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uge collection of 3400+ free website templates, WP themes and more http://jartheme.com/ at the biggest community-driven free web design site.

주요기사

[보도자료] 3·1운동 105주년 특별기획전 〈홍범도와 ХОН БОМДО(홍범도)-북간도 연해주 중앙아시아 그리고 한국에서〉삼일절 개막

2024년 2월 29일 720

[보도자료] [다운로드] 3·1운동 105주년 식민지역사박물관 특별기획전 〈홍범도와 ХОН БОМДО(홍범도)-북간도 연해주 중앙아시아 그리고 한국에서〉 삼일절 개막 ․ 홍범도장군의 전 생애를 보여주는 관련 자료를 망라 ․ 특히 국가보훈부,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등 국가기관의 공공아카이브 자료 적극 활용 ․ 해외 한인동포사회의 독립을 향한 노력, 특히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예술로 승화한 홍범도 추모 노력 소개 ․ 2024.3.1.(금)~5.5(일), 식민지역사박물관(매주 월요일, 5․1 휴관) 1. 민족문제연구소는 3·1운동 105주년을 맞아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월곡고려인문화관 결’과 함께 〈홍범도와 ХОН БОМДО〉특별전을 개최한다. 두 단체는 홍범도장군의 유해 봉환에 힘쓰고,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삶과 함께 했던 장군의 흔적들을 국내에 널리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2. 2023년 8월 윤석열정부는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육사 내 독립전쟁 영웅 흉상 철거를 기도하면서 때아닌 이념의 색깔로 그가 평생 몸 바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훼손했으며, 지금도 정부 주도의 이념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3. 이번 전시는 홍범도장군의 삶과 그의 독립운동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기획했으며, 방대한 국가기관 공공 데이터베이스의 전자사료들과 실물자료(복제)를 통해 홍범도의 삶과 독립운동에 보다 쉽게 접근하고자 했다. 4. 홍범도 장군은 아내와 두 아들을 모두 독립운동 과정에서 잃게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와 그의 가족의 헌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과 2021년에 각각 대통령장(대한민국장)와 애국장․애족장을 서훈했다. 그의 독립운동, 이 가운데서 민중과 함께 한 인간적 풍모는 홍범도 자신이 쓴 일지를 독립운동가 이인섭과 고려인 배우 이함덕이 필사한 두 권의 「홍범도 일지」를

[MBC뉴스] ‘독재’ 빠진 2·28 기념사‥’이승만 띄우기’ 영향?

2024년 2월 29일 215

앵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구 2.28 민주운동. 2018년부터 국가 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는데요. 어제 한덕수 총리의 기념사에는 이전과는 달리 ‘독재’라는 단어가 빠졌습니다. 이용주 기자입니다. 리포트 1960년 2월 28일. 대통령·부통령 선거를 보름여 앞두고,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최대 정적인 장면 박사의 대구지역 유세가 예정된 날이었습니다. 학생들의 참석을 막기 위해 대구 8개 고등학교에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고, 학생 2천여 명은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라며 가두시위에 나섰습니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 민주운동입니다. 지난 2018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고 올해 정부 대표로 참석한 한덕수 총리는 2·28 운동의 의미를 평가했습니다. [한덕수/국무총리 (어제)] “대전의 3·8 민주 의거와 마산의 3·15 의거로 이어지고, 4·19 혁명으로 민주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한덕수/국무총리 (작년)] “독재정권의 불의에 항거하는 2천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작년을 포함해 그간 모든 기념사에서 독재라는 단어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독재가 없었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우리 헌법에는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2·28 의거 기념식에서 독재와 싸웠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은 과연 누구와 싸웠단 말입니까?” 최근 정부는 부쩍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국방부는 이승만을 ‘혜안의 지도자’라고 기술한 정신교육 교재를 냈고, 국가보훈부는 올 1월의 독립운동가로 이 전 대통령을 단독 선정했습니다. 여권 지도부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뉴시스]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1000명 아래로…”역사 전승작업 시급”

2024년 2월 28일 931

[기사원문] <2024-02-28> 뉴시스 ☞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1000명 아래로…”역사 전승작업 시급” 지난해 1264명서 360여명 줄어 904명 [광주=뉴시스]김혜인 기자 = 일제강제동원 피해 생존자가 1000명 이하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고령인 점을 고려해 역사 전승 작업과 피해자 지원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8일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행정안전부로부터 받은 ‘국외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의료지원금 지급 현황’에 따르면 지난 1월 관련 지원금을 받은 피해자는 904명이다. 지난해 국외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는 1264명이었지만 1년새 피해자 360명이 숨졌다. 여성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는 지난해보다 3명 줄은 83명으로 집계됐다. ·········<상세는 기사원문>·········

[JTBC뉴스] ‘건국전쟁’ 기세 몰아…서울 한복판에 이승만 기념관?

2024년 2월 28일 287

[기사원문] <2024-02-27> JTBC뉴스 ☞ ‘건국전쟁’ 기세 몰아…서울 한복판에 이승만 기념관? 이승만 기념관’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기념관 부지로 종로구 송현광장을 언급했고, 이승만 대통령 기념 재단도 건립 절차 등에 대해 내부 논의 중인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건축물을 지을 수는 있지만 “왜 하필 송현광장이냐”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사회적 합의가 먼저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송현광장은 어떤 곳이고, 기념관 건립 논의는 어떻게 흘러갈지. [지금,왜]에서 짚어봤습니다. —<중략>— 신진 기자 ·········<상세는 기사원문>·········

[오마이뉴스] ‘반민특위터 표석’의 수난… 우여곡절 끝 제자리 찾았다

2024년 2월 27일 733

[기사원문] <2024-02-27> 오마이뉴스 ☞ ‘반민특위터 표석’의 수난… 우여곡절 끝 제자리 찾았다 [나의 표석 설치 분투기] 이승만의 씻을 수 없는 과오 ‘반민특위 해산’을 곱씹다 이승만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 논란이 뜨겁다. —<중략>—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비판받아야 할 첫 번째 문제가 바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해산해 친일파가 활개 치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1948년 5.10총선으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그해 9월 7일 찬성 103, 반대 6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제헌국회가 세 번째로 제정한 법이기도 했다. 당시 시대가 부여한 중차대한 과제는 ‘친일파 청산’이었다. 친일파를 등에 업고 대통령의 권좌에 오른 이승만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반대했지만, 정부가 제출한 양곡매입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법안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에 의해 잘못 뀌어진 친일청산의 역사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성된 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23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임시정부 문화부장 출신의 제헌의회 의원 김상덕이 위원장을 맡았다. 반민특위 산하에는 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반민족행위자에 대해 반민특위는 일본과 조선총독부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 경찰과 군부대, 헌병대 등에서 첩자 등으로 활동한 자, 위안부와 학도병의 강제징용을 권유하거나 찬양한 자 등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에 해당하는 7000여 명의 친일부역자를 파악, 일람표를 작성하고 검거에 들어갔다. 1949년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체포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관동군의 끄나풀이었던 <대동신문> 사장 이종형, 2.8독립선언서를 쓴 이광수,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 민족대표 33인이자 <매일신보> 사장을 지낸 최린, 중추원 부의장이었던 박중양, 이토 히로부미의

[오마이뉴스] 좌파가 된 공안검사… 과거를 지울 수 있을까

2024년 3월 5일 66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강중인 박정희는 친일파에서 남로당(남조선노동당)으로 전향했다. 박정희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그런 전향을 한 사람이 덕전중인(德田仲仁)이란 창씨명을 가진 강중인(姜仲仁)이다. 박정희는 일제 패망으로 인해 만주국 군대와 분리됐다. 그런 상태로 1946년 5월 6일 톈진항을 출발해 이틀 뒤 부산에 도착했다. 고향 마을에 출현한 것은 그달 중순이다. 기존 조직과 절연된 뒤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그가 남로당에 가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중인은 37세 때인 1945년 8·15 당시에 일제 검사였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강중인 편은 “1943년 3월 대전지방법원 검사로 자리를 옮겨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검사로 있었다”라고 말한다. 경찰이나 검찰 같은 일제 공권력 기구는 8·15 뒤에도 미군정의 보호를 받았다. 일본인 상급자들이 철수한 뒤였기 때문에, 한국인 직원들에게는 고속 승진의 기회가 있었다. 기존의 공권력 기구가 이처럼 미군정과 한국인 직원들을 중심으로 강화됐기 때문에, 이런 곳에 있었던 사람이 공개적으로 좌파 진영에 넘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강중인은 대놓고 좌파 활동을 했다. 위 사전은 “해방 후 좌익 활동에 가담하여 1946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토지문제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라고 말한다. 민전으로 약칭되는 이 조직이 토지문제에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는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한 좌우합작회담 때 나타났다. 민전은 그해 7월 25일의 제1차 좌우합작회담 정식회담(본회담) 때 좌파 진영을 대표해 ‘5원칙’을 제시했다. 대표적 우파 매체 중 하나인 그해 7월 28일 자 <한성일보> 1면 우상단에 따르면, 친일청산과 더불어 토지개혁이 민전이 표방한

민족사랑 2024년 2월호

2024년 2월 23일 381

[바로보기] * 왼쪽 바로보기로 들어가셔서 표지의 각 목차를 클릭하시면 해당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오마이뉴스] “‘만세’ 아닌 ‘반자이’…” 친일파의 황당한 변명

2024년 2월 19일 255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재극 한국에서는 남한 대통령 생일은 거의 알려지지 않는 반면, 북한 지도자 생일은 잘 알려져 있다. 현직(1월 8일)뿐만 아니라 전직(2월 16일)과 전전직(4월 15일)의 생일까지 언론에 수시로 보도된다. 이런 날을 전후해 뭔가 발사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남한은 물론이고 미국·일본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데 북한 3대의 생일보다 한국 운명에 훨씬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일왕(천황)의 생일이다. 이 생일 파티가 ‘한국에서 어떻게 치러지는가’는 한국의 자주성을 측량하는 바로미터 중 하나다. 서울의 일본대사관 직원들이 이 행사를 조용히 치른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루히토 일왕의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거행된 지난해 2월 16일의 생일연은 사정이 달랐다. 한국 정부가 외교부 제2차관을 파견하고 남산 위에서 기미가요가 울려 퍼진 이날의 풍경은 한국의 대일 자주성 측면에서 적색 신호다. 1980년대의 인기 언론인인 조선일보사 이규태(1933~2006) 논설위원실장은 1986년 4월 20일자 일요칼럼에서 “일본 천황 생일을 축하하는 성대한 파티가 예년마다 서울 중학동에 있는 일본대사관에서 열려왔고, 또 올해도 열릴 것”이라며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인 4월 29일이 국내에서 성대하게 기념되는 현상을 언급했다. 이런 풍경은 1945년 해방으로 중단됐다가 20년 만인 1965년 한일협정을 계기로 되살아났다. 1965년을 계기로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대일 종속성이 심화된 20세기 후반 상황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다. 1894년에 청나라를 격파한 일본은 10년 뒤에는 러시아를 제압했다. 러일전쟁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강화조약으로 종결됐다. 이 조약 38일 전인

[자료집] 이승만 진실 찾기 《이승만 우상화 무엇이 문제인가?》

2024년 2월 19일 700

※ 자료집 : 이승만 진실 찾기 《이승만 우상화 무엇이 문제인가?》 ※관련기사 ☞더 칼럼니스트: 그들이 이승만을 숭배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본의 아니게 이승만의 죄상을 더욱 드러낸 ‘건국전쟁’ ☞민족문제연구소: [논평] 독립운동을 모독하는 윤석열 정부의 역사변조를 규탄한다

[오마이뉴스] 친일 위성정당의 실체… ’30만 학살 음모’를 아십니까

2024년 2월 14일 307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성근 대의당(大義黨)이라는 일본제국주의 집권세력의 위성정당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창간한 일본어 신문인 <경성일보>의 1945년 6월 23일 자 2면 중간에 이렇게 보도된 정당이다. “국가에 대하여 일개 병졸이 되고 동포에 대하여 일개 충복이 되기를 기약하고 대의를 따라 죽을 굳은 단결을 하고 황국의 위기를 돌려 신기(神機)로 만드는 수사분투(殊死奮鬪)를 서약해 대의당을 결성하며, 이것이 발회식을 24일 오후 1시부터 부민관 대강당에서 거행한다.” 해방이 두 달도 남지 않은 6월 24일 결성된 이 당은 이처럼 일본 국가와 지배세력의 “일개 병졸”을 자처했다. 한중 항일군과 미영 연합군의 압박으로 ‘황국’이 처한 위기를 신의 기회로 바꾸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분투하는 병졸의 정당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동포들에 대해서도 충복이 되겠다고 서약했지만, 이들의 행동과 모순된다. 이들은 한국인들을 강제징병·위안부·강제징용으로 동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동포들의 충복이 되겠다는 것은 사탕발림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충성을 하고 그로부터 금전적 이익도 얻고 있었으니, “국가에 대하여 일개 병졸”이 되겠다는 서약은 빈말이 아니었다. 의병 탄압, 독립운동가 검거… 승승장구한 친일파 이성근 대의당은 조직폭력배 출신인 친일파 박춘금이 친일 문인 이광수 및 매일신보사 사장 이성근 등과 함께 조직한 친일 정당이다. 이 당이 그저 그런 당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시선도 있었다. 1945년 6월 24일 지금의 서울시의회 청사인 부민관에서 진행된 대의당 결성식 현장,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3권 대의당 편은 이날 행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