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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신임 독립기념관장에 광복회가 ‘뉴라이트’ 지목한 김형석 교수 임명
신임 독립기념관장에 김형석 고신대 석좌교수가 6일 임명됐다. 이종찬 광복회장이 뉴라이트 계열 인사로 지목해 국가보훈부에 후보 철회를 요구했던 인물이라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보훈부는 이날 김 교수가 임기 3년의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됐다고 밝혔다. 독립기념관장은 독립기념관 이사회가 구성한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에서 복수의 후보를 추천한 뒤 보훈부 장관의 제청을 거쳐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김 관장을 겨냥해 “(독립기념관장 후보 중 한 명은) 이승만 대통령을 우파, 김구 주석을 좌파로 갈라치기하거나 임시정부 역사를 평가절하하며 대한민국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건국된 것이 아니라 1948년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해왔다”면서 임추위를 새로 구성해 후보 선정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또 김 관장이 “급조한 관변 단체를 이끌면서 특정 정당과 업무협약을 맺어 역사연구에 정치를 끌어들(였다)”고도 비판했다. 김 관장이 재단법인 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점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재단법인은 지난 2022년 8월 국민의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김 관장은 2022년 10월 언론과 인터뷰에서 “‘국부 논쟁’을 끝내고 이승만과 김구를 모두 ‘건국의 아버지로 둬야 한다”며 “이승만과 김구의 지지자를 아울러야 국민 통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김 관장은 2022년 8월 출간한 저서 <끝나야 할 역사전쟁 – 건국과 친일 논쟁에 관한 오해와 진실>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두고 “친일행위자의 ‘역사적 공과’를 따지지 않고 ‘친일 행위’와 ‘반민족 행위’를 동일시하는 우를 범했다”고 적었다. 그는 또 지난해 5월 한 역사
[한겨레] ‘사도광산 등재’ 시민사회가 홍보 기회로 역이용해야 [왜냐면]
강철구 |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유네스코 등재 대상 유산이란 ‘인류가 공동으로 보호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곳’을 말한다. 만일 사도광산이 정말로 우리 인류가 공동으로 보호해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곳이라면 그 인류에는 우리 한국인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된 분들 중 아직 신원도 확인되지 않은 우리 선조들의 희생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한국은 이 부분의 기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고, 특히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에서도 지난 6월 사도광산과 관련해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고 권고하며 보류를 결정해 양국 협상에서 한국이 우위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좋은 기회를 우리 정부와 외교부는 결과적으로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국회가 7월25일 본회의에서 ‘일본 정부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추진 철회 및 일본 근대산업시설 유네스코 권고 이행 촉구 결의안’까지 채택했는데도 ‘강제동원’이 빠진 채 합의했다는 것은 정부가 국민과 국회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일본은 7월28일부터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조선인 출신 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환경의 역사 전시와 추도식도 하겠다고는 하지만, 일본 정부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약속 사항을 성의있게 이행해 나갈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사도광산 내에 승용차 157대와 관광버스 3대가 주차할 수 있는 전체 면적 1000㎡(330평) 규모의 전시관이 아닌, 사도광산에서 약 2㎞나 떨어진 외곽지역에, 그것도 승용차 20대 정도의 주차공간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등재 범위에서조차
[보도자료] 소년 이봉창이 다닌 문창학교 위치 확인
[보도자료] [다운로드] 소년 이봉창이 다닌 사립문창학교의 소재지 최초 확인 청파동 골목길 안쪽의 미용실 자리(청파동 2가 5번지)가 바로 그곳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경시청 앞에서 폭탄투척의거를 일으키고 순국한 이봉창 의사(李奉昌 義士, 1901~1932)가 소년시절에 다녔던 사립문창학교(私立文昌學校)의 정확한 소재지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특히 이곳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홍병기(洪秉箕, 1869~1949) 선생이 교장(校長)으로 있던 학교였으며, 애국지사 신숙(申肅, 1885~1967) 선생 역시 설립 초기에 학감과 교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로도 주목이 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최근 용산 주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 활동유적지의 현황과 관련사료를 순차적으로 점검하는 과정에서 사립문창학교의 소재지가 구체적으로 언급된 내용을 새롭게 발굴하였다고 밝혔다.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1915)에 수록된 「사립일반학교 일람표」에 따르면, 이 학교의 소재지 주소가 바로 ‘청엽정 2정목(靑葉町 二丁目, 지금의 청파동 2가) 5번지’로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12년 9월에 작성된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국가기록원 소장자료)를 보더라도, 208평(坪) 규모에 달하는 이곳 대지의 소유자가 나중에 손병희에게서 천도교 교주의 직임을 물려받는 박인호(朴寅浩, 북부 가회방 재동)로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관계는 이 학교가 1910년대에 천도교에서 인계하여 운영했던 각종 학교의 한 곳이었다는 점과 그대로 일치하는 대목이다. 이 학교는 최초에 사립광성학교(私立廣成學校; 공덕리 소재)의 지교(支校)로 만들어졌다가 이내 이를 확장하여 1909년 2월 4일에 정식설립인가(설립자 이순하)를 받아 4년제 초등과정으로 개편 전환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무렵에 나온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관련기사들에는 이 학교의 위치가 원래 청파 하마비동(靑坡 下馬碑洞, 지금의 효창동과 원효로 1가에 걸친 지역)에
[오마이뉴스] 파리 유학파 기자의 몰락… 이런 거짓말까지 퍼트렸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정섭 프랑스 파리는 2024년 제33회 대회까지 합쳐 올림픽을 세 번이나 개최했다. 1900년 제2회 대회에 이어 1924년 제8회 대회도 파리에서 열렸다. 1900년과 1924년 대회는 다른 도시에서 열릴 수 있었지만 결국 파리에서 개최됐다. 제1회 대회를 개최한 그리스는 제2회도 자국에서 열기를 희망했지만, 1896년에 제2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된 피에르 드 쿠베르탱의 주도하에 파리에서 두 번째 대회가 열리게 됐다. 제2회 대회로부터 불과 20년 만에 파리에서 또다시 열린 것은 후보 도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파리 외에 로스앤젤레스·바르셀로나·암스테르담·프라하·로마 등도 개최를 희망했다. 파리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친 데는 파리 출신인 쿠베르탱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1900년 대회가 만국박람회 부속행사처럼 열린 것이 안타까워 고향에서 제대로 치러보고자 했던 그의 의지가 영향을 줬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을 치른 그 이듬해에 위원장에서 퇴임했다. 정조 임금 때인 1789년에 혁명이 일어난 프랑스는 혜성처럼 등장한 나폴레옹의 혁명전쟁으로 한때는 유럽을 강타했지만, 그의 몰락과 함께 위축되어 갔다. 나폴레옹 전쟁이 진압된 뒤 오스트리아 정치가 클레멘스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열린 1815년 빈 회의는 프랑스를 견제하는 전제하에 세력균형 시스템으로 유럽 국제질서를 재편했다. 빈 체제하에서도 프랑스는 강대국의 지위를 잃지는 않았지만, 종전보다 위축된 상태를 감내해야 했다. 1866년에 조선까지 와서 병인양요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1870년에 비스마르크 총리의 프로이센과 치른 보불전쟁에서 패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주도한 19세기 중후반 세계질서 하에서 프랑스는 2위 그룹 국가였다.
[오마이뉴스] 허형식 장군의 기마 동상이 세워지기를
[박도 칼럼-23] 허형식 장군 82주기 추모식 거행 2024년 8월 3일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장 겸 총참모장을 역임하신 허형식 장군 순국 82주기 기일이다. 허형식 장군은 대한제국 시절 13도 창의군 군사장을 역임하신 왕산 허위 선생의 집안 조카로서 1909년에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태어나셨다. 왕산 허위 선생 순국 이후 집안 가솔들은 일제 등살에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15년 허씨 일족들은 북만주로 이주하였다. 이후 북만주에서 항일운동 일선에 투신하여 가열차게 투쟁한 결과 장군의 나이 31세 때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과 제3군장에 오른 만주 제일의 항일 빨치산이었다. 1940년대 초 일제의 토벌이 극심해지자 대부분 항일 빨치산들은 러시아로 피신했다. 하지만 허형식 장군은 동북의 인민들을 그대로 둔 채 또 다른 외세에 의존, 목숨을 구걸치 않고자 끝까지 북만주의 동포를 지키며 반일 활동을 했다. 그런 가운데 1942년 8월 3일 새벽 헤이룽장성 경안현 청송령 골짜기에서 일제 토벌대의 기습을 받자 당신 부하는 살리고 당신은 살신성인, 장렬하게 전사했다. 지난 8월 3일 구미시 임은동 허 장군의 생가터 앞 왕산기념공원에서 열린 82회 추모제는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부(지부장 박찬문) 주최로 열린바, 뜨거운 염천에도 허장군 조카 허창수씨, 허형식장군기념사업회 장기태 회장, 전 동북아 역사재단 연구위원 장세윤 박사 등 다수의 귀빈이 참석하여 장군의 행적을 드높이 기렸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 나는 1999년 여름 중국 일대 항일유적지를 답사하던 중,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서 허형식 장군의 행적을 알게 된
[오마이뉴스] “일제 식민통치 옹호하는 사람이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라니”
광복회원들, 김낙년 원장 취임식 행사 진입 시도… “반민족적 인사 사퇴하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2일 열린 신임 원장 취임식에서 광복회가 김낙년 신임 원장의 반민족적 성향을 이유로 취임 반대 시위를 벌였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이사장을 맡아온 김낙년 신임 원장은 일제가 식량을 강제로 가져간 것을 수출로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징용과 위안부 문제에서 강제성을 부정하고,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에 근거가 부족하다고 언급한 <반일 종족주의>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친일적이고 반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보인 인사가 민족 정신의 근간을 다지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원장으로 임명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광복회의 입장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김낙년 신임 원장 취임에 대한 반발을 예상해 정문에 경비원 3명과 연구원들을 배치하고, 사전에 성남 분당경찰서에 반대 집회 가능성에 대해 문의한 상태였다. 이는 김낙년 원장이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인사라는 점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광복회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교육부 산하의 공공기관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만큼 국민의 알 권리와 발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며 연구원의 운영 방침과 원장 선출 과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연구원 정문 앞에서 “김낙년 박사의 취임은 부적절하다”며 항의의 뜻을 강하게 밝혔다. 경비원들은 “행사를 방해할 우려가 있다”며 광복회의 진입을 제한하려 했지만, 연구원이 공공기관이라는 이유로 이들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었다. 광복회 측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행사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공공기관의 행사로 공지되었으며, 국민의 권리로서 취임식 진행을 지켜볼
[서울앤] ‘시대의 아픔’ 되돌아볼수록 ‘미래 향한 소망’은 커진다
8·15 특집-평화·민주·인권을 향한 작은 박물관 스탬프 투어 (상) 통일의 집, 근현대사기념관, 김근태기념도서관, 전태일기념관 성취감·자신감 얻고, ‘내가 스스로 만든 음식’으로 편식 고쳐 근현대사기념관, 김근태기념도서관, 문익환 통일의 집, 박종철 센터, 식민지역사박물관,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이한열기념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를 이어받아 평화·민주·인권을 바라는 시민들의 마음을 모아 탄생한 박물관들이다. 이 박물관들이 지난 6월18일 다자간 협약을 맺고 ‘작은 박물관 스탬프 투어’를 시작했다. 8개 박물관을 모두 돌아본 시민들에게는 마지막 방문 기관에서 선물을 증정한다. 참가를 원하는 시민들은 구글링크(https://forms.gle/7W1hXyMF9mYDXKJo7)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협약에 참여한 작은 박물관들은 앞으로 일상적인 활동을 공유하고 교류하는 등 연대를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서울&>은 8·15 광복절을 앞두고 장태동 여행작가의 스탬프 투어 참여기를 두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그 첫 번째로 근현대사기념관, 김근태기념도서관, 문익환 통일의 집,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을 소개한다. 게재 순서는 장 작가가 투어한 순서에 따랐다. 편집자 문익환 통일의 집 1970년대 초 이 집은 3대가 함께 사는, 여덟 명 대가족의 보금자리였다. 현재 ‘기도방’은 문익환 목사의 부모님 방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서재와 기도실로 썼다. ‘아들방’은 세 아들이 쓰던 방이었다. ‘안방’은 문 목사와 박용길 장로 부부의 침실이자 서재였다. 손님 접대실이 되기도 했다. 문 목사가 성서를 번역하고 시를 쓰던 방이자 박 장로가 붓글씨를 쓰고 수예품을 만들던 곳이기도 했다. 1976년 발표한 ‘3·1민주구국선언문’을 이 방에서 썼다. 성직자의 길, 신학자의 길을 걷던 문 목사는
[한겨레] 청일전쟁·러일전쟁의 현재적 의미 짚는 전시회 열린다
‘한반도 운명을 바꾼 그들의 전쟁’ 2일부터 용산 식민지역사박물관 청·일전쟁 130년, 러·일전쟁 120년을 맞아 한반도와 두 전쟁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린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재)역사와책임은 2일부터 12월29일까지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한반도 운명을 바꾼 그들의 전쟁’ 전시를 진행한다고 1일 밝혔다. 1부 ‘조선 정탐과 침략지도’, 2부 ‘그들의 전쟁, 일그러진 성공신화’, 3부 ‘불편한 기념, 왜곡된 기억’으로 구성된 전시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30여년간 기증받고 수집해온 청·일전쟁, 러·일전쟁 관련 희귀자료 26건 58점이 공개된다. 청·일전쟁 두루마리 2권 등 니시키에(다색 판화) 38점과 각종 풍속화보·침략지도·군용회화책·기록사진집 등이 포함됐으며, 당시 열강과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날카롭게 비판한 풍자화 32점도 전시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전시회에 선보일 생생한 실물자료들은 일제가 어떻게 일본국민들에게 전쟁의 광기를 확산시키고, 동학농민군 학살 등 반인도적 야만행위를 은폐하여 침략전쟁을 정당화하였는지를 설득력 있게 증거하고 있다”며 “이 사변들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세기를 넘어 재현되고 있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격돌이라는 현실 속에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고 밝혔다. 전시기간 중엔 특강과 학술심포지엄도 열릴 예정이다. 문의: (02)2139-0437.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2024-08-01> 서울& ☞기사원문: 청일전쟁·러일전쟁의 현재적 의미 짚는 전시회 열린다다 ※관련기사 ☞더팩트: 민족문제연구소, 청일전쟁⋅러일전쟁 조선인 시각 재해석한 기획전 연다
[한겨레] 시민단체 “윤 정부, 일 ‘강제동원 역사 지우기’ 동참”
외교부에 항의서한 전달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강제동원이 대규모로 이뤄졌던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이 지난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가운데, 시민단체가 31일 외교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정부의 사도광산 등재 찬성은 일본의 ‘강제동원 역사 지우기’에 동참한 것”이라고 규탄하며 외교부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정의기억연대 등이 속한 시민단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앞에서 “강제동원 표현 않기로 합의한 외교부는 사죄하라” “일본 역사 왜곡에 합의한 윤석열 정부 규탄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고, 정부의 대일 ‘굴욕외교’를 강력히 규탄한다는 내용의 항의 서한을 외교부에 전달했다.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에서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강제 동원’이 빠진 것에 대해, 일본 언론에서 한·일 정부가 사전에 협의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저자세 외교 논란이 일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한국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은 수십년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강제동원은 반인도적 불법행위’라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냈다”면서 “일본은 사도광산의 역사적 성과를 자랑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2018년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강제성’을 부정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우리 정부는 부끄럽지도, 참담하지도 않느냐”고 말했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한국 정부는 부인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와 일본 언론으로부터 나오는 보도를 종합하면 국제법상 불법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지우는 데 한국 정부가 합의해 주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고 있다”면서 “윤
[통일뉴스] 민족문제연, 정부 겨냥 “‘사도광산’ 외교협상 실패 사죄해야”
“1,500여 강제동원 피해자의 고통과 인권침해의 역사를 이렇게 내팽개친 한국 정부는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가 30일 성명을 통해 “사도광산 입구에 만든 최신 전시 시설인 ‘키라리움 사도’가 아니라 (…) 향토박물관 한구석 여섯 평 전시공간에 그것도 강제동원은 쏙 빠진 내용을 알고도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는 말인가”면서 이같이 질타했다. ‘사도광산’ 관련 대일 협상의 결과는 “‘강제동원’이 아니라 일본이 ‘합법적’으로 동원한 ‘한반도 출신 노동자’들이 고생했다는 것”이라 규정하면서, “한국 정부는 사도광산 등재 과정에서 실패한 외교협상에 대해 명명백백히 진상을 밝히고 사죄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역사의 진실을 봉합한 채 한일관계 개선이라는 허상을 좇아 외교 실패를 성과로 둔갑시키려는 꼼수는 언젠가는 밝혀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식민지배와 강제동원의 불법성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기나긴 소송과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을 통해 밝혀낸 역사의 진실이며, 윤석열 정부가 결코 외교 거래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헌법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민족문제연구소는 “지금 니가타현립문서관에 있는 1414번 자료, ‘반도 노무자 명부’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라며 “한국 정부는 이 자료의 공개를 일본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9월 예정된 ‘추도식’에 앞서 “미쓰비시가 숨기고 있는 피해자 명부 제공을 일본 정부에 요청하라”고 충고했다. “추도할 희생자의 이름도 모른 채 추도식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이광길 기자 <2024-07-30> 통일뉴스 ☞기사원문: 민족문제연, 정부 겨냥 “‘사도광산’ 외교협상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