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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친일인명사전 발행금지 가처분 기각(09.02.23)

2009년 2월 23일 906

친일인명사전 발행금지 가처분 기각(서울신문)

청와대 비서관 ‘식민지 근대화론’ 옹호 논란(09.03.01)

2009년 3월 2일 931

청와대 비서관 ‘식민지 근대화론’ 옹호 논란(세계일보)

친일사전 발행금지가처분 모두 ‘기각’(09.02.22)

2009년 2월 23일 954

친일사전 발행금지가처분 모두 ‘기각’(아시아경제)

靑 이상목 비서관,식민지근대화론 두둔 논란(09.03.01)

2009년 3월 2일 1001

靑 이상목 비서관,식민지근대화론 두둔 논란(쿠키뉴스)

친일사전 발행금지가처분 모두 기각(09.02.22)

2009년 2월 23일 857

친일사전 발행금지가처분 모두 기각(헤럴드경제)

청와대 비서관, “친일·반일 애매”(09.03.01)

2009년 3월 2일 959

청와대 비서관, “친일·반일 애매”(YTN)

[길을 찾아서] ‘유신 철폐’ 앞장선 기독교(09.02.16)

2009년 2월 23일 910

[길을 찾아서] ‘유신 철폐’ 앞장선 기독교(한겨레신문)

“아직도 日제삿밥 먹는 아버지…”

2009년 3월 2일 907

‘야스쿠니 신사 합사취하’ 소송 이희자씨 법정서 눈물 서울신문 이재연 기자 “아버지 자식으로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는 게 제 인생에 남은 과제고 소원입니다. 바로 제 아버지 이름을 야스쿠니 신사에서 빼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강제징용된 뒤 생사여부도 끊어진 아버지를 찾아 헤맨 지 올해로 20년째. 이씨는 1997년에야 중국 광시성 유장(柳江)현 전투 중 사망한 아버지 이사현씨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장돼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2002년 소송을 시작했지만 2006년..<기사 발췌> “아직도 日제삿밥 먹는 아버지…”(서울신문, 09.02.28) 관련기사 日 야스쿠니 한국인명부 일부 없앤다(서울신문, 09.02.28)야스쿠니 명부 삭제 소송 기각(부산일보, 09.02.28)日야스쿠니 합사 취소訴 기각(서울신문, 09.02.27)日 야스쿠니 전몰자 명부 삭제 소송 기각(한국일보, 09.02.26)

[길을 찾아서] 문인들 겁주려 ‘간첩 조작’(09.02.19)

2009년 2월 23일 838

[길을 찾아서] 문인들 겁주려 ‘간첩 조작’(한겨레신문)

일제의 침략전쟁에 끌려간 조선청년들, 시베리아 억류, 통한(痛恨)의 역사를 재조명한 전시회 열려

2009년 3월 1일 1240

민족문제연구소개막식 사진 내려받기  2월 27일부터 국회도서관 2층 로비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 가운데 시베리아 억류라는 이중피해를 겪은 이들의 한 서린 체험을 증언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강제징집이나 징용, 강제연행일본군위안부 피해 사례는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직도 세상의 무관심 속에 묻혀 외면당하고 있는 비극적 사연의 주인공은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이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말기 징병징용으로 일본 군대에 끌려가 만주사할린쿠릴열도 등지에서 소련군에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일대 포로수용소에서 수년간 강제노동에 복역했다.일본군 신분으로 시베리아에 강제로 끌려갔던 조선인 포로들은 패전국 일본과 승전국 소련, 그리고 연합군사령부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 철저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해방을 맞이한 상황에서도 시베리아에 강제 억류되어 가혹한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귀환 후에도 남북분단이라는 이데올로기 대치 상황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중첩된 고통을 당했다.소련군에 의해 일본군으로 분류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간 조선인 청년들은, 해방을 맞아서도 자기 뜻대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포로 신분으로 수용소에 강제 억류되었다. 소련 당국에 우리는 조선인이고,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독립국가가 수립되기 전이어서 교섭대상이 없다는 이유로 귀환을 거부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당시 미군정도 이들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1949년 경 겨우 귀국선을 타게 된 이들은 이미 분단되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던 삼팔선을 넘어 귀환하다 총격을 당해 일부가 숨지는 참극을 겪기도 했다. 살아서 삼팔선을 넘은 이들도 다시 수용소에 억류되었으며, 석방 뒤에도 사찰 대상으로 시달림을 당하는 냉전시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6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