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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日 외무성 차관 “식민지배 고통 사과”-아시아경제신문(08.01.22)

-0001년 11월 30일 331

日 외무성 차관 “식민지배 고통 사과”

‘장준하의 아들’장호권씨 어쩌다 ‘사기꾼’으로 전락했나-경향신문(08.01.23)

2008년 1월 23일 382

‘장준하의 아들’장호권씨 어쩌다 ‘사기꾼’으로 전락했나

법원 “금성 역사교과서 발행 중단”

2009년 9월 3일 317

법원 “금성 역사교과서 발행 중단”(서울신문, 09.09.03)

[사설]또 左편향 역사교과서 만들면 학교가 거부해야

2009년 9월 3일 325

[사설]또 左편향 역사교과서 만들면 학교가 거부해야(동아일보, 09.09.03)

쇠락한 일제강점기 영욕의 상징

2008년 1월 23일 382

    아래 글은 국정홍보처에서 발행하는 격주간지 코리아플러스에 실린 글이다. 글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국정홍보처 측에 감사 드린다.<편집자 주>     송석기 군산대 교수(문화재 전문위원)     문화재청은 지난해 12월 8일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을 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1923년 조선은행 군산지점으로 건립된 이곳은 당시 경성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웅장한 근대식 건물이다. 일본인이 설계했지만, 설계 과정에 오스트리아인도 참여했다고 전해지며 시공에는 중국인 석공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또한 최근까지 성인나이트클럽으로 영업을 해왔다고 하니, 근 1세기 동안의 영화와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문화재로 값어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전라북도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 군산은 북쪽으로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서천군과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전라북도 익산시, 남쪽으로는 만경강을 끼고 전라북도 김제시와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인구 26만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항구도시이다. 군산이 근대적인 항구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899년 5월 1일 대한제국 정부의 속령으로 개항하면서부터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고, 뒤이어 목포, 진남포가개항된 이후 군산은 성진, 마산과 함께 6번째 개항이었다. 개항 직후 군산에는 외국인 전용주거지역이 설치됐다. 또 근대적인 항만시설과 철도, 도로 등이 건설되고, 관공서, 상가, 주거시설 등이 건립되면서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군산에 들어온 외국인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군산과 김제, 익산의 넓은 평야지대에서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했고 여기서 수확한 쌀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자위대파견 공명 항구법 논의-마이니치신문(08.01.23)

2008년 1월 23일 322

자위대파견 공명 항구법 논의     (일본 마이니치, 1.23, 5면) 공명당은 22일 외교안보조사회와 내각부회 합동회의를 열고 자위대를 해외에 파견시키는 요건을 정하는 항구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시정방침연설에서 항구법의 검토를 추진할 생각을 나타내는 등 정부측의 움직임이 활발해 질 것에 대비하는 것이 목적. 공명당은 지금까지 자위대파견에 대해 “개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오타대표)며 항구법에 신중한 자세를 취해 왔다. 그러나 자민, 민주 양당이 적극적으로 대응할 자세를 보이고 있어, 이 논의에 참가하지 않으면 고립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 논의를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이날의 회의에서는 당내 논의의 초안으로서 각 당의 주장을 연구했다. 자위대 활동의 역사나 정부답변 등 법제면의 논의에 대해서도 향후 정리한다. 야마구치 외교안보조사회장은 회의 후 기자단에게 “당내에서 이해를 얻으면 자민당과 기초적인 논의를 해나갈 것”이라며 여당 프로젝트팀을 설치해 논의할 생각을 밝혔다.‘평화의 당’을 주장하는 공명당이 항구법 논의를 시작한 것은 자민, 민주 양당의 대연립구상으로 항구법이 정책협의 중심의 테마가 된 것이 배경에 있다. 자민, 민주 양당이 공명당을 제치고 논의를 시작하면 여당으로서의 존재감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다만 지지단체인 창가학회에는 항구법에 대한 신중론이 뿌리 깊다. 공명당은 논의의 전제로서 (1) 헌법의 틀 내 (2) 국회 관여에 의한 문민통제 (3) 무기사용 한정 – 의 3조건을 들고 있다. 기타가와 간사장은 “국민의 이해를 얻지 못하면 법안화는 인정할 수 없다”며 법 정비에는 신중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법원 “금성 역사교과서 배포 중단”

2009년 9월 3일 333

법원 “금성 역사교과서 배포 중단”(동아일보, 09.09.03)

[사설]사실상 유죄판결 받은 역사교과서 직권수정

2009년 9월 3일 307

[사설]사실상 유죄판결 받은 역사교과서 직권수정(경향신문, 09.09.03)

日정부, 한국 징용자 유골 반환에 맞춰 유족 초정 추도식-아사히신문(08.01.23)

2008년 1월 23일 321

日정부, 한국 징용자 유골 반환에 맞춰 유족 초정 추도식    (일본 아사히, 1.23, 34면) 구 일본군의 군인 및 군속으로서 징용되어, 전사하거나 병사한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 101명분의 한국 반환에 맞춰 유족을 초청한 정부주최의 추도식이, 22일 유골을 보관해 온 도쿄도 메구로구의 유텐지(祐天寺)에서 치러졌다. 이러한 식전 개최는 처음 있는 일로, 이번과 같은 다수의 유골반환도 1976년의 22위 이래의 일이다. 유골은 23일, 6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간다.식전에는 한국에서 유족 50명과 정부 및 강제동원피해자 전기호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이, 일본 측에서는 후생노동성, 외무성의 부대신이 참가했다.12살 위의 형 김정봉씨를 잃은 유족대표 김경봉씨(71, 서울)는 “코흘리개 장난꾸러기이던 경봉이가 아버지 어머니보다도 흰머리가 되어서 겨우 형님을 다시 만났습니다.”라며 추도문을 전했다. 김정봉씨가 만주에 출정한 것은 1944년 9월. 사망 통지가 오지 않아 가족은 계속 그를 기다렸다. 조모는 신문을 매일 쌓으며 “저만큼 쌓이면 돌아올 것”이라며 달랬다고 한다. 조모가 말하는 신문지의 높이는 낡은 신문이 쌓이는 대로 높아져만 갔다.2006년 초 동위원회를 통해 일본정부가 보관하던 육군전시명부에 전시 병사가 기록되어 유골이 유텐지에 있다는 것이 전해졌다. 1945년 3월에 전쟁 중이던 중국에서 협심증으로 사망했다. “이렇게 긴 세월 공양도 해주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다”는 김정봉씨.후생노동성에 따르면 한반도 출신 군인 및 군속 사망자는 약 2만 2천명이다.

한국인 유족 맞이해 유텐지(祐天寺)에서 추도식-도쿄신문(08.01.23)

2008년 1월 23일 327

한국인 유족 맞이해 유텐지(祐天寺)에서 추도식    (일본 도쿄, 1.23, 26면) 도쿄도 메구로구의 유텐지(祐天寺)가 보관하고 있는 한반도출신 구일본군, 군속의 유골 중 101명 분이 유족에게 건네지게 됨에 따라, 처음으로 한국에서 유족 50명을 맞이한 일본 정부 주최의 추도식이 22일 유텐지에서 개최됐다.추도식에는 기시 후생노동 副대신, 기무라 외무 副대신, 유명환 주일한국대사 등도 참석. 기무라 副대신은 1998년 10월의 한일공동선언을 인용, 유족들 앞에서 과거의 식민지지배에 대해 재차 사과했다.참석한 유족들은 한국의 상복을 입고 있었다. 44년 징병돼 중국에서 병사(病死)한 김정봉씨의 동생 김경봉씨는 유족을 대표해 “괴롭고 힘들었던 기억을 씻어내고 천국에서 편안하게 잠들어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