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건국전쟁이 아니라 친일전쟁인 이유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노덕술 이승만이 1948년 전후에 벌인 것은 건국전쟁이 아니라 친일전쟁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친일파 김성수 및 친일파 노덕술의 행적이다. 해방 직후의 보수세력은 독자적인 대권 후보를 배출하지 못했다. 1947년 7월 30일 자 <동아일보>에도 보도됐듯, 이들의 구심점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은 ‘친일 원흉’이란 손가락질을 받았고 그래서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기 힘들었다. 한민당 지도자 김성수가 독립운동권의 문제아인 이승만을 ‘1호 인재’로 영입한 것은 그 때문이다. 친일파들의 후원을 받아 대권을 향해 나아가던 이승만은 헌법 조문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조문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제1대 총선 직후인 1948년 6월 8일 국회 헌법기초위원회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려 하자, 그는 15일과 21일 위원회를 찾아가 대통령중심제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6월 18일 자 <군산신문>에 ‘이 박사 헌위(憲委)에 임석, 대통령책임제 역설’이란 기사가 났을 정도로 그의 애착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자기에게 불리한 조문이 없는지를 구석구석 살핀 이승만은 헌법 맨 앞의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대목을 문제 삼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선언하고 그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운영하겠다는 뜻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2023년 현재의 극우세력이 내세우는 논리대로라면 3·1운동과 분리된 별도의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 골몰했어야 하지만, 1948년 전후의 이승만은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건국전쟁이 아닌 친일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김성수와 한민당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이 세력의 입지를 굳혀준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또
[프레시안] 일본 천황제와 신사 참배, 과거 문제만이 아니다
[파시즘의 어제와 오늘] 일본제국주의와 신사참배, 그 현재적 의미 1868년 초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출범한 일본 근대국가는 왕정복고(王政復古)와 제정일치(祭政一致)를 표방한 절대군주제 국가였다. 유신정부는 유신 초기부터 신기관(神祇官)을 설치하고, 선교사(宣敎使)를 두어 신도국교화정책(神道國敎化政策)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내외의 반발에 직면하자 1871년 7월 ‘신사는 모두 국가의 종사(宗祀)’라는 ‘신사비종교론’을 내세우고, 그후 신사행정과 종교행정을 분리하여 신사행정은 내무성에서, 종교행정은 문부성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1889년 2월 ‘대일본제국헌법’과 1890년 10월 ‘교육칙어(敎育勅語)’를 발포하여 초종교적인 국가신도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국가신도는 이른바 ‘국체(國體)’를 교의로 한 사실상의 국교였으며, 일본은 자국 국민에게는 물론 그들의 식민지였던 조선인에게도 신사신앙과 참배를 강요하였다. 1910년대 식민지배 초기부터 조선총독부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발포하고, 1912년 교육칙어까지 발포하여, 적극적인 동화(=충량화=일본화) 정책을 폈다. 특히 국책과목인 수신, 역사, 일본어 교과서에서는 황실숭경(皇室崇敬)이라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내용으로 편성하여, 신도의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왜곡하여 가르쳤다. 교과 내용을 통해서 신도의 신화와 그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모시는 유명한 신사들을 가르칠뿐만 아니라, 신사참배, 동방요배 등 학교행사를 통하여 천황숭배와 신사숭경을 몸에 익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학관까지 파견하여 아동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주입되었는지 조사하게 하였다. 1910~20년대 조선총독부는 관폐대사 조선신궁을 설립하고, 1915년 8월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과 1917년 3월 「신사(神祠)에 관한 건」을 발포하여 신사·신사(神社神祠)의 설립을 장려하고 그 관공립적인 성격을 강화하기는 하였지만, 그에 대한 반발에 부딪혀 소극적인 신사정책과 신사행정을 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 이후 ‘준전시체제’와 1937년 7월 중일전쟁 도발 이후
[오마이뉴스] 성일종 사무실 앞 “안중근 묘소에서 석고대죄하라”
[기사원문] <2024-03-10> 오마이뉴스☞ 성일종 사무실 앞 “안중근 묘소에서 석고대죄하라” [현장] 충남 민족문제연구소, 규탄 기자회견… ‘이토 히로부미 인재’ 발언 파장 일파만파 “우리가 안중근이다! 우리가 독립군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역위원회가 ‘이토 히로부미 인재’ 발언 논란을 빚은 성일종 국민의힘 의원을 향해 “안중근 묘소 앞에서 석고대죄하라”고 촉구했다. 충남지역위는 10일 오후 성일종 의원 서산사무실 앞에서 ‘친일 망언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이토 히로부미가 ‘인재’라면 안중근 의사는 인재 살해범인가”라며 이같이 비판했다. 이날 규탄 기자회견은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역 회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발언은 제국주의·식민주의·인종주의 등 강자에 의한 약자 지배를 정당화하는 사회진화론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면서 “문제는 적절치 못한 비유가 아니라 그의 친제국주의적 의식”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일이다. 서산은 충남 15개 시군 중 청양, 홍성 다음으로 211명이나 되는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자랑스러운 고장”이라면서 “성일종 의원은 진정성 없는 한 줄짜리 사과가 아닌 안중근 의사 묘소 앞에서 석고대죄할 것”을 재차 촉구했다. 발언에 나선 한 시민은 “완전한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못해 안타깝다”면서 “역사적인 서산에서 망언이 나와 부끄럽다. 완전한 친일 청산이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서산지역 한 회원은 “서산시민으로서 (국민들께) 사죄한다”라고, 태안에서 참석한 한 시민은 “우리가 안중근이다”라고 외쳤다. 또 다른 한 시민은 “나라의 정통성이 흔들리고 있다. 새로운 독립운동을 한다는 마음으로 친일 망언을 규탄한다”고 강조했다. ·········<중략>·········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은 마지막으로 임시정부
[한겨레] 강제동원 배상 ‘셀프 종료’, 윤석열 정부의 입틀막
김소연 ㅣ 도쿄 특파원 지난 6일은 윤석열 정부가 한-일 관계 최대 쟁점인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 일방적인 양보안을 발표한 지 1년이 된 날이다. 대법원에서 승소한 일부 피해자와 유족들은 일본 피고 기업이 아닌 한국의 재단이 돈을 내는 ‘제3자 변제’라는 정부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지금도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인 아내 대신 싸우고 있는 93살 김명배 할아버지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김 할아버지는 지난달 27일 후지코시 주주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경기도 용인에서 일본 혼슈 도야마현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일본 피고 기업의 주식을 사서, 주총에 참여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투쟁을 해왔다. 김 할아버지는 이번 주총에서 구로사와 쓰토무 후지코시 사장을 향해 “대법원 판결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지난 1월 대법원의 승소 확정 판결이 나오기까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법정 투쟁에만 21년이 걸렸다. 그사이 12살 때 후지코시에서 온갖 고생을 했던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김 할아버지는 “단순히 돈이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오래 싸우지 못했을 것”이라며 “(한국) 재단의 돈은 받을 수 없다. 그것은 죽은 아내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를 더욱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 정부다. 가뜩이나 일본을 상대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데, 윤 정부가 ‘제3자 변제’를 추진하면서 ‘강제동원 피해자’와 ‘한국 정부’ 사이의 새로운 갈등이 생겼기 때문이다. 일본 쪽은 ‘한국이 알아서 할 문제’라며 남의 일 보듯이 하고
[경향신문] 강제동원 해법 발표 1년…“정부, 아무것도 한 것 없어”
시민단체 규탄 집회 “박진 전 장관 등 총선서 심판해야”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의 피와 목숨값을 스스로 내던진 굴욕 해법이 발표된 지 1년이 됐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정의기억연대 등 역사시민단체는 6일 오전 강제동원 해법 발표 1년을 맞아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를 규탄했다.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한 박진 전 외교부 장관 등의 제22대 총선 출마를 두고는 “국민이 심판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지난해 3월6일 일본 기업들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진 채무를 한국 기업들이 대신 변제하는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참가자들은 제3자 변제안 절차가 법원에서 줄줄이 가로막혔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법원에 공탁을 신청했지만 1심 법원에서 잇따라 ‘불수리’ 결정이 내려졌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재단이 전국 12개 법원에 시도한 공탁 12건이 예외 없이 불수리 처분됐고, 12건 이의신청도 기각됐다”면서 “헌법과 법률 어디에 비춰도 이런 해괴망측한 규정은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박석운 전국민중행동 공동대표는 “정부가 3자 변제안이라는 꼼수로 대법원 확정판결을 뒤집으려 했지만 지난 1년 사이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유일한 해결책은 피해자의 권리를 인정한 판결을 그대로 따르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한·일 정부는 어떻게든 역사를 덮으려 하지만 이미 3자 변제는 파탄났다”면서 “히타치조선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해자들이 공탁금을 받은 게 그 증거”라고 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20일 전범기업 히타치조선이 공탁한 6000만원을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피해자들에게
[보도자료] 일제강점기 기념비 탁본전시회 〈비문에 남긴 찬사 – 그 이면의 흑역사〉
[보도자료] [다운로드] 일제강점기 기념비 탁본전시회 〈비문에 남긴 찬사 – 그 이면의 흑역사〉 주최 :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후원 : 경기문화재단·식민지역사박물관 협찬 : 수원박물관·용인문화원 기간 : 2024.3.11.(월)~3.22.(금) 장소 : 경기도청(수원시 광교 신청사) 본관 1층 로비 개막 : 3월 11일 오후 2시 관람 시간 : 평일 10:00~17:00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지부장 박종선)는 3월 11일부터 22일까지 경기도 신청사 본관 로비에서 〈비문에 남긴 찬사-그 이면의 흑역사〉란 제목으로 일제강점기 기념비 탁본 전시회를 연다. 이번 전시는 경기도 2023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며 경기문화재단과 식민지역사박물관이 후원한다. 경기도는 2019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사업을 진행한 뒤, 2021년 5월 도의회에서 「경기도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였으며 지속적으로 후속사업을 전개해 왔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는 경기도의 선행 연구·조사 성과를 토대로 이를 보완하는 측면에서 경기도 각지에 산재한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기념비를 탁본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각종 석비류 총 47기 100여 점에 이르는 탁본을 일차 완료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명문(銘文)을 정확하게 판독·해석하여 이를 정리하였다. 나아가 미화 일변도의 비문에 숨겨진 이면의 역사에 대한 조사도 함께 진행했다. 이번 전시는 이 결과물들을 선별해 소개하는 자리이다. 전시는 Ⅰ부 『친일인명사전』등재 인물 관련 금석문 탁본과, Ⅱ부 일제 식민통치 관련 금석문 탁본으로 나누고 해설을 덧붙였다. 현장의 사정으로 미처 전시하지 못한 나머지 탁본들은 Ⅲ부 면장·조합장 등 재지유력자 관련 금석문 탁본으로 편제하여 도록에 실었다. 주최
[경향신문]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 3·1절 낀 연휴에 홍범도 전시회 찾은 시민들
경북 구미시에 사는 윤기석씨(30)는 3일 아내와 함께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지난 1일부터 이곳에서 진행돼온 홍범도 장군 특별기획전 ‘홍범도와 ХОН БОМДО(홍범도)-북간도 연해주 중앙아시아 그리고 한국에서’를 보기 위해서였다. 박물관 한편의 기록들을 살피던 윤씨는 2019년 개봉작 <봉오동 전투>를 떠올리며 “영화에서 본 사실이 기록에도 있다. 전투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홍 장군 흉상 철거 논란 등을 언급하며 “(독립의 역사가) 정치 문제가 되는 게 안타깝다”라고 했다. 그는 “뉴라이트 등 일부 세력이 역사를 반대로 말하면서 너무나 쉽게 관심을 얻고, 그 과정에서 독립 영웅들이 정치적 도구로 소모된다”라고 말했다. 이날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은 시민들의 발걸음은 신중하고 더뎠다. 40평 남짓한 공간에 빽빽이 전시된 홍범도 일지 필사본과 홍 장군의 초상화, 의병대 활동에 관한 일본 경찰 보고서와 대한독립군 부대원 이종학의 봉오동·청산리 전투 회상기 앞에서 시민들은 한참 동안 서성였다. 백영권씨(67)는 박물관에서 나눠준 ‘3·1 독립선언서’를 옆구리에 낀 채 전시를 관람했다. 그는 홍 장군 등 독립군의 무장투쟁사를 다룬 소설 <아리랑>을 지난해 두 차례 읽었다 했다. 백씨는 “지난해 8월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 장군 흉상 철거 뉴스를 보면서 속에서 불이 차올랐다”라며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해 오게 됐다”라고 했다. 백씨는 전시물 중 ‘인물관계도’와 ‘홍범도 생애’를 설명한 곳에서 오래 머물렀다. 홍 장군과 북간도·연해주에서 의병·독립운동가로 함께 활동한 ‘허근’ ‘김약연’을 낮게 읊조린 백씨는 “내가
[세계일보] 홍준표 “광장에 박정희 동상”…野 “비웃음거리만 될 것”
[기사원문] <2024-03-05> 세계일보☞ 홍준표 “광장에 박정희 동상”…野 “비웃음거리만 될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대구역 광장 ‘박정희 광장’ 명명 등 검토 홍준표 “광주, 김대중 업적 흔적 곳곳에 대구는 박정희 업적 흔적 안 보여…유감” 반발 나선 야권…“비웃음거리만 될 것” ‘공과’ 역사적 인물 동상 건립 논란 계속 홍준표 대구시장이 동대구역 광장을 ‘박정희 광장’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힌 것을 두고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중략>········· ◆“박정희, 대구·경북 대표하는 인물” vs “공과 논란 커” 5일 정치권에 따르면 대구시는 동대구역 광장에 박 전 대통령 동상을 건립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홍 시장은 지난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동대구역 광장을 ‘박정희 광장’으로 명명하고, 그 앞에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을 건립하는 방안은 어떠할지 검토 중에 있다”며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보겠다”고 밝혔다. ·········<중략>········· 홍 시장은 이날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 동상 건립 구상과 관련해 “대구시장 당선 이래로 쭉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라며 “시민의 대표 기관인 시의회와 논의해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홍 시장은 “일부 시민단체서 동상 세우기 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며 그들과 같이할 생각도 없다”고 덧붙였다. 동대구역 광장의 ‘박정희 광장’ 명명 및 동상 건립 추진을 두고 지역 야권에선 반발이 나왔다. ·········<중략>········· 민주당 대구시당은 “박 전 대통령의 공과는 논란이 많다”며 “역사의 흔적이 뚜렷하니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미
[경향신문] 역사적 무지인가, 무심함인가…3·1절 먹칠한 정부의 실수
[기사원문] <2024-03-03> 경향신문☞ 역사적 무지인가, 무심함인가…3·1절 먹칠한 정부의 실수 행안부 ‘3·1운동 하얼빈서 시작’ 홍보문 올렸다 삭제 “중학생도 아는 내용 틀려” “뉴라이트 시각 돌출” 비판 기념식 배경 글귀 ‘자위대’ 연상…“준비 소홀” 지적도 이번 3·1절은 뜻하지 않은 논란으로 얼룩졌다. 행정안전부가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3·1운동이 “만주 하얼빈에서 시작됐다”며 사실과 다른 내용을 게재해 논란 끝에 삭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기념식 배경 글귀가 공교롭게 앞 글자만 따서 세로로 읽으면 일본 군대인 ‘자위대’로 읽혀 논란이 됐다. ·······<중략>······ “3·1운동이 1919년 3월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시작됐다는 건 중학생도 다 아는 내용 아닌가요.”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인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은 3일 경향신문과 전화 통화를 하며 행안부가 삭제한 카드뉴스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전 관장은 “얼토당토않은 실수인데, 그만큼 정부가 3·1운동 등 독립운동에 얼마나 무지한지 보여준다고 본다”며 “그렇지 않으면 공식 문서나 다름없는 공식 계정에 이런 엉터리 문서를 올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역사학자 전우용씨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몰상식적 게시물이며 논쟁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중략>······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현 정부가 3·1절, 광복절 등 국경일에 역사 연구자에게 자문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며 “독립운동을 가볍게 보거나 폄하하는 시선이 작은 실수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이라고 했다. ‘자위대’ 문구 소동 역시 사전에 걸러져야 하는 대목으로 지적됐다. 방 실장은 “3월1일은 유명 인플루언서가 일본에 가는 것도 논란이 되는 날”이라면서 “너무 뚜렷하게
[오마이뉴스] 영화 ‘파묘’보다 더 기겁할만한 일제의 만행들
[이게 이슈] 지명 바꾸고, 쇠말뚝 박고… <파묘>가 상기시킨 역사적 사실들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영화 <파묘>는 일제가 박아둔 쇠말뚝 자리에 일본 요괴인 오니가 살고 있고,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자리에 친일파 조상을 묻은 후손들의 비극을 다룬다. 사무라이 투구를 입은 그 오니는 자신이 봉건제후인 다이묘였다며, 자기는 원래 남산신궁으로 갈 몸이었는데 엉뚱하게 이곳에 있게 됐다고 불평한다. 이 오니가 있는 곳에 ‘대표적 친일파’인 자기 조상을 묻은 일로 인해 박지용(김재철 분)의 집안은 아기가 생명의 위험을 겪는 등의 불행을 겪는다. 신녀 이화림(김고은 분), 지관 김상덕(최민식 분), 장의사 고영근(유해진 분), 법사 윤봉길(이도현 분)은 쇠말뚝이 박힌 줄도 모르고 박지용 아들의 병을 고쳐주겠다며 굿과 파묘를 진행한다. 그랬다가 죽을 고비를 겪는 것은 물론이고 예측불허의 상황들로 고생한다. ‘쇠말뚝’의 원래 의도 일제는 전국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 ‘풍수학적으로 한국 땅의 기운을 꺾을 목적’이라고 표방하면서 그렇게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1910년부터 시작된 토지조사사업이 그 명분이었다. 삼각 측량을 위한 삼각점으로 쓰겠다며 그것을 박았다. 삼각 측량은 예컨대, 정면에 있는 나무의 높이를 직접 재지 않고, 자기 발끝(제1점)과 나무 밑동(제2점)까지의 거리, 자기 발끝과 나무 꼭대기(제3점)까지의 각도를 토대로 나무 높이를 재는 것이다. 이런 측량에 쓰이는 표식이라고 해서 삼각점으로 불렸다. 일본이 쇠말뚝을 박은 것은 단순히 토지 조사만 하고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한국인들의 땅을 빼앗는 게