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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외쳤다고 15년형 이어 억울한 죽음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15) 통일운동 선구자 이수병 4·19후 통일운동 이끌었다가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미운털 혁명재판서 15년형 선고 이어 74년 2차 인혁당 조작사건으로 다른 7명과 함께 사법살인 당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에제키엘 37,21-22)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 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로마 9,2-3) 1961년 4월,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4·19 일주년 기념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학생대표 이수병 선생님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4·19 혁명으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청년 학생들이 3·1 독립선언과 항일투쟁 정신을 이어받아, 미국에 종속된 정치체제를 넘어 민족의 일치와 화해, 통일을 위한 불길을 댕긴 것입니다. 4·19로 분출된 뜨거운 시대정신은 청년과 시민을 각성시켰고, 이는 통일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절절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청년 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판문점으로 향했습니다. 청년 학생들의 열정과 울부짖음은 뿌리를 찾고자 하는, 구원과 완성을
[보도자료] 한국사 연구에 큰 족적 남긴 김태영 교수 별세
【보도자료】 한국사 연구에 큰 족적 남긴 김태영 교수 별세 한국 사회경제사와 실학사상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김태영 경희대학교 명예교수가 1월 11일 오후 8시경 향년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김태영 교수는 경희대학교 문리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다산연구회와 실시학사 등 학술단체에서 활동했다. 전두환 군부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으며,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를 비롯한 역사와 사회 정의 실현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다.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때는 강만길 고려대 교수, 언론인 리영희, 송건호 선생과 함께 고문을 맡았으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에는 지도위원으로 자문했다. 그의 진면목은 만년까지 이어진 치열한 학술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1982년 저술한 『조선전기 토지제도사 연구』는 대학교수들이 선정한 ‘현대 한국의 명저 100권’에 포함되었으며, 1986년 이 저서로 제 1회 단재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 외에도 『실학의 국가개혁론』 『조선성리학의 역사상』 『유형원-국가개혁안을 제시한 실학의 비조』 등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다. 수많은 논구는 한결같이 국가개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세사 연구자임에도 화두는 항상 현실 개혁이었던 것이다. 단재상, 미원학술상, 다산학술상 학술대상, 벽사학술상 등 숱한 수상 경력은 그의 실천적 탐구정신에 대한 사회의 응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례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연세대학교 신촌장례식장 7호, 발인은 15일 오전 10시이며, 장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추모공원이다.
[경향신문] 차별과 혐오, 타향살이 아픔···주소 불명 작품에 ‘주소’를 부여하다
재일조선인 미술사 발굴학자 백름 백름(白凜)은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발굴한 학자다. 이 발굴을 ‘반전’이라고 말한다. “재일조선인 미술은 언급할 가치가 없고, 연구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전 계기는 199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아름전’이다. 재일조선인에게도 ‘미술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일조선인 2세들이 중심이 돼 개최한 이 전시에 재일조선인 1세 화가의 작품들이 나왔다. “재일조선인 미술가 집단의 에너지에 감동했다. 고흐나 마네 같은 서양 미술인들은 알면서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은 이름도, 인생도, 작품도 왜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일본 조선대학교 교육학부 미술과 졸업을 앞둔 때다. 당시 이 학교 교수 리용훈이 ‘재일코리안 미술의 궤적’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다. “리 선생님이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정리하는 연구자가 나와야 하는데…’ 하고 몇 번 말씀하셨다. 그때 ‘내가 해보자’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재일조선인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국적을 부여받고 살다 1945년 해방 뒤 무국적자로 분류됐다. 남북이 분단하면서 ‘대한민국’ 지지자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지자로 나뉘었다. 재일조선인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나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에 각각 소속되거나 가입하지 않은 이들을 통칭한다. 이들은 남북한은 물론 일본 국적도 취득하지 않았다. 백름은 재일조선인이 “ ‘북한 사람’이 아니라 조선반도(한반도)에 뿌리를 두고 일본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백름은 처음으로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집단 활동을 연구했다. 활동의 시작은 1947년 설립된 조선미술협회 결성이다. 이들은 “민족이 대립과 차이의 키워드가 아닌 공존의 키워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활동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재일조선미술회’가 설립됐다. 백름은 “조국에 새로운 르네상스를 불러오겠다는
[오마이뉴스] 1920년대 일본이 남산에 한 짓은 끔찍하다
남산 통치기구와 우리 민족 정신을 말살하려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 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편집자말] 우리에게 남산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 얼이 서린 산’이라 비견해도 무방할 것이다. 백두산과 더불어 오랜 관념으로 그리 굳어졌다. 수많은 사람이 오래전부터 불러 굳어진 노랫말 애국가 2절은 “남산 위에 저 소나무”로 시작하며 우리 기상을 드러내는 존재로 남산을 묘사한다. 환경결정론이라 할 수 있는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세워진 계획도시가 한양이다. 이때 남산은 계획 중심요소로, 내사산 중 주작에 해당한다. 이성계는 새 나라와 도읍 한양을 지켜 줄 수호신으로 목멱대왕(木覓大王)을 모시면서 정상에 국사당을 세운다. 산은 또한 여러 이름을 가졌으나, 주로 목멱산이라 불렀으며 경복궁과 관계도 중요하다. 경복궁은 외사산 중 삼각산을 조산 삼고 백악산을 주산 삼아 앉힌 새 나라 법궁(法宮)이다. 남산은 경복궁 안산이다. 이렇듯 조선의 도성 한양에서 경복궁과 남산은 도시 조영과 핵심적 통치공간을 상징하는 장소성을 갖는다. 또한 남산은 국방통신인 봉수제 원점이기도 했다. 산에 오르면 도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세가 순하고 부드러워 도성 사람들에게 일상으로 바라다보이는 친근감과 편안함을 줌은 물론이다. 왜성대와 남산대신궁 강화도조약으로 조선 최초 외국 공관, 일본 공사관이 돈의문 밖 청수관에 자리한다. 하지만 임오군란 때 불타 버리고, 제물포조약 후 금위대장 집을 2년간 임시로 사용한다. 교동에
[SBS] ‘뜻은 못 이뤘지만’..이봉창 재평가 목소리
<앵커> 일제 강점기였던 1932년, 이봉창 의사가 일본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의 큰 물꼬를 튼 의거였습니다. 그래서 의거 90주년을 맞아 이봉창 의사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임상범 기자가 전하겠습니다. <기자> 임시정부를 찾아온 정체불명의 청년. 밀정이라는 의심도 받았지만, 은밀히 서약서를 쓰고 한인애국단 1호 단원이 된 이봉창. 차라리 일본인으로 살겠다며 일본 땅에서 일용직을 전전하던 그는 일왕 즉위식을 보러 갔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투옥되자,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하게 됩니다. [한시준/독립기념관장 : 고민을 하죠. 내가 일본인으로 살고 싶어 해도 일본 사람들은 나를 일본인으로 봐주지 않는구나.] 삶의 목표를 바꾸고는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로 망명합니다. [홍인근/이봉창 평전 저자 : 삼십 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다 했습니다. 이제 영원한 쾌락을 얻어야 되는데. 김구 선생 말씀을 듣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준비를 끝낸 이봉창은 일본으로 되돌아가고, [홍인근/이봉창 평전 저자 : 일왕이 1월 8일 날 요요기 연병장에서 육군 관병식을 한다. 그런 얘기를 듣고 아 그날 거사하면 되겠구나.] 1932년 1월 8일, 도쿄 경시청 앞을 지나는 일왕의 마차 행렬에 수류탄을 던집니다. [송성희/이봉창 역사울림관 : 이봉창 의사는 성공한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엄청 큰 소리가 났거든. 근데 위력은 너무 약했던 거야.]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거사는 실패도, 끝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렸고 석 달 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연합뉴스] 독립운동가 허위 선생 장손녀 유해 구미에 안장
지난달 96세 일기로 별세한 허로자 여사, 할아버지 곁으로 (구미=연합뉴스) 김용민 기자 = 경북 구미 출신 항일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4∼1908) 선생의 장손녀인 허로자 여사의 유해가 구미에 안장된다. 10일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에 따르면 허 여사 유해 봉안식이 오는 12일 오전 11시 구미 공설 납골당인 숭조당에서 열린다. 허 여사는 지난달 26일 서울에서 향년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나 경제적으로 궁핍해 유해를 모실 곳을 찾지 못했다. 그의 장례식도 구미지역 국회의원과 모 대기업의 도움을 받아 치렀다. 화장한 유해를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아 서울 사는 5촌 조카가 잠시 모시고 있다가 이번에 구미로 모시게 됐다고 한다. 허 여사의 유해를 구미로 모시는 데는 김재상 구미시의회 의장과 구미시의 도움이 있었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덧붙였다. 우즈베키스탄에 살던 허 여사는 지난 2006년 10월 당시 한명숙 국무총리 초청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으며 이후 최근까지 서울에서 생활했다. 허 여사의 할아버지인 허위 선생은 1907년 13도 연합의창군 1만여명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는 등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돼 190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항일운동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허위 선생 후손들은 한국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 여러 곳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설명했다. 김영덕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장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평생 고생을 하셨을 텐데 이제는 할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곳에서 영면하시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김용민 기자 yongmin@yna.co.kr <2022-01-10> 연합뉴스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허위 선생 장손녀 유해 구미에 안장 ※관련기사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일제는 왜 조선임금의 탯줄까지 집단이주시켰나
조선왕릉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2009년 왕과 왕비 무덤 44기 중 40기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왜 4기는 빠졌을까. 제릉(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릉)과 후릉(2대 정종과 정안왕후릉)은 북한 땅에 있으니 뭐 그렇다치자. 연산군(1494~1506)과 광해군(1608~1623)의 무덤도 제외됐다. ‘왕릉’이 아니라 ‘묘’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등재명칭이 ‘조선왕릉’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묘’는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과 광해군은 만 12~15년간 조선을 다스린 임금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폐위됐지만 그것은 조선 왕조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까지 ‘왕릉’이 아니라 ‘묘’라는 딱지를 그대로 붙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자격을 얻지 못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케케묵은 왕조의 잣대로 연산군과 광해군에게 행한 ‘잔인한 2차 가해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까맣게 잊고 있던 연산군의 태실 필자는 최근 두 가지 소식을 듣고 다시 한번 연산군과 광해군을 떠올리게 됐다. 하나는 경기도가 도내에 존재하는 조선 왕가의 태봉·태실 65곳 자료를 집대성한 보고서(<경기도 태봉·태실 보고서>)를 발간했다는 소식이었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한 뒤 길지를 선정해 그 태(태반과 탯줄)를 봉안하는 공간을 일컫는다. 태봉은 태를 묻은 산봉우리다. 보고서를 읽은 필자의 시선이 머문 쪽이 있었다. 이번에 연산군의 태를 묻은 곳으로 처음 지목된 이령(梨嶺·경기 광주시 목현동 골프연습장 일대)이었다. 이령은 광주시 목현동에서 성남시 상대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현재 지명은 이뱃재이다. 사실 성종 때(1481년)에 처음 편찬되고, 연산군(1499년)과 중종(1530년) 연간에 수정·보충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령에 성종과 금상(今上·현재 재위 중인 임금)의 태를 묻었다’고 기록했다.
[당진신문] 당진시, 드디어 인태식·홍난유 선정비 앞 ‘친일 행적 안내판’ 설치
[당진신문=지나영 기자] 당진시가 친일파 비석 옆에 친일 행적을 알리는 안내문을 지난 5일 설치 완료했다. 당진 남산공원에는 당진 출신의 관료·정치인 출신 인태식 씨의 공적비가, 당진문화원에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당진 군수로 재직한 홍난유 씨의 선정비가 세워져있다. 두 사람은 친일인물사전 명단에 수록된 친일파다. (관련기사: 당진 남산공원과 문화원에 버젓이 세워진 친일파 공적비,1320호)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인태식은 세무서 재직 중에 중일전쟁과 관련한 각종 세금에 대한 일반인의 강화 등 전시사무를 수행한 공로로 지나사변공로자공적조서에 이름을 올렸다. 홍난유는 광주군수로 재직중이던 1908년 의병 진압을 목적으로 지역 각 면을 순회하며 연설했고,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에서는 관민들을 설득했다. 문제는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시유지에 친일파 공적비가 세워져 있고, 특히 당진시는 본지 보도를 통해 홍난유의 친일 행정을 인지했을 만큼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않았으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본지 보도 이후 언론의 질타를 받은 당진시는 뒤늦게 친일 인물 비석 옆에 친일행각을 알리는 안내문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지난해 6월 충남도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특별위원회에 친일파의 비석을 어떻게 처리할지, 안내문을 설치해도 되는지에 대한 안건을 올렸다. 이후 충청남도는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열고 당진시 친일파의 비석을 철거 또는 안내문을 세우고, 지자체에서 조속히 처리하는 것으로 안건을 심의 처리했다. 하지만 인태식 비석을 세운 단체에서 비석을 옮길지 아니면 안내문 설치를 진행할지를 두고 당진시와 입장을 달리하면서, 홍난유 친일 행적 안내판 설치도 덩달아 미뤄졌던 상황.
[오마이뉴스] 영상으로 보고 듣는 ‘효창 청사진’이 있다
‘도시놀이 2교시’로 효창공원의 미래를 함께 그린다 ‘효창 도시놀이 2교시’가 1월 8일에 시작된다. 1월 8일은 이봉창 의사가 의거를 감행한 날이다. 이봉창 의사의 고향은 지금 효창공원 바로 아래쪽이다. 효창공원 일대 도시놀이 2교시가 이날 시작하는 이유다. 매주 금요일마다 7주 동안 저녁 7시 반에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 한 회차 마다 약 40명씩 온라인에서 모여 무얼 할까? 도시놀이를 꿈꾸고 만드는 곳 ‘효창마루’는 거주민과 함께 효창공원 인근 도시 계획을 논하고 싶었다. 이를 ‘효창 도시놀이 2교시’라고 이름을 붙인 데는 그 이유가 있었다. 1교시에서 오는 부담감은 떨치고 말 그대로 2교시의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찬 시민대학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효창 도시놀이 2교시’는 용산구 효창동, 특히 효창공원 주변에 사는 거주민들이 함께하는 도시계획의 장이다. 새로운 방식의 도시계획 ‘효창 도시놀이 2교시’ ‘효창 도시놀이 2교시’는 모두 7강으로 구성된 온라인 강의다. ▲ 1강 ‘효창공원과 동네이야기’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실장 ▲ 2강 ‘다시 만드는 도시를 찾아서’ 효창마루 ▲ 3강 ‘오래된 길에서 새길 찾기’ 조정구 건축가 ▲ 4강 ‘우리도 도시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오연호 꿈틀리 대표 ▲ 5강 ‘조금 일찍 온 미래도시’ 김세용 고려대 교수 ▲ 6강 ‘런던, 뉴욕, 바스크에서 서울을 보다’ 천장환 건축가 ▲ 7강 ‘2교시, 한 번 더 놀자’ 효창마루. 효창공원이 일제강점기에 골프장이었다고? 첫 강의였던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실장의 ‘효창 공원과 동네 이야기’는 ‘도시놀이 2교시’를 함께 듣던
[한국일보] 이원수의 문학과 ‘친일’에 대하여
<2022-01-05> 한국일보 ☞기사원문: 기억할 오늘, 이원수의 문학과 ‘친일’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