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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에서 묻혀버린 몽양 되살려야”
한겨레신문 한승동 기자 » ‘여운형 평전’ 펴낸 강덕상 일본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 인터뷰 / ‘여운형 평전’ 펴낸 강덕상 일본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 분단민족 설움 절감한 재일동포 학자“몽양 살았다면 전쟁·분단 없었을 것잘못된 역사 바로잡고 통일 보탬 되길” 근대 중국의 시작을 알린 5·4운동을 촉발시킨 불씨가 조선의 3·1운동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지만, 그 의미는 평가절하돼 있다. 3·1운동 발발 직후인 1919년 3월호 <매주평론>에 실린 중국공산당 창시자 천뚜슈(진독수)의 ‘조선독립운동의 감상’의 일절은 다음과 같다. “위대하고 성실하며 비장하고 정확 명료한 민의를 바탕으로 … 세계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조선민족에게 이러한 영광이 나타나 … 움츠르던 우리 중국민족을 더욱 부끄럽게 했다. … 보라 조선인의 활동을 … 조선인에 비해 우리는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전 3권 중 먼저 1권이 나온 <여운형 평전>(김광열 옮김·역사비평사 펴냄)의 지은이 강덕상 일본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는 13일 전화인터뷰에서 “3·1운동과 5·4운동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쑨원과 조선인청년단이 연결돼 있었으며 이를 통한 조-중 연대운동에 일본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3·1운동 직후에 결성된 상하이 임시정부 활동이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 등 당시 동아시아 변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일제정부는 임시정부를 일대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며 그 중심에 몽양 여운형이 있었다고 했다. 강 교수는 자신이 접한, “일제가 식민지배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수집한 방대한 정보”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분야는 민족운동 관계자료였는데
노기남 김연수 친일 결정에 강하게 반발
민족문제연구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성대경)가 노기남 대주교(1902~1984)와 삼양사 그룹 창업자이며 인촌 김성수의 동생인 김연수(1896~1979 사진 오른쪽)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통지서를 보낸 데 대해 각각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김연수의 유족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노기남은 일제 강점기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를 비롯해 여러 친일단체에 참여하였고 기관지『경향잡지』를 통해 여러 편의 친일 글을 발표했다. 김연수는 일제 강점기 경성방직 사장으로서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냈으며, 일제 말기에는 학병을 적극 권장했다. 1963년 전주종합경기장이 건립될 당시 많은 기부금을 낸 김연수의 아호를 따 경기장 정문인 일주문에 ‘수당문’이란 현판이 걸렸으나 그의 친일행적으로 이유로 2005년 4월 19일 연구소 전북지부와 전주시가 합의해 현판을 철거하기도 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측은 천주교 소유의 방송(왼쪽 사진)과 신문을 통해 그리고 김연수의 유족 측은 행정소송을 통해 각각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취소를 주장하고 있다. 한편 조선, 동아일보 등은 사설과 칼럼을 통해 노기남 대주교의 친일행위를 옹호하면서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을 끌어 들여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을 들먹이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즉, ‘좌파’인 여운형의 친일은 왜 문제 삼지 않느냐는 억지 논리다. 한편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8월부터 ‘만화 CEO열전’이란 제목으로 김연수를 비롯한 재벌 총수들의 성공담을 담은 만화를 전국 11,000여 개의 초중고에 무상 배포한 바 있다.
업무 방해한 수구단체 회원들 뒤늦게 배상금 지급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소 앞에서 수차례 집회를 열면서 행패를 일삼아 온 수구단체 회원들에게 대법원은 지난 2008 11월 27일 업무방해 등의 혐의를 인정한 판결을 최종 확정했다. 즉 집회를 주도한 김동주(박정희 바로알기 대표), 신혜식(인터넷 독립신문 대표), 홍정식(활빈단 대표), 홍관희(안보전략연구소장), 김병관(서울시 재향군인회장) 등은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김승교(연구소 고문 변호사)에게 총 2,000만원을 연대하여 지급하라는 판결이었다. 그러나 홍관희를 제외한 나머지 인사들은 주소지를 수시로 변경하는 방법 등으로 대법원 판결문 수령을 거부하면서 배상금 지급을 고의로 이행하지 않았다.이에 연구소 측 소송대리인은 9월 1일 오후 2시 경 법원 집행관 3명을 독립신문 사무실로 보내 컴퓨터, 모니터, 팩시밀리 등 사무용품 8개에 가압류 스티커를 붙였다. 결국 이들은 9월 14일 자신들이 배상해야 할 금액을 보내왔다. 그러나 당시 집회의 주도자인 김동주는 독립신문이나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서는 버젓이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주소지는 숨긴 채 법원의 집행을 회피하고 있다. 한편 이들은 지난 2005년 9월부터 12월까지 수차례 연구소 사무실 앞에서 집회를 열면서 연구소와 임원들을 ‘김정일 하수인’ 등으로 매도하면서 연구소 현판을 훼손하는 등 연구소 업무를 방해했다.
[사설]日정부, EU의 ‘위안부 결의안’ 안 들리나-세계일보(0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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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日, 유럽의회 위안부 결의를 보라-서울신문(0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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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민족일보 영인본 등 보급 사업 착수
민족문제연구소 우리 연구소는 앞으로『민족일보 영인본』(1961.2.13-1961.5.19 총92호)과 조용수 선생의 평전인『조용수와 민족일보』(원희복 / 도서출판 새누리)를 위탁 판매한다. 이는 조용수기념사업회 전무배 회장(전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과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박중기 의장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전 무배 회장 자택에 보관되어 있던 1톤 트럭 한대 분량의 영인본과 평전 전량을 9월 15일 연구소 자료실로 이전했다. 영인본과 평전 보급을 통해 우리 연구소는 고 조용수 사장과 민족일보의 창간 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에도 미력하나마 관심을 기울일 것을 다짐했다. (사진은 9월 15일 자료를 1톤 트럭에 모두 옮긴 뒤 전무배 선생 자택에서 찍은 것으로, 왼쪽에서 네 번째부터 전무배 선생 내외분과 박중기 의장님) · 민족일보 영인본 (정가 60,000원) → 회원가 48,000원 · 조용수와 민족일보 (증보판 / 정가 20,000원) → 회원가 16,000원 · 조용수와 민족일보 (초판 / 정가 15,000원) → 회원가 12,000원 문의 : 02-969-0226
올해 임종국상 연기하기로
민족문제연구소 11월 11일로 예정되어 있던 임종국상 시상식을 작년에 이어 올해도 부득이 연기하기로 했다. 장병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회장과 임헌영 소장은 9월 11일 회합을 갖고 이같이 결정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보고대회와 임종국상 시상식 일정이 시기적으로 중복될 가능성이 높아 실무 준비에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다만 발간 보고대회 당일 임종국 선생의 업적과 생애를 부각하도록 하고, 이후 천안에 있는 임종국 선생의 선영에서 친일인명사전 헌정식을 진행키로 했다.
“전세계 분노에도 일본만 귀 막아”-서울신문(07.12.15)
“전세계 분노에도 일본만 귀 막아”
[사설]위안부 결의안은 유럽의회의 경고-매일신문(07.12.15)
[사설]위안부 결의안은 유럽의회의 경고
독립운동가 최능진 선생 억울한 죽음 밝혀져
민족문제연구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한 독립운동가 최능진(1899~1951) 선생이 부당한 죽음을 당했다고 결론짓고 국가의 사과와 법원의 재심 수용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는 “최능진은 이승만에게 맞선 것이 계기가 되어 설치 근거도 없고, 법관 자격도 없으며, 재판관할권도 없는 재판부에 의해 사실관계가 오인된 판결로 사형이 선고되고 총살당함으로써 중대한 인권인 생명권을 침해받은 것”이라고 밝혔다. 평남 강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였던 최능진 선생은 해방 뒤 월남, 미군정에 의해 발탁돼 경무부 수사국장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하며 이승만과 정면 대립하면서 파면됐고, 1948년 정부수립 후 한달 만에 내란음모죄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후 인민군에 의해 풀려난 최능진 선생은 피란길에 오르지 않고 서울에서 정전·평화운동을 벌였으나 서울 수복 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친북 활동가로 억울하게 몰려 1951년 2월 11일 이적죄로 총살당했다. 한편 최능진 선생의 차남으로 전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최만립 선생(연구소 지도위원)은 9월 9일 진실화해위의 결정문을 들고 연구소를 방문해 그동안 이 문제 해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준 연구소 관계자들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사진은 연구소를 방문해 진실화해위 결정문을 들어 보이고 있는 최만립 지도위원. 감격 어린 표정이 역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