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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관보(08.08.14)

2008년 9월 18일 759

관보(대전일보, 이용)

“어떤 어려움 닥쳐도 조선일보 지키겠다”(09.03.05)

2009년 3월 5일 836

“어떤 어려움 닥쳐도 조선일보 지키겠다”(미디어오늘)

[객원논설위원칼럼] 야만이 판치는 ‘건국 60주년’ / 김유선(08.08.13)

2008년 9월 18일 753

[객원논설위원칼럼] 야만이 판치는 ‘건국 60주년’ / 김유선(한겨레신문, 김유선[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

친일파 재산 국가귀속 취소판결 한건도 없어(09.02.28)

2009년 3월 5일 738

친일파 재산 국가귀속 취소판결 한건도 없어(동아일보)

보수단체, 2003년 8·15부터 ‘건국절’ 행사(08.08.13)

2008년 9월 18일 761

보수단체, 2003년 8·15부터 ‘건국절’ 행사(한겨레신문, 안수찬 기자)

친일재산환수 단초 제공한 이선희 전 부장판사(09.02.27)

2009년 3월 5일 973

<3·1절 90주년 기념 인터뷰>친일재산환수 단초 제공한 이선희 전 부장판사(내일신문)

이항녕 前 홍익대 총장 별세(08.09.18)

2008년 9월 18일 794

이항녕 前 홍익대 총장 별세(한국일보, 허정헌)

친일파 후손 땅소송은 ‘현재 진행형’(09.02.27)

2009년 3월 5일 873

친일파 후손 땅소송은 ‘현재 진행형’(연합뉴스)

한국일보[김영명 칼럼/9월 17일] 박정희와 인간 지각의 한계

2008년 9월 17일 865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박정희를 대체로 높이 평가한다. 나이 든 사람들 중에도 물론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 까닭으로 지금의 ‘혼란상’을 많이 든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그립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사람들의 지각 능력 부족에서 온 면이 많다. 그가 주도한 경제 개발의 과실은 지금 우리가 고스란히 누리고 있다. 박정희 이 김영명(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박정희를 대체로 높이 평가한다. 나이 든 사람들 중에도 물론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 까닭으로 지금의 ‘혼란상’을 많이 든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그립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사람들의 지각 능력 부족에서 온 면이 많다. 그가 주도한 경제 개발의 과실은 지금 우리가 고스란히 누리고 있다. 박정희 이..<기사 발췌>     [김영명 칼럼/9월 17일] 박정희와 인간 지각의 한계(한국일보, 08.09.17)

벽초 홍명희, 그 진실과 화해

2009년 3월 5일 1677

신명식기획이사 41년 전 오늘 벽초 홍명희(1887~1968)가 운명했다. 벽초는 독립운동가이며 해방 후 북한 내각의 부수상을 지냈고, 한국문학사상 최고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소설 ‘임꺽정’을 쓴 문인이다. 벽초의 고향은 충북 괴산군 동부리다. 그가 태어난 고택은 괴산군이 매입하여 작년에 복원공사를 마쳤지만 ‘괴산 동부리 고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1919년 이후 벽초 일가가 살았던 괴산군 제월리 옛집을 문화재청이 3년 전 문화재로 등록예고를 했지만 보수단체 반발로 무산됐다. 1998년 제월리에 세워진 홍명희문학비는 2년 후 동판을 뜯어내 문구를 고치는 난리를 겪었다. 사계절출판사는 매년 가을 괴산에서 홍명희문학제를 여는데 작년이 13회째였다. 작년에는 괴산군이 ‘벽초 신인문학상’을 제정하려다 보수단체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 자녀의 기록에 따르면 벽초는 말년에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이다. 일생 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벽초의 아버지는 홍범식(1871~1910) 선생이다. 금산 군수로 있던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날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나는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다” 벽초가 일제 하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그는 1927년부터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힘을 합친 민족유일당운동인 신간회를 이끌었다. 벽초와 함께 ‘조선 3재’라 불렸던 최남선 이광수가 일찍이 일제에 투항하여 조선청년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는 동안 그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