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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고 조문기 이사장님 친필과 어록모음

2008년 2월 6일 556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소 식구들에게   독립운동사 다시 써야한다.     하지만 참으로 오묘한 진리가 있다. 역사는 영원히 묻히지 않는다. 밝혀지게 돼 있다. 그래서 역사다. 그래서 역사는 무섭다는 것이다. 역사를 깔보고 역사를 농락하고 역사를 짓밟던 자들이 점점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나는 본다. 참으로 무서운 인내와 의지로 영영 묻혀있을 줄 알았던 민족의 혼, 민족의 역사를 조그만 민간단체가 끄집어낸 것을 저들은 봤고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장엄한 깃발이 힘차게 휘날리는 것도 봤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이 신독립군들 앞에 나와 머리를 조아리고 참회와 용서를 빌 날도 머지않으리라.(민족사랑 2004년 6월호 독립운동사 다시 써야 한다)       천당과 지옥사이   이젠 외롭지 않다. 수만 명의 신독립군 동지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군자금 때문에 한줌밖에 안되는 친일반민족세력의 교만과 횡포를 참아내던 인내도 이젠 필요 없다. 이젠 새파랗게 질려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친일반민족세력과 그 후계세력에게 완전한 자주독립국가 쟁취를 위한 제2의 독립운동을 실천으로 보여줄 일만 남았다. 군자금으로 제2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만의 새로운 신독립군들, 그리고 영욕과 고락을 함께 하겠다고 신규가입한 연구소의 천오백여 새 식구들, 이것은 분명 연구소만의 사건이 아니라 8.15이후 우리나라 민족운동이 맞는 대사건이자 대전환점이다. 이럴 때야말로 우리에게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있어서는 안된다. 십여 년 몸에 배인 긴장도 소명의식도 더욱 다잡고 분발해야 한다고 믿는다.(민족사랑 2004년 1,2월호 천당과 지옥사이)      속

고 조문기 이사장님의 회고록

2008년 2월 6일 483

    민족문제연구소       고 조문기 이사장님의 회고록 『슬픈조국의 노래』중에서                             * 세부 내용은 추모게시판 1번~12번 글에 꼭지를 나누어 등록하였습니다.    

일본 강제징용 미불임금 소송 제기

2009년 9월 8일 291

일본 강제징용 미불임금 소송 제기(머니투데이, 09.09.04)

日징용 피해자 미불임금 관련 소송제기

2009년 9월 8일 306

日징용 피해자 미불임금 관련 소송제기(연합뉴스, 09.09.04)

고 조문기 이사장님 휘호모음

2008년 2월 6일 507

    민족문제연구소     ▲ 2002년 새해 조문기 선생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1세기의 독립군으로 민족혼을 지키는 보루라며 자랑스러워하셨다.2003년 새해 조국통일을 소원하며 쓰셨다     ▲ 2002년 새해 조문기 선생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1세기의 독립군으로 민족혼을 지키는 보루라며 자랑스러워하셨다             ▲ 2005년 새해를 앞두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제2, 제3의 친일 또는 반민족 세력을 타파하고 끊임없이 겨레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줄 것을 당부하셨다.       ▲ 친일인명사전은 역사의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뜻             ▲ 친일청산은 역사를 바로잡는 길이며,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아야만 올바른 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사 청산은 곧 미래를 위한 역사의 길라잡이라는 것이다

애국지사 조문기 선생 별세(보도자료)

2008년 2월 5일 644

    민족문제연구소    조국 독립과 민족사 광정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애국지사 조문기 선생께서 2008년 2월 5일 오후 5시경 향년 82세로 별세하셨다. 조문기 선생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이끌어 오던 지난 2006년 11월 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자택이 있는 수원과 서울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받았으나 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몸이 더욱 쇠약해져 항암치료를 중단하고 요양병원에 장기입원 중이었다. 최근에는 다소 병세가 호전되었으나 지난 2월 1일 중환자실로 급히 옮기셨다가 결국 별세하셨다.   조문기 선생은 1945년 7월 24일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널리 알려진“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이다. 1944년 소년의 몸으로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20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참여한‘조선인 멸시 규탄 파업’을 주도했다. 선생은 1945년 1월 조국으로 돌아와 항일비밀결사 단체인‘대한애국청년당(약칭 애청)’을 조직하고 친일파 거두인 박춘금과 총독부 주요 인사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박춘금의 ‘대의당’집회 광고를 보고 7월 24일 친일거두가 총집결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인 부민관 폭파 의거를 결행했다. 이 의거는 가혹한 전시체제하에서 숨죽여 지내던 민중들에게 저항정신을 일깨웠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굳건히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해방 후에도 선생은 ‘대한애국청년당’, ‘인민청년군(대한청년군)’을 조직,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으셨다. 1948년 6월 2일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수립 반대를 위한 ‘인민청년군 사건’을 일으켰고, 그 결과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분단과 상처투성이 조국에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선생은 10년 정도 연극배우로서 유랑생활을 하신 적도 있다.   1959년 다시

아산 소화마을 정착 동포들 노령연금 갑자기 끊겨 발 동동

2009년 9월 8일 318

아산 소화마을 정착 동포들 노령연금 갑자기 끊겨 발 동동(중앙일보, 09.09.03)

일제 강제징용 미불임금 ‘제값 받기’ 소송

2009년 9월 8일 306

일제 강제징용 미불임금 ‘제값 받기’ 소송(한겨레신문, 09.09.04)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별세(추모게시판 연결)

2008년 2월 4일 1478

    민족문제연구소   [부고(訃告)]   조국 독립과 민족사 광정(匡正)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애국지사 조문기(趙文紀) 선생께서 2008년 2월 5일 오후 5시 향년 82세로 별세하셨습니다.      빈  소 :  서울대 병원(대학로) 장례식장 1호 발  인 :  2008년 2월 11일  오전 7시  노  제1: 2008년 2월 11일(월) 오전 8시30분 청량리 민족문제연구소   영결식 :  2008년 2월 11일  오전 10시 성공회 본당 프란시스홀  노 제2: 2008년 2월 11일(월) 오전 10시40분 부민관 현장(정동 서울시의회 본관) 안장식 :  2008년 2월 11일  오후 3시 대전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 유  족 :  부인     장영심    딸        조정화     사위  김석화    외손녀  슬아  슬샘    양자     조강협 연락처 :  빈소   ( 02 ) 2072 – 2091~2092    민족문제연구소 (02) 969-0226 / 누리집 www.minjok.or.kr     고인의 약력   1926  경기 화성 출생1944  일본강관주식회사 파업 주도, 지명 수배1945  대한애국청년당 결성1945.7.24  부민관 폭파 의거1948  단정반대(인민청년군 사건) 옥고1951 <황금좌><고려> 등에서 극단 활동1959  ‘이승만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 조작사건’으로 투옥1982  건국포장1983-1988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1990  건국훈장 애국장1991-1999  광복회 경기도지부 지부장1999  (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2001  (현)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이사장                     <영결식 장소 안내>   1호선 시청역 3번출구(약도 참조): 대한성공회 서울교구(본당)   >   * 여러분들의 요청에

독도 접안시설 안전난간 설치·새단장 마무리-매일신문(08.02.01)

2008년 2월 1일 311

독도 접안시설 안전난간 설치·새단장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