 됐다”는 것.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개념이 잘못돼 있기에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임 소장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지난해 말 “여든의 황혼 길에서 제 인생 종합 성적표”인 자전적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록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발간했다. 70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에다 12장에서 ‘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이라는 독특하고 인상적인 내용을 담은 것. 그의 삶이 ‘민족과 반제국주의’에 닿아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답게 인터뷰 내내 일관되게 ‘민족’을 강조했다. 그는 민주화 운동 시기, 문학이 다른 학문에 비해 오히려 앞섰다면서 “모든 학문이 아직까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 문학은 민족문학을 주장했다”고 상기시켰다. 오죽하면 민족문학은 6.25 이후로 ‘빨갱이문학’이라고 금지 당했는데도 몇 년 만에 회생할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고 질기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케이팝(K팝), 케이문화(K문화) 등 한류가 일어난 원인이 리얼리즘과 민족문학, 참여문학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리얼리즘과 민족문학, 참여문학에서 응용이 이뤄져서 영화, 그림, 드라마, 노래대로 다 발전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한겨레] 수식어 붙은 민주주의는 언제나 불순

2022년 1월 25일 793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17)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듣고 깨달아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태오 15, 8-11) 거짓말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라’는 윤리적 가르침은 하늘과 양심의 명령이며, 모든 법과 인간 질서의 기초입니다. 법에는 위계가 있습니다. 신정법(神定法), 자연법(自然法), 인정법(人定法)의 순서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실정법은 신정법과 자연법의 하위 개념입니다. 역사 기도는 신정법과 자연법 그리고 양심에 기초해, 실정법의 한계를 넘어 보다 크고 완전한 공동선의 가치를 찾아가는 노력입니다. 우리 근현대사는 치욕의 일제 침략기 36년과 피눈물 나는 독재 정권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1945년 해방은 되었으나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졌고, 남한은 3년간의 미군정을 거쳤습니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은 이승만 독재 12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4·19의 횃불은 딱 1년 만에 박정희의 군사반란으로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이후 전두환, 노태우 정권 12년 동안 군사 독재가 더 이어집니다. 박정희 정권의 특징은 ‘군사반란’과 ‘배반’입니다. 박정희와 그 후계 정권을 판단할 때 우리는 이러한 원론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면서, 우리 안에 내재한 침략적 불법성과 만행을 눈감는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특히 1961년 군사반란을 포함해 우리 민족과

[경기신문] [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갈리아의 수탉”들과 만난 문학과 역사

2022년 1월 24일 1066

임헌영과 갈리아의 수탉들 “제 인생의 스승들은 결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한 시대의 황혼에야 날개를 펼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둠을 뚫고 새로운 시대를 일깨워주는 새벽의 전령사인 갈리아의 수탉들이었습니다.”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한길사/2021)>의 머리말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이 책은 문학평론가로 활동해온 임헌영과 유성호 교수와의 대담집으로 연수(年數) 팔십 고개를 넘어서는 그의 전투적이자 혁명적인 삶의 전기(傳記)다. 제목 그대로 문학과 역사가 서로 엉키면서 직조(織造)해온 세월에 담긴 사연과 인연들은 ‘문학평론가’라는 직업군 분류로만 설명할 수 없는 실천적 지식인 “임헌영”의 치열한 인생궤적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갈리아의 수탉’들과 함께 해온, 아니 그 자신이 바로 그 ‘갈리아의 수탉’이 된 현실의 한 복판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우리는 임헌형이 이 시대 또 하나의 스승이 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미네르바는 그리스 신화 아테나가 로마의 풍토와 만나 새롭게 태어난 지혜의 여신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바로 그 미네르바와 함께 다니는 이른바 신조(神鳥)이며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숲속을 날아 자신의 시간을 시작하는 성찰의 존재를 가리키는 헤겔의 철학 용어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법철학> 서문에 담긴 문장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여야 날개를 편다”는 건 무슨 말인가? 그건 온갖 복잡한 현실의 쟁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던 것들이, 그 치열한 접전이 종료된 이후에야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치게 된다는 주장이다. “역사 해석”을 둘러싼 논쟁의 출발이다. 그런데 <헤겔 법철학 비판>을 쓴 마르크스는 전혀

[과거청산의빌런들] Ep.3 2️⃣편 친일파 후손 한판 붙자

2022년 1월 24일 911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별기획] 백년전쟁 스핀오프 시리즈 《과거청산의 빌런들》 ▶3화 친일파 후손들의 역습 2️⃣편! #백년전쟁 #민족문제연구소 #현대사시리즈 #민족문제연구소30주년 ▶민족문제연구소 https://www.minjok.or.kr 《과거청산의 빌런들》은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의 성금과 민족문제연구소 해피빈 모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관련기사 ☞과거청산의빌런들 Ep.3 1️⃣편 : 친일파 후손들의 역습 ☞과거청산의빌런들 Ep.2 2️⃣편 :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이 영상 보면 더 이상 그런 말 못 합니다 ☞과거청산의빌런들 Ep.2 1️⃣편 : 미 CIA문서로 드러난 박정희의 한일협정 뒷거래 ☞과거청산의빌런들 Ep.1 2️⃣편 : “안두희의 입을 열게한 비밀무기는?” ☞과거청산의빌런들 Ep.1 1️⃣편: 안두희와 빌런추적단

[과거청산의빌런들] Ep.3 1️⃣편 친일파 후손들의 역습

2022년 1월 21일 870

[민족문제연구소 30주년 특별기획] 백년전쟁 스핀오프 시리즈 《과거청산의 빌런들》 ▶3화 친일파 후손들의 역습 1️⃣편! #백년전쟁 #민족문제연구소 #현대사시리즈 #민족문제연구소30주년 ▶민족문제연구소 https://www.minjok.or.kr 《과거청산의 빌런들》은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의 성금과 민족문제연구소 해피빈 모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관련기사 ☞과거청산의빌런들 Ep.2 2️⃣편 :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이 영상 보면 더 이상 그런 말 못 합니다 ☞과거청산의빌런들 Ep.2 1️⃣편 : 미 CIA문서로 드러난 박정희의 한일협정 뒷거래 ☞과거청산의빌런들 Ep.1 2️⃣편 : “안두희의 입을 열게한 비밀무기는?” ☞과거청산의빌런들 Ep.1 1️⃣편: 안두희와 빌런추적단

[김해뉴스] 김해현충시설 친일 잔재 시비·노래비 교체 완료

2022년 1월 25일 815

철거 약 3주 걸쳐 지난달 완료 “세부내용 결정하느라 다소 지체” 보훈대상자 이름 새긴 비석 세워 시설 전반 개·보수 작업도 진행 김해 삼계동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뒤편에 세워져있던 친일시인 모윤숙(1910~1990)·친일작곡가 박시춘(1913~1996)의 작품 비석이 모두 철거됐다. 해당 비석에 새겨져 있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친일파 문학인으로 알려진 모윤숙 시인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최초로 알려진지 약 6개월 만이다. 김해시 시민복지과는 모윤숙 시인이 쓴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와 박시춘 작곡가가 작곡한 노래 ‘전우여 잘 자라’의 가사가 적힌 비석 철거 작업을 약 3주에 걸친 공사 끝에 지난달 10일 모두 완료했다고 최근 밝혔다. 시와 경남동부보훈지청·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가 업체 선정, 예산 규모, 일정 등 세부내용을 함께 협의했다. 이들은 시각적인 통일성,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문제가 된 비석(시비 2칸·노래비 1칸)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다른 시비 2칸까지 총 5칸을 철거·교체하기로 결정했다. 또 교체 작업을 하면서 글자 수정, 페인트칠 등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시설 전반을 개·보수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했다. 이 비석들이 철거된 자리에는 보훈대상자 230명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새로 세워졌다. 6·25 참전용사 20명, 월남전 참전용사 26명, 보국수훈자 184명 등이다. 공사 예산은 총 1970만 원이 소요됐다. 국가보훈처의 현충시설 보수비 2000만 원을 지원받은 덕에 시비는 들어가지 않았다. 시민복지과 관계자는 “작품비를 교체하는 자리에 어떤 내용이 새겨진 비석을 세울지, 누구의 이름을 새길지 등 세부내용을 신중하게 결정하느라 다소 시간이 지체됐다”며 “이제 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는 우리나라를

[단디뉴스] “진주시 명석면 발굴지(1차, 4차, 11-1차)로 향하여”

2022년 1월 25일 1157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2주년이다. 전쟁 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리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2차까지, 현재도 계속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한국전쟁 전후 진주지역 민간인 학살지는 모두 24개소에 달한다. 그중에서 8개소를 발굴하였고 이번에 소개할 발굴지는 명석면 3개소(1차,4차,11-1차)이다. 3개소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품은 아래 표와 같다. ▶ 먼저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공동조사단) 출범되다.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의 유해들이 아직도 전국 곳곳에 방치되고 있다가 2007~2009년까지 1기 진실∙화해위원회(이하:진화위)가 실태조사와 발굴조사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국가는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국가적 책무인 법적∙정치적 책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조차 지지 않고 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와 7개 시민사회단체의 후원금으로 2014년 ‘공동조사단’이 출범하게 된다. 공동조사단은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를 제1차 발굴지로 선정한다. 그때부터 필자는 ‘유해발굴 자원봉사’로 인연을 맺게 된다. ▶ 공동조사단이 제1차 발굴지를 진주시 명석고개(용산치)로 선정한 이유는 현재 전국유족회 중에서 진주유족회가 전국에서 가장 잘 운영되고 있다. 그 이유는 강병현 전 유족회장이 9년간

[오마이뉴스] 곡기 끊어 순국한 독립운동가와 ‘민족가수’ 백년설

2022년 1월 24일 1117

순국 111주기 자하 장기석(1860~1911) 선생을 기리며 1월 5일은 자하(紫下) 장기석(張基奭, 1860~1911) 선생의 순국 111주기였다. 1세기하고도 10년이 더 지났으니 역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던가. 나는 자료를 뒤져 그의 삶을 돌이켜보다가 그 주말에 성주 벽진의 집실 마을을 다녀왔다. 감옥에서 27일간 곡기 끊어 순국 선생을 알게 된 것은 2년 전, 순국 102주기를 맞은 칠곡의 독립운동가 만송 유병헌(1842~1918) 선생을 기리는 기사를 쓸 무렵이다(관련 기사 : “일왕 머리를 베었어야” 법정서 일갈한 선비의 사연). 경술국치 이후에 자정(自靖) 순국한 분 가운데서 이웃 고을 성주 출신인 선생의 함자를 발견하면서였다. 자하 장기석은 국권을 잃은 이듬해인 1911년 1월 5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 전해 성주경찰서를 거쳐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때부터 27일간, 일제의 위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식음을 거부하며 저항한 끝에 순절한 것이다. 7년 뒤에 같은 방식으로 같은 장소에서 이웃 칠곡의 선비 만송도 곡기를 끊어 순국했다. 경북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집실(가곡 家谷)에서 태어난 자하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스물넷에야 칠곡군 기산면 평복리의 함양 박씨와 혼인한 것도, 38세에 이르도록 공부를 하지 못한 것도 가난 탓이었다.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통탄하던 그는 서른아홉 살(1898)이 되어서야 학문의 길에 들어 마흔셋에 사서 육경을 통달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앞두고 그는 “독립 국민이 어찌 오랑캐의 백성이 되겠느냐? 제군들은 충의에 신명을 바쳐야 한다”라고 말한 뒤 문하생들을 돌려보내고

[오마이뉴스] 촉석루 ‘이지용’ 이름 앞 ‘친일 반민족행위자’ 팻말 세웠다

2022년 1월 19일 1170

[보도 후] 진주성관리사무소, 지난해 10월 말 설치 뒤늦게 알려져 … “진주시 설치에 의미” 경남 진주성(사적 제118호) 촉석루 아래 암벽에 새겨져 있는 이지용(李址鎔, 이은용, 1870~1928) 글자 앞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안내판이 세워진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관련기사 : “촉석루 아래 암벽에 친일파 이지용 이름이 새겨져 있다”) 18일 <오마이뉴스> 확인 결과, 진주성 촉석루와 의암 사이 암벽 난간 앞에 가로 150mm, 세로 220mm 크기의 안내판이 붙어 있다. 안내판에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음각 현황. 촉석루 아래 암벽에는 이은용(李垠鎔, 왼쪽)과 개명 후 이름인 이지용(李址鎔, 오른쪽)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이지용은 대한제국 당시 학부대신, 내부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일제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어 있다”라고 적혔다. 이 안내판은 진주성관리사무소가 2021년 10월 말경 설치한 것이다. 진주성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진주시의회에서 지적도 있고 해서 벼랑에 안내판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이 안내판은 진주성관리사무소가 자체적으로 판단해 설치된 것이다. 진주성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안내판을 크게 세우려면 문화재청과 협의를 해야 하지만, 작으면 허가사항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지용은 ‘을사오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이은용’이 본래 이름인데, 세자 책봉된 ‘영친왕’의 이름인 ‘이은(李垠)’과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어 ‘이지용’으로 바꿨으며, 그는 구한말 경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지용은 대한제국시기에 황해도관찰사, 의정부 찬정, 외부대신서리, 내부대신 등을 지냈다. 그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과 같이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지용은 1911년 일왕으로부터 은사공채 10만 원을 받았고,

[경향신문] 실학사상 연구 큰 업적,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

2022년 1월 14일 915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때 고문 친일인명사전 지도위원 참여 한국 사회경제사와 실학사상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가 별세했다. 향년 84세. 고인은 경희대 문리대 학장과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다산연구회와 실시학사 등 학술단체에서 활동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기관에 연행돼 고초를 겪기도 했으며, 한국사 국정교과서 반대 등 사회운동에 적극 목소리를 냈다.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당시 원로 사학자 강만길 고려대 교수, ‘사상의 은사’ 언론인 리영희·송건호 선생과 함께 고문을 맡았으며 ‘친일인명사전’에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다. 장례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이며 발인은 15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 광릉추모공원이다. <2021-01-13> 경향신문 ☞기사원문: 실학사상 연구 큰 업적,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 ※관련기사 ☞한국일보: 한국사 연구 힘쓴 김태영 교수 별세 ☞연합뉴스: ‘한국사 연구에 큰 족적’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 ☞디지털타임스: `한국사 연구 큰 족적` 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별세…향년 84세 ☞한겨레: “조선 토지제도에서 실학 연구까지 중요한 성과 남기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